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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믿음 (벧전5:7-9)

본문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마음으로 되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고난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마 역사상 최고의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역사에 길이 기록될 만한 그런 고난입니다. 그 다음의 고난은 아무래도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씁입니다. 이 본문은 네로 황제 때 가장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던 그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쓰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소망의 서싱”이라고 하고 “격려의 서신”이라고도 부릅니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라.” 이 같은 고난을 가리켜서 공적인 고난이라고 합니다. 나 개인 때문이 아니고 예수 때문에 모두가 같이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 말고 생활에서 당하게 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고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고난은 공적인 고난보다도 훨씬 더 아프고, 당황하고, 고달픈, 고난일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울리고 아프게 하고 그럽니다. 지난 주간에 어떤 책을 보았는데 거기에 어떤 분의 수기가 발표되어 있었습니다. 평온하게 살아가는 집에 한참 커 가는 아들 둘이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진찰을 해보니까 신장이 모두 상했습니다. 열심히 치료를 했지만 나중에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어 신장을 모두 떼어 내 버리고 이식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누군가의 신장 하나를 제공받아야만 이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 마침 큰 아들이 동생을 위해서 자기의 콩팥 하나를 제공하겠다고 선뜻 나섰습니다. 그래서 조직을 맞추어 보니까 아주 잘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 아들이 동생을 위해서 신장을 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지금
둘째 아들의 신장 질환이 유전성 질환이라서 장차 큰 아들도 그 병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콩팥 하나를 떼낸 큰 아들이 병에 걸릴 때는 속수 무책입니다. 그리고 큰 아들이 신장을 이식한다 해도 그 수술이 100%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환경에서 고민을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심방을 하다 보면 별의별 어려움들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없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이 같은 고민을 동반한 고난스러운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본 어떤 영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제목은 “하이눈”이라는 영화입니다. 주연 배우가 허리에 권총을 차고 적진을 향하여 유유히 걸어 들어갑니다. 그때 총 한방이면 그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도 그는 유유히 걸어갑니다. 그때 그 모습이 관람객들을 매료시킵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멋진 모습입니까 그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걸어 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영화라서 그렇습니다. 감독이 그렇게 시켜서 그렇습니다. 만약 실제 상황이라고 하면 그가 그렇게 걸어갈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남의 고난 이야기를 들을 때는 별로 감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내 상황이라면 문제는 다릅니다. 그래서 그 곳에 눈물이 있고, 탄식이 있고, 고달픔이 있고,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을 보고 해석하는 시각이 대체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보는 시각이 있고, 또 하나는 신앙적으로 보고 해석을 하는 시각입니다. 아마 살아가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재수가 없어서 당하는 일로 쉽게 해석을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교통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재수가 없어서 당한 것입니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날은 재수가 없어서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강도를 만난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것은 재수가 없어서 다리가 부러진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한 그 고난은 더 무겁습니다. 더 아픔이 가중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 속에서 기도를 하는 한 그 기도의 차원은 원망의 기도 차원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얕은 판단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신앙인의 생각을 가지고 생각해야 하고, 신앙인은 신앙인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그런 일들은 모두 우연도 아니고, 부질없는 일도 아니고, 거기에 바로 깊고도 오묘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광야를 지나 여행을 합니다. 가다가 날이 어두워져 천막을 치고 시계가 없는 때라 닭을 천막 끈에 묶어 놓고 날이 새면 울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천막 속에서 등불을 켜 놓고 성경을 읽고 있는데 바람이 획 불어 와서 등불이 꺼졌습니다. 이 랍비가 할 수 없어서 성경을 덮고 잠을 잡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 오는데도 닭이 울지를 않습니다. 나귀도 기척이 없습니다. 일어나 보니까 맹수들이 닭도 물어가고 나귀도 물어 갔습니다. 이 랍비는 정말 재수 없는 밤이었다고 투덜대면서 날이 밝은 다음 주위를 살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네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들아가 보니까 온통 야단입니다. 간밤에 강도떼가 동네에 들어와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뺏고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 때 이 랍비가 무릎을 꿇고 불을 꺼지게 하시고, 닭은 물어 가게 하시고, 나귀도 물어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만일 등불이 켜져 있었거나, 닭과 나귀가 소리를 냈더라면 자신도 그날 영락없이 죽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랍비는 잃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 랍지는 잃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은 것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이 뭐냐 하면 어떤 여건 속에서도 그 속에 담겨있는 이 같은 은혜를 발견하는 힘입니다. 그런 힘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기도하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병이 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 병을 고쳐 주십시오.”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기도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기도해서 낫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깊이 생각하는 신앙인이라면 그 병 중에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달라집니다. “하나님 내가 앓아야 한다면 앓게 하시고, 회복되는 것이 좋으면 회복되게 하소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 이런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즉 우리가 아픔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디를 가는지 전혀 모르면서도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불평없이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아이는 부모의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부모의 능력만을 믿고 아무 의심없이 기쁨으로 따라만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왜 악이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 악을 없애 버리지 않고 왜 내버려 두시는지 우리는 그것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악 속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악이 사람들을 깨우치기도 하고 사람들을 사람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왜 전쟁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릅니다.
