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봉헌 (고후8:1-7)
본문
풍성한 햇빛, 그리고 적당한 비를 주셔서 금년에도 우리는 풍년을 이루어 냈습니다. 한 해 동안 은혜 가운데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도리는 감사함을 알고, 은혜를 알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고마워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감사할 줄을 알고, 또한 그 은혜를 갚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에서 배은 망덕이라는 말들이 자꾸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배은 망덕” 이 말은 참으로 슬픈 단어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함을 모르고 옛날을 잊고 저절로 큰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배은 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들은 오늘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양식이 먹고도 남아서 처지기 곤란할 정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지금 쌀이 100만 섬이나 남아서 쌓여 있다고 하니 기적 같은 일입니다. 춘궁기, 보릿고개,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이제는 이 같은 말들이 옛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백성들은 특별한 마음으로 이 같은 은혜를 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는 그래서 설교자들에 의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옛날부터 천병(天病)이라고 했습니다. 고칠 방법이 없었던 병입니다. 부정해서 동구 밖에 격리 수용되었던 병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께 찿아와 감사하면서 보답했던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안다고 하는 것이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을 모르고 배은 망덕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미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고등학생들이 “운전사 돕기회”를 조직해서 하루 종일 운전만 하는 운전사들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차가 정차했을 때 유리창을 닦아 주고, 세차도 해주고, 타이어도 갈아 끼워 주고, 모두 무료로 봉사를 했습니다. 운전들이 고마워서 돈을 주려고 하면 “우리 클럽에 감사하다는 편지 한 통만 보내 주시면 됩니다.”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2년 동안을 그렇게 일을 했는데도 편지는 단 두 통 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배가 핌몰해 갈 때 목숨을 걸고 물에 빠진 사람을 17명이나 구조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기진 맥진해서 병원으로 업혀 갔습니다. 몇 년 후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밖에는 지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조받은 17명의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슨 보즈웰 이라는 사람은 “감사는 훌륭한 교양의 열매다. 천한 사람에게서는 그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해리 팩스라는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은 타고 나야지 이 세상 모든 것으로도 창조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탈무드에 보면 감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빵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 밭에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곡식을 거두어 들인 후 그것으로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어 먹기까지에는 무려 15단계를 거쳐야 먹을 수 있었다. 빵을 먹는 자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에는 농부에게 감사하라.”
그런데 오늘 우리가 먹고 사는 쌀밥 한 그릇을 먹기까지에는 무려 88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이치를 알고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것은 분명 죄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 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이같이 풍성하게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참으로 기막힌 감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로 감사가 무엇이며 기쁨이 무엇이며 헌금이 무엇이며 봉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난 봉헌을 향기 나는 최상의 봉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환난 중에 드린 감사입니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가리킵니다. 데살로니가 지방 전체를 일컬어서 마게도냐라고 불렀습니다. 이 마게도냐 지방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많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개종해서 기독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마게도냐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 박해가 나중에는 환난으로 변해 갑니다. 견디기 어려운 협박과 유혹과 이간질과 핍박이 가해집니다. 어지간한 교회 같았으면 이때 큰 타격을 받고 사람들이 줄어 들기도 하였을 것인데 마게도냐 교회는 조금도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사로가 격려하면서 인내했습니다. 이 시험에 이겨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서로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기쁨으로 참아 냈습니다. 그런 중에 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하여 사도 바울에게 전달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헌금을 받아 들고 눈물겹도록 반가워하면서 한 말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 중에서 진짜 감사를 했던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워지면 뒤로 물러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오히려 환난과 시련 때문에 더 풍성한 감사를 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기쁠 때 하는 감사보다, 받고 나서 하는 감사보다 환난 중에 하는 감사입니다. 영국에서 살고 있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에서 조그만 목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102명이 석 달 동안 대서양 망망 대해를 무작정 항해해 간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위해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추위와 배고픔으로 얼어 죽고 병들어서 절반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해서 그것으로 음식을 만드어 놓고 동료들이 묻혀 있는 공동 묘지에서 꽁꽁 얼어 붙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추수 감사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남겼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맥시코 사람들처럼 황금을 캐러 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이 침묵의 땅에 묻을 때 이곳에서 신앙의 자유가 꽃이 필 것이며 인간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우주에 빛날 것이다.” 이것이 추수 감사절의 정신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인간은 이렇게까지 위대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감사는 따뜻한 잠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배부른 만족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차디찬 환난의 눈물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감사를 아십니까 욥은 사람들이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넓은 땅에 가축만 해도 수천 쌍이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 딸이 10남매나 됩니다. 그들은 모두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그 지방의 유지였고, 인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아침에 가지고 있던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재산도, 자식들도, 아내도 잃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가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아내 말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저주하면서 죽을 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나는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환난 중의 감사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감사입니다. 미얀마 아웅산 사건 때 유능한 인사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장례식때 대통령 비서실장이 17살 난 딸에게 기자가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치가 떨리는 증오와 미움과 복수의 마음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17살 난 딸의 대답은 “17년 동안 좋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하는 대답뿐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위대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신앙을 떠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 같은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우리는 이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활의 푸념 따위는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하였던 그 감사를 오늘 아침 우리들도 해야 하겠습니다.
