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과 성도의 시련 (벧전1:4-9)
본문
5절은 4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4절에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던 기업이라고 해 놓고 5절은 이것을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4절을 좀 더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4절에서 이 구원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하늘에 간직되었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비밀스런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해져 왔었던 것이지만 그 실제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인간이나 천사들까지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간직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기업이라고 한 것은 믿는 자들이 이러한 구원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기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이 구원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준비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세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그 때부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천국을 여셨습니다. 이 천국 앞에는 죄 지은 이 세상이 정죄를 받고 부정되었습니다. 천국은 이 세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이 세상이 없어진 셈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신 그 때를 말세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숨겨져 있다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 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신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구원을 얻도록 보호된 사람들입니다. 보호된다는 이 말은 보초를 서고 지킨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된 신자들을 이렇게 지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이 구원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마귀의 세력이 어떤 인간도 구원에 참여하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보호하셨기 때문에 신자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또 거기서 부활하게 하신 능력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란 '구원을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구원을 위하여 보호하심을 입은 자들이 신자라고 한다면 신자들이 믿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신자들을 보호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도 신자들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믿음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있었던 것이고 또 그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 때문에 아들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일입니다. 오늘 4-5절에도 이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를 믿을 수밖에 다른 믿음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신실하심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실이란 어떤 사람의 변함없이 성실한 성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를 믿고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했던 아들의 믿음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아들의 믿음과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의 신실하심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호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신자요 교회라면 하나님의 능력이란 것도 바로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시도록 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죽음을 물리치는 능력이요 그렇기 때문에 한 마디로 십자가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능력에 의해서 보호하심을 입은 자가 교회요 신자들입니다. 6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이 이 구원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일시적으로 당해야 하는 시험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구원 안에서 크게 즐거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져야 할 마땅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은 구원을 인하여 크게 기뻐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진 신자들이 가졌던 이런 자세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신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거리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험거리가 없다면 그것이 좀 이상한 일이요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험거리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신자는 시험에 빠질 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이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시험거리가 여러 가지로 많지만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는 신자에게는 그 시험거리들이 시련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란 고통이 따르지만 그 속에는 제련되고 정제되는 고귀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자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시련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합니다. 이런 시련이 없다면 순수한 믿음이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이런 시련을 신자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이 없을 때는 자기가 참으로 좋은 줄 알고 또 자기의 믿음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자기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되고 남을 정죄하게 되고 자기는 일등 신자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받게 되면 자기가 기뻐하기보다는 근심하고 있고 구원을 즐거워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회개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련이 신자에게 가져오는 고귀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순수함과 그로 인한 고귀함은 은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을 다 주어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은 오히려 믿음을 타락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시련은 돈으로 얻을 수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돈보다 귀한 믿음을 얻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런 믿음이 돈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면 시련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더 귀하다고 생각한다면 시련을 기뻐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 시련은 시험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수를 바라보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또 시련에서 귀한 믿음에 이를 줄 알고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끝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련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영광입니다. 따라서 천국도 시련을 통하여 주어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시련 속에 천국이 있고 구원이 있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을 받게 되는 것을 성도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믿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십자가 지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끝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 영광을 바라보고 시련의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요 넘을 수 없는 요구 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것에 동의하고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보호함을 받은 자가 교회요 신자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또한 시련을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을 동의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역시 예수의 믿음 안에 보호함을 받은 자임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 시련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러므로 4절을 좀 더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4절에서 이 구원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하늘에 간직되었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비밀스런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해져 왔었던 것이지만 그 실제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인간이나 천사들까지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간직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기업이라고 한 것은 믿는 자들이 이러한 구원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기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이 구원이 말세에 나타내기로 준비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세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그 때부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천국을 여셨습니다. 이 천국 앞에는 죄 지은 이 세상이 정죄를 받고 부정되었습니다. 천국은 이 세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이 세상이 없어진 셈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신 그 때를 말세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숨겨져 있다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그 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신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구원을 얻도록 보호된 사람들입니다. 보호된다는 이 말은 보초를 서고 지킨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교회 된 신자들을 이렇게 지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이 구원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마귀의 세력이 어떤 인간도 구원에 참여하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보호하셨기 때문에 신자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또 거기서 부활하게 하신 능력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란 '구원을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구원을 위하여 보호하심을 입은 자들이 신자라고 한다면 신자들이 믿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신자들을 보호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도 신자들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믿음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있었던 것이고 또 그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심 때문에 아들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일입니다. 오늘 4-5절에도 이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다른 말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를 믿을 수밖에 다른 믿음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신실하심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실이란 어떤 사람의 변함없이 성실한 성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를 믿고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했던 아들의 믿음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아들의 믿음과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의 신실하심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호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신자요 교회라면 하나님의 능력이란 것도 바로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시도록 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죽음을 물리치는 능력이요 그렇기 때문에 한 마디로 십자가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능력에 의해서 보호하심을 입은 자가 교회요 신자들입니다. 6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이 이 구원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일시적으로 당해야 하는 시험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구원 안에서 크게 즐거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져야 할 마땅한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은 구원을 인하여 크게 기뻐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진 신자들이 가졌던 이런 자세는 모든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신자들은 여러 가지 시험거리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시험거리가 없다면 그것이 좀 이상한 일이요 비정상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험거리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신자는 시험에 빠질 자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으로 인하여 즐거워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이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시험거리가 여러 가지로 많지만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는 신자에게는 그 시험거리들이 시련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란 고통이 따르지만 그 속에는 제련되고 정제되는 고귀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자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시련은 순수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합니다. 이런 시련이 없다면 순수한 믿음이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이런 시련을 신자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이 없을 때는 자기가 참으로 좋은 줄 알고 또 자기의 믿음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자기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이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되고 남을 정죄하게 되고 자기는 일등 신자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받게 되면 자기가 기뻐하기보다는 근심하고 있고 구원을 즐거워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을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회개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련이 신자에게 가져오는 고귀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순수함과 그로 인한 고귀함은 은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을 다 주어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은 오히려 믿음을 타락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시련은 돈으로 얻을 수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돈보다 귀한 믿음을 얻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런 믿음이 돈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면 시련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이 더 귀하다고 생각한다면 시련을 기뻐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 시련은 시험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수를 바라보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또 시련에서 귀한 믿음에 이를 줄 알고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끝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시련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영광입니다. 따라서 천국도 시련을 통하여 주어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시련 속에 천국이 있고 구원이 있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시련을 받게 되는 것을 성도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믿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십자가 지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끝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 영광을 바라보고 시련의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요 넘을 수 없는 요구 같이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것에 동의하고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보호함을 받은 자가 교회요 신자이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또한 시련을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을 동의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역시 예수의 믿음 안에 보호함을 받은 자임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 시련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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