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대장 (딤전1:1-20)
본문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예수님은 죄인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리, 죄인, 창녀, 부정한 사람, 간음한 여인, 이방인,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주 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낮은 출신이 라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 사실을 못 박아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 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 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 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 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마9:11-13)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실 최대의 일은 죄인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토록 예수님은 병든자와 죄인을 찾으셨을까요 바로 이들이 야말로 복음의 진리가 필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 나, 왜 예수님이 죄인을 기뻐하셨을까요 그것은 죄인들이야말로 하나님께 다가갈 마음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위대해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가 절실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병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그 계통의 의사가 무심하게 보 이질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비교적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 이 그렇게 감격스럽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실한 죄인들은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삭개오처럼, 간음한 여인처럼, 세리 마태 처럼 이들은 용서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금강산 여행 갔던 민영미 씨가 북한에 엿 세 동안 억류되 었다가 풀려났습니다. 북한에 억류되어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내 일이면 죽을 수도 있지, 영영 남편 얼굴, 아이들 얼굴 못 보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밥이 안 넘어가고 잠이 안 오는 겁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돌아 왔습니다. 평소에 불만이 많던 남편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고, 속썩이던 아이들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 러울 수 없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비교적 의로운 사람, 비교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 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 그렇게 감격스럽고 절실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다릅니다.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기도를 할 때는 머리를 무릎에 박게 됩니다. 교회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죄인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죄인이라서 멀리 하는게 아니예요. 죄인인 상태 그 자체를,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꼭 기억하실 일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주의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회개하 지 않는 죄인은 주님께 받아드려 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죄인을 기뻐하시는 까닭은, 새로운 영혼의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깊은 죄에서 돌아올 때 열리는 하늘 축제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능성이 막혀 있다면 주님이 기 뻐하시겠습니까 용서하는 죄인 때문에 하늘 축제를 벌리는데, 죄인이 회개할 마음을 아예 먹고 있지 않다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는 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복은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믿지 않는 불신자가 믿게 되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 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믿지 않는 불신자이기도 하지만, 오래 믿은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늘 깨어지 고, 실패하고, 추락하고 범죄 하는 신앙인의 회개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에 파티가 벌어지 기도 하지만, 믿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돌아올 때도 하늘에서는 파티가 벌어지는 겁니다. 죄인은 불신자이기도 하지만 신자인 나도 죄인입니다. 탕자는 불신자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오래 다니 고 있는 우리도 탕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의 사람들 이 죄인으로서 철저히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리 마태, 삭개오, 베드로, 십자가 한편 강도, 이들의 회개를 즉시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과거 전력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하 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에게 용서 받지 못할 큰 죄는 없다고 했지요.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죄인의 심정을 가진 자를 기뻐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죄인 의식입니다. 빚진자 의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 자신의 무기력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죄인 중 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눈물과 겸 손의 신앙인을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자 바울을 한 번 보세요. 바울처럼 철저하게 산 자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예수님께 헌신한 자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처럼 작은 죄에도 그렇게 민감한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바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가사이한 사실은 바울은 평생을 죄인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냥 죄인의식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내가 가장 죄질이 나쁜 죄인이다'라는 말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을 표현할 때,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라 고 소개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 헛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심정이 평생을 갔습니다. 바로 눈물의 고백입니다. "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2:8) 그러면, 어떻게 바울은 평생을 중죄인 의식으로 살았을까요 바 로 은총의식입니다, 빚진자 의식입니다. 자신의 말씀 실천을 수 준이 너무 너무 높기 때문에 절망하는 자였습니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나 자신에 대해 처절 하게 절망하면 절망할수록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약하다'라는 고백이 바울 서신의 전편 에 흐르고 있습니다. 일군은 '디아코노스'입니다. 종, 사역자, 다 이 말입니다. 일군이 든, 종이든, 사역자든, 직분자든, 이 감격의 눈물이 사라지면 끝장 입니다. 자기 의가, 자기 자랑이, 자기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면 망하는 겁니다. 오히려 눈물이 많아야 합니다. 머리를 무릎에 박 고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바리세인이 설마 세리 보다 못하겠습니까