2. 가난 중의 감사입니다. 본문은 보면 “(고후8:2)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가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극한 가난은 가장 밑바닥 가난이라는 말입니다. 쌀독의 쌀이 바닥에 깔려 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난, 그 가난이 바로 극한 가난입니다. 가끔 신문을 보면 가난 때문에 일가족 모두가 동반 자살을 해서 죽었다는 기사가 실리곤 합니다. 사람이 오죽하면 일가족 모두가 자살을 해서 죽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극한 가난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가진 사람은 싫도록 먹고 없는 사람은 너무나 빈약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입니다. 엊그제 실린 신문의 기사를 보니까 약간 비약된 기사였는데 오늘의 부자들은 먹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점심은 동경에 가서 먹고, 저녁은 제주도에 가서 먹고, 잠은 서울에 와서 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귀찮은 사람은 집에 앉아서 전화 한 통만 걸면 저녁 밥상에 동경에서 날아온 싱싱한 생선회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니까 미식을 즐깁니다. 이 같은 사람의 정신 속에 감사의 정신이 자리나 잡을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어느 백화점에서 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린 아이가 100만 원짜리 수표를 들고 와서 45만 원 하는 수입품 장난감 자동차를 사겠다고 내놓았습니다. 점원이 기가 막혀서 어린 아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100만 원짜리 수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 점원도 그래서 전화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물건이나 팔고 남은 돈 줘 보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내일을 살아갈 일이 막막해서 일가족이 약을 먹고 죽어가는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이웃이란 없습니다. 신앙이 자리를 잡을 여백이 없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거세게 다가오는 박해 속에서도, 가속되어 가는 가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여 전도비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그 교회를 “성숙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여러분, 성숙이 무엇입니까 성숙은 울어야 할 때 울음을 참고 냉철을 잃지 않는 그 마음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배고플 때 배고프다고 도적질하지 않고 중심을 지켜 살아가는 마음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어려울 때에도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포기하지 않고 수행해 나가는 삶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극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에도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사리를 분별해서 대처해 나가는 능력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은 가난이 오히려 은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이렇게 감사할 줄을 아는 교회였습니다.
3. 힘껏 드린 감사입니다. “(고후8:3)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억지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자원하여서 해야 그것이 감사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힘에 지나도록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인가 본 것이 있엇고, 느낀 것이 있었고,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바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보고 깨달은 것이 있음으로써 가치관과 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뀔 때 감사와 바침과 헌신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6)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제부터는 내 생각대로가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전에는 내 생각대로 판단했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예수를 만나고, 알고, 깨달은 후에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헌신이 나오고 자원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무엇이든지 주리라.” 그 음성을 듣고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퀴나스의 기도는 “오지 당신”일 뿐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가난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환난도, 핍박도 별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가난할수록, 박해가 심해질수록 그에게는 기쁨이 더해지고, 감사가 더 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 감사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찬문을 열어 놓고 고국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고발을 당했습니다. 또한 번만 더 기도하다가 발각이 되면 사자굴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면서도 하던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감사하였더라”(단 6:10)고 성경은 써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절대 감사입니다. 이 같은 감사가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감사입니다. 세상이 주는 그런 감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감사는 상대적입니다. 많이 주어지므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이 주는 감사입니다. 옛날 어느 구두 수선하는 노인이 지금 돈으로 1억 원이나 되는 복권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이제는 가난을 청산하자 하고 구두 궤짝을 짊어지고 강으로 가서 깊은 물 속에 집어 던지면서 “가난아 물러가라”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노인이 보는 앞에서 가난이 강물을 따라서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그리고 이 노인은 홀가분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 복권을 그만 상자 속에 넣어 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그 충격으로 이 노인은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행복은 잠시고, 변덕이 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이 절대 감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마게노냐 교회는 그 가난 속에서도 그 혹심한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얼마나 서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슴 없이 “나에게 복을 주세요”하고 기도할 수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4. 