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벧전2:11-12)
본문
지금까지 베드로는 성도는 세상에서는 나그네이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새로운 신분을 얻은 자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 새로운 신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성도에게 덧입혀진 것이었습니다. 마치 하늘에라도 완전히 들어간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의 명칭들로 성도를 호칭했었습니다. 성도를 이렇게 호칭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아직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잘 가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신분을 되새겼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신자의 실존이 나그네요 행인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고달픔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고달픈 나그네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나그네 세상을 광야라고 한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시절에 겪었던 온갖 고달픔은 신자가 세상에서 겪는 고달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달플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운 신분을 되새겼던 것입니다. 이제사도는 이 땅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현실은 우리가 피하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망가려고 해서 도망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부딪혀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부딪혀서 나아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생명의 길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달픈 이 땅의 현실은 성도가 도망가고 피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딪히면서 그 속으로 나있는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길을 가는 신자들을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사랑 받은 자들아'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고달픈 삶을 살고 있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라고 사도 베드로는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이 말은 앞에서 말했던 영광스런 용어들과 같은 유의 명칭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도 이 말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고달프지만 두려워 말고 광야 길을 달려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피곤해지고 고달플 때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럴 때마다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주님의 부르시는 말씀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부르심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는 사람들에만 주시는 부르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인 줄 아는 사람만이 이 부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제 나그네와 행인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말은 자기 집 자기 고향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향을 떠나와 일시 체류하는 자요 지나가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브라함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태어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왔지만 그 땅에서도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에는 그 땅을 한 치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가 배운 것은 자기가 갈 곳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도성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성도인 너희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즉 오늘날의 아브라함이다'라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부르심은 이런 사람에게 주시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베드로가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비슷한 말을 중복해서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그네 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그네니 정신을 잃지 말고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 정신이 필요합니까 정욕을 제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어한다는 말은 '멀리 하다, 멀리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육체의 정욕을 멀리 하라는 말이요 멀리 떠나 있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정욕에 빠지는 것은 정욕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정욕이란 육신적인 욕망인데 이런 것을 바라고 가까이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정욕에 빠집니다. 돈을 가까이하면 돈에 빠지고 여자를 가까이 하면 여자에 빠집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에서 멀리 하라는 뜻입니다. 멀리하라는 것은 실제로 공간적으로 멀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이 함께 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멀리 할 수 없는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마음으로 멀리하라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멀리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을 알고부터 가지게 되는 나그네 정신입니다. 나그네 정신이 있을 때 육체의 정욕을 떠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신자가 떠나 온 곳이 육체의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함께 이것은 망할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이란 이런 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며 무가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대한 나그네 정신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그것은 볼 것 없다고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정욕이란 말은 좀 막연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본 서신에도 알 수 있습니다. 4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육체에 속한 정욕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정욕은 음란, 호색, 술취함, 방탕, 연락, 무법한 우상숭배 따위로 표현됩니다. 그러니 정욕은 이런 것들을 지향하는 욕망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5:16절 이하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고 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13-14절에도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에서 정욕이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욕심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믿지 않을 때 추구하던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을 때는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욕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그네 정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서 이미 죽었고 또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신자가 추구할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말을 들을 때 그 말씀을 인정을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야지요. 믿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더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사도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자는 베드로의 이 말씀을 감사하게 받고 더 정신을 차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사람이 정욕을 멀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이런 말을 들을 때 '맞습니다. 그래야지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정욕이 신자를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이 범죄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이 단순히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인 줄로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열 번 백 번이라도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욕을 멀리하라는 말에 대하여 그것에 어떤 자세로 응하느냐에 따라 신자와 불신자가 나누어지는 셈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말씀으로 감사하게 받을 것이고 불신자는 조롱하면서 거절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믿는 자를 믿는 자로 세우고 믿지 않는 자를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정욕을 멀리 할 수 있는라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자기가 그것으로 인해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신자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되새기라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믿는 자로서 살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있다면 믿지 않는 자로서 육신의 욕망을 따라 갈 것입니다. 12절에서 말하는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믿지 않는 때의 삶을 살지 않고 주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나그네 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들 즉 불신자들 속에서 살지라도 그들과는 다른 이방인 곧 나그네로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혹시 깨달아 부름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택한 자는 이런 것을 통하여서도 깨닫는 자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을 맺겠습니다. 