첫째 아들이 설마 둘 째 아들 보다 못할리야 있나요 그러나 문제는 자세입니다. 뻣뻣 한 자세, 냉랭한 자세, 이게 문제예요. 바리세인이든
첫째 아들 이든 이 냉랭한 마음, 뻣뻣한 마음, 의로운 의식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 간절함도 없습니다. 매달림도 없습니다. 감격도 없고 감사에도 인색합니다. 눈물은 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니 이게 문제입니다. 뻣뻣해 지기 시작하면 조심하세요. 냉냉해 지기 시작 하면 위기임을 아십시오. 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의 차이를 주님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 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 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눅18:13-1
4'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의롭습니다. 너무 만족을 잘 합니다. 신앙의 기준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절절하지 못 해서 그렇습니다. 신앙의 기준을 높이라고 하면 그저 부담만 된 다고 합니다. 거꾸로이지요. 부담이 아니라, 감격이 되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데, 왜 이렇게 못사는 거야! 아 정말 부담스러워. 안 되는데 자꾸 이렇게 살라고 하니, 이 짐이 너무 무거워. 갈등이 너무 커!" 여기서 끝나면 율법입니다. 여기서 끝 나면 짐에 눌려 죽게 됩니다. 이 짐을 율법의 짐이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할 때의 짐은 바 로 이 율법의 짐입니다. 그러나 "아- 내가, 이렇게 한 순간도 말씀대로 잘 살지 못하는구나. 나는 역시 죄인이야. 내가 누구보다 큰 죄인이야. 정말 하나님이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오늘도 이렇게 철저하게 실패를 했으니 두손들고 주님께로 가야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는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이 렇게 고백하는 순간 은총의 강물은 넘치고, 감사의 폭포수는 쏟 아져 내리는 겁니다. 문제는 뭡니까 죄인의식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감격의식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죄인인 의로운 자가 있습니다. 의로운체 하지만 실상은 죄인입니다. 두 번째는 의로운 죄인이 있습니다. 죄인중에 괴수라고 하지만 실상은 참으로 의로운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모쪼록 의로운 죄인이 되어 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대장들입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니라" 이 고백이 우리의 하루 하루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격이 하나 도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박해자요, 포악자였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었어. 주님께서 살 리시고 주님께서 은혜로 선택해 주신거야!' 이 생각이 평생을 따라 다녔습니다. 복음을 위해 매를 맞고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 교회를 수 십개 개척을 하고, 복음을 로마로까지 끌고 가는 세계사적인 위대한 일을 하면서도 '나는 죄인이야'라고 말합니다. 모름지기 죄인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 죄인 의식이 감격을 불러 일으킵니다. 예수를 십년을 믿든, 백년을 믿든 이 죄인 의식, 감 격의식이 엷어지면 바리세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이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목 메인 심 정으로 주님께 두 손을 들고 나아갑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 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런 감격의 신앙의 늘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 서 손들고 옵니다. 기도 시간이면 머리를 무릎에 박고 뜨거운 눈 물이 흐르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 많은 곳에 은총의 강 물이 넘칩니다. 이런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약해 빠졌습니다. 또 넘어졌 습니다. 이 질그릇 위에 은총을 부어 주소서. 죄 많은 이 육신에 은총이 많게 하소서. '네 죄가 사하여 느니라" 이런 주님의 용 서와 은총을 주옵소서. "
그런데 극적으로 돌아 왔습니다. 평소에 불만이 많던 남편이 그렇게 소중할 수 없고, 속썩이던 아이들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 러울 수 없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비교적 의로운 사람, 비교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 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이 그렇게 감격스럽고 절실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다릅니다. 찬송을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기도를 할 때는 머리를 무릎에 박게 됩니다. 교회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죄인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죄인이라서 멀리 하는게 아니예요. 죄인인 상태 그 자체를,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꼭 기억하실 일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주의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회개하 지 않는 죄인은 주님께 받아드려 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죄인을 기뻐하시는 까닭은, 새로운 영혼의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깊은 죄에서 돌아올 때 열리는 하늘 축제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가능성이 막혀 있다면 주님이 기 뻐하시겠습니까 용서하는 죄인 때문에 하늘 축제를 벌리는데, 죄인이 회개할 마음을 아예 먹고 있지 않다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는 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복은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믿지 않는 불신자가 믿게 되는 기쁨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 입니다. 이
