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울 자리도 없이 (눅2:1-7)
본문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형용할 수 없는 우주적인 신비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사건이고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세계가 연합된 사건이고 또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되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데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순전히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목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너무나 높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거룩합니다. 인간이 그곳까지 접근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한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려고 스스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이치를 표현하기를 “인간은 죄인이고 그 자리가 너무 낮아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에게로 찾아오셨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고 복음의 핵심이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이고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2. 역사를 바꾸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부터 이 세상의 역사는 뒤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역사를 BC라고들 말하는데 이것이 기원전의 역사입니다.
B.C라는 말은 "Before Christ"인데 “예수 이전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원전의 역사는 모두 인간의 역사이고, 구세대의 역사이고, 원시적인 역사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A. D., 즉 "Anno Domini"라는 역사로 바뀌었습니다. 이 말은 “새 역사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이후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이 세상의 모든 역사의 초점은 예수에게 맞추어집니다. 모든 문화나 예술, 음악이나 미술이 예수가 중심이 되었고 예수를 묘사하고 찬양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이 세상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은 “세계인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만 해도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라는 한 종족의 하나님으로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그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소개되었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인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소개받아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얼마나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학수 고대하고 기다렸던 메시야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예수님이 오시기를 얼마나 학수 고대하면서 기다렸습니까 로마의 압제 속에서 얼마나 탄식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고대했습니까 이 민족으로부터 압제당하는 설움은 우리 민족이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메시야 오심을 고대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랬으면 오신 메시아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의 오심은 구약성경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예수의 탄생 예언입니다. 이사야가 이미 탄생 700년 전에 이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예언도 아주 분명하고 자세하게 하였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보다 더 분명한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예언된 그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환영할 일입니다. 마땅히 환영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땅히 환영할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 주신 사랑 가운데서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무”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인카네이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친히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고 표현하였고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극난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에는 이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셨으면 사람들은 마땅히 오신 예수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의 오심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영광이고 승리”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나라, 그 민족 속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얼마나 영광된 일입니까 그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그 민족으로서는 자랑거리이고 황홀한 영광된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주인공이 됨을 의미합니다. 마땅히 환영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예수가 그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을 했습니까 정말로 그의 오심을 축제 속에서 축하하고 맞이하고 영접했습니까 영접은 고사하고 “그는 마구간으로”밀려났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관에 누을 자리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편안히 누울 자리도 없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에게 인정을 베푸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가운데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시는데 그렇게 오셨습니다. 영접은커녕 냉대 속에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심을 아무도 모르게” 오셨습니다. 이미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700년 전부터 예언되어 사람들이 기다렸지만 막상 그가 오셨을 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조용히 오셨습니다. 인간의 무성의 속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라는 동안 내내 무시를 당하면서”자랐습니다. 당시 가장 천한 직업은 어부였고 목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서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빈정댔습니다. 그 말은 상당히 무시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청소년 시절 동안 상당한 갈등 속에서 자랐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됩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얼마나 갈들이 많았겠습니까 몸은 이 땅에 존재하고 관심과 마음은 저 하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구 하나 깊은 대화를 나눌 만한 대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고민이 많고 생각할 일이 많으면 산을 찾는 습관이 있습니다. 산은 그런 사람에게는 가장 친근한 벗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생활에 아주 익숙해졌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자주 산을 오르시던 그 습관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습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성장한 후에 사역할 때도 온갖 방해와 비난과 질시와 이단자로 몰리는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찾아와 환영하고 영접하고 기뻐해야 할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고발하고 이단자로 몰아 결국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 고집스런 백성들은 지금 21세기를 앞둔 현시점에도 예수를 여전히 메시아로 보지 않고 이단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400만 명 가운데 0.1%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밖에서 믿고 이주해 들어온 디아스포라들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도 기독교를 유사 종교로 돌려놓고 예수를 여전히 이단자로 규졍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 그 민족, 그 백성들이 망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왜 이 같은 오류를 범했습니까 거기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몰이해” 때문입니다. 편견과 독선과 고집스런 몰이해 때문입니다.
