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그것은 은혜다 (벧전4:1-11)
본문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마음대로 믿게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지나온 역사를 보면 어느 사회나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드시 수난이 있었고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박해의 종교이고 수난의 종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기독교는 빛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빛을 싫어합니다. 세상은 어두움의 세상이고 기독교는 빛의 종교이기 때문에 빛이 세상에 오면 어두움의 세상이 밝아지니까 세상이 그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의 생리상 박해가 따르고 수난이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깊은 마음에는 어두움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밝은 곳을 피하고 좀 어두컴컴한 곳을 찾아 다닙니다. 그래서 찻집이나 다방 같은 곳을 가면 한결같이 어두컴컴합니다. 보면 거기에 마음이 어두컴컴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컴컴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곤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밝고 환한 것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부하고 외면하고 핍박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바로 그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은 평화시대라서 그렇지 초장기에는 우리나라도 얼마나 수난이 많았습니까 그 수난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앞으로 언젠가 또한차례 이 땅에 박해가 온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를 고르기 위해서 고난의 때가 반드시 온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는 세 가지를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1.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벧전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다가 시련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길 것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참 묘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술 안 마셔도 미워합니다. 술 안 마시고 앉아 있으면 술맛 떨어진다고 미워합니다. 같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미워합니다. 같이 먹고 적당히 눈감고 하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또 같이 욕을 하지 않는다고 미워합니다. 욕할 때는 같이 욕을 해야 하는데 말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같이 욕 안한다고 미워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욕하고 핍박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또 13절을 보면 핍박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이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아프면 어머니는 아이 곁에서 밤잠을 못 자고 밤새워 지키고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때 어머니는 아이에게 사랑을 몽땅 퍼 부어 주십니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아이를 괴롭히면 혼을 내주십니다. 전폭적으로 나만 위해 주십니다. 그것이 부모 사랑입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들은 속으로 나도 아파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 모두 그런 생각을 한번씩은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심방을 하는 데 건강한 분들의 가정은 심방하지 않습니다.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가끔 왜 우리집은 오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건강한 가정에까지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고 사고가 발생하고 병난 가정을 우선해서 찾아갑니다. 더 큰 사고가 나고 더 큰 병이 나면 더 빨리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영이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세상에는 부질없는 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보증 잘못 서 주었다가 고난을 당합니다. 돈 빌려주고 받지 못해서 고난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 장기 두는 데 앉아서 훈수하다가 얻어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일로 고난을 당하면 떳떳할 것도 없고 보람 있을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러니까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당당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앉아서도 찬송을 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도 웃었다고 했습니다. 포리캅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주기도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그래서 신앙인이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할 대 부끄러워하거나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2. 과거를 청산했기 때문입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들이 예수를 모를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얼마나 우리들이 육신에 얽매여 살았습니까 그때는 생각하는 것이 고작 먹고 살아가는 것에 매여 살지 않았습니까 그때 취미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고작해서 먹고 마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때는 그것이 전 부인 양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로 이니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장이십니다. 우리의 대장 되시는 예수께서 고낭을 당하셨으면 우리들도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이 영광받으면 우리도 영광을 받고 그분이 고난을 받으면 우리도 고난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같은 운명입니다. 그분이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분이 천국에 갔으니 우리도 천국에 갑니다.
