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그것은 축복이다 (벧전5:10-11)
본문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는 아픔과 고난과 어려움이 늘 동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고 피하려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굉장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난과 아픔은 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발전을 가져오게 하고 향상을 주기도 하고 지혜롭게 하기도 합니다. 어떤 생물학자가 산중에서 동물들을 관찰하는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를 하다 보니 큰 충격을 받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약한 동물들은 이 너무나 많이 맹수들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었습니다. 약한 동물들은 맹수들의 밥이었습니다. 그렇게 잡아 먹히는 모습을 보니까 약한 둥물들이 너무나 안스럽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생물학자가 한 지역을 택해서 그곳에 울타리를 쳐 놓고 그곳에 약한 동물들을 불러 모아서 안전하게 보호를 해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랬더니 힘이 약한 동물들이 울타리 안에서 마음 놓고 낮잠을 자기도 하고 놀기도 했습니다. 이 학자가 그 모습들을 보고는 아주 만족해 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지나다 보니까 동물들이 자꾸만 병이 들고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니까 병신들이 태어나고 그럽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안전하게 살라고 울타리까지 쳐 주었는데 자꾸만 병들고 병신들이 태어나니까 이상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연구해 본 결과 동물들을 울타리 안에 넣어 놓고 온실처럼 너무나 안전하게 기르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산속의 질서는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이 학자가 그것을 몰랐습니다. 병들고 약한 동물은 산속에서 살아 남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산속에 있는 동물은 모두 긴장하며 살기 때문에 건강하고 힘이 있고 튼튼합니다.
그런데 울타리를 쳐 놓으니까 이제는 도망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낮잠을 자고 병든 것도 잡아 먹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병든 짐승들이 태어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고 안일하게 살고 고생 없이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동물을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보호해주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요사이에는 아주 유약한 아이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사람은 적당히 고생도 해보아야 하고 훈련도 받아야 하고 연단도 받아야 강해집니다. 그래야 인간미가 생겨납니다. 온실에서 자라난 꽃은 가늘고 힘이 없고 향기가 없습니다. 향기 없는 꽃이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인간미가 있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정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살아가는 동안 고생도 해보고 강한 연단도 받아 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참다운 인정이 흘러나오고 깊은 인간미가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말하고 연단을 말하고 강한 훈련을 말합니다. 때로 신앙인들에게 고난이 찾아오는데 그 고난의 이유가 무어신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주시는가, 고난이 오면 왜 하나님은 금방 그 고난을 없애 주시지 않고 그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본문에서는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온전케 하시려고입니다. “온전”이라는 말은 “회복”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면 반드시 고통이 수반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보니까 뼈가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뼈를 바로잡습니다. 뼈를 바로잡는 데 굉장히 아팠습니다. 왜 아프냐 하면 바로잡히느라고 아픈 것입니다. 그 고통이 지나고 나니까 어긋났던 뼈가 바로잡혔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온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바로집히고 온전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이렇게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또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되니까 탈선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막 가고 있습니다. 누구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 상태가 말하자면 위골된 상태입니다. 뼈가 어긋난 상태입니다. 사람이 그 상태로 오래 있거나 그냥 놓아 두면 병신이 될 수도 있고 병이 악화되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되도록 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호소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타일러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사람들이 호소를 해도 듣지를 않으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나서서 바로잡으십니다. 하나님이 나서서 바로잡으실 때는 인정 사정이 없습니다. 그때에는 피눈물 나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았다는 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를 맞으면 사람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원위치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회복”이라고 하고 “온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고통이나 고난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기쁨이고 은혜입니다. 만일 그런 고난이 없어 보십시오. 그러면 막 나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망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이 인간에게 임하는 이유이고 또 고난이 주는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또 다른 차원의 고난이 따릅니다. 그것은 사람을 엄숙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라는 말입니다.
2. 굳게 하시려고입니다. 고난은 사람이나 식물을 굳데 합니다. 나무도 야산에 있는 나무와 바람이 많이 부는 산등성이에 서 있는 나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선 그 나무의 뿌리가 다릅니다. 바람을 많이 타는 나무는 뿌리가 단단합니다. 어지간한 바람이나 태풍쯤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강한 연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단단하고 굳습니다. 그렇지만 뒷산 조그만 동산에 서 있는 나무는 뿌리가 약합니다. 그래서 심한 바람이 불면 뿌리가 그대로 뽑혀 나갑니다. 평소에 연단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기지입니다. 평생 부모 품안에 자라온 자식은 강하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커서도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늘 어머니에게 물어서 결정합니다.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하면 문제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아내하고 상의해서 처리해야 하는데 사사건건 문제만 생기면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물어서 결정하곤 합니다. 이런 아들을 일컬어서 “마마보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은 이런 아들들이 많습니다. 아들에게 많은 용돈을 주어서 놀게하고 아들이 고생하는 것이 안스러워서 직장생활도 못하게 하고 평생 먹을 것은 있으니까 놀고 살아라 하고 과보호한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그런 생활에서 어떻게 강한 아들이 만드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독립심이 없고 유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강하게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된 훈련도 받고 수고스런 연단도 받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강조합니다. “이 고난은 너희로 굳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라.” 고난도 의미를 알고 당하면 훨씬 가볍습니다.