이미 예언자들을 통해서 수백 번씩 예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집과 편견이 그 같은 오류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서 발견되기 쉬운 이 편견과 고집은 때로 신앙의 안목을 흐리게 하고 눈을 가리울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독선을 부리게 되고 편견을 갖게 되어 문제를 어렵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득권” 때문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그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입니다. 그리고 기득권이 대단한 고소득층이었고 이미 자리를 확보한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그같이 안정된 기득권을 빼앗기고 상실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 문맥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어렴풋이나마 알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는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하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고 그 내용이 메시아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내용이 서기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득권자들이라고 해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역시 예수에게서 그런 특별한 권위를 느꼈을 것이고 남다른 신비스러움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예수를 적으로 몰아 거세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시 불치병인 앉은뱅이, 소경,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3대 병자들을 고치는 사람을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로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나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나 또한 당시 하늘이 내린 천병으로 인정하고 있던 문둥병자를 고치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병자들을 고치는 사람을 메시아라고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병자들을 아주 쉽게 고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미 죽은 지 3일이 지난 사람도 완전하게 살려 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에게 몰려 있었고 그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느낌을 그들이라고 해서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더 깊게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한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고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득권자들로서는 새로 부각되는 인물이라든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들 공동의 적입니다. 빨리 그를 제거해야 내가 안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차 같은 입장에서 공동전선을 펴서 예수를 제거하는 데 같은 보조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 기득권자들이 문제입니다. 어느 사회나 문제되는 사람은 이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개혁을 하려 해도 가장 저항하는 무리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이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요지부동합니다. 이들이 거세게 저항을 합니다. 이들이 개혁의 흐름을 앞장서서 가로막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끝까지 방해한 일에는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결정적인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사람들이 기다림이 없어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입니다. 사람들이 매일같이 성경을 옆에 끼고 살았고 그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고 손으로 매일같이 필경을 했지만 그들의 관심은 예언 사항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뇌물에 관심을 가졌고 재물에 관심ㅇ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막상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났음에도 그들이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 안목이 그만큼 둔감해졌고 무디어졌고 느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는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무디어짐은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수치이고 불행입니다. 신앙인이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신앙인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였다면 자신의 미래의 운명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종말을 영적인 안목으로 충분히 느낄 수가 있어서 사전에 얼마든지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준비 없이 그날을 맞는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에게는 가장 큰 불행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기다림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의 나심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그 사실을 알고 찾아와 경배한 사람은 멀리 사는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경배를 했습니까 그것은 기다림 때문입니다. 이 박사들이 메시아가 오시기를 얼마나 고대하면서 기다렸습니까 그의 오심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자기 할 일에 열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의 탄생을 천사들이 찾아와 고지해 주어 찾아가 경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신앙생활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대여섯 걸음만 걸어가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날 수 있었을 여관집 주인도 몰랐던 예수의 태어나심을 그 멀리 동방에서 알고 찾아와 경배하였다는 것은 설명을 해도 다할 수 없는 신비한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탄 때만 되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 때의 모습입니다. 성탄은 예수의 초림을 말합니다. 성탄은 예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심을 말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오셨습니다. 말 그대로 도적같이 오셨습니다. 700년 동안 오시리라고 예언되었건만 정작 그가 오셨을 때는 어쩌면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오실 수가 있습니까 한편 신기하기도 하고 또한편으로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있을 주님의 재림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때도 이 날과 똑같은 현상이 이 땅에 벌어질 것입니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때에 예수님은 다시 도적같이 이 땅에 재림해 오실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그날 우리 자신들이 그 한심한 주인공이 되어 방황하지나 않을까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의 최대 관심은 이미 오신 예수를 마음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동방의 박사들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 경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 순전히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목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너무나 높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거룩합니다. 인간이 그곳까지 접근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한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려고 스스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 같은 이치를 표현하기를 “인간은 죄인이고 그 자리가 너무 낮아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에게로 찾아오셨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고 복음의 핵심이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심이고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2. 역사를 바꾸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부터 이 세상의 역사는 뒤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역사를 BC라고들 말하는데 이것이 기원전의 역사입니다.