그렇다면 그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죽어서 천국에만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기 전에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복입니다. 자식은 잘 났어도 못 났어도 부모에게 영광이고 기쁨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났거나 못 났거나를 불문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또 우리들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실향민들을 보십시오. 명절이 되어도 갈 곳이 없습니다. 명절이 되어도 고향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향민들은 명절이 되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자체로도 복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갈 곳이 있는 사람은 평안하게 죽습니다. 우선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갈 곳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그 시간이 다가오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죽음이 임박해 오면 두려워하고 떨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하면 그 고난을 참고 인내하고 견디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한가지만 가지고도 우리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해도 그 고난을 마다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
3. 심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벧전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으나 살아 있으나 늘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성경을 보면 언젠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이 우리의 삶의 모습을 이실 직고해야 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적어도 속이거나 증거를 감추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그대로 이실 직고해야 합니다. 그때를 생각해서 오늘 고난이 와도 참고 쓴 잔을 감수하라는 말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심판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믿을 필요가 있을까 적당히 수양 정도로 믿으면 되지 고난까지 당하면서 고집스럽게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장차 우리 앞에 심판이 없다면 적당히 신앙생활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꼭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해야 하고 금기생활을 해야만 하는가, 좀 적당히 편안하게 삶을 즐기면서 예수를 믿으면 안 되는가”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적당히 편안하고 쉽게 수양삼아 신앙생활을 하면 안하는 사람보다는 나을테니까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게 그럭저럭 신앙생활하다가 죽으면 그만 아닙니까 아닌 말로 누가 천당에 갔다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저 인생도 즐기면서 수양도 하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다가 늙어 때가 되면 편안하게 죽어 묻히면 그만 아닙니까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 신앙이 분명하지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은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장차 다가올 심판을 이야기했고 천국을 말씀했습니다. 장차 우리 앞에 이 심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세가 달라집니다.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장차 우리 앞에 주어질 심판은 때로 신앙인들에게 상당한 힘을 주고 용기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체면으로 이기고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올 심판 때문에 오늘 목숨도 내놓고, 인생도 내놓고, 인내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장차 올 심판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기서 우리에게 몇 가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재림사상과 심판사상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는 싱앙생활에서 활력을 주는 요소입니다. 지금 한창 고난을 받는 사람에게는 재림사상이 큰 힘이 되고 지금 한창 방탕하는 사람에게는 장차 올 심판이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사상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윤리싱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사랑하는데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되면 정이 더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헤어질 때 보면 서로 부둥켜 안고 울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에게 죽음이 임박해지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원수도 그때는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열심히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왜 열심히 사랑하라고 했느냐 하면 허다한 허물이 감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참 오묘한 것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아이가 싸 놓은 기저귀를 들고 냄새를 맡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이고 고소하다” 그럽니다. 그 냄새가 고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코에는 단내가 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의붓어머니 같아 보십시오. 그 냄새가 고소하겠습니까 사랑은 때로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사랑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흉이 보이질 않습니다. 부부가 사랑할 때는 서로 흉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싸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이 일평생 동안 유지되고 오래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이 결혼을 하게 되면 한 달 정도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한 달을 일컬어서 허니문이라고 합니다. 달콤해서 눈먼 기간이 그 한 달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사랑이 식어지면서 눈이 뜨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상대방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연애할 때 보이지 않던 결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다투기 시작하고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제일 먼저 상대방의 결점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말씀하기를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또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 했습니다. 일하되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청기기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얼마나 엄숙한 사람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엄숙한 것입니다. 이 시대를 이렇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1.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벧전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각오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다가 시련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길 것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참 묘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술 안 마셔도 미워합니다. 술 안 마시고 앉아 있으면 술맛 떨어진다고 미워합니다. 같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미워합니다. 같이 먹고 적당히 눈감고 하지 않는다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또 같이 욕을 하지 않는다고 미워합니다. 욕할 때는 같이 욕을 해야 하는데 말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같이 욕 안한다고 미워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욕하고 핍박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또 13절을 보면 핍박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이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가 아프면 어머니는 아이 곁에서 밤잠을 못 자고 밤새워 지키고 앉아 있지 않습니까 그때 어머니는 아이에게 사랑을 몽땅 퍼 부어 주십니다.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이 아이를 괴롭히면 혼을 내주십니다. 전폭적으로 나만 위해 주십니다. 그것이 부모 사랑입니다. 그러면 다른 형제들은 속으로 나도 아파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 모두 그런 생각을 한번씩은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심방을 하는 데 건강한 분들의 가정은 심방하지 않습니다. 찾아가지도 않습니다. 가끔 왜 우리집은 오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건강한 가정에까지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고 사고가 발생하고 병난 가정을 우선해서 찾아갑니다. 더 큰 사고가 나고 더 큰 병이 나면 더 빨리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도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영이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세상에는 부질없는 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보증 잘못 서 주었다가 고난을 당합니다. 돈 빌려주고 받지 못해서 고난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 장기 두는 데 앉아서 훈수하다가 얻어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일로 고난을 당하면 떳떳할 것도 없고 보람 있을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러니까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당당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앉아서도 찬송을 했습니다. 스데반은 죽어 가면서도 웃었다고 했습니다. 포리캅은 불에 타 죽으면서도 주기도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얼마나 당당한 모습입니까 그래서 신앙인이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할 대 부끄러워하거나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2. 과거를 청산했기 때문입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고 했습니다. 옛날 우리들이 예수를 모를 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얼마나 우리들이 육신에 얽매여 살았습니까 그때는 생각하는 것이 고작 먹고 살아가는 것에 매여 살지 않았습니까 그때 취미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고작해서 먹고 마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때는 그것이 전 부인 양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로 이니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장이십니다. 우리의 대장 되시는 예수께서 고낭을 당하셨으면 우리들도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이 영광받으면 우리도 영광을 받고 그분이 고난을 받으면 우리도 고난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과 같은 운명입니다. 그분이 승리했으니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합니다. 그분이 천국에 갔으니 우리도 천국에 갑니다.