3. 강하게 하시려고입니다.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은 더 강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덜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나 의지가 남달리 아주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독립심 있게 강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 쇠도 보면 더 강하 쇠가 있고 덜 강한 쇠가 있습니다. 쇠도 연단하기에 따라서 그 강도가 달라집니다. 풀무불에 달구어서 쇠판에 놓고 여거 번 두들긴 다음에 찬물에 넣었다 꺼낸 쇠는 강철입니다. 찬물에 두 번 들어갔다 나온 쇠는 더 강합니다. 그래서 쇠의 용도에 따라서 찬물에 한 번 넣는 쇠가 있고, 두 번 넣는 쇠가 있고, 아주 여러 번 넣었다 꺼낸 쇠도 있습니다. 여러 번 풀무불에 들어가고 찬물에 들어갔다 나온 쇠는 특수 용도로 사용할 만큼 강한 쇠가 됩니다. 강철은 그만큼 연단을 많이 받아서 강해지고 단단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너희를 고난받게 하신 것은 너희로 강하게 하시려고 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이들을 강하게 하시는가 하면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지금 강하게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훈련은 사람으로 하여금 강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군대는 남자들을 아주 바람직하게 훈련하는 훈련장이라 생각됩니다. 철도 없고 응석만 부리던 아들들이 군에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신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집니다. 아주 의젓해집니다. 그것은 훈련을 받은 결과입니다. 이렇게 훈련받은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공비를 잡으려고 험한 산속을 헤매고 다니는 군인들이 집에서만 있었어 보십시오. 그런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훈련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세속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전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훈련시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들로는 이 점을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강하게 하시려고 함이라.” 이것이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4. 견고케 하시려고입니다. 본문을 보면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정착을 의미합니다. 오늘 고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내일 있다가 흩어질 사람들이 아닙니다. 견고하게 해서 영원히 복음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견고해지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터가 견고하지 않으면 자꾸만 무너집니다. 집도 무너지고 산도 무너지고 다리도 무너집니다. 이것은 신앙도 그렇고 인격도 그렇습니다. 기초가 약하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넘어지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아주 기초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마침내 아주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도 나를 떠나려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대답하기를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 마른 베드로가 그만큼 견고해졌다는 말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 참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연단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로마를 복음화해야 하기 때문에 미리 연단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이 왔을 때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는 우리들이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의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에는 그 결과가 모두 선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하나님께로서만 오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당시는 어렵지만 잠시만 견디면 참 좋은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모두 그 결과가 유익한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한 연단을 받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왜 그렇게 혹독하게 연단을 하십니까 그것은 그에게 좋은 결과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을 그렇게 연단하시지 않았다면 야곱은 마침내 사기꾼으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그냥 놔 두면 평생 사기나 치고 남을 속이는 일만 하다가 결국은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꼭 붙드시고 풀무불에 쇠붙이를 넣고 달구듯이 사정없이 연단해서 결과 야곱이 성자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때는 고되고 어려웠지만 그 결과 얼마나 선한 인간으로 태어납니까 그것이 연단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을 주시기도 하고 연단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단받지 않고 사기꾼으로 살래, 아니면 아프더라도 연단을 받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성자가 될래”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연단받는 것이 싫어서 평생을 사기꾼으로 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임의로 고난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아픔은 그것이 어떤 아픔이든지 말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까 고난은 어떤 고난이든 어렵습니다. 고난은 어렵기 때문에 약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고난은 의미가 없습니다. 매가 효험이 있는 것은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 아픔이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아픈 고난은 언제나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그 고난이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실수에 의해서 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잘못에 의해서 비롯된 고난이라도 잘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혼자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사실은 견디기 더 어려운 고난입니다. 또 내 잘못이 아니고 주위 사람들의 잘못으로 비롯된 고난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 사회가 복잡한 사회가 되다 보니 나 혼자만 잘한다고 안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나도 잘해야 하지만 이웃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도 다 잘해야 안전한 세상입니다. 이렇게 남으로부터 온 고난일지라도 잘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고난은 혼자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복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함께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훨씬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온 고난을 당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그것으 하나의 연단으로 알고 기쁨으로 견디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는 아주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두루 합해서 유익하게 하신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는 먼저 그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고난의 출처가 어디인가 무엇 때문에 이 고난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나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된 시험이면 바로잡는 기회로 삼고, 이웃으로부터 온 시험이라면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시험이라면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인새으이 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몇 해 지나다 보니까 동물들이 자꾸만 병이 들고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니까 병신들이 태어나고 그럽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안전하게 살라고 울타리까지 쳐 주었는데 자꾸만 병들고 병신들이 태어나니까 이상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연구해 본 결과 동물들을 울타리 안에 넣어 놓고 온실처럼 너무나 안전하게 기르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산속의 질서는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이 학자가 그것을 몰랐습니다. 병들고 약한 동물은 산속에서 살아 남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산속에 있는 동물은 모두 긴장하며 살기 때문에 건강하고 힘이 있고 튼튼합니다.
