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하리로다 (벧전1:3-4)
본문
사도 베드로는 인사에 이어서 우리의 관심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려놓습니다. 사도는 먼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써 찬양부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에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소아시아 신자들은 시련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고통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라면 '어려운 중에서 어떻게 지내느냐'는 식의 위로를 먼저 하고난 후 마음이 좀 부드러워진 후에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인간적이고 심리적 상황적인 배려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뚱딴지같이 찬송부터 하고 있습니다. 마치 실직하여서 어떻게 살꼬 하면서 낙심하여 앉아 있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이런 저런 상황을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만 좋아하면서 찬송을 불러대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돈을 떼이게 되어 낭패가 났다는데 '잘 되었군. 찬송합시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베드로가 참으로 앞뒤를 가릴 줄을 모르며 세상 돌아가는 것이나 인간의 형편을 생각하고 그에 맞출 줄 모르는 사람 같이 보일 수도 있고 자기 세계 속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잘 하는 뒤퉁스런 사람 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먼저 찬송부터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려운 중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께 돌려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려운 상황보다 크고 또 현재의 어려운 상황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의 큰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큰 사역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신자들은 중상과 폭력과 사회적인 추방 곧 직장에서 쫓겨나고 모든 소유를 다 잃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에 사로잡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그의 하신 큰 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큰 일이란 우리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얼마나 크고 좋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것일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다급한 문제보다 먼저 이 구원을 바라보는 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베드로의 의도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것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고 돈을 떼이게 되고, 직장을 잃게 되는 일들이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현실적 어려움에 사로잡혀서 우리가 가진 참으로 귀한 것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는 듯이 그리고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서 생명을 잃은 듯이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어떻게 살까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베드로는 찬송하자고 합니다. 삼위 하나님과 그들이 하신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사역을 바라보고 찬송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삼위 하나님과 그 사역이 실제적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하나님과 그 사역이 가장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과 그 사역이 가장 큰 보화요 유일한 가치를 가진 보화이기 때문에 잊었다가도 그것을 생각하면 자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하자고 하는 사도의 말에 동의하게 되고 마침내 찬송하는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현재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찬송하는 자리에 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찬송하며 왜 찬송하는 지 봅시다.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이런 관계를 밝혀주셨습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그 관계를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다고 하셨으며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들의 유독하신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구원이 특별한 것임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구원을 주신 것은 긍휼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이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말합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고로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불쌍히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긍휼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거듭나게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근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성령님도 없고 성령님이 없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거듭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님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을 위해 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일시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새 삶은 시작이 되었으면 계속되는 삶이 있으며 마침내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란 영원한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4절은 산 소망 즉 영원한 소망에 대하여 계속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영원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업이란 물려받는 유산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산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려받는 것인 동시에 영원한 것입니다. 이런 성격은 이 기업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서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보관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아무도 빼앗아 가거나 도적질해 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침략할 수 없는 안전한 곳 하늘에 보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생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오셔서 부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의 삶이란 이미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죽고 새로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믿는 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부활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멈추지 않고 연속되는 것이 영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믿고 사는 현재의 삶도 부활한 삶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던 삶은 죄 아래서 죽은 삶이었지만 예수를 믿고부터 살게 된 삶은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육으로 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부활의 삶 또는 하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하늘의 삶입니다.
둘째, 현재에도 비록 육을 벗어나지 못했고 육의 삶이 있을 지라도 이것을 가지고 씨름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으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자처럼 환상처럼 생각할 것이지 의미를 두고 씨름할 것이 못됩니다. 아무리 이것이 중요한 것 같아도 결국은 죽음과 함께 끝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나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지나갈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신자가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님으로 사는 삶입니다. 성령님으로 사는 이것이 우리의 생명인 줄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자는 즐거워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슬퍼도 이것 때문에 슬퍼할 것이지 이전의 삶 때문에 즐거워하고 슬퍼할 사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돈이나 직장은 그 자체가 육적이라거나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속된 것도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이 자체는 모두가 하나님이 내셔서 인간이 이용하면서 살도록 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다루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령님으로 믿음으로 살 때는 이것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에 유익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반면 육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 때는 이것들이 인간의 죄악성과 욕심과 불신앙을 반영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이런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늘 삶을 살고 있는 자라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없어도 믿는 우리 자신들이 하늘 삶을 살고 있고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이 없어졌다면 '주님이 가져가셨구나. 이 땅에 더 살게 하신다면 또 다른 일거리를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찾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 돈을 떼이게 되었다면 그것이 얼마가 되었던지 '주님이 주셔서 사용하면서 살게 하셨다가 주님이 가져가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하늘의 사람되어 있는 것에 충실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직장이나 돈은 하나님이 이용하라고 주신 도구들이지 그것이 믿는 나의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나의 인격은 이것들이 있던 없던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주님을 찬송할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있을 때도 찬송해야 하겠지만 없을 때도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우리는 인격은 이런 것들 때문에 우왕좌왕할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이런 것들이 있던 없던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게 구원을 주실 때는 물질과 직장을 보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이 있을 때도 찬양하고 없을 때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산 소망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부활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현재 소아시아 신자들은 시련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고통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라면 '어려운 중에서 어떻게 지내느냐'는 식의 위로를 먼저 하고난 후 마음이 좀 부드러워진 후에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인간적이고 심리적 상황적인 배려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뚱딴지같이 찬송부터 하고 있습니다. 