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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 (벧전1:3-9)

본문

강찰 왕 카네기의 사무실 벽 한가운데에는 그림 하나가 그의 일생 동안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의 내용은 커다란 나룻배 하나와 배를 젓는 노가 썰물에 밀려서 모래사장에 던져져 있는 것으로 무척 벌망스럽게 보이는 거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이것이 카네기의 평생 생활 신조였습니다. 그는 오늘 절망스러운 때에도 밀물 때를 생각하며 이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허파에는 산소가 필요하듯이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소망이 있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빵이 아닌 소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별명을 붙인다면 “소망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기 위해서 본 서신이 기록되었습니다. 서신을 기록하면서 저자는 문안 인사에 이어서 바로 송영 부분인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처한 당시의 상황은 찬송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핍박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하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산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늘에 간직한 산 소망을 소유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산 소마의 근거(3절)
1) 부활하심으로 예수의 부활이 살아 있는 것의 근거가 되고,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기독교인들의 소망의 기초는 부활입니다. 공동 번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로 번역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우리의 전파도 헛것이고, 믿음도 헛것이고,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이미 죽은 기독교인들도 망한 것이 되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에게도 산 소망이 되신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도 “(전9:4)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산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생각하면, 이 산 소망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보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거듭남으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객관적인 근거가 된다면 거듭나는 것은 주관적인 근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남으로 썩지 않는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 거듭남의 조건 3절에 보면 “그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8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나의 거듭남(구원)의 조건이 됩니다. 결코 나의 선행, 의지, 노력, 믿음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은 내가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이미 멸망당했고,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하였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인 탄생을 자신이 선택하거나 성취할 수 없음같이 거듭나는 것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성령님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긍휼”이라고 하는 말은 “은혜”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은혜는 “거져 준다”는 뜻입니다. 긍휼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던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입니다.
(2) 거듭남의 방편 5절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여기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입니다. 이것은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거듭남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구원에 이르는 방편이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한 근거나 조건은 아닙니다. 오직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도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믿음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믿음 때문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나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은혜는 하나님의 부분이요, 믿음은 우리의 부분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이 마치 하나님과 나의 합작품인 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살후3: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2. 산 소망의 내용 산 소망의 내용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기업을 얻습니다(4절). 기업이란 상속자가 받는 재산입니다. 이것을 다른 성경에서는 유업 또는 분깃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본래 기업의 구약적 의미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입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에 와서는 하늘 나라 또는 구원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기업을 얻을 후사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소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기업의 성격은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썩지 않고, 더럽히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업과는 서로 대조적입니다. 세상의 기업은 시간이 흐를수록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시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업은 시간과 상관없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고후 4:16). 다른 하나는,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이란 ‘하나님의 거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에 의해 보호되고 있고, 하나님의 관리하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둘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없고, 도적이 구멍을 뚫을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마 6:20).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간직’이란 ‘보호’외에도 ‘예약되어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하늘 나라의 기업을 예약해 놓은 상태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2) 종말적인 구원(5,9) 로마서 8:24에서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 번째로 소망의 내용은 구원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은 의미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령, 위험으로부터의 구원(마 8:15, 요 12:27), 질병으로부터의 구원(마 9:21, 요 11:12),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마 1:21,24:13) 등입니다. 시간적으로도 3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적인 구원(요 5:24), 현재적인 구원(빌 2:12), 그리고 미래적인 구원입니다(고후 1:10). 이미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지금도 구원받은 사람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될 것입니다(롬 8:20-23).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시간적으로 “말세”(5절)요, 성격상으로는 “영혼 구원(9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8)”고 권면했습니다.
3) 칭찬, 영광, 존귀(7절) 이 땅에서의 칭찬은 칭찬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영광은 영광이 아닙니다(롬 8:18). 이 땅에서의 존귀는 더 이상 존귀가 아닙니다. 진정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주어집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 이 땅에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주님 앞에 있습니다.
3. 산 소망의 능력
1) 오히려 기뻐하는 삶(6절) 역설적인 삶을 사는 이유가 바로 소망에 있습니다. 심지어 근심 중에서도, 시험 중에서도 오히려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독교인의 기쁨이란 그가 처한 형편이나 상황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했고,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옥중에 기록한 빌립보서를 통하여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산 소망’ 때문입니다.
2)가치관의 변화(7절) 산 소망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다. 믿음의 시련을 금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게 합니다. 시련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금을 불속에 집어 넣었다 뺏다 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불순물을 빼고 금의 순도를 높여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순도 높은 금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시련은 박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박해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박해를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그 결과 때문입니다. 소망 때문입니다. 현실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생각이나 자세의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살아 있는 소망 때문입니다.
3) 신락애의 삶을 살게 됨(8절) 여기에는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공통된 것은 “보지 못하나”입니다. 독자들이 예수를 육안으로 본 것도 아닙니다. 구전을 통하여 또는 서신을 통하여 그런 줄을 알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것 역시 소망이 가져다 주는 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고 하셨습니다. 역시 우리도 복된 반열에 서게 됨을 감사할 것입니다. 영국의 심장병 의학자 맥코넬 윌슨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주로 무슨 약을 많이 쓰셨습니까”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소망입니다.” “그것으로도 안 되면 어떻게 했습니까” “그런 땐 더욱 큰 마지막 소망을 씁니다. 천국의 소망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썩지 않고, 시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산 소망’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는 산 소망 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산 소망만 확실하다면 얼마든지 시험을 이길 수가 있고, 얼마든지 살아 볼 만한 세상입니다. 히브리어로 소망은 ‘키벤’인데 그것은 ‘거미줄처럼 엮는다’는 뜻입니다. 거미줄은 약하지만 희망으로 엮어질 때 강한 성이 됩니다. 산 소망을 가진 자가 곧 강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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