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하는 신앙 (딤전4:15-16)
본문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신앙 성장을 위한 애정어린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말은 신앙을 성장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금년에는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신앙이 성장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라는 것이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어린이가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들의 아름다움은 자라는 데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봅니다. 어렸던 자녀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조기 좋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아름답다 하는 마음만 들겠지만 부모가 그 모습을 볼 때 아름다움뿐이겠습니까 얼마나 대견하고 의젓해 보이겠습니까 성장한다는 것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식물이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람이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성숙하고 자란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도 발전해야 하고 진보해야 하고 성숙해져야 합니다. 신앙이 이렇게 성장하면 몇 가지 나타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1. 소극적이던 사람이 적극적으로 바뀝니다. 사람이 뭔가 자신이 없고 깊이가 없으면 소극적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지 못하고 언제나 뒷줄에 서 있기를 좋아하고 매사를 주저하고 망설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런 신앙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자신감이 없으면 매사가 이렇게 소극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이 되어서 뒷자리 신세를 면키 어렵습니다. 신앙도 자신감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언제나 뒷자리를 면치 못하고, 언제나 끌려다니고, 찾아가야만 한번 나오고, 전화해야만 한번 나오고, 등을 떼밀어야만 나오고 그럽니다. 그것은 아직 유아적 신앙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 신앙에서는 신앙이 주는 재미도 느낄 수가 없고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신앙의 깊이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에 자신감이 있어 보십시오. 언제나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 사람은 생활에 발전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진보가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활력이 있어서 좋고 자신김이 있어서 좋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나 생활이 이렇게 분명하고 확실하고 적극적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분명하고 적극적인 것이 좋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할 때 느끼는 것이지만 악수를 할 때도 힘있게 손을 쥐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얼마나 박력이 있고 힘이 있어 좋습니까 그렇게 힘있게 잡아 주면 누구보다도 할머니들이 참 좋아하시고 박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람이 매사 확실하고 분명하면 이렇게 좋습니다. 신앙도 그렇게 분명해야 진보가 있습니다. 그래야 도움받던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얻어 먹던 사람이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끌려 다니던 사람이 끌고 다니는 사람으로 변하고 수동적이던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조하여 “전심적력하여 진보하는 모습을 나타나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2. 듣는 자리에서 행동하는 자리로 발전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큰 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움직이지 않는 병입니다. 야고보서 “(약1:22)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듣는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듣는 자리에서 움직이는 자리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싱앙이 단단해지고 발전하여 진보하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신앙도 썩고 몸도 병나고 물도 썩습니다. 제주도에 가 보니 얼마 전만 해도 시골에서는 수도가 없어서 빗물을 받아 놓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빗물을 그냥 받아 놓으면 물이 썩으니까 물항아리 속에 개구리 한 마리를 놓어 두었다고 합니다. 이 개구리가 하루종일 항아리 속에서 움직이게 되니까 물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움직이면 썩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이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있으면 썩어 버립니다. 유교에서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깨우쳤으면 나가서 활용하고 움직여야지 왜 죽습니까 왜 그렇게 소극적입니까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공부하는 이유는 깨우치고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족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 깨우침을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깨우친 사람이 그 깨우침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하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인도의 교육 철학자 케리는 형대인에게 정신적 죄악 세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고,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아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러냐”하고 비난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행동히 없느냐”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말만 앞서고 행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움직여야 할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문제가 되지만 그를 보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라는 논문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인의 가장 큰 자유함은 세상에서 헌신하는 자유를 만찍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인이 행동이 없으면 가장 부자유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에서 행동이 없으면 그 신앙은 소극적이 되어서 결국에 가서는 침체되고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정신병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시간은 많은데 행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정신 없이 움직이면서 살아 보십시오. 왜 정신병이 오고 노이로제에 걸리고 불면증이 찾아오겠습니까 시간이 많은 사람이 문제이고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잡념이 많고 불필요한 생각이 많아서 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움직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발전이 있고 진보가 있습니다.
