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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가 주는 교훈 (고후12:7-10)

본문

실패를 실패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공의 시금석이나 발판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후자가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이해하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찌르는 가시가 있었는데 오히려 그 가시 때문에 자신의 신앙에 큰 유익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시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시는 그것이 어느 곳에 위치하 고 있던지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시는 찌르고 할퀴고 상처 를 만듭니다 그러나 가시는 언제나 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은 가시가 있습니다. 꽃 증의 꽃인 장미는 가시가 있습니다. 아무나 함부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탐내 꺽지 못하도록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백합화 향기는 가시에 찢겼을 때 진동합니다. 생선도 가시 많은 생선이 먹기는 힘들어도 맛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의 경우도 그를 괴롭힌 가시 때문에 자신의 삶과 신앙을 바르게 추스려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종류의 가시에 대하여 말 드리겠습니다.
1. 최초의 가시는 가시덤블과 엉겅퀴였습니다. 창세기 3:18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니'라고 했습니다. 땅에 씨를 뿌리면 파릇파릇 예쁜 싹과 열매를 내는 것이 창조의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은대로 뿌린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토질이 변했고 땅이 말을 듣지 않는 역행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증요한 것은 땅이 먼저 변했느냐 사람이 먼저 변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먼저 변하고 그후에 땅이 변했습니다. 산이 벌거승이가 되고 강들마다 썩어 악취가 생기고 산과 들이 쓰레기로 뒤덮히게 된 왼인은 사람 때문입니다 어느 날 길올 걸어 가는데 구두 밑창이 끈적끈적하고 길바닥에 달라 붙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히 여기고 구두 밑창을 들여다 보았더니 호떡 크기만한 껌이 드러붙어 있었습니다. 정확하겐 모르겠지만 최소한 한꺼번에 4개 정도는 씹다가 버린 것같았습니다. 그걸 씹다가 그냥 내뱉은 것을 공교롭게도 제가 밟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떼내느라 한참동안 품을 들여야 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증요한 사건입니다. 이런 행위들 패문에 환경은 파괴되어 가고 자연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연석과 흡연석도 구별 못하는 사람들, 쓰레기 통과 길거리도 식별 못하는 사람들, 그들 때문에 우리 시대는 점점 더 가시가 크고 엉 겅퀴가 뻗고 있는 것입니다. 고등동물과 하등동물의 차이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를 꼽는다면 고등동믈은 그 삶이 윤리적이며 청 결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개나 돼지는 윤리적 결단이나 자기 통제가 없습니다. 아무데서나 방료 배설이 자유롭고 접촉도 제한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등동믈인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체면도 있고 입장도 있고 자기 자리도 챙겨야 합니다. 하등동물처럼 생각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고등동물이기 때문에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인간들의 세계가 점차 하등동물의 세계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데나 버리고 싸고 망가뜨리고 윤리도 도덕도 소용이 없습니다. 보도가 안 된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제 기억으론 강아지가 제 어미 개를 물어 뜯어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식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살해합니다. 부모가 자식 을 버럽니다. 그 정도라면 금수에 비해 나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우린 지금 가시와 엉겅퀴 뒤덮힌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2. 모세가 본 호렙산의 가시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기록된 호렙산의 가시는 갑자기 돋아난 가시가 아 닙니다. 이미 있었던 가시였습니다. 문제는 그 가시 떨기에 블이 붙었다는 것입니다. 맹렬하고도 강한 불이 가시떨기에 붙었습니다. 그러나 타서 없어지는 불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뜻이 있습니다. 모세가 본 호렙산의 가시는 모세 가 걸어야 할 험난한 가시밭 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가시 떨기 에 붙은 꺼지지 않는 불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동역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모세가 걷는 길만 가시밭 길인 것은 아닙니다. 인생 모두가 걷는 길은 가시밭과 같습니다. 어머니 태에서 나온 이후 l년 2개월 동안 엄마 품에 안겨 보지 못하고 인규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신생아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l00일을 지냈고 첫돌을 맞았습니다. 그 아기가 첫돌을 맞던 날 산부인과 병원 간호사들이 자그마한 케익에 한 자루의 촛블을 켜고 그 아기 엄마와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엄마는 인규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를 바라 보며 눈물을 훔쳐내야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시를 만나는가 하면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시 밭을 만납니다. 모세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호렙산의 가시떨기 불길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예외일 것이라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시 울타리를 만나 면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탈없이 순탄한 행군을 계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바람일 뿐, 현실은 아닙니다. 