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요일4:7-8,사54:7-8)
본문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소유와 사랑”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과,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인간의 최대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랑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또한편으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장식품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직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소유욕에만 불타고 있다. 그래서 자기의 것으로 소유될 수 있는 돈과 명예와 권력에만 매달리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사랑이란 인간의 이기적인 소유 대상으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누구 나가 할 것 없이 “기독교는 사랑이다”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다 “사랑이 없다”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사랑의 의미는, 하나님이 생각하고 바라시는 사랑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러면 사람이 생각하는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기독교의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할 때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향하시고 베푸시는 것을 충분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말이다. 사실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그 역사 속에서 간섭하심으로 나타나시고, 은혜와 징계를 통하여 표현되고, 계시되신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느슨하거나 적당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다. 또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하기도 하며, 인간을 향하신 그의 행위의 표현이기도 하다. 또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통하여 사랑을 받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어주시면서도 사람들을 통하여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1. 사랑의 하나님이란 어떤 하나님이신가
1)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다.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자녀가 될 사람이 자신의 수태의 시기, 성의 구분, 부모의 대한 선택 등을 자기가 생각해 보고 선택하고 고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힘에 의해서 자녀는 결정되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누구의 자녀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역시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함은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고 자녀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알 수 있는 방법은 성령님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확신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킬 때 가장 훌륭하고도 진정한 교육을 시키기를 원하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은 부모나 스승이 불의 하거나 거짓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행위를 할 때 자녀나 제자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악이나 선에 대하여 분별할 수 없는 소경과 같으며, 또 양심도 무디어져서 죄를 느끼지도 못하여, 오히려 더 강퍅하고 마비된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분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힘입어 깨닫고 확신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디어진 양심이 치료함을 받아야 하며, 악화된 영혼이 치료함을 받아 죄를 분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과, 시간과, 힘 등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계신다. 희생이라는 것은 조건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조건적으로 사랑하시지 않으셨다. 또 어느 순간에만 사랑하시는 분도 아니다. 우리가 불의를 행하는 때에도 반역을 행하는 때에도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고 계신다. 창18:에 소돔과 고모라성이 죄의 극치를 보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의인의 수를 50명, 40명, 30명, 20명, 만약 10명이라도 찾는다면 하나님이여! 그때는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고 수를 헤아리는 아브라함의 노력과 함께, 10명이라도 있다면 그 성을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또 요나서에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 요나를 통하여 죄를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 등 10만 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람인 요나는 모두 죽기를 바라며 다시스로 도망을 가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요나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시며 아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수 없는 불법을 보면서도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기보다는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때가 되매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끝없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자신이 아끼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참으심을 진노와 멸망으로 나타내시지 않으시고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행하셨는데, 그 방법은 독생자를 보내 주시는 것이다. 또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은 증거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닌가의 행함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요4:11) 사랑의 완전한 표현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 죽으심을 통하여 “나는 너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표현을 하셨는데, 이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순간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속되는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될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은 듯하나 진정한 사랑이 없으며 참음도 없는 일시적인 것뿐이다. 사랑을 하되 희생이 없는 사랑이며, 행함도 없는 말뿐인 사랑이다. 모두가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꾸준히 참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만 오로지 사랑을 위해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오늘의 세상인 것이다.
2. 자비로우신 하나님
1) 자비의 본질은 긍휼이다. 긍휼이란 말은 자궁이란 뜻의 명사로서 “레헴”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자비라 할 때 무엇인가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만 유대인들은 자비라 할 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보호하며, 출산하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이 되었기 때문이다.(욥31:15에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임신에서부터 출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이는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지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또 자비란 오랫동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하나님의 자비는 순간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것이며, 한량없이 땅에 충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패역한 자식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연장시키시며, 죄를 회개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상기시키며, 결국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자비는 어떻게 나타나시는가 인간 창조에 나타나셨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란 지정의를 포함한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데, 진실, 자비, 사랑, 선, 등 하나님이 지니고 계시는 모든 아름다움을 우리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으로 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형상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며, 이것마저도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습 정도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해 보기를 바람(소, 말, 돼지, 개 등등)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나타나심. 마3:13-17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면서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며 기뻐하는 자라도 너희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신다.
3) 선교의 현장에도 나타나심. 마28:19,20에 주님이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셨는데,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역이 택하신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버림을 받은 이방인들까지 또 믿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는 그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세상 끝 날까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3)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는 어떻게 임하시는 충만하게 임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는 줄 듯 말 듯, 느낄 듯 말 듯, 받을 듯 말 듯이 아니라 주시되 충만하게 주신다. 충만 이란 차고 넘치게 임하는 것을 말한다. 죄는 우리에게 고통과 사망을 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주시되, 넘치도록 주신다. 구원받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위로와 참된 기쁨을 넘치도록 주시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도록 주신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들에게 주시되 영원히 지속되도록 주신다. 창8:21에 인간들의 죄악이 땅에 광포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물로서 심판하셨다. 인간의 죄악이 극치를 달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도 극에 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하셨다. 그러나 사랑의 징계가 끝난 뒤에는 자비의 위로를 주시는데,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하시면서 노아 시대에 내려졌던 홍수를 다시는 내리시지 않겠다는 굳은 자비의 의지를 보여주셨는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이 되는 것이다. 측량할 수 없이 베풀어주심. 하나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며 깊고 높은가를 측량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여 그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비로 처리하신다.