그렇다면 그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죽어서 천국에만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기 전에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복입니다. 자식은 잘 났어도 못 났어도 부모에게 영광이고 기쁨이고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났거나 못 났거나를 불문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또 우리들이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습니다. 실향민들을 보십시오. 명절이 되어도 갈 곳이 없습니다. 명절이 되어도 고향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향민들은 명절이 되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자체로도 복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갈 곳이 있는 사람은 평안하게 죽습니다. 우선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갈 곳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는 사람은 그 시간이 다가오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죽음이 임박해 오면 두려워하고 떨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하면 그 고난을 참고 인내하고 견디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를 알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한가지만 가지고도 우리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해도 그 고난을 마다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본문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
3. 심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벧전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으나 살아 있으나 늘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성경을 보면 언젠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이 우리의 삶의 모습을 이실 직고해야 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적어도 속이거나 증거를 감추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그대로 이실 직고해야 합니다. 그때를 생각해서 오늘 고난이 와도 참고 쓴 잔을 감수하라는 말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심판이 없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믿을 필요가 있을까 적당히 수양 정도로 믿으면 되지 고난까지 당하면서 고집스럽게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장차 우리 앞에 심판이 없다면 적당히 신앙생활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꼭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해야 하고 금기생활을 해야만 하는가, 좀 적당히 편안하게 삶을 즐기면서 예수를 믿으면 안 되는가”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적당히 편안하고 쉽게 수양삼아 신앙생활을 하면 안하는 사람보다는 나을테니까 좋은 것 아닙니까 그렇게 그럭저럭 신앙생활하다가 죽으면 그만 아닙니까 아닌 말로 누가 천당에 갔다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저 인생도 즐기면서 수양도 하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다가 늙어 때가 되면 편안하게 죽어 묻히면 그만 아닙니까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 신앙이 분명하지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은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장차 다가올 심판을 이야기했고 천국을 말씀했습니다. 장차 우리 앞에 이 심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세가 달라집니다.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장차 우리 앞에 주어질 심판은 때로 신앙인들에게 상당한 힘을 주고 용기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체면으로 이기고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올 심판 때문에 오늘 목숨도 내놓고, 인생도 내놓고, 인내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장차 올 심판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기서 우리에게 몇 가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재림사상과 심판사상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는 싱앙생활에서 활력을 주는 요소입니다. 지금 한창 고난을 받는 사람에게는 재림사상이 큰 힘이 되고 지금 한창 방탕하는 사람에게는 장차 올 심판이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사상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은 윤리싱앙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을 사랑하는데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되면 정이 더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헤어질 때 보면 서로 부둥켜 안고 울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에게 죽음이 임박해지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원수도 그때는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열심히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왜 열심히 사랑하라고 했느냐 하면 허다한 허물이 감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참 오묘한 것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 아이가 싸 놓은 기저귀를 들고 냄새를 맡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이고 고소하다” 그럽니다. 그 냄새가 고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코에는 단내가 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의붓어머니 같아 보십시오. 그 냄새가 고소하겠습니까 사랑은 때로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사랑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흉이 보이질 않습니다. 부부가 사랑할 때는 서로 흉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싸우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이 일평생 동안 유지되고 오래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이 결혼을 하게 되면 한 달 정도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한 달을 일컬어서 허니문이라고 합니다. 달콤해서 눈먼 기간이 그 한 달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사랑이 식어지면서 눈이 뜨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상대방의 허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연애할 때 보이지 않던 결점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다투기 시작하고 갈등이 시작됩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제일 먼저 상대방의 결점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말씀하기를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또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고 했습니다. 일하되 어떻게 하느냐 하면 “청기기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얼마나 엄숙한 사람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엄숙한 것입니다. 이 시대를 이렇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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