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도록 자람의 의미 (벧전2:1-10)
본문
1장 후반부에서 사도 베드로는 은혜를 바라는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하면서 그 삶을 살 것을 소아시아 신자들에게 권면했었습니다. 그 삶은 거룩 즉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요, 나그네로서 경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요, 피차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가 모두 서로 상관관계가 있으며 신자의 거룩한 자로서 사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도 사도는 계속해서 같은 성격의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자의 신분이 어떠한 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제시하는 것이 신자가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면서 주님이 오심을 바라고 살아가는 데 더욱 힘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는 신자가 주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먼저 힘써야 할 것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사는 동안에 거룩하게 살고 두려움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도록 하는데 가장 요긴한 것이 신령한 젖이기 때문에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면서도 신자의 신분과 관계가 없는 것을 먼저 말씀합니다. 이것이 1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합니다. 악독이란 남을 해하려는 악한 마음이고, 궤휼이란 간사를 부리며 교모하게 속이는 것을 말하며, 외식은 속과는 달리 겉으로만 그런 체 하는 것입니다. 속은 악독과 간사를 가지고 있는데 겉으로는 오히려 사랑하고 위하여 주는 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는 남의 잘 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방해하는 것이요 비방하는 말이란 남을 나쁘게 험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의 백성이 되기 전에 가졌던 옛 사람의 특성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기 때문에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더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이 하게 되는 죄악의 모습들입니다. 그 근본은 결국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런 모습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이런 사람으로서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관없는 것을 먼저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관없는 것을 먼저 말함으로 참으로 신자가 살아야 할 사람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가 신자로서 추구해야 할 사람의 모습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간사하지 않는 말씀의 젖'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앞 절에서 사도가 말했던 믿지 않을 때의 인간상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즉 앞 절에서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악독과 간사를 추구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와는 반대로 말씀의 젖은 간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젖은 그것을 사모하는 자로 하여금 간사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이 말씀의 젖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젖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 말씀의 젖은 1장 끝에서 말했던 영원히 있는 주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을 사모하는 신자는 신자로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또 이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젖을 사모는 하는 것은 신자로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사도는 신자가 당연히 추구하게 될 것을 말씀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을 통하여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젖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씀의 젖을 사모하되 갓난아이들 같이 사모하라고 합니다. 갓난아이란 말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나 또는 아직 태어나지 않고 태중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만큼 어린아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갓 태어난 아기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젖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갓난아이들이 의도적으로 젖을 먹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들이란 말에서 우리는 갓난아이의 본능성을 느끼게 됩니다. 막 태어난 아이가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비유는 신자는 말씀의 젖을 찾는 것이 본능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의 생명현상이 말씀의 젖을 찾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말함을 통하여 신자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 사람에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이요 또 마땅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앞만 향해서 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사모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신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신자는 말씀 사모함이 없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말씀을 이렇게 사모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말씀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말씀 안에서 구원에까지 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에서 오해가 많고 잘못된 해석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신자가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긍휼을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은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으면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선 자란다는 말을 쓴 것은 앞에서 갓난아이를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갓난아이같이 젖을 사모하는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신분이 9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신분은 믿고난 후에 장성하여 자라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믿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즉시 이러한 신분을 누리게 됩니다. 즉 믿게 된 그 때부터 믿는 그 사람은 택하신 족속의 일원이 되었고 왕 같은 제자장이 되었고 거룩한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신분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9절 하반절에 이렇게 밝혀 놓았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신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까 마이크를 들고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서 외치고 다니라는 말입니까 광장 같은 곳에서 모여서 찬양을 부르라는 말입니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첫째, 9절 하반절에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말씀에서 '우리를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빛이란 어두움과 대조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죄에서 해방되어 믿음으로 살게 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러한 백성된 상태에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덕은 무어니 해도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어 오셔서 희생하신 것이 구약의 역사요 그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어서 죽게 했다면 이것만큼 아름다운 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장에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1:18-19)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한 것이 얼마나 귀하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20-21에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셨느냐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을 믿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을 볼 때 2:9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역을 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이라는 다소 간접적인 표현을 한 것은 이미 앞에서 아름다운 덕이 무엇이라는 것을 다 말했기 때문에 이제는 수사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간접적으로 말해도 알아들을 것이라고 판단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은 하나님이 낮아지신 놀라운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합당합니다. 그러면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낮아지심 즉 하나님의 희생하심을 선전하도록 불렀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전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하심을 깨달은 자로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전의 사람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모든 악독을 버리고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라는 말을 먼저 하면서 '갓난아이들 같이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고 한 것입니다. 