B.C라는 말은 "Before Christ"인데 “예수 이전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원전의 역사는 모두 인간의 역사이고, 구세대의 역사이고, 원시적인 역사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A. D., 즉 "Anno Domini"라는 역사로 바뀌었습니다. 이 말은 “새 역사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이후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이 세상의 모든 역사의 초점은 예수에게 맞추어집니다. 모든 문화나 예술, 음악이나 미술이 예수가 중심이 되었고 예수를 묘사하고 찬양하는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이 세상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3. 그리고 예수님은 “세계인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만 해도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라는 한 종족의 하나님으로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그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소개되었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전세계인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소개받아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얼마나 숭고한 뜻을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학수 고대하고 기다렸던 메시야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예수님이 오시기를 얼마나 학수 고대하면서 기다렸습니까 로마의 압제 속에서 얼마나 탄식하면서 그분의 오심을 고대했습니까 이 민족으로부터 압제당하는 설움은 우리 민족이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메시야 오심을 고대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랬으면 오신 메시아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의 오심은 구약성경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예수의 탄생 예언입니다. 이사야가 이미 탄생 700년 전에 이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예언도 아주 분명하고 자세하게 하였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보다 더 분명한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예언된 그 예수가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환영할 일입니다. 마땅히 환영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땅히 환영할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 주신 사랑 가운데서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무”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인카네이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친히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고 표현하였고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극난한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에는 이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셨으면 사람들은 마땅히 오신 예수를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의 오심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영광이고 승리”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나라, 그 민족 속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얼마나 영광된 일입니까 그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그 민족으로서는 자랑거리이고 황홀한 영광된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주인공이 됨을 의미합니다. 마땅히 환영했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예수가 그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을 했습니까 정말로 그의 오심을 축제 속에서 축하하고 맞이하고 영접했습니까 영접은 고사하고 “그는 마구간으로”밀려났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관에 누을 자리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편안히 누울 자리도 없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에게 인정을 베푸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가운데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태어나시는데 그렇게 오셨습니다. 영접은커녕 냉대 속에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심을 아무도 모르게” 오셨습니다. 이미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700년 전부터 예언되어 사람들이 기다렸지만 막상 그가 오셨을 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조용히 오셨습니다. 인간의 무성의 속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라는 동안 내내 무시를 당하면서”자랐습니다. 당시 가장 천한 직업은 어부였고 목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서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빈정댔습니다. 그 말은 상당히 무시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청소년 시절 동안 상당한 갈등 속에서 자랐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됩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얼마나 갈들이 많았겠습니까 몸은 이 땅에 존재하고 관심과 마음은 저 하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누구 하나 깊은 대화를 나눌 만한 대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고민이 많고 생각할 일이 많으면 산을 찾는 습관이 있습니다. 산은 그런 사람에게는 가장 친근한 벗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생활에 아주 익숙해졌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자주 산을 오르시던 그 습관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습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성장한 후에 사역할 때도 온갖 방해와 비난과 질시와 이단자로 몰리는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찾아와 환영하고 영접하고 기뻐해야 할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서 고발하고 이단자로 몰아 결국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그 고집스런 백성들은 지금 21세기를 앞둔 현시점에도 예수를 여전히 메시아로 보지 않고 이단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400만 명 가운데 0.1%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밖에서 믿고 이주해 들어온 디아스포라들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도 기독교를 유사 종교로 돌려놓고 예수를 여전히 이단자로 규졍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 그 민족, 그 백성들이 망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왜 이 같은 오류를 범했습니까 거기에도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몰이해” 때문입니다. 편견과 독선과 고집스런 몰이해 때문입니다.