그런데 울타리를 쳐 놓으니까 이제는 도망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낮잠을 자고 병든 것도 잡아 먹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병든 짐승들이 태어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가고 안일하게 살고 고생 없이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식에게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동물을 울타리에 가두어 놓고 보호해주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요사이에는 아주 유약한 아이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사람은 적당히 고생도 해보아야 하고 훈련도 받아야 하고 연단도 받아야 강해집니다. 그래야 인간미가 생겨납니다. 온실에서 자라난 꽃은 가늘고 힘이 없고 향기가 없습니다. 향기 없는 꽃이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인간미가 있고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정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살아가는 동안 고생도 해보고 강한 연단도 받아 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참다운 인정이 흘러나오고 깊은 인간미가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고난을 말하고 연단을 말하고 강한 훈련을 말합니다. 때로 신앙인들에게 고난이 찾아오는데 그 고난의 이유가 무어신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주시는가, 고난이 오면 왜 하나님은 금방 그 고난을 없애 주시지 않고 그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본문에서는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온전케 하시려고입니다. “온전”이라는 말은 “회복”이라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바로잡는다”는 뜻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면 반드시 고통이 수반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보니까 뼈가 어긋났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뼈를 바로잡습니다. 뼈를 바로잡는 데 굉장히 아팠습니다. 왜 아프냐 하면 바로잡히느라고 아픈 것입니다. 그 고통이 지나고 나니까 어긋났던 뼈가 바로잡혔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온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바로집히고 온전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이렇게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또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되니까 탈선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막 가고 있습니다. 누구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 상태가 말하자면 위골된 상태입니다. 뼈가 어긋난 상태입니다. 사람이 그 상태로 오래 있거나 그냥 놓아 두면 병신이 될 수도 있고 병이 악화되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되도록 빨리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호소를 해도 듣지를 않습니다. 타일러도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사람들이 호소를 해도 듣지를 않으면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나서서 바로잡으십니다. 하나님이 나서서 바로잡으실 때는 인정 사정이 없습니다. 그때에는 피눈물 나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았다는 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를 맞으면 사람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원위치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회복”이라고 하고 “온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고통이나 고난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기쁨이고 은혜입니다. 만일 그런 고난이 없어 보십시오. 그러면 막 나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망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이 인간에게 임하는 이유이고 또 고난이 주는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또 다른 차원의 고난이 따릅니다. 그것은 사람을 엄숙하게 하기 위해서 오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이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라는 말입니다.
2. 굳게 하시려고입니다. 고난은 사람이나 식물을 굳데 합니다. 나무도 야산에 있는 나무와 바람이 많이 부는 산등성이에 서 있는 나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선 그 나무의 뿌리가 다릅니다. 바람을 많이 타는 나무는 뿌리가 단단합니다. 어지간한 바람이나 태풍쯤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강한 연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단단하고 굳습니다. 그렇지만 뒷산 조그만 동산에 서 있는 나무는 뿌리가 약합니다. 그래서 심한 바람이 불면 뿌리가 그대로 뽑혀 나갑니다. 평소에 연단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기지입니다. 평생 부모 품안에 자라온 자식은 강하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커서도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늘 어머니에게 물어서 결정합니다.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하면 문제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아내하고 상의해서 처리해야 하는데 사사건건 문제만 생기면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물어서 결정하곤 합니다. 이런 아들을 일컬어서 “마마보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은 이런 아들들이 많습니다. 아들에게 많은 용돈을 주어서 놀게하고 아들이 고생하는 것이 안스러워서 직장생활도 못하게 하고 평생 먹을 것은 있으니까 놀고 살아라 하고 과보호한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그런 생활에서 어떻게 강한 아들이 만드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독립심이 없고 유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강하게 길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된 훈련도 받고 수고스런 연단도 받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에서 고난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베드로는 강조합니다. “이 고난은 너희로 굳게 하시려고 주신 것이라.” 고난도 의미를 알고 당하면 훨씬 가볍습니다.