둘째 아들은 믿지 않는 불신자이기도 하지만, 오래 믿은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늘 깨어지 고, 실패하고, 추락하고 범죄 하는 신앙인의 회개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에 파티가 벌어지 기도 하지만, 믿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돌아올 때도 하늘에서는 파티가 벌어지는 겁니다. 죄인은 불신자이기도 하지만 신자인 나도 죄인입니다. 탕자는 불신자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오래 다니 고 있는 우리도 탕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의 사람들 이 죄인으로서 철저히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세리 마태, 삭개오, 베드로, 십자가 한편 강도, 이들의 회개를 즉시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과거 전력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하 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에게 용서 받지 못할 큰 죄는 없다고 했지요.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죄인의 심정을 가진 자를 기뻐하십니다. 무엇입니까 죄인 의식입니다. 빚진자 의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 자신의 무기력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겁니다. '나는 죄인 중 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눈물과 겸 손의 신앙인을 우리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자 바울을 한 번 보세요. 바울처럼 철저하게 산 자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예수님께 헌신한 자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처럼 작은 죄에도 그렇게 민감한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바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가사이한 사실은 바울은 평생을 죄인 의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냥 죄인의식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내가 가장 죄질이 나쁜 죄인이다'라는 말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을 표현할 때,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라 고 소개합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 헛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 이런 심정이 평생을 갔습니다. 바로 눈물의 고백입니다. "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엡:2:8) 그러면, 어떻게 바울은 평생을 중죄인 의식으로 살았을까요 바 로 은총의식입니다, 빚진자 의식입니다. 자신의 말씀 실천을 수 준이 너무 너무 높기 때문에 절망하는 자였습니다. '오호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러나 자신에 대해 처절 하게 절망하면 절망할수록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약하다'라는 고백이 바울 서신의 전편 에 흐르고 있습니다. 일군은 '디아코노스'입니다. 종, 사역자, 다 이 말입니다. 일군이 든, 종이든, 사역자든, 직분자든, 이 감격의 눈물이 사라지면 끝장 입니다. 자기 의가, 자기 자랑이, 자기 성과가, 보이기 시작하면 망하는 겁니다. 오히려 눈물이 많아야 합니다. 머리를 무릎에 박 고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바리세인이 설마 세리 보다 못하겠습니까
첫째 아들이 설마 둘 째 아들 보다 못할리야 있나요 그러나 문제는 자세입니다. 뻣뻣 한 자세, 냉랭한 자세, 이게 문제예요. 바리세인이든
첫째 아들 이든 이 냉랭한 마음, 뻣뻣한 마음, 의로운 의식 이게 문제입니다. 그러니 간절함도 없습니다. 매달림도 없습니다. 감격도 없고 감사에도 인색합니다. 눈물은 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니 이게 문제입니다. 뻣뻣해 지기 시작하면 조심하세요. 냉냉해 지기 시작 하면 위기임을 아십시오. 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의 차이를 주님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 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 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눅18:13-1
4'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의롭습니다. 너무 만족을 잘 합니다. 신앙의 기준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절절하지 못 해서 그렇습니다. 신앙의 기준을 높이라고 하면 그저 부담만 된 다고 합니다. 거꾸로이지요. 부담이 아니라, 감격이 되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데, 왜 이렇게 못사는 거야! 아 정말 부담스러워. 안 되는데 자꾸 이렇게 살라고 하니, 이 짐이 너무 무거워. 갈등이 너무 커!" 여기서 끝나면 율법입니다. 여기서 끝 나면 짐에 눌려 죽게 됩니다. 이 짐을 율법의 짐이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할 때의 짐은 바 로 이 율법의 짐입니다. 그러나 "아- 내가, 이렇게 한 순간도 말씀대로 잘 살지 못하는구나. 나는 역시 죄인이야. 내가 누구보다 큰 죄인이야. 정말 하나님이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오늘도 이렇게 철저하게 실패를 했으니 두손들고 주님께로 가야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는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이 렇게 고백하는 순간 은총의 강물은 넘치고, 감사의 폭포수는 쏟 아져 내리는 겁니다. 문제는 뭡니까 죄인의식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감격의식입니다.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죄인인 의로운 자가 있습니다. 의로운체 하지만 실상은 죄인입니다. 두 번째는 의로운 죄인이 있습니다. 죄인중에 괴수라고 하지만 실상은 참으로 의로운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모쪼록 의로운 죄인이 되어 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대장들입니다. "내가 죄인중에 괴수니라" 이 고백이 우리의 하루 하루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격이 하나 도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박해자요, 포악자였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었어. 주님께서 살 리시고 주님께서 은혜로 선택해 주신거야!' 이 생각이 평생을 따라 다녔습니다. 복음을 위해 매를 맞고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 교회를 수 십개 개척을 하고, 복음을 로마로까지 끌고 가는 세계사적인 위대한 일을 하면서도 '나는 죄인이야'라고 말합니다. 모름지기 죄인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 죄인 의식이 감격을 불러 일으킵니다. 예수를 십년을 믿든, 백년을 믿든 이 죄인 의식, 감 격의식이 엷어지면 바리세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이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목 메인 심 정으로 주님께 두 손을 들고 나아갑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 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런 감격의 신앙의 늘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 서 손들고 옵니다. 기도 시간이면 머리를 무릎에 박고 뜨거운 눈 물이 흐르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죄 많은 곳에 은총의 강 물이 넘칩니다. 이런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문) "주님,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약해 빠졌습니다. 또 넘어졌 습니다. 이 질그릇 위에 은총을 부어 주소서. 죄 많은 이 육신에 은총이 많게 하소서. '네 죄가 사하여 느니라" 이런 주님의 용 서와 은총을 주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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