불신자로 살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5절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란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말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제사장의 신분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가 바로 하나님의 희생하심을 따라서 희생하여 서로 사랑하고 나그네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도 베드로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갓난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젖으로 삼는 본성을 가진 자로 태어났으니 계속해서 그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것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간사함이 없는 말씀의 젖은 결국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또 이 복음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이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것을 가리는 것이라면 이제 신자는 이제 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생명으로 삼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새 생명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사모하여 구원에까지 자라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에서 나그네요 죽은 자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는 말이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사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은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신자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나그네요 죽은 자로서 사는 것 즉 십자가를 새 생명으로 하여 오실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고난을 두려워하고 세상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같은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이런 사람으로서는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상관없는 것을 먼저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관없는 것을 먼저 말함으로 참으로 신자가 살아야 할 사람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가 신자로서 추구해야 할 사람의 모습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간사하지 않는 말씀의 젖'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앞 절에서 사도가 말했던 믿지 않을 때의 인간상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즉 앞 절에서 믿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악독과 간사를 추구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와는 반대로 말씀의 젖은 간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젖은 그것을 사모하는 자로 하여금 간사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이 말씀의 젖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젖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 말씀의 젖은 1장 끝에서 말했던 영원히 있는 주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을 사모하는 신자는 신자로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또 이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젖을 사모는 하는 것은 신자로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사도는 신자가 당연히 추구하게 될 것을 말씀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을 통하여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의 젖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씀의 젖을 사모하되 갓난아이들 같이 사모하라고 합니다. 갓난아이란 말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나 또는 아직 태어나지 않고 태중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만큼 어린아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갓 태어난 아기를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젖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갓난아이들이 의도적으로 젖을 먹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들이란 말에서 우리는 갓난아이의 본능성을 느끼게 됩니다. 막 태어난 아이가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먹으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비유는 신자는 말씀의 젖을 찾는 것이 본능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자의 생명현상이 말씀의 젖을 찾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말함을 통하여 신자가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 사람에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이요 또 마땅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베드로는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앞만 향해서 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사모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신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신자는 말씀 사모함이 없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말씀을 이렇게 사모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말씀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말씀 안에서 구원에까지 자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에서 오해가 많고 잘못된 해석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신자가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긍휼을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은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으면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선 자란다는 말을 쓴 것은 앞에서 갓난아이를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는 갓난아이같이 젖을 사모하는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신분이 9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 신분은 믿고난 후에 장성하여 자라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믿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즉시 이러한 신분을 누리게 됩니다. 즉 믿게 된 그 때부터 믿는 그 사람은 택하신 족속의 일원이 되었고 왕 같은 제자장이 되었고 거룩한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신분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9절 하반절에 이렇게 밝혀 놓았습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신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까 마이크를 들고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면서 외치고 다니라는 말입니까 광장 같은 곳에서 모여서 찬양을 부르라는 말입니까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첫째, 9절 하반절에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말씀에서 '우리를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빛이란 어두움과 대조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죄에서 해방되어 믿음으로 살게 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있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러한 백성된 상태에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덕은 무어니 해도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어 오셔서 희생하신 것이 구약의 역사요 그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어서 죽게 했다면 이것만큼 아름다운 덕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장에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1:18-19)고 했습니다.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한 것이 얼마나 귀하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20-21에는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셨느냐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을 믿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을 볼 때 2:9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역을 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이라는 다소 간접적인 표현을 한 것은 이미 앞에서 아름다운 덕이 무엇이라는 것을 다 말했기 때문에 이제는 수사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간접적으로 말해도 알아들을 것이라고 판단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은 하나님이 낮아지신 놀라운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합당합니다. 그러면 믿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낮아지심 즉 하나님의 희생하심을 선전하도록 불렀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선전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하심을 깨달은 자로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전의 사람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서 모든 악독을 버리고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라는 말을 먼저 하면서 '갓난아이들 같이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고 한 것입니다. 불신자로 살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5절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란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말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제사장의 신분은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가 바로 하나님의 희생하심을 따라서 희생하여 서로 사랑하고 나그네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도 베드로는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갓난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젖으로 삼는 본성을 가진 자로 태어났으니 계속해서 그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것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간사함이 없는 말씀의 젖은 결국 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또 이 복음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이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것을 가리는 것이라면 이제 신자는 이제 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생명으로 삼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즉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 새 생명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사모하여 구원에까지 자라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에서 나그네요 죽은 자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는 말이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사는 것이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은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신자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나그네요 죽은 자로서 사는 것 즉 십자가를 새 생명으로 하여 오실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고난을 두려워하고 세상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같은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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