이미 예언자들을 통해서 수백 번씩 예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고집과 편견이 그 같은 오류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서 발견되기 쉬운 이 편견과 고집은 때로 신앙의 안목을 흐리게 하고 눈을 가리울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 독선을 부리게 되고 편견을 갖게 되어 문제를 어렵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득권” 때문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그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입니다. 그리고 기득권이 대단한 고소득층이었고 이미 자리를 확보한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그같이 안정된 기득권을 빼앗기고 상실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 문맥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어렴풋이나마 알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이는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하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고 그 내용이 메시아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내용이 서기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득권자들이라고 해서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역시 예수에게서 그런 특별한 권위를 느꼈을 것이고 남다른 신비스러움을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더욱 예수를 적으로 몰아 거세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시 불치병인 앉은뱅이, 소경, 문둥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3대 병자들을 고치는 사람을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로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나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나 또한 당시 하늘이 내린 천병으로 인정하고 있던 문둥병자를 고치는 일은 사람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병자들을 고치는 사람을 메시아라고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병자들을 아주 쉽게 고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미 죽은 지 3일이 지난 사람도 완전하게 살려 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에게 몰려 있었고 그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느낌을 그들이라고 해서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더 깊게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애를 썼고 그래서 결국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한 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기득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고 위협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득권자들로서는 새로 부각되는 인물이라든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들 공동의 적입니다. 빨리 그를 제거해야 내가 안전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차 같은 입장에서 공동전선을 펴서 예수를 제거하는 데 같은 보조를 취했던 것입니다. 이 기득권자들이 문제입니다. 어느 사회나 문제되는 사람은 이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개혁을 하려 해도 가장 저항하는 무리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이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들이 요지부동합니다. 이들이 거세게 저항을 합니다. 이들이 개혁의 흐름을 앞장서서 가로막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끝까지 방해한 일에는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결정적인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사람들이 기다림이 없어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입니다. 사람들이 매일같이 성경을 옆에 끼고 살았고 그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고 손으로 매일같이 필경을 했지만 그들의 관심은 예언 사항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뇌물에 관심을 가졌고 재물에 관심ㅇ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막상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났음에도 그들이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 안목이 그만큼 둔감해졌고 무디어졌고 느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는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무디어짐은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수치이고 불행입니다. 신앙인이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신앙인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였다면 자신의 미래의 운명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종말을 영적인 안목으로 충분히 느낄 수가 있어서 사전에 얼마든지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준비 없이 그날을 맞는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에게는 가장 큰 불행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기다림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의 나심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그 사실을 알고 찾아와 경배한 사람은 멀리 사는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경배를 했습니까 그것은 기다림 때문입니다. 이 박사들이 메시아가 오시기를 얼마나 고대하면서 기다렸습니까 그의 오심을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자기 할 일에 열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의 탄생을 천사들이 찾아와 고지해 주어 찾아가 경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이 신앙생활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대여섯 걸음만 걸어가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날 수 있었을 여관집 주인도 몰랐던 예수의 태어나심을 그 멀리 동방에서 알고 찾아와 경배하였다는 것은 설명을 해도 다할 수 없는 신비한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탄 때만 되면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 때의 모습입니다. 성탄은 예수의 초림을 말합니다. 성탄은 예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심을 말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오셨습니다. 말 그대로 도적같이 오셨습니다. 700년 동안 오시리라고 예언되었건만 정작 그가 오셨을 때는 어쩌면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오실 수가 있습니까 한편 신기하기도 하고 또한편으로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있을 주님의 재림 때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때도 이 날과 똑같은 현상이 이 땅에 벌어질 것입니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때에 예수님은 다시 도적같이 이 땅에 재림해 오실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두려운 일입니다. 그날 우리 자신들이 그 한심한 주인공이 되어 방황하지나 않을까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의 최대 관심은 이미 오신 예수를 마음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생활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동방의 박사들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 경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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