진리 편에 서라 (고후13:1-13)
본문
선데이 포스트지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는 그 교회에 목사로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검토하면서 고르고 있었습니다. 목사 초 빙위원회는 서기가 지망하는 목사들의 지원서를 하나 하나 읽는 것을 듣 고 있었습니다. 지망하는 목사들은 한 사람만 빼놓고는 모두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신사들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은 아주 훌륭한 웅변 가들이었고, 정력적인 목회자들이었고 그리고 회중들의 신앙을 부흥시킬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다른 지망 목사들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는 한 지망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대개 큰 도시들 안에 있는 많은 작은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회에서 삼 년 이상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책을 저술한 저자로서 약간 성공했습니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의 제직들과 나와의 관 계는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교회의 제직들은 나를 협박하기 까지 했습니다. 나는 평화를 깨뜨렸다는 죄목으로 서너 차례 투옥된 적이 있습니다. 나이는 50세가 넘었습니다. 건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닙니다. 기억력도 좋치 않습니다. 내가 세례준 사람들의 이름 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목사로 초빙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목사 초빙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런 건강도 좋치 않고, 말썽꾸러기이고, 기억력도 좋치 않고, 감옥을 제집 안방드나들 듯이 하는 사람을 목사로 초빙해야 하다니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녀석인가" 서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원장님,
그런데 그의 이름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어떤 교회에 목사로 가기 위하여 그의 지원서를 썼다면 위의 목사가 자 기를 소개하기 위하여 쓴 지원서와 거의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하기에 적합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의 몸 에 찌르는 가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지 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일들은 약한 자, 병자들 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의 위대한 황제 어거스터스는 위궤양을 앓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장군들의 하나였던 쥴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 자였습니다. 넬슨은 위대한 해군 제독이었지만 말년에는 배만 타면 배멀 미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가 낳은 가장 인기있는 설교가들 중의 하나는 토마스 찰머스였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항상 눈을 원고에서 떼지 않았 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스코틀랜드 한 지방의 독특한 억양으로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재주가 없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역 사상 바울만큼 효과있는 설교를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력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온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간접적으로 알지 않고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을 외모로만 평가하고 약하고 능력없는 사도로 잘못 판단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력한 징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전장(前章) 20, 21절에서 지적한 '성적 부도덕과 음 란 등'을 이번 세 번째 방문길에도 회개치 않으면 불가불 강력한 징계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최후의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의 이같은 징계 의 선포는 처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서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서 추방당하거나 책망받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그리스도게서 너희 안에 계신가" 스스로 반문해보고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 시말해 회개하고 '진리편에 서라'는 말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좋은 풍속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감람 나무 묘목을 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꼭 감 람나무 열매 같은 좋은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자 아 이를 낳으면 소나무 묘목을 심는데 이것은 소나무와 같이 변치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좋은 관습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 다도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늘 그 감람나무와 소나무를 바라볼텐데 그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그 뜻을 샛길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처 럼 우리 신앙인들도 처음 그리스도를 받아들였 때부터 어떠한 좌표가 필 요하리라 여겨집니다.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달려갈 때에 스스로 점검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결코 낙오됨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생활이 진리 편에 서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근심하지않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 까 항상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느 때를 막론하고, 사도 바울처럼 몸에 가시가 떠나지 않을지라 도,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진리 안에 사는 생활입니다. 진리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고후 13:11).형제들아 기뻐하라.(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 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둘째, 온전하라 것입니다. "(고후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온전케 되며." 그리스도인의 온전이란 완전무결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사랑 즉 이웃을 내몸같 이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온전이 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눈먼 딸 하나가 먼데 가 있는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려고 종이에 글을 써서 부쳤습니다. 