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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바라는 삶 (벧전1:13-25)

본문

지금까지 사도 베드로는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말하면서 이 구원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통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에 주어질 것을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폈다는 말을 했습니다. 천사들도 알기를 원했던 구원이라고 하면서 구원의 은혜가 큼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옛날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의 의식 속에는 장차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주어질 축복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이것을 상기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사도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것을 온전히 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마음속에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가져올 은혜는 현재의 모든 고난을 상쇄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크지만 장차 주실 은혜의 부요함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 속에서 우리 자신과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죄악이 끝나고 새롭게 된 세상에서 하늘 몸을 입은 자로 나타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상기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것을 온전히 소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소망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이 세상의 고난을 이기고 성도로서 살아 갈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 이루질 은혜는 미래의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현재에는 고난만이 있는 세상 같지만 사실은 현재에도 미래의 능력이 성도를 이끌고 있습니다. 미래의 능력이란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하늘의 영이요 장차 올 미래의 세계를 증거해 주는 영입니다. 그 영이 현재에도 성도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성도는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도가 성도로서 살게 되는 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고 보호함을 받고 있기 때문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렇게 성도를 보호하면서 이끌고 가시면서 장차 올 은혜의 부요함 속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은혜 속에 살다가 은혜의 부요함 속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각을 다시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고난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현재 사는 것을 힘들어하고 피하고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도 은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장차 완전하게 드러날 은혜의 부요함이 미리 와서 있는 성령님의 능력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세상만을 볼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미래의 능력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장차 주님이 가져다 줄 부요함을 소망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소망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어서 나오는 가르침들입니다. 먼저 사도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거룩을 먼저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이 신자를 신자로서 유지시켜 주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신자로서 먼저 좇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합니다. 거룩치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말하는 셈입니다. 신자는 자기의 사욕 즉 정욕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순종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자식처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순종의 자녀들로서' 또는 '순종의 아이들로서'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랑스런 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좇던 것을 좇아가서는 안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좇던 것이 무엇입니까 '사욕' 즉 정욕입니다. 사욕 즉 정욕이란 인간의 육신적인 욕심입니다. 육신적인 욕심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안주하려는 욕심입니다. 이런 욕심이 있을 때에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으며 그 때에 주실 은혜를 바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은 성도가 신자됨을 버리면 얼마든지 즐기며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육신적인 욕심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좇아가도록 유혹합니다. 신자지만 육신적인 욕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아직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런 욕심을 따라가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제 다른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다른 세상을 알게 하였고 다른 세상의 삶을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세상을 알지 못하던 때에 좇아가던 대로 따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던 때 하던 대로 따라 간다면 다른 세상을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세상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옛 세상의 풍습에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즉 자기가 성령님의 능력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에서 이것을 되새기면서 처신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신자된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없다면 그는 신자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이러한 성품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본성을 따라서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되새기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지 않는 자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 즉 거룩한 자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자의 거룩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는 거룩은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거룩을 은혜로 입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거룩을 신자는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가 덧입고 있는 거룩은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거룩한 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완전한 자가 아닙니다. 신자는 아직도 완성될 그 날을 향해서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붙잡혀서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성령님의 능력 안에 살고 있으면서 또 장차 올 은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신자의 거룩한 생활입니다. 이것을 곧 믿음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때는 믿고 어떤 때는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매사를 살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러한 삶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바라는 생활에서 두 번째로 말하는 것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생활을 하게 하는 마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나그네라는 말은 '외국에 거주하는 자, 거류민'을 말합니다. 일본에 가서 사는 우리 나라 사람들을 재일 거류민이라고 불렀었는데 신자가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이 자기의 나라가 아니라 외국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 세상의 생활이 나그네 생활이요 거류민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언젠가는 모두가 하나님께 돌아갈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그러면 이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분입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말은 곧 소망을 어디에 두었느냐를 판단하신다는 말입니다. 소망을 이 세상에 두고 살았다면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은 멸망을 당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 가를 따라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면 거짓된 신앙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다면 참된 믿음으로서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았는가를 따라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라면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망을 땅에 두고 사는 거짓된 신자가 되지 않도록 근신하여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신자는 어떻게 구속된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가 구속된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은금에 비교할 수 없으며 재물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속된 자가 신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되었지만 말세에 오셔서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보배로운 피를 흘렸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너무나 고귀한 희생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였던 분이 말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생명을 버리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자는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속을 알고 있는 자라면 세상의 은금과 재물 때문에 소망을 땅에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망을 땅에 두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경멸하는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속화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가 하는 말씀은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말씀은 열렬히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마치 연애하는 사람들이 열렬히 서로 사랑하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어디에서 옵니까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서 옵니다.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성도를 형제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한 복음 안에서 사랑입니다. 따라서 혈연적인 것도 아니요 학연이나 지연 등과 같은 인간적인 관계에 의한 사랑이 아닙니다. 한 복음의 말씀으로 얻게 된 구원 때문에 가지게 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은 가장 순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거듭난 사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입니다. 비록 모든 인간은 풀과 같이 사라져 가지만 이 말씀의 영원함을 믿는 자는 주님의 가족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 글을 쓸 때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전후의 문맥으로 보아서 소망을 하나님께 두도록 서로 권면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서로 기도하는 것이며 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서로가 돕고 위로하며 믿음에 낙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신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피차간에 뜨겁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도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결심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구속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을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려고 하기 전에 주님의 구속이 참으로 귀한 것이라는 것과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리에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확실할 때 서로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레 되어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열렬히 사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러한 목표를 향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모습이 주님이 오실 때에 주실 은혜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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