1. 사랑의 하나님이란 어떤 하나님이신가
1)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다.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자녀가 될 사람이 자신의 수태의 시기, 성의 구분, 부모의 대한 선택 등을 자기가 생각해 보고 선택하고 고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힘에 의해서 자녀는 결정되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누구의 자녀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음을 말한다. 역시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함은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고 자녀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알 수 있는 방법은 성령님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된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확신하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시킬 때 가장 훌륭하고도 진정한 교육을 시키기를 원하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은 부모나 스승이 불의 하거나 거짓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행위를 할 때 자녀나 제자들로 하여금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악이나 선에 대하여 분별할 수 없는 소경과 같으며, 또 양심도 무디어져서 죄를 느끼지도 못하여, 오히려 더 강퍅하고 마비된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분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힘입어 깨닫고 확신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디어진 양심이 치료함을 받아야 하며, 악화된 영혼이 치료함을 받아 죄를 분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물질과, 시간과, 힘 등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계신다. 희생이라는 것은 조건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조건적으로 사랑하시지 않으셨다. 또 어느 순간에만 사랑하시는 분도 아니다. 우리가 불의를 행하는 때에도 반역을 행하는 때에도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신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고 계신다. 창18:에 소돔과 고모라성이 죄의 극치를 보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의인의 수를 50명, 40명, 30명, 20명, 만약 10명이라도 찾는다면 하나님이여! 그때는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고 수를 헤아리는 아브라함의 노력과 함께, 10명이라도 있다면 그 성을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다. 또 요나서에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 요나를 통하여 죄를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 등 10만 명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람인 요나는 모두 죽기를 바라며 다시스로 도망을 가고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요나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시며 아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수 없는 불법을 보면서도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기보다는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때가 되매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 끝없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자신이 아끼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대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참으심을 진노와 멸망으로 나타내시지 않으시고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행하셨는데, 그 방법은 독생자를 보내 주시는 것이다. 또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은 증거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닌가의 행함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요4:11) 사랑의 완전한 표현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 죽으심을 통하여 “나는 너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표현을 하셨는데, 이는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순간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속되는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될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은 듯하나 진정한 사랑이 없으며 참음도 없는 일시적인 것뿐이다. 사랑을 하되 희생이 없는 사랑이며, 행함도 없는 말뿐인 사랑이다. 모두가 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꾸준히 참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만 오로지 사랑을 위해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오늘의 세상인 것이다.
2. 자비로우신 하나님
1) 자비의 본질은 긍휼이다. 긍휼이란 말은 자궁이란 뜻의 명사로서 “레헴”에서 유래되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자비라 할 때 무엇인가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만 유대인들은 자비라 할 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보호하며, 출산하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이 되었기 때문이다.(욥31:15에 “나를 태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임신에서부터 출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이는 악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주어지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또 자비란 오랫동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하나님의 자비는 순간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것이며, 한량없이 땅에 충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패역한 자식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연장시키시며, 죄를 회개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상기시키며, 결국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자비는 어떻게 나타나시는가 인간 창조에 나타나셨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란 지정의를 포함한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데, 진실, 자비, 사랑, 선, 등 하나님이 지니고 계시는 모든 아름다움을 우리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으로 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형상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며, 이것마저도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습 정도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상상해 보기를 바람(소, 말, 돼지, 개 등등)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나타나심. 마3:13-17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면서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며 기뻐하는 자라도 너희를 위해서라면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 주겠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신다.
3) 선교의 현장에도 나타나심. 마28:19,20에 주님이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셨는데,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역이 택하신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버림을 받은 이방인들까지 또 믿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는 그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세상 끝 날까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3)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는 어떻게 임하시는 충만하게 임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는 줄 듯 말 듯, 느낄 듯 말 듯, 받을 듯 말 듯이 아니라 주시되 충만하게 주신다. 충만 이란 차고 넘치게 임하는 것을 말한다. 죄는 우리에게 고통과 사망을 주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주시되, 넘치도록 주신다. 구원받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위로와 참된 기쁨을 넘치도록 주시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되도록 주신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들에게 주시되 영원히 지속되도록 주신다. 창8:21에 인간들의 죄악이 땅에 광포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물로서 심판하셨다. 인간의 죄악이 극치를 달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도 극에 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하셨다. 그러나 사랑의 징계가 끝난 뒤에는 자비의 위로를 주시는데,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하시면서 노아 시대에 내려졌던 홍수를 다시는 내리시지 않겠다는 굳은 자비의 의지를 보여주셨는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이 되는 것이다. 측량할 수 없이 베풀어주심. 하나님의 자비는 얼마나 크며 깊고 높은가를 측량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여 그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비로 처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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