아버지가 이 편지를 보고 고르지 못하게 쓰인 글이나 줄을 가지고 탓하시겠습니까 도리어 다른 어느 익숙한 편지보다도 더욱 깊이 간직하고 중하게 두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딸이 장님인데도 불구 하고 제 정성을 다해서 쓴 편지 속에 나타난 사랑의 마음을 아버지는 보 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을 보시고 우리 가 행한 결과는 보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언제든지 그 성공하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온갖 행동에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 그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추운 겨울 아침에 어머니께서 외출하려는 눈치를 채고 빨 리 나가서 어머니의 신을 불에 녹혀 드리려다가 잘못해서 불 속에 떨어 뜨려 태웠다고 합시다. 어머니는 이 때에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도리어 그를 귀하게 여기 껴안고 입을 맞출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의 행동도 때 로는 잘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고쳐나가야 할 것이 있기는 하여도 그 동 기의 출발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였다면 하나님은 그 동기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한 폭의 그림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엔 물을 가지고 지금 곧 루이스성으로 떠나려는 찰라 아이봐 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 목적을 물은 즉 부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 불 로 천국을 사르고, 이 물로는 지옥의 불을 끄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이 천국에만 들어가겠다는 욕심이 없어질 것이며, 지옥에도 떨어질 공포 심이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하렵니다." 하더라는 말이었 습니다. 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할 일인줄 압니다. 천국 을 부러워할 마음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공포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다 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있으면 그는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진 자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누구는 마치 야곱이 라반의 목장에서 일하듯이 사랑을 위하여 일하고, 누구는 옛날 애굽에서 벽돌을 굽고 있듯이 두려움 으로 마지 못하여 일합니다. 공장 안에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며 일하는 직공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퇴근 시간이 지나고 온 직공들이 퇴근한 다음도 홀로 남아 있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있습니다. 이 청년은 흥미를 갖고 일을 하는 공장 주인의 아들입니다. 많은 직공들은 봉급만을 노리는 자들이지만 이 청년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인줄 모르고 직공같이 삯을 노리 면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두 가지를 다 바라고 일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동안 금과 돌이 함께 나옵니다. 진리 편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진리 편에 있는 사람은 범사에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이단자는, 그릇된 교훈을 가르쳤다고 이 단자가 아니고 그것을 고치지 않는 고로 이단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온 전에 나가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늘 고치는 자입니다.
셋째,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가능합니다. 또한 애통하는 자 가 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애통할 것인가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은 삶이 가져다 주는 가장 쓰라린 비애를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랍 격언에 "태양 빛이 언제나 계속 비친다면 사막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막이 왜 사막이 되었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 빛만 사시사철 내리 쬐이기 때문입니다. 태양 빛이 항상 내려 쪼이는 그 땅은 곧 식물이 성장할 수 없는 건조지가 되고 결국 메마른 사막 이 되고 맙니다. 비가 내려야 만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슬픔을 통해서 비로소 경험되어지는 축복입니다. 슬픔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긍 휼 이외는 그 무엇도 위로를 줄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을 때에 비로소 이웃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로 울 때는 사물의 표면 이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슬픔에 부딪칠 때 인간은 삶의 깊이에 들어가게 되고 이 때에 그 슬픔을 바르게만 받아들 인다면 새로운 힘과 아름다움이 그의 영혼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기쁨과 더불어 한 마일을 걸었네 내내 기쁨만이 종알 거려 슬기는 나를 떠나 버렸네 나는 슬픔과 더불어 한 마일을 걸었네 그는 내내 한 마디 말도 없어 오! 나는 배웠네 가치 있는 것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더 나아가 "자신의 죄와 자기의 무가 치함을 절망하리만치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자기 죄를 비통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와 축복의 마스 코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가지는 위대한 힘 중의 하나는 인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죄를 보게 될 때 그는 죄에 대한 강한 비 애를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죄의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를 깊이 슬퍼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범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애통하는 사람이며 십자가를 보고 죄로 인 하여 다가올 파멸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죄의 두려움을 경험하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참으 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멸시치 아니 하십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 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용서함 받은 자의 기쁨을 얻는 길은 상한 심령을 가진 자의 철저한 비 애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세상 고통과 자기 죄로 인하여 상한 심령 을 가진 자는 복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 나라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죄, 부정 부패하고 음란과 사치, 허영의 죄악에 빠진 것을 애통하는 자는 복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 자신과 나라 민족의 죄를 애통하며 진리 편에 서시기를 기원합니다.