이 땅에 전쟁이 없었으면 얼마나 마음 놓고 살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처참했던 6,25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평화롭게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그 전쟁이 없었다면 오늘 이 땅은 벌써 공산화가 되어서 지금쯤 우리 모두는 김일성의 지배하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좀더 깊고 세련되게 되면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깊이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와 뜻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찬송가에 보면 “그 때는 알리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 왜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지 그 때는 알리라, 내가 왜 오늘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하는지 그 때는 알리라” 하는 찬송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왜 지금 외롭게 살아야 하고, 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지금은 모릅니다. 그리고 내 젊은 친구가 왜 세상을 일찍 떠나야 하는지 그것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다음 우리가 모두 주님 앞에 가면 그 때는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슈퍼 스타라는 종교 영화를 보면 죽은 가룟 유다의 혼이 구슬프게 울면서 노래를 합니다. 그 노래의 주제가 “왜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입니다. 이 물음은 주님께서 부활하신다는 계획을 왜 진작 말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는 물음입니다. 진작 말씀하셨더라면 내가 예수님을 배반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하고 원망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진작 자세한 스케줄을 얘기 하였더라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먹는 그런 못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무식한 것이 죄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을 보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라들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텐데 보면 스스로 똑똑한 체합니다. 그게 똑똑한 것입니까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에 가서 그때서야 유다처럼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원망을 하고 후회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때로 심각한 고독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고독 속에서 안절부절못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축복인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러간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사업이 망해야만 견딜 수 없이 고독해져서 그 고독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짐작이나 할 것입니까 알고 보면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여러분, 포항 제철을 한번 기회 되시면 가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쇠붙이를 녹인 용광로에서 시뻘건 쉿물이 물 흐르듯이 흘러 나옵니다. 이 쉿물이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약간 열이 식습니다. 그러면 육중한 쇠망치가 이쪽 저쪽을 사정 보지 않고 내리치기 시작합니다. 다시 불속으로 집어 넣어서 달굽니다. 그리고 꺼내다가 또 치고 또 다시 불 속에 넣었다 꺼내어 그 쇠 덩어리 속에 공기가 없어지고 이음새가 없어질 때까지 여러번 쇠뭉치로 칩니다. 우리는 그 기계가 무엇을 만들려고 쇠 덩어리를 그렇게 여러 번 달구어 내어 모질게 쳐 대는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왜 얻어 맞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궁금한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더 아프고 더 고독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이유를 밝히 알게 됩니다. 이 기계가 쇠 덩어리를 다 쳤다 싶으면 이번에는 공작 기계 속에 다 집어 넣고는 아주 육중한 무게를 지닌 기계가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꾹 눌러 냅니다. 그러면 기차 바퀴가 찍혀 나옵니다. 철로를 쉴 사이 없이 굴러 다니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 바퀴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입니다. 욥기서를 보면 욥이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 용광로 속에 온갖 녹슬고 부러지고 구부러져서 쓸모없는 잡동사니 쇠붙이들이 다 들어가서 녹은 다음에 모두 기차 바퀴로 당당하게 다시 태어나듯이 욥은 그런 이치를 알고 그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결론 짓겠습니다. 캄캄한 밤일수록 등불이 필요합니다. 가파른 언덕, 높은 고갯길일수록 든든한 지팡이가 필요한 법입니다. 시대가 세속화되고 험한 세상일수록 우리에게는 신앙의 안목이 더욱 필요합니다. 잔잔하던 생활 속에 어느 날 갑자기 풍랑이 일어아는 것이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 때 거세게 일어나는 풍랑만을 보면 기가 죽습니다. 주님보다 풍랑이 더 크게 보이는 한 세상이 겁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난 주일 아침에 주님을 높이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일찍이 고난 받으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힘있게 세상을 살아가도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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