3. 현세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관심이 바뀝니다. 신앙이 초기에는 현세적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초신자 때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대부분 현세적입니다.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병낫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평안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현세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신앙이든 생각이든 나 위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미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나” 위주입니다. 자신의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여기서 오래 머물면 안 됩니다. 시작은 그 목적이 현세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고 연륜이 쌓이면 그 신앙이 영적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올라가야 합니다. 깊은 신앙의 영적 세계로 신앙의 목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버린 이유가 그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생각은 지극히 현세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디니면 언젠가는 크게 성공할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마다 않고 앞장서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니까 그 좌절감에서 그만 스승을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이 목적이 이렇게 현세적이면 그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탈락하기 쉽습니다. 목표를 세워 놓았는데 그 목표가 충죽되지 않으면 그 신앙이 어떻게 유지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가룟 유다는 그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가룟 유다가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는 신앙이 지극히 현세적인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지 않고 발전하지 못하여 10년, 20년을 신앙생활했는데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은 현세적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현세적 차원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발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심적력하여 진보를 나타나게 하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 지식 신앙에서 고백 신앙으로 전환됩니다. 신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으로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이론으로 설명하려다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과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지식 신앙으로 출발할 수 있지만 시간이 가면 그 지식 신앙이 고백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사람이 성경도 많이 알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신앙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성경을 알고 외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구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개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머리는 뜨거운데 가슴은 냉랭하면 그것은 개념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에서는 신앙의 고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감격도 없습니다. 머리로 믿는 신앙에서 가슴으로 믿는 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생활 속에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고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무릎을 꾾고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했던 것은 그 가슴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고백이 얼마나 힘이 있고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개념적인 신앙에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런 생명력도 없고 그런 고백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청년들은 “세상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아주 혁명적인 기도를 합니다. 지식인들은 “세상의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숙한 신앙인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주여, 이 어리석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 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내가 신앙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빠지고, 내가 변하지 않고 누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입니까 개념적인 신앙에서는 나는 빼고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신앙은 개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반항적입니까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답답한 부모들이 “너도 결혼해서 자식 키워 봐라. 그러면 부모 마음 알게 될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그런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이 자식들이 부모의 그 깊은 심정을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자식을 낳아 직접 길러 보면 그때 가서야 그 깊은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 어머님 은혜를 부르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눈에 비로소 눈물이 고일 것이고 목이 메일 것이며 가슴 저미는 회한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고백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신앙에서 고백다운 고백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5. 주께 위탁하고 살아가는 생활로 바뀝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기까지 성장되었으면 합니다. 이 단계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 신앙이 여기까지 성장하게 되면 이 세상이 살아가기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파도가 일으날 수 있습니다. 생각도 못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장애물도 있을 수 있고 걸림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한숨도 쉬게 되고 걱정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도가 심하면 밤잠을 설쳐서 불면증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정신 질환이 발생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툰 운전 솜씨로 불안스럽게 운전을 턱 맡겨 놓고 그 옆좌석에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서 여행하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행이 얼마나 편안하고 즐겁겠습니까 아마 그것이 주님께 우리의 앞날을 모두 맡기고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고집부리며 살아도 보았고 무던히 살아 보려고 애도 써 보았고 밤잠을 설쳐 가며 궁리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질없이 고생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다 맡기고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 그것이 가장 성숙한 신앙이고 발전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 단계에서 비로소 십자가를 질 용기도 생기고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도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진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부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여러분의 신앙이 이렇게 진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소극적이던 사람이 적극적으로 바뀝니다. 사람이 뭔가 자신이 없고 깊이가 없으면 소극적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지 못하고 언제나 뒷줄에 서 있기를 좋아하고 매사를 주저하고 망설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런 신앙으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자신감이 없으면 매사가 이렇게 소극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수동적이 되어서 뒷자리 신세를 면키 어렵습니다. 신앙도 자신감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언제나 뒷자리를 면치 못하고, 언제나 끌려다니고, 찾아가야만 한번 나오고, 전화해야만 한번 나오고, 등을 떼밀어야만 나오고 그럽니다. 그것은 아직 유아적 신앙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런 신앙에서는 신앙이 주는 재미도 느낄 수가 없고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신앙의 깊이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에 자신감이 있어 보십시오. 언제나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런 사람은 생활에 발전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진보가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활력이 있어서 좋고 자신김이 있어서 좋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나 생활이 이렇게 분명하고 확실하고 적극적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분명하고 적극적인 것이 좋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할 때 느끼는 것이지만 악수를 할 때도 힘있게 손을 쥐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얼마나 박력이 있고 힘이 있어 좋습니까 그렇게 힘있게 잡아 주면 누구보다도 할머니들이 참 좋아하시고 박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람이 매사 확실하고 분명하면 이렇게 좋습니다. 신앙도 그렇게 분명해야 진보가 있습니다. 그래야 도움받던 사람이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얻어 먹던 사람이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끌려 다니던 사람이 끌고 다니는 사람으로 변하고 수동적이던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조하여 “전심적력하여 진보하는 모습을 나타나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2. 듣는 자리에서 행동하는 자리로 발전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큰 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움직이지 않는 병입니다. 야고보서 “(약1:22)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듣는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듣는 자리에서 움직이는 자리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싱앙이 단단해지고 발전하여 진보하게 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신앙도 썩고 몸도 병나고 물도 썩습니다. 제주도에 가 보니 얼마 전만 해도 시골에서는 수도가 없어서 빗물을 받아 놓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빗물을 그냥 받아 놓으면 물이 썩으니까 물항아리 속에 개구리 한 마리를 놓어 두었다고 합니다. 이 개구리가 하루종일 항아리 속에서 움직이게 되니까 물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움직이면 썩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이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있으면 썩어 버립니다. 유교에서는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는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도를 깨우쳤으면 나가서 활용하고 움직여야지 왜 죽습니까 왜 그렇게 소극적입니까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면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공부하는 이유는 깨우치고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족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 깨우침을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깨우친 사람이 그 깨우침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하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인도의 교육 철학자 케리는 형대인에게 정신적 죄악 세 가지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고,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고,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아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러냐”하고 비난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행동히 없느냐”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말만 앞서고 행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움직여야 할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에게도 문제가 되지만 그를 보는 세상 사람들에게까지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라는 논문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인의 가장 큰 자유함은 세상에서 헌신하는 자유를 만찍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인이 행동이 없으면 가장 부자유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에서 행동이 없으면 그 신앙은 소극적이 되어서 결국에 가서는 침체되고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가 정신병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시간은 많은데 행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정신 없이 움직이면서 살아 보십시오. 왜 정신병이 오고 노이로제에 걸리고 불면증이 찾아오겠습니까 시간이 많은 사람이 문제이고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잡념이 많고 불필요한 생각이 많아서 병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움직이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발전이 있고 진보가 있습니다.