미국 사람들의 경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3분의1은 노후관리 비로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늙게 된 후의 관리비가 더 많이 들어간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문제는 내 앞길을 가로막는 인생의 가시들을 돈이나 명예나 권력등으로 해결해 낼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가시는 나한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3. 바을의 가시 입니다. 바울의 가시는 육체의 질병이었습니다. 원문을 보면 가시를 [스콜로프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말뚝, 뾰 족한 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육체에 말뚝 흑은 뾰족한 창이 꽂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스콜로프스가 꽂혔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 스러웠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울같은 성자에게도 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그 가시가 고통스러워서 가시를 물리쳐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서 가시를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를 '은혜라 고 했습니다. 바울이 본래 받고 싶었던 기도응답은 '네게서 가시를 옮겨 주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기도제목을 내걸고 세번 씩이나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바울의 가시가 은혜였을까요
첫째 그 가시 때문에 겸손하게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 남자들이 부러워하는 몇 가지 사회적 신분이 있었 습니다. 그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 카말리엘같은 흘릉한 율 법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율법을 공부하는 것.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 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들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과시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지을 때도 큰 사람이 되라고 [사울]이라고 했습니다. 초대 왕인 사울처럼 왕이 되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가시에 걸렸습니다. 그 가시는 율법으로도, 시민권으 로도, 가문으로도 해결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는 가시 때문에 늘 자기를 낮출 수 있었습니다.
둘째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기도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9절 끝을 보면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 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시 때문에 엄청난 은혜를 깨닫 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농촌 출신 알렉산더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명하여 노 벨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세인트 메리 대학에서 실험병리학을 전공한 뒤 영국 런던 대 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어린아이들에게 유행하던 부스럼을 연구하다가 어느 날 여러 개의 접시에 배양된 세균을 현미경으로 관찰했습니다. 그는 실수로 한 개의 접시 뚜껑을 열어 논채 퇴근했다 가 다음 날 아침 깜짝 놀랐습니다. 뚜껑이 열린 접시에 푸른색 곰팡이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두번 놀랐습니다. 접시 안에 잔뜩 배양돼 있던 세균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살균력이 강한 푸른 곰팡이가 뚜껑 열린 접시에 날아와 세균을 멸균시킨 것올 그는 발견했습니다. 그는 곧 푸른 곰팡이를 대량 배양 한여 여러 병균에 침투시켜 가며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폐렴 복막염 등의 균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페니실린의 발명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위대한 실수였습니다. 우린 여기서 플레밍 교수의 실수를 실패, 절망, 아픔, 고통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봅시다. 그리고 그것들이 위대한 실패나 절망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봅시다. 바울은 본문 11절 끝에서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합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시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 재하심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시라도 은혜가 되는 까닭은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시로 말하면 예수님의 가시에 견줄 가시가 어디 있겠습니까 가시는 예수님의 이마를 찢었습니다. 손과 발과 옆구리를 꿰뚫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의 가시도 바울의 가시도 스데반의 가시도 그리고 우리들의 가시도 예수님의 가시에는 비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가슴을 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예수님 보다 억울합니까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합시다. 예수님보다 더 아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으로 좌절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절규하셨던 주님만큼 고독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토록 처절한 고통과 절망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승리의 부활을 바라본 바울은 가시보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시타령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가시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가시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 가시에 굴복하면 가시에 찔려 죽고 넘어지고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그 모질었던 가시밭길을 생각하며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머잖아 영광의 새벽. 승리의 이침을 맞게 될 것입니다. 가시는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교만하지 말라. 기도하라, 십자가를 생각하라,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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