자신을 드리는 감사입니다. “(고후8:5)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 봉헌은 환난 가운데서 드리는 것도 귀하고, 극한 가난 중에서 드리는 것도 귀하고, 힘껏 드리는 것도 무엇보다 귀한 것이지만 더욱더 귀한 봉헌은 자기 자신을 드리는 봉헌입니다. 이것이 봉헌 가운데서 최상의 봉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기뻐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던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가인은 제물만 갖다 드림으로써 제사를 끝냈습니다. 그기에는 뜻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제물만 드려서 제사를 올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제물도 드렸지만 또한 자기 자신도 드렸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고 대신 양을 잡아서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양의 죽음은 곧 자기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복수 제물입니다. 그 제물은 자기 자신을 제물화한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복수 제물인 것입니다. 뜻이 결여된 제사나 제물이나 예물은 사람에게도 결레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더욱 불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정성과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선물을 받고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선물에 정성이 깃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젊은이들에게 준 말씀 가운데서 “(전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 중에서 가장 소중한 젊은 때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늙어서 시간이 많을 때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보다 싱싱하고 힘이 있고 교긴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즉 그만큼 뜻고 정성이 있는 시간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아주 가난했던 교회입니다. 거기다 안팎으로 박해와 환난이 닥쳐 온 교회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에 대해서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고 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지난 일년 동안 뒤를 돌아 보면 얼마나 감사했던 일들이 많겠습니까 건강하게 살아온 한 해입니다. 그리고 무사하게 살아온 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다 보면 은혜로웠던 일이나 감사했던 일들은 모두 잊혀지고 어려웠던 일들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절대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할 줄을 아는 사람만이 은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줄을 아는 사람만이 내일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에서 배은 망덕이라는 말들이 자꾸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배은 망덕” 이 말은 참으로 슬픈 단어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함을 모르고 옛날을 잊고 저절로 큰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배은 망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민족들은 오늘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양식이 먹고도 남아서 처지기 곤란할 정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지금 쌀이 100만 섬이나 남아서 쌓여 있다고 하니 기적 같은 일입니다. 춘궁기, 보릿고개,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이제는 이 같은 말들이 옛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백성들은 특별한 마음으로 이 같은 은혜를 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는 그래서 설교자들에 의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옛날부터 천병(天病)이라고 했습니다. 고칠 방법이 없었던 병입니다. 부정해서 동구 밖에 격리 수용되었던 병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열 명이 다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께 찿아와 감사하면서 보답했던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안다고 하는 것이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사실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을 모르고 배은 망덕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미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고등학생들이 “운전사 돕기회”를 조직해서 하루 종일 운전만 하는 운전사들을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차가 정차했을 때 유리창을 닦아 주고, 세차도 해주고, 타이어도 갈아 끼워 주고, 모두 무료로 봉사를 했습니다. 운전들이 고마워서 돈을 주려고 하면 “우리 클럽에 감사하다는 편지 한 통만 보내 주시면 됩니다.”하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2년 동안을 그렇게 일을 했는데도 편지는 단 두 통 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배가 핌몰해 갈 때 목숨을 걸고 물에 빠진 사람을 17명이나 구조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기진 맥진해서 병원으로 업혀 갔습니다. 몇 년 후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밖에는 지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조받은 17명의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찾아와서 감사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슨 보즈웰 이라는 사람은 “감사는 훌륭한 교양의 열매다. 천한 사람에게서는 그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해리 팩스라는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은 타고 나야지 이 세상 모든 것으로도 창조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또 탈무드에 보면 감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빵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 밭에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곡식을 거두어 들인 후 그것으로 반죽을 해서 빵을 만들어 먹기까지에는 무려 15단계를 거쳐야 먹을 수 있었다. 빵을 먹는 자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에는 농부에게 감사하라.”