3. 현세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관심이 바뀝니다. 신앙이 초기에는 현세적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초신자 때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이 대부분 현세적입니다.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병낫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평안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현세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신앙이든 생각이든 나 위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미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나” 위주입니다. 자신의 범위를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여기서 오래 머물면 안 됩니다. 시작은 그 목적이 현세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고 연륜이 쌓이면 그 신앙이 영적 차원으로 자연스럽게 올라가야 합니다. 깊은 신앙의 영적 세계로 신앙의 목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정상적으로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버린 이유가 그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생각은 지극히 현세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디니면 언젠가는 크게 성공할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생을 마다 않고 앞장서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은 이런 기대를 저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목적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니까 그 좌절감에서 그만 스승을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이 목적이 이렇게 현세적이면 그 신앙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탈락하기 쉽습니다. 목표를 세워 놓았는데 그 목표가 충죽되지 않으면 그 신앙이 어떻게 유지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가룟 유다는 그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가룟 유다가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는 신앙이 지극히 현세적인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지 않고 발전하지 못하여 10년, 20년을 신앙생활했는데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은 현세적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현세적 차원에 그냥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발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심적력하여 진보를 나타나게 하라.”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 지식 신앙에서 고백 신앙으로 전환됩니다. 신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으로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이론으로 설명하려다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과는 다릅니다. 처음에는 지식 신앙으로 출발할 수 있지만 시간이 가면 그 지식 신앙이 고백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사람이 성경도 많이 알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신앙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성경을 알고 외우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구약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개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머리는 뜨거운데 가슴은 냉랭하면 그것은 개념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에서는 신앙의 고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감격도 없습니다. 머리로 믿는 신앙에서 가슴으로 믿는 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생활 속에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고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앞에 무릎을 꾾고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했던 것은 그 가슴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고백이 얼마나 힘이 있고 감격적이었겠습니까 개념적인 신앙에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런 생명력도 없고 그런 고백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청년들은 “세상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아주 혁명적인 기도를 합니다. 지식인들은 “세상의 기독교가 기독교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성숙한 신앙인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주여, 이 어리석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켜 주십시오.”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내가 신앙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빠지고, 내가 변하지 않고 누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입니까 개념적인 신앙에서는 나는 빼고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신앙은 개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반항적입니까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답답한 부모들이 “너도 결혼해서 자식 키워 봐라. 그러면 부모 마음 알게 될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그런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이 자식들이 부모의 그 깊은 심정을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자식을 낳아 직접 길러 보면 그때 가서야 그 깊은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 어머님 은혜를 부르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눈에 비로소 눈물이 고일 것이고 목이 메일 것이며 가슴 저미는 회한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고백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신앙에서 고백다운 고백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5. 주께 위탁하고 살아가는 생활로 바뀝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기까지 성장되었으면 합니다. 이 단계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 신앙이 여기까지 성장하게 되면 이 세상이 살아가기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파도가 일으날 수 있습니다. 생각도 못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장애물도 있을 수 있고 걸림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 한숨도 쉬게 되고 걱정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도가 심하면 밤잠을 설쳐서 불면증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정신 질환이 발생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툰 운전 솜씨로 불안스럽게 운전을 턱 맡겨 놓고 그 옆좌석에 편안한 마음으로 앉아서 여행하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행이 얼마나 편안하고 즐겁겠습니까 아마 그것이 주님께 우리의 앞날을 모두 맡기고 살아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고집부리며 살아도 보았고 무던히 살아 보려고 애도 써 보았고 밤잠을 설쳐 가며 궁리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질없이 고생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다 맡기고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 그것이 가장 성숙한 신앙이고 발전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 단계에서 비로소 십자가를 질 용기도 생기고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도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진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부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여러분의 신앙이 이렇게 진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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