넷째,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어질 때 참 평안이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 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가 진리 편에 서서 서로 하나가 되어질 때, 마치 예수님과 하나님 이 하나이듯이 우리가 하나가 되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 가운에 하나가 되어질 때 비록 눈 앞에 십자가가 있 다할지라도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생활이며 참 평안의 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인간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불란서의 철학자 볼 테르가 유언하기를,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기독교 성경은 없어진다고 했 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로 그의 살던 집이 성서공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유언한 것은, 진리의 세계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고 도리어 역 효과를 낸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리를 위할 뿐입니다. 진리를 위한다는 말은 진리가 우리 편으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 편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님과 하나되기 위해 항상 성결보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은 모두가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진리 편에 서서 삶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바울이라고 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어떤 교회에 목사로 가기 위하여 그의 지원서를 썼다면 위의 목사가 자 기를 소개하기 위하여 쓴 지원서와 거의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하기에 적합한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그의 몸 에 찌르는 가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몸에 있는 가시 때문에 지 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일들은 약한 자, 병자들 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의 위대한 황제 어거스터스는 위궤양을 앓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장군들의 하나였던 쥴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 자였습니다. 넬슨은 위대한 해군 제독이었지만 말년에는 배만 타면 배멀 미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가 낳은 가장 인기있는 설교가들 중의 하나는 토마스 찰머스였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항상 눈을 원고에서 떼지 않았 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에 스코틀랜드 한 지방의 독특한 억양으로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재주가 없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역 사상 바울만큼 효과있는 설교를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력있는 설교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온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간접적으로 알지 않고 직접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을 외모로만 평가하고 약하고 능력없는 사도로 잘못 판단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력한 징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전장(前章) 20, 21절에서 지적한 '성적 부도덕과 음 란 등'을 이번 세 번째 방문길에도 회개치 않으면 불가불 강력한 징계를 취할 수 밖에 없다는 최후의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의 이같은 징계 의 선포는 처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서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서 추방당하거나 책망받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그리스도게서 너희 안에 계신가" 스스로 반문해보고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 시말해 회개하고 '진리편에 서라'는 말입니다. 유대 나라에는 좋은 풍속이 하나 있습니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감람 나무 묘목을 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 아이가 어른이 되면 꼭 감 람나무 열매 같은 좋은 행동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자 아 이를 낳으면 소나무 묘목을 심는데 이것은 소나무와 같이 변치 않는 사랑의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대단히 좋은 관습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 다도 그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늘 그 감람나무와 소나무를 바라볼텐데 그 때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그 뜻을 샛길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처 럼 우리 신앙인들도 처음 그리스도를 받아들였 때부터 어떠한 좌표가 필 요하리라 여겨집니다.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달려갈 때에 스스로 점검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결코 낙오됨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생활이 진리 편에 서 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 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근심하지않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 까 항상 기뻐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느 때를 막론하고, 사도 바울처럼 몸에 가시가 떠나지 않을지라 도,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진리 안에 사는 생활입니다. 진리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고후 13:11).형제들아 기뻐하라.(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 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니라"
둘째, 온전하라 것입니다. "(고후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의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온전케 되며." 그리스도인의 온전이란 완전무결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사랑 즉 이웃을 내몸같 이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가능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온전이 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눈먼 딸 하나가 먼데 가 있는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려고 종이에 글을 써서 부쳤습니다. 아버지가 이 편지를 보고 고르지 못하게 쓰인 글이나 줄을 가지고 탓하시겠습니까 도리어 다른 어느 익숙한 편지보다도 더욱 깊이 간직하고 중하게 두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딸이 장님인데도 불구 하고 제 정성을 다해서 쓴 편지 속에 나타난 사랑의 마음을 아버지는 보 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을 보시고 우리 가 행한 결과는 보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언제든지 그 성공하는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온갖 행동에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 그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추운 겨울 아침에 어머니께서 외출하려는 눈치를 채고 빨 리 나가서 어머니의 신을 불에 녹혀 드리려다가 잘못해서 불 속에 떨어 뜨려 태웠다고 합시다. 어머니는 이 때에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도리어 그를 귀하게 여기 껴안고 입을 맞출 것입니다. 이같이 우리의 행동도 때 로는 잘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고쳐나가야 할 것이 있기는 하여도 그 동 기의 출발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였다면 하나님은 그 동기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한 폭의 그림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한 손에는 불을 들고 한 손엔 물을 가지고 지금 곧 루이스성으로 떠나려는 찰라 아이봐 라는 청년이 나타나 그 목적을 물은 즉 부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 불 로 천국을 사르고, 이 물로는 지옥의 불을 끄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 이 천국에만 들어가겠다는 욕심이 없어질 것이며, 지옥에도 떨어질 공포 심이 없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도록 하렵니다." 하더라는 말이었 습니다. 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할 일인줄 압니다. 천국 을 부러워할 마음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공포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다 만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차있으면 그는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진 자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누구는 마치 야곱이 라반의 목장에서 일하듯이 사랑을 위하여 일하고, 누구는 옛날 애굽에서 벽돌을 굽고 있듯이 두려움 으로 마지 못하여 일합니다. 공장 안에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며 일하는 직공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퇴근 시간이 지나고 온 직공들이 퇴근한 다음도 홀로 남아 있어서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고 있는 청년 하나가 있습니다. 이 청년은 흥미를 갖고 일을 하는 공장 주인의 아들입니다. 많은 직공들은 봉급만을 노리는 자들이지만 이 청년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인줄 모르고 직공같이 삯을 노리 면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두 가지를 다 바라고 일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동안 금과 돌이 함께 나옵니다. 진리 편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진리 편에 있는 사람은 범사에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이단자는, 그릇된 교훈을 가르쳤다고 이 단자가 아니고 그것을 고치지 않는 고로 이단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온 전에 나가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늘 고치는 자입니다.