그런데 오늘 우리가 먹고 사는 쌀밥 한 그릇을 먹기까지에는 무려 88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이치를 알고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을 모른다는 것은 분명 죄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 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이같이 풍성하게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참으로 기막힌 감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로 감사가 무엇이며 기쁨이 무엇이며 헌금이 무엇이며 봉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타난 봉헌을 향기 나는 최상의 봉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 환난 중에 드린 감사입니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마게도냐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가리킵니다. 데살로니가 지방 전체를 일컬어서 마게도냐라고 불렀습니다. 이 마게도냐 지방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많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개종해서 기독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마게도냐 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 박해가 나중에는 환난으로 변해 갑니다. 견디기 어려운 협박과 유혹과 이간질과 핍박이 가해집니다. 어지간한 교회 같았으면 이때 큰 타격을 받고 사람들이 줄어 들기도 하였을 것인데 마게도냐 교회는 조금도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사로가 격려하면서 인내했습니다. 이 시험에 이겨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서로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기쁨으로 참아 냈습니다. 그런 중에 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하여 사도 바울에게 전달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헌금을 받아 들고 눈물겹도록 반가워하면서 한 말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고후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 중에서 진짜 감사를 했던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워지면 뒤로 물러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는 오히려 환난과 시련 때문에 더 풍성한 감사를 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기쁠 때 하는 감사보다, 받고 나서 하는 감사보다 환난 중에 하는 감사입니다. 영국에서 살고 있던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에서 조그만 목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102명이 석 달 동안 대서양 망망 대해를 무작정 항해해 간 것입니다. 그것은 목숨을 내놓고 신앙을 위해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겨울 추위와 배고픔으로 얼어 죽고 병들어서 절반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농사를 짓고 추수를 해서 그것으로 음식을 만드어 놓고 동료들이 묻혀 있는 공동 묘지에서 꽁꽁 얼어 붙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추수 감사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남겼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온 것은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맥시코 사람들처럼 황금을 캐러 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참된 신앙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이 침묵의 땅에 묻을 때 이곳에서 신앙의 자유가 꽃이 필 것이며 인간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이 우주에 빛날 것이다.” 이것이 추수 감사절의 정신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인간은 이렇게까지 위대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감사는 따뜻한 잠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배부른 만족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차디찬 환난의 눈물의 자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욥의 감사를 아십니까 욥은 사람들이 가지고 싶은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넓은 땅에 가축만 해도 수천 쌍이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들 딸이 10남매나 됩니다. 그들은 모두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그 지방의 유지였고, 인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인정하시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아침에 가지고 있던 것 모두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재산도, 자식들도, 아내도 잃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가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아내 말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자신을 저주하면서 죽을 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나는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환난 중의 감사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감사입니다. 미얀마 아웅산 사건 때 유능한 인사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장례식때 대통령 비서실장이 17살 난 딸에게 기자가 지금 심정이 어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치가 떨리는 증오와 미움과 복수의 마음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17살 난 딸의 대답은 “17년 동안 좋은 아버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하는 대답뿐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신앙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위대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신앙을 떠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 같은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 우리는 이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활의 푸념 따위는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하였던 그 감사를 오늘 아침 우리들도 해야 하겠습니다.
2. 가난 중의 감사입니다. 본문은 보면 “(고후8:2)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가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극한 가난은 가장 밑바닥 가난이라는 말입니다. 쌀독의 쌀이 바닥에 깔려 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난, 그 가난이 바로 극한 가난입니다. 가끔 신문을 보면 가난 때문에 일가족 모두가 동반 자살을 해서 죽었다는 기사가 실리곤 합니다. 사람이 오죽하면 일가족 모두가 자살을 해서 죽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극한 가난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가진 사람은 싫도록 먹고 없는 사람은 너무나 빈약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회입니다. 엊그제 실린 신문의 기사를 보니까 약간 비약된 기사였는데 오늘의 부자들은 먹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점심은 동경에 가서 먹고, 저녁은 제주도에 가서 먹고, 잠은 서울에 와서 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귀찮은 사람은 집에 앉아서 전화 한 통만 걸면 저녁 밥상에 동경에서 날아온 싱싱한 생선회를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많이 먹으면 살이 찌니까 미식을 즐깁니다. 이 같은 사람의 정신 속에 감사의 정신이 자리나 잡을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어느 백화점에서 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어린 아이가 100만 원짜리 수표를 들고 와서 45만 원 하는 수입품 장난감 자동차를 사겠다고 내놓았습니다. 점원이 기가 막혀서 어린 아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100만 원짜리 수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 점원도 그래서 전화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물건이나 팔고 남은 돈 줘 보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내일을 살아갈 일이 막막해서 일가족이 약을 먹고 죽어가는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감사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이웃이란 없습니다. 신앙이 자리를 잡을 여백이 없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거세게 다가오는 박해 속에서도, 가속되어 가는 가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여 전도비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그 교회를 “성숙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여러분, 성숙이 무엇입니까 성숙은 울어야 할 때 울음을 참고 냉철을 잃지 않는 그 마음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배고플 때 배고프다고 도적질하지 않고 중심을 지켜 살아가는 마음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어려울 때에도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포기하지 않고 수행해 나가는 삶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극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에도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사리를 분별해서 대처해 나가는 능력을 성숙이라고 합니다.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은 가난이 오히려 은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이렇게 감사할 줄을 아는 교회였습니다.
