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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유산, 신앙 교육 (딤전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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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 있다면 그것은 가르치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부터 가르치는 사람을 존대했고 존경했습니다. 성경에서도 가르치는 사람을 배나 더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내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분명하게 영광된 일입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만한 인식이 뒤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입니다. 저도 한때는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육학을 공부했고 한때는 잠시 가르쳐 본 경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 가운데서도 더 소중한 교육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 교육입니다. 일반 교육은 사람의 인성을 개발해 주고 인간을 기르고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정신과 지식을 심어 주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가 함께 공동의 교육을 받아 세상을 함께 적응해 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교육은 생명 교육입니다. 영적인 교육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교육입니다. 이것이 일반 교육과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교육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의 교육은 적어도 일반적인 교육의 차원을 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과 계명과 교훈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교육은 그냥 가르치는 것으로 다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 가르칩니다. 그러니 그 신앙 교육이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교육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그래서 강할 수밖에 없는 민족입니다. 성경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교육하되, 그냥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문설주에 기록하고,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매고, 마음판에 새겨 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적당히 가르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으로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히브리인들이 가르치는 교육이 얼마나 강하고 집념 있는 교육이겠습니까 성경이 신앙 교육을 이렇게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교육 속에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교육은 단순 교육이 아닙니다. 인격이나 길러 주고 수야이나 시키고 직업을 갖게 해주는 그런 교육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적어도 신앙 교육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아주 끈질긴 힘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말할 때는 복음을 말하고 복음을 말할 때는 흔히 겨자씨와 비교를 하기도 합니다. 겨자씨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작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작은 것의 상징이 바로 겨자씨입니다. 작다는 말은 헬라어로 미크로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마이크로라고 합니다. 마이크로라는 말은 미니보다 더 작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이크로보다 더 작은 것은 마이크로 그램입니다. 이것은 작은 것의 100만 분의 1을 의미합니다. 겨자씨는 그렇게 작다는 것입니다. 보잘것이 없습니다.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보일 듯 말 듯 아주 세미한 것이 복음입니다. 베들레헴 어느 여관에 이 복음의 씨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겨자씨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는 누구도 거들떠보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장차 이 세상의 복음의 주인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처음에 그렇게 초라하게 태어났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지역에서 인물이 태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베들레헴은 당시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베들레헴에서 무슨 귀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처음에 베들레헴에 떨어진 복음의 씨는 겨자씨만큼이나 작았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씨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의 씨가 자라서 12명으로 늘어났고 그 12명은 다시 70명으로, 70명이 120명으로, 120명이 4천명으로, 5천 명으로 이것이 다시 커져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마침내는 로마를 석권합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다시 지중해와 발칸 반도를 넘어 유럽을 점령하고 영국을 점령합니다. 이 복음은 다시 대서양을 넘어 북미 대륙을 석권하고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와 일본에 전파되더니 마침내 한국을 복음화하고 이 복음이 젊은이들의 손에 들려져 지금 아시아를 누비고 있으며 급기야는 이 복음이 인도에까지 갔습니다. 지도를 보면 인도 위 지역이 예루살렘입니다. 이 겨자씨에 비유되는 작은 복음이 씨 하나가 마침내 이 지구를 완전히 한바퀴 돌아서 다시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누가 겨자씨를 작다고 했습니까 겨자씨는 작은 것이 아니고 작게 보일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력이고 생명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종교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교사들이 한 사람을 놓고 그 마음속에 이 복음의 씨를 심어 주기만 하면 후에 어떤 모습으로 크고 자라서 어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겨자씨로 상징되는 복음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런가 하면 겨자씨는 작지만 그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이 겨자씨가 지니는 두 번째 특징입니다. 겨자씨는 작아도 그속에 신비스런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이 생명이 자꾸만 성장하게 하고 변화하게 하고 움직이게 만듭니다. 한국에 110년 전에 이 복음이 들어올 때는 단 두 사람이 인천항을 통해서 들어옴으로써 이 땅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때는 겨자씨 한알만큼이나 초라했습니다. 온갖 인습과 구태, 그리고 무속과 구시대적인 사고 속에서 매어 살던 우리 민족을 하나씩 개화시키면서 이 복음이 퍼져 나갔습니다. 당시는 불교와 유교의 거대한 기반이 이 땅의 정신적인 지주들을 모두 점령하고 있었고 삶의 수단과 정신적인 가치로 인정되고 있어서 기독교의 터전은 미미하기 그지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후 110년의 역사가 지난 오늘 이 땅에는 불교와 유교를 능가하는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어 4만 교회
