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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축복들 (벧전3:5)

본문

주의 백성들은 가끔 일손을 멈출 때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며 오늘 우리가 누리는 축복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건강과 그에 따른 큰복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에게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맛보는 기능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걸을 수 있고, 잠잘 수 있으며, 이것 저것 가진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매일 양식을 먹고살며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싶어집니다.(더욱 장애인들에게 대한 사랑을 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특권을 주셨다. 유대인들은 편지를 쓸 때,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많은 시편들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고 싶을 때에는 그런 시편들을 펴놓고 자신의 찬송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보이신 모든 선하신 축복들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리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축복들을 받은 것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 덕분이라고 생각하면 인생살이의 굴곡을 지나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친절을 다 찬양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감사를 생략하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머니들은 부엌에서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해 음식을 장만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가끔:엄마, 이것 맛 하나도 없어, 안 먹을래!“ 라고 말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이와 비슷하게 대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큰복들도 당연시합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놓고 찬양을 드리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한편,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로써 그의 서신들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후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거듭나게 하는 복을 주십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그들의 서신 초두에서 ‘그리스도 안에’있는 영적 축복들을 첨언해 줍니다.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해 주셨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애초의 출생과는 다른 탄생입니다. 어머니가 되어 보았거나 산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목격해 본 사람들은 출생의 신비를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들은 누구나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불순종에 감염된 자들입니다. 반면, 거듭나는 것은 전혀 다른 형태의 출생입니다. 요한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은 어느 날 니고데모라는 한 종교 지도자에게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셨습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중생이 필수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옛 삶은 죄에 물든 생(生)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려면 새로운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자연적인 출생은 죄 중에서의 출생이며 죄악 속에서 형성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옛 본성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진정으로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영적 축복들을 체험하려면 우리들의 죄악된 옛 생명을 거두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이런 중생의 필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직도 그들은 죄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더 열심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교적 활동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으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네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라는 인간 존재가 완전히 바뀌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적인 변화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죄를 철저히 씻는 길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완전히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 신생에 대해 베드로는 그의 서두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거듭난 자들입니다! 이 중생은 하나님의 크나큰 긍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듭나는 일은 누구든지 자신의 힘이나 공로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려고 무던히 힘씁니다. 또한 좋은 일들을 하면 하나님이 잘 보아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약점이나 잘못들을 덮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하늘에 닿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긍휼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악 됨을 인정하고 주님께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떠나고 싶다고 아뢸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갈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이렇게 믿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거듭나는 중생의 놀라운 축복들을 체험하면 진실로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깨닫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산 소망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들이 거듭나면 “산 소망”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들은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모든 일이 잘 되겠지요.”라는 희망을 자주 표현합니다. 물론 우리들은 그런 일이 소망대로 이루어질지 확실히 모르지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그렇게 희미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성취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히6:19)한 것이라고 서술하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하셨다고 한 말의 이미는 우리들이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닻이 대양을 횡단하는 큰 배를 단단히 붙잡고 떠내러 가지 않도록 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신생은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거두어질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소망이라는 어휘는 언제나 보증을 뜻했습니다. 그래서 소망하는 자는 자신이 얻기로 보증 받은 것을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산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획득한 것입니다. 아무도 이 소망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격량속에서 하나님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닻줄은 심판 날에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산 소망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출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에 베드로가 처했던 소망 없던 상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지만 가장 어두운 순간에 주님을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는 이른 아침의 적막을 깨고 귀에 쟁쟁히 울리는 닭울음 소리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통곡하였습니다. 그는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가망이 전혀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을 때, 베드로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생겼습니까! 그는 용서받고 새로워졌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했을 때 베드로의 이름이 특별히 언급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이 없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신 산 구주께서 가져다 준 산 소망을 가진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럼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자문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요”(고전15:17).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어찌나 자주 반복해서 강조했던지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서로 다른 존재로 생각해서 결혼한 한 쌍의 신들이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행17:18참조) (행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 나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계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은 정녕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를 위해서 하늘에서 하나님께 중보 사역을 하십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인 터어키 북부 지역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같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한한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산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새로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출생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하며 “하늘에 간직”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이라는 물질적인 유산을 받았습니다. 이 땅을 가리켜 약속의 땅이라고 부릅니다.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비옥한 가나안 땅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장 큰 축복을 내리셨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땅은 유대 백성들이 죄악된 길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 약속의 땅은 사악한 셀류커스 통치자인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는 온 나라를 짓밟고 성전에서 돼지들을 제물로 바치는 더러운 짓을 자행하였습니다. 또한 이방의 헬라 제국이 휩쓸고 간 후에 로마인들이 온갖 잡신들을 유입시킴으로써 약속의 땅은 또다시 오염되었습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은 영원히 근절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유산에 대해서 말한 것은 무엇일까요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에 의하면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거듭난 신자들을 총칭합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이 받는 유산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이 유산은 ‘그리스도’ 안에 속함으로써 받게 되는 것이므로 사람의 몸처럼 시간과 함께 스러지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천국이란 죄로 물들지 않는 곳이며 하나님이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유산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므로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풍성한 유산을 상속할 자들로 태어난 성도들 가운데 궁핍한 삶을 살다가 죽은 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유산은 세상의 사건들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성도의 유산이 하나님의 신령하신 능력과 지혜와 사랑의 보호를 받는 ‘하늘에 간직’된 것이기 때문이다”(존 브라운) 17세기의 레이톤(Leighton)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도의 유산이 있는 곳은 풍요하고 유쾌한 나라이다. 그 곳은 모든 침입으로부터 벗어난 안식과 평화의 유일한 땅이다. 그 곳은 폐허가 없고, 아름다움이 지워지지 않으며, 전쟁이 없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지도 않는다. 성도의 유산은 결코 썩거나 더럽혀지지 않으므로 사기나 폭력에 의해 빼앗길 수도 없다.” 끝으로 베드로는 “너희를 위하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주신 것을 말하다가 갑자기 ‘우리를 위하여’하나님이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신생(新生)이 갖는 개인적인 성격을 다시 강조해 줍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축복 하나님은 거듭난 우리들에게 산 소망과 영원한 유산을 주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5절)입게 합니다. ‘보호를 받는다’는 말은 ‘안전하게 지켜진다’ 또는 ‘잘 지켜 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종종 군사적인 문 건에서도 사용됩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서 이와 유사한 문장으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평선 너머에서 넘실대는 위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악한 자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들을 막아 주는 방패와 같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3절)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악으로부터 막아 주는 방패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우리 주(主)와 구주로 믿을 때에 주님은 믿음에 의하여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주님의 임재와 보호를 날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5절)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 지상에서 우리의 유산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산의 충만한 실체는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구원의 유익과 보호와 확신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구원의 온전한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큰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은 만물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입니다. 우리들은 그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구속이 지닌 모든 축복을 완전히 소유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망은 과거에 닻을 내리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우리의 소망은 현재에까지 뻗쳐 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우리들의 소망은 미래에 완성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 때문이다!” (에드문드 클라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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