3. 강하게 하시려고입니다.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은 더 강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덜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온 환경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나 의지가 남달리 아주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려서부터 독립심 있게 강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 쇠도 보면 더 강하 쇠가 있고 덜 강한 쇠가 있습니다. 쇠도 연단하기에 따라서 그 강도가 달라집니다. 풀무불에 달구어서 쇠판에 놓고 여거 번 두들긴 다음에 찬물에 넣었다 꺼낸 쇠는 강철입니다. 찬물에 두 번 들어갔다 나온 쇠는 더 강합니다. 그래서 쇠의 용도에 따라서 찬물에 한 번 넣는 쇠가 있고, 두 번 넣는 쇠가 있고, 아주 여러 번 넣었다 꺼낸 쇠도 있습니다. 여러 번 풀무불에 들어가고 찬물에 들어갔다 나온 쇠는 특수 용도로 사용할 만큼 강한 쇠가 됩니다. 강철은 그만큼 연단을 많이 받아서 강해지고 단단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너희를 고난받게 하신 것은 너희로 강하게 하시려고 하신다고 했습니다. 왜 이들을 강하게 하시는가 하면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지금 강하게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훈련은 사람으로 하여금 강하게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군대는 남자들을 아주 바람직하게 훈련하는 훈련장이라 생각됩니다. 철도 없고 응석만 부리던 아들들이 군에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신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집니다. 아주 의젓해집니다. 그것은 훈련을 받은 결과입니다. 이렇게 훈련받은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공비를 잡으려고 험한 산속을 헤매고 다니는 군인들이 집에서만 있었어 보십시오. 그런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훈련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로마라고 하는 거대한 세속의 도시에 복음을 전하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전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강하게 훈련시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들로는 이 점을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강하게 하시려고 함이라.” 이것이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4. 견고케 하시려고입니다. 본문을 보면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정착을 의미합니다. 오늘 고난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내일 있다가 흩어질 사람들이 아닙니다. 견고하게 해서 영원히 복음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견고해지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일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터가 견고하지 않으면 자꾸만 무너집니다. 집도 무너지고 산도 무너지고 다리도 무너집니다. 이것은 신앙도 그렇고 인격도 그렇습니다. 기초가 약하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넘어지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아주 기초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마침내 아주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도 나를 떠나려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대답하기를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계시매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하고 대답합니다. 그 마른 베드로가 그만큼 견고해졌다는 말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 참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연단이라고 했습니다. 장차 로마를 복음화해야 하기 때문에 미리 연단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험이 왔을 때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는 우리들이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의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에는 그 결과가 모두 선하고 좋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하나님께로서만 오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당시는 어렵지만 잠시만 견디면 참 좋은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모두 그 결과가 유익한 것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한 연단을 받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을 왜 그렇게 혹독하게 연단을 하십니까 그것은 그에게 좋은 결과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을 그렇게 연단하시지 않았다면 야곱은 마침내 사기꾼으로 일생을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그냥 놔 두면 평생 사기나 치고 남을 속이는 일만 하다가 결국은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꼭 붙드시고 풀무불에 쇠붙이를 넣고 달구듯이 사정없이 연단해서 결과 야곱이 성자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때는 고되고 어려웠지만 그 결과 얼마나 선한 인간으로 태어납니까 그것이 연단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을 주시기도 하고 연단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단받지 않고 사기꾼으로 살래, 아니면 아프더라도 연단을 받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성자가 될래” 하고 묻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연단받는 것이 싫어서 평생을 사기꾼으로 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임의로 고난을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아픔은 그것이 어떤 아픔이든지 말할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까 고난은 어떤 고난이든 어렵습니다. 고난은 어렵기 때문에 약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없는 고난은 의미가 없습니다. 매가 효험이 있는 것은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픔이 사람을 만듭니다. 그 아픔이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그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렇게 아픈 고난은 언제나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그 고난이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실수에 의해서 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잘못에 의해서 비롯된 고난이라도 잘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혼자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사실은 견디기 더 어려운 고난입니다. 또 내 잘못이 아니고 주위 사람들의 잘못으로 비롯된 고난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 사회가 복잡한 사회가 되다 보니 나 혼자만 잘한다고 안전한 세상이 아닙니다. 나도 잘해야 하지만 이웃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도 다 잘해야 안전한 세상입니다. 이렇게 남으로부터 온 고난일지라도 잘 견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고난은 혼자 당하는 고난보다 훨씬 극복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함께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에 훨씬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온 고난을 당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그것으 하나의 연단으로 알고 기쁨으로 견디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는 아주 좋은 결과가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두루 합해서 유익하게 하신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는 먼저 그 고난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고난의 출처가 어디인가 무엇 때문에 이 고난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나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된 시험이면 바로잡는 기회로 삼고, 이웃으로부터 온 시험이라면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시험이라면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인새으이 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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