마치 실직하여서 어떻게 살꼬 하면서 낙심하여 앉아 있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이런 저런 상황을 들어보지도 않고 자기만 좋아하면서 찬송을 불러대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돈을 떼이게 되어 낭패가 났다는데 '잘 되었군. 찬송합시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베드로가 참으로 앞뒤를 가릴 줄을 모르며 세상 돌아가는 것이나 인간의 형편을 생각하고 그에 맞출 줄 모르는 사람 같이 보일 수도 있고 자기 세계 속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잘 하는 뒤퉁스런 사람 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먼저 찬송부터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려운 중에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하나님께 돌려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려운 상황보다 크고 또 현재의 어려운 상황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의 큰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큰 사역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신자들은 중상과 폭력과 사회적인 추방 곧 직장에서 쫓겨나고 모든 소유를 다 잃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에 사로잡히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그의 하신 큰 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큰 일이란 우리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얼마나 크고 좋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것일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다급한 문제보다 먼저 이 구원을 바라보는 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런 베드로의 의도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것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고 돈을 떼이게 되고, 직장을 잃게 되는 일들이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현실적 어려움에 사로잡혀서 우리가 가진 참으로 귀한 것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없고 구원도 없는 듯이 그리고 세상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서 생명을 잃은 듯이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어떻게 살까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베드로는 찬송하자고 합니다. 삼위 하나님과 그들이 하신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사역을 바라보고 찬송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믿는 자에게는 삼위 하나님과 그 사역이 실제적이요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하나님과 그 사역이 가장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과 그 사역이 가장 큰 보화요 유일한 가치를 가진 보화이기 때문에 잊었다가도 그것을 생각하면 자기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찬송하자고 하는 사도의 말에 동의하게 되고 마침내 찬송하는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현재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던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찬송하는 자리에 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찬송하며 왜 찬송하는 지 봅시다.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이런 관계를 밝혀주셨습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그 관계를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형성된 것이지만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다고 하셨으며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아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들의 유독하신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구원이 특별한 것임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구원을 주신 것은 긍휼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이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말합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고로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불쌍히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긍휼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거듭나게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근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성령님도 없고 성령님이 없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거듭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님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을 위해 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일시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새 삶은 시작이 되었으면 계속되는 삶이 있으며 마침내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란 영원한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4절은 산 소망 즉 영원한 소망에 대하여 계속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영원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업이란 물려받는 유산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산 소망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려받는 것인 동시에 영원한 것입니다. 이런 성격은 이 기업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에서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보관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아무도 빼앗아 가거나 도적질해 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침략할 수 없는 안전한 곳 하늘에 보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생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오셔서 부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의 삶이란 이미 이 세상 사람으로서는 죽고 새로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믿는 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부활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멈추지 않고 연속되는 것이 영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믿고 사는 현재의 삶도 부활한 삶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를 모르고 살던 삶은 죄 아래서 죽은 삶이었지만 예수를 믿고부터 살게 된 삶은 전혀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육으로 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부활의 삶 또는 하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마음으로 사는 것은 하늘의 삶입니다.
둘째, 현재에도 비록 육을 벗어나지 못했고 육의 삶이 있을 지라도 이것을 가지고 씨름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으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자처럼 환상처럼 생각할 것이지 의미를 두고 씨름할 것이 못됩니다. 아무리 이것이 중요한 것 같아도 결국은 죽음과 함께 끝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나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역시 지나갈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신자가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성령님으로 사는 삶입니다. 성령님으로 사는 이것이 우리의 생명인 줄 알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자는 즐거워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워하고 슬퍼도 이것 때문에 슬퍼할 것이지 이전의 삶 때문에 즐거워하고 슬퍼할 사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돈이나 직장은 그 자체가 육적이라거나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속된 것도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이 자체는 모두가 하나님이 내셔서 인간이 이용하면서 살도록 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다루는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령님으로 믿음으로 살 때는 이것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에 유익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반면 육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 때는 이것들이 인간의 죄악성과 욕심과 불신앙을 반영해주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이런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살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늘 삶을 살고 있는 자라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없어도 믿는 우리 자신들이 하늘 삶을 살고 있고 산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이 없어졌다면 '주님이 가져가셨구나. 이 땅에 더 살게 하신다면 또 다른 일거리를 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찾으면서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 돈을 떼이게 되었다면 그것이 얼마가 되었던지 '주님이 주셔서 사용하면서 살게 하셨다가 주님이 가져가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하늘의 사람되어 있는 것에 충실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직장이나 돈은 하나님이 이용하라고 주신 도구들이지 그것이 믿는 나의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나의 인격은 이것들이 있던 없던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주님을 찬송할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있을 때도 찬송해야 하겠지만 없을 때도 찬송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우리는 인격은 이런 것들 때문에 우왕좌왕할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는 이런 것들이 있던 없던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게 구원을 주실 때는 물질과 직장을 보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 자신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이 있을 때도 찬양하고 없을 때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산 소망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부활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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