나그네와 행인은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십자가를 상기시켜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 정신은 또한 십자가 정신이고 주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또한 성령님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믿는 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정신 때문에 육체적 욕망을 멀리하게 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믿는 자는 고맙게 생각하고 정신을 차립니다. 자기 속에도 동일한 정신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믿는 자임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런 말씀을 전혀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하게 따라야 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고 따라야 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여러분에게 정욕을 멀리 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정욕을 멀리 하십시오. 여러분은 사랑을 입은 자들이요 나그네와 행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고달픈 삶을 살고 있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라고 사도 베드로는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이 말은 앞에서 말했던 영광스런 용어들과 같은 유의 명칭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도 이 말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고달프지만 두려워 말고 광야 길을 달려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피곤해지고 고달플 때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럴 때마다 이 부르심은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주님의 부르시는 말씀 속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부르심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는 사람들에만 주시는 부르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인 줄 아는 사람만이 이 부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제 나그네와 행인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말은 자기 집 자기 고향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향을 떠나와 일시 체류하는 자요 지나가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아브라함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태어난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왔지만 그 땅에서도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에는 그 땅을 한 치도 받지 못했습니다.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가 배운 것은 자기가 갈 곳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도성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성도인 너희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즉 오늘날의 아브라함이다'라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부르심은 이런 사람에게 주시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을 베드로가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비슷한 말을 중복해서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그네 됨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그네니 정신을 잃지 말고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 정신이 필요합니까 정욕을 제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어한다는 말은 '멀리 하다, 멀리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육체의 정욕을 멀리 하라는 말이요 멀리 떠나 있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정욕에 빠지는 것은 정욕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정욕이란 육신적인 욕망인데 이런 것을 바라고 가까이 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정욕에 빠집니다. 돈을 가까이하면 돈에 빠지고 여자를 가까이 하면 여자에 빠집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에서 멀리 하라는 뜻입니다. 멀리하라는 것은 실제로 공간적으로 멀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람이 함께 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멀리 할 수 없는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마음으로 멀리하라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멀리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을 알고부터 가지게 되는 나그네 정신입니다. 나그네 정신이 있을 때 육체의 정욕을 떠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신자가 떠나 온 곳이 육체의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정욕은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과 함께 이것은 망할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이란 이런 것들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며 무가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에 대한 나그네 정신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그것은 볼 것 없다고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정욕이란 말은 좀 막연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본 서신에도 알 수 있습니다. 4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육체에 속한 정욕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정욕은 음란, 호색, 술취함, 방탕, 연락, 무법한 우상숭배 따위로 표현됩니다. 그러니 정욕은 이런 것들을 지향하는 욕망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5:16절 이하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리고 성령님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13-14절에도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과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에서 정욕이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욕심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믿지 않을 때 추구하던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을 때는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욕망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그네 정신은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서 이미 죽었고 또 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신자가 추구할 대상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말을 들을 때 그 말씀을 인정을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야지요. 믿지 않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더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사도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신자는 베드로의 이 말씀을 감사하게 받고 더 정신을 차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사람이 정욕을 멀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보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이런 말을 들을 때 '맞습니다. 그래야지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정욕이 신자를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이 범죄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이 단순히 사람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인 줄로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열 번 백 번이라도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욕을 멀리하라는 말에 대하여 그것에 어떤 자세로 응하느냐에 따라 신자와 불신자가 나누어지는 셈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말씀으로 감사하게 받을 것이고 불신자는 조롱하면서 거절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믿는 자를 믿는 자로 세우고 믿지 않는 자를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정욕을 멀리 할 수 있는라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자기가 그것으로 인해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신자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되새기라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믿는 자로서 살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있다면 믿지 않는 자로서 육신의 욕망을 따라 갈 것입니다. 12절에서 말하는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믿지 않는 때의 삶을 살지 않고 주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나그네 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방인들 즉 불신자들 속에서 살지라도 그들과는 다른 이방인 곧 나그네로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혹시 깨달아 부름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택한 자는 이런 것을 통하여서도 깨닫는 자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을 맺겠습니다. 나그네와 행인은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십자가를 상기시켜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 정신은 또한 십자가 정신이고 주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또한 성령님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믿는 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정신 때문에 육체적 욕망을 멀리하게 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믿는 자는 고맙게 생각하고 정신을 차립니다. 자기 속에도 동일한 정신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믿는 자임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런 말씀을 전혀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감사함으로 받고 당연하게 따라야 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고 따라야 할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도 여러분에게 정욕을 멀리 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정욕을 멀리 하십시오. 여러분은 사랑을 입은 자들이요 나그네와 행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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