1,200만 성도로 성장을 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복음에는 생염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이 단기간내에 기적같이 성장하게 하고 변화하게 하고 세상을 점령해 버립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니는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 속에는 다름 아닌 모질고 질긴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상징하는 겨자씨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워너메이커라는 사람은 교회 교육을 “생명 교육”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자신은 교회학교 교사직을 천직으로 알고 수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가 체신장관으로 입각하라는 통고를 받았을 때는 단호하게 두 가지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나라 일이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는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 줄 수 있도록 시간을 보장해 줄 것과, 주일에는 아무리 바빠도 교회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조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교육에는 이 같은 신비한 생명력 있는 힘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교회 교육에 대해서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평생 동안 수행하려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겨자씨는 처음에는 보잘것없고 아주 작지만 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면 새들과 들짐승들이 와서 깃들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겨자씨는 처음에는 보잘것이 없습니다. 아주 미미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면 그 품에서 짐승들이 모여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나무로 성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이것이 겨자씨가 지니는 비밀스러운 모습이자 장점입니다. 알고 보면 복음도 처음에는 이렇게 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주 미약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이 생명력을 발휘해서 커지고 확장되어 전파되면 이 세상을 놀랍도록 변화시키고 일신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회를 개혁시키고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니는 특징이고 위력이고 능력입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는 그냥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신학문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땅이 어둑하고 미개할 때 복음이 들어오면서 서구의 신학문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개화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했습니다. 또한 이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사고을 일으키게 해서 생활 습관을 변하게 만들었고 생활을 개조시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을 우상과 가난과 우매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올 당시는 양반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계급 때문입니다. 천민들은 교육의 기회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대접도 받지를 못해습니다. 그래서 천민들은 노예 아닌 노예로 살았고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상놈들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고 백정들도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변화입니다. 일종의 사회개혁이고 변혁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고 교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양반과 상놈이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개혁적인 사회 변화입니다. 이 같은 일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남으로써 우리 사회는 급기야 대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자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품에 안는 큰 그늘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준 좋은 예입니다. 교회 교육은 이렇게 중요한 지혜와 힘과 희망과 생명을 지닌 교육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직 시에 노 스승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담소하던 중 노 스승 한 분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좀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신앙생활을 시작해 보라.” 그 당부에 박 대통령께서 대답하기를 “그 점을 늘 아쉽게 생각합니다. 내가 어려서 주일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를 교육해 주었더라면 좋은 신앙인이 되었을 것인데 이제 와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교육하고 있는 아이들의 장래를 우리는 모릅니다. 보면 모두 코를 흘리고 장난이나 치는 철부지들입니다. 그 아이들이 커서 대통령이 되고 큰 사람이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보통의 생각들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어린 아이일 때 누구도 그 아이가 장차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를 가르쳤다는 교회학교 교사 역시 대충 아이들을 가르친 것이 분명합니다. 그 아이를 주목한다는 것은 그 교사에게 있어서는 무리였습니다. 그만큼 관심도 없었고 신앙 교육에 대한 절박한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충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주 중요한 사람에게 신앙 교육을 가르치지 못해서 우리는 두고 두고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는 너무 거짓된 지식이 많다. 그리고 망령된 말도 많다. 그뿐이 아니고 아주 무익한 변론도 많다. 그것들은 모두 믿음에서 떠난 말들이다. 그러니 너는 부디 이것들을 피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주 자상하고 세심한 권면입니다. 오늘날은 교회학교 교사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특히 거짓된 유혹이 많은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망령된 도덕도 많고 젊은이들의 정신을 혼돈시키는 풍조들로 꽉 차 있습니다. 모두 믿음과는 상관도 없는 세상의 풍조들입니다. 오늘은 청ㅇ소년들이 갈 곳이 없는 시대입니다. 마음 놓고 밖으로 내보낼 곳이 없습니다. 모두 세속적인 풍조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이 같은 풍조들 때문에 오늘의 젊은이들의 정신이 모두 피폐해지고 메말라지고 있어서 말초적인 자극만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젊은이들이 여기 저기서 유혹을 받고 이끌려서 탈선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청소년들이 당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타락적이고 퇴폐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중학생들을 보십시오. 보기에는 마냥 어리고 철 없이 보이지만 그 아이들이 벌써 임신을 해서 등교길에 아이를 낳고, 정신은 아직도 어린데 몸은 이미 어른이 다 되어 버렸다는 이 기현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한 번 예민하게 바라보십시오. 아직도 철 없이 뛰어노는 것 같지만 그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이미 어른들이 느끼고 있어야 할 이성적이고 성적인 이해와 예민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을 살아온 어른들의 생각으로 요즘의 아이들을 평가해서는 그 아이들과 대화조차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지금 가지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관심사나 마음속의 생각을 건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뒤떨어진 이해도를 가지고 무슨 청소년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은 이미 마음으로는 다 자란 아이들입니다. 알 만한 것은 다 보고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이 세상의 풍조와 정면으로 부딪치거나 도전받는 어떤 계기가 주어진다면 우리들이 상상도 못할 어느 지경으로 단순간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실제로 세속으로 빠져버리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지금 우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이 직책과 교육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오늘의 교회학교 교사들은 이 점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그 중요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사회는 거짓된 유혹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세상의 풍조들이 너무나 현란하게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젊은이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흔들림을 교회 교육이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 교사들은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에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사명이고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사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명쾌한 교훈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당시나 오늘이나 이 망령되고 허탄한 교리나 지식은 여전히 난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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