셋째,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가능합니다. 또한 애통하는 자 가 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애통할 것인가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말은 삶이 가져다 주는 가장 쓰라린 비애를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랍 격언에 "태양 빛이 언제나 계속 비친다면 사막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막이 왜 사막이 되었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고 태양 빛만 사시사철 내리 쬐이기 때문입니다. 태양 빛이 항상 내려 쪼이는 그 땅은 곧 식물이 성장할 수 없는 건조지가 되고 결국 메마른 사막 이 되고 맙니다. 비가 내려야 만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슬픔을 통해서 비로소 경험되어지는 축복입니다. 슬픔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긍 휼 이외는 그 무엇도 위로를 줄 수 없음을 알려 줍니다.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을 때에 비로소 이웃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로 울 때는 사물의 표면 이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슬픔에 부딪칠 때 인간은 삶의 깊이에 들어가게 되고 이 때에 그 슬픔을 바르게만 받아들 인다면 새로운 힘과 아름다움이 그의 영혼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기쁨과 더불어 한 마일을 걸었네 내내 기쁨만이 종알 거려 슬기는 나를 떠나 버렸네 나는 슬픔과 더불어 한 마일을 걸었네 그는 내내 한 마디 말도 없어 오! 나는 배웠네 가치 있는 것을"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은 더 나아가 "자신의 죄와 자기의 무가 치함을 절망하리만치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였습니다. 사람이 만일 자기 죄를 비통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와 축복의 마스 코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가지는 위대한 힘 중의 하나는 인간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죄를 보게 될 때 그는 죄에 대한 강한 비 애를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죄의 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를 깊이 슬퍼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범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애통하는 사람이며 십자가를 보고 죄로 인 하여 다가올 파멸로 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죄의 두려움을 경험하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참으 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회개하는 자를 위로하시고 멸시치 아니 하십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 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용서함 받은 자의 기쁨을 얻는 길은 상한 심령을 가진 자의 철저한 비 애를 통해서만 오는 것입니다. 세상 고통과 자기 죄로 인하여 상한 심령 을 가진 자는 복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이 나라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죄, 부정 부패하고 음란과 사치, 허영의 죄악에 빠진 것을 애통하는 자는 복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 자신과 나라 민족의 죄를 애통하며 진리 편에 서시기를 기원합니다.
넷째,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어질 때 참 평안이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 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가 진리 편에 서서 서로 하나가 되어질 때, 마치 예수님과 하나님 이 하나이듯이 우리가 하나가 되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 가운에 하나가 되어질 때 비록 눈 앞에 십자가가 있 다할지라도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생활이며 참 평안의 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요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인간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불란서의 철학자 볼 테르가 유언하기를,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기독교 성경은 없어진다고 했 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정반대로 그의 살던 집이 성서공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유언한 것은, 진리의 세계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고 도리어 역 효과를 낸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진리를 위할 뿐입니다. 진리를 위한다는 말은 진리가 우리 편으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 편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 하나님 말씀대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님과 하나되기 위해 항상 성결보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은 모두가 우주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진리 편에 서서 삶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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