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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나그네 (벧전1:1-2)

본문

본 1-2절은 인사말입니다. 성경의 서신들이 그 서신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인사말 속에 담아 두듯이 베드로 전서도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인사말 속에 먼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해서 독자로 하여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는 지를 짐작하게 하고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 지를 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란 말은 전권을 위임받아 보냄을 받은 대사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보낸 분의 대리자 행세를 할 수 있는 신분을 말합니다. 사도는 자기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못합니다. 그가 하는 일이나 말은 보낸 분이 하는 일이나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사와 말은 곧 보낸 분의 행사와 말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행한 행사와 말은 사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 보낸 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의 행사와 말을 듣고 보는 사람은 곧 그것이 사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 보낸 분의 것이로구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보낸 분의 인격을 보여주는 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서신에서 하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말입니다. 듣는 사람들은 이 말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을 알고 가까이 하던 사람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권면하는 정도라면 들어도 되고 안들어도 됩니다. 이런 정도라면 참고로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따라서 신앙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듣는 사람들도 신앙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기도 했었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돌아 가버렸던 사람을 이렇게 주님의 대리자인 사도로 세워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죄인이라도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주의 사람으로 세워주신 은혜가 크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도가 누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까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로 소아시아 북반부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이 곳에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 베드로는 편지를 써야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편지를 써서 주님의 말씀을 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상황이란 신자로서 산다는 것 때문에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었습니다. 믿는 것에 대한 중상, 약소한 세력에 대한 얕잡아봄, 폭력, 사회적인 고립과 추방 등과 같은 어려움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는 아직 기독교인에 대한 네로의 대박해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네로의 대박해는 주후 64년이었는데 이 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이 편지를 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전서에서 말하는 시련과 고난은 대박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신자가 당하는 일상적인 고난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여 소아시아 지역에서 살고 있던 성도들이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신자들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신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고향을 떠나와서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을 두고 한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땅이 아니기 때문에 주권도 없이 여러 가지 핍박과 불리한 취급을 받으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서도 이러한 나그네를 고아와 과부와 같이 힘없는 사람들에 포함시켜서 돌아보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도 나그네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이 나그네로 살다가 참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하나님이 나그네의 고향이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그네는 현재의 사는 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떠날 것을 생각하면서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 나그네입니다. 베드로가 신자들을 나그네라고 부르는 것은 신자들이 바로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나그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새로운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이 때문에 이제는 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모두가 나그네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성도들에 대하여 가지는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라는 말은 성도의 별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30여년의 오랜 세월을 보내었는데 그 동안에 온갖 풍상을 다 겼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확인한 진리는 이 땅에는 안식도 쉼도 없으며 결국 신자는 나그네로 살다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 갈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겪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은 신자가 겪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신자가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체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배운 진리지만 베드는 그의 삶으로 이것을 체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에게 되새겨 주어서 그들도 주님을 바라보고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섰던 것입니다. 즉 나그네임을 인식시킴으로 나그네로서의 신자의 삶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역시 나그네로서 살 수밖에 없는 신자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며 가진 것이 없고 가난하고 힘을 가지지 못한 것은 우리가 나그네라는 것을 되새겨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이 우리의 땅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이 땅의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로 인하여 돌아 갈 본향이 주님의 품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그네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고난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그네로서 고통을 당하면서 사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는 우리 성도의 이 세상 삶의 고달픔을 반영해 주고 있는 말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진리를 체득한 나이 많은 사도 베드로가 흰 수염을 날리면서 주님을 대신해서 너희가 이것을 잊지 않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우리 신자들이 사는 것이 너무나도 삭막한 것 같고 서글퍼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2절을 보면 나그네 된 신자가 그렇게 삭막하고 서글픈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절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고 소망을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2절은 우리가 어떤 은혜를 누리가 있는 자들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기는 하지만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택하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택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지만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고 버림을 받아도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다른 세계에서 살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가장 복되고 안전한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은혜를 누릴 것이고 평강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택되는 근거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는 구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아셨다는 말씀입니까 성경의 여러 곳의 말씀들은 창세 전에 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미리 아셨다는 것은 시기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랑하셔서 선택을 해 주셨기 때문에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되는 것은 우리 인간 편의 장점 때문에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편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따라 우리를 그저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무엇하기 위해서 선택하셨습니까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과 피 뿌림을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이란 불러내어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는 사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2:10절에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아서 택한 자들을 불러내서 하나님께 소속시키는 성령님의 사역을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이 구별하여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것은 순종과 피 뿌림을 위해서입니다. 피 뿌림을 사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순종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순종이라고 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은 믿게 되는 그 순간부터 세상 사람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순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새 사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옛 사람의 성격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부터가 순종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불렀는데 소아시아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이러한 신앙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신앙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순종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으로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 뿌림 곧 죄 사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죄 사함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 죄 사함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기 때문에 죄 사함의 생활은 계속 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삶을 위해서 택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인도하여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영광스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자를 세상에서 나그네 되게 하신 것은 영광스런 믿음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성도의 처지만 보면 나그네란 괴로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세계를 보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세상에 나그네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스런 세계를 바라보고 살도록 해야 하겠으며 또 이 삶을 낙심하지 않고 잘 달려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은혜와 평강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성도의 고난이 클수록 은혜와 평강도 더 크게 해 주셔서 성도가 그 고난을 견디고 나가도록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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