3. 힘껏 드린 감사입니다. “(고후8:3)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억지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자원하여서 해야 그것이 감사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힘에 지나도록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인가 본 것이 있엇고, 느낀 것이 있었고,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바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보고 깨달은 것이 있음으로써 가치관과 중심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뀔 때 감사와 바침과 헌신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5:16)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제부터는 내 생각대로가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전에는 내 생각대로 판단했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예수를 만나고, 알고, 깨달은 후에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헌신이 나오고 자원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깊이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무엇이든지 주리라.” 그 음성을 듣고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퀴나스의 기도는 “오지 당신”일 뿐이었습니다. 이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가난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환난도, 핍박도 별로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으로 가난할수록, 박해가 심해질수록 그에게는 기쁨이 더해지고, 감사가 더 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 감사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찬문을 열어 놓고 고국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고발을 당했습니다. 또한 번만 더 기도하다가 발각이 되면 사자굴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면서도 하던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감사하였더라”(단 6:10)고 성경은 써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절대 감사입니다. 이 같은 감사가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는 감사입니다. 세상이 주는 그런 감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감사는 상대적입니다. 많이 주어지므로 오히려 불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이 주는 감사입니다. 옛날 어느 구두 수선하는 노인이 지금 돈으로 1억 원이나 되는 복권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이제는 가난을 청산하자 하고 구두 궤짝을 짊어지고 강으로 가서 깊은 물 속에 집어 던지면서 “가난아 물러가라”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노인이 보는 앞에서 가난이 강물을 따라서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그리고 이 노인은 홀가분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 복권을 그만 상자 속에 넣어 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그 충격으로 이 노인은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행복은 잠시고, 변덕이 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이 절대 감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마게노냐 교회는 그 가난 속에서도 그 혹심한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얼마나 서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슴 없이 “나에게 복을 주세요”하고 기도할 수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4. 자신을 드리는 감사입니다. “(고후8:5)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 봉헌은 환난 가운데서 드리는 것도 귀하고, 극한 가난 중에서 드리는 것도 귀하고, 힘껏 드리는 것도 무엇보다 귀한 것이지만 더욱더 귀한 봉헌은 자기 자신을 드리는 봉헌입니다. 이것이 봉헌 가운데서 최상의 봉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기뻐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던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가인은 제물만 갖다 드림으로써 제사를 끝냈습니다. 그기에는 뜻도 의미도 없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제물만 드려서 제사를 올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제물도 드렸지만 또한 자기 자신도 드렸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고 대신 양을 잡아서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 양의 죽음은 곧 자기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복수 제물입니다. 그 제물은 자기 자신을 제물화한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복수 제물인 것입니다. 뜻이 결여된 제사나 제물이나 예물은 사람에게도 결레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더욱 불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정성과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선물을 받고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선물에 정성이 깃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젊은이들에게 준 말씀 가운데서 “(전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 중에서 가장 소중한 젊은 때를 하나님께 바치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늙어서 시간이 많을 때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는 보다 싱싱하고 힘이 있고 교긴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라는 말입니다. 즉 그만큼 뜻고 정성이 있는 시간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아주 가난했던 교회입니다. 거기다 안팎으로 박해와 환난이 닥쳐 온 교회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에 대해서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고 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지난 일년 동안 뒤를 돌아 보면 얼마나 감사했던 일들이 많겠습니까 건강하게 살아온 한 해입니다. 그리고 무사하게 살아온 한 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다 보면 은혜로웠던 일이나 감사했던 일들은 모두 잊혀지고 어려웠던 일들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추수 감사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절대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할 줄을 아는 사람만이 은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줄을 아는 사람만이 내일을 바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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