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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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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5절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다시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먹여 주신 생명의 양식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은 죄인 치고 멸망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 자기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중량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 이래 구원받기로 작정된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먹고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이 위대한 생명의 노다지인 하나님의 자기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랑에는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스톨게(στοργ)라고 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혈통적 사랑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은 필리아 (φιλα) 곧 형제사랑입니다. 그리고 성적(性的)인 낭만을 나타내는 에로스(ρω)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왕인 아가페(γπη)가 있습니다. 이는 희생적 사랑, 대속적 사랑, 하나님께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아가페(γπη)이시라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I. 사랑의 객관성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랑의 원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의 근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본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란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속성이란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본래부터 신적인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주관적 산물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의 지식적 산물이나, 노력적 산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랑은 본래부터 하나님 자신께 속한 객관적 성질의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속성 중에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많은 속성을 전혀 도외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실로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전능이 있고, 전지(全知)가 있습니다. 거룩이 있고, 의로움이 있습니다. 영원함, 불변함, 등등이 있습니다. 그 여러 속성들 가운데 ‘사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여러 속성 중에 특별히 ‘사랑’이 알려지고, 그 사랑과 관계가 깊은 것은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멸망받을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선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객관성을 보여 줍니다.
Ⅱ. 사랑의 공개성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타난 바 된 사랑’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기 사랑의 공개성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 공개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 안에… 나타났다 고 한 뜻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마 1:21)입니다. 자기 땅의 자기 백성 (요 1:11)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 (요 13:1)을 사랑하였습니다. 그 공개된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심 이었습니다. 바로 독생하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바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온 천하에 폭로하고, 공개하신 전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생 가운데 사람과 함께 거하시도록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의 공개적 임마누엘(마1:23)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공개를 뜻합니다. 만민이 그를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귀로 그 음성을 듣고, 손으로 그를 만질 수 있도록 역사의 한가운데 공개한 것입니다(요일 1:1). 그래서 그는 세상의 빛으로 알려 지고 말았습니다(요 1:9, 8:12).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저 미국 뉴욕에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가정마다 그 집의 유리창에 별을 하나씩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자기 어린 꼬마와 함께 그 밤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이 꼬마는 각 집마다 불이 켜 있는 유리창에 빛나는 별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야! 신난다.” 하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걸어가며 계속해서 이 집 저 집을 지나가는 가운데 궁금해진 꼬마는, “아빠! 저것 보세요. 왜 집집마다 저렇게 별을 달아 두었을까요” 하며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아빠는 “응. 그래. 저 별들은 저 집주인의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표시란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때 꼬마는 “어! 저기도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집이 또 있네. 아빠! 저쪽에 있는 집 창에는 별이 두 개나 붙어 있잖아요 저 집엔 별이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또 저 집은…” 이렇게 외치면서 길을 걷고 있던 꼬마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꼬마는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빠! 저기 보세요! 하나님도 저렇게 많은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셨나 봐요. 별이 저렇게 많이 반짝이고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저 순진한 꼬마가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죄인(우리)을 사랑하사, 하늘에 반짝이는 지음받은 별이 아닌, 당신 품속에 독생하신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와 싸움하여 우리를 구원코자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만천하에 공개된 영광의 날입니다.
Ⅲ. 사랑의 목적성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 하반절에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공개’ 되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공개된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확실한 목적, 뚜렷한 목적, 결정적 목적, 영원한 목적, 성취적 목적입니다.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롬 5:5).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다고 하였습니다(롬 5:8).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개적인 자기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확증시켜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1 우리가 아직 연약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6)고 한 것입니다.
2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한 것입니다(롬 5:8).
3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과 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고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롬 5:10). 이것이 공개된 하나님 자기 사랑의 궁극적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공개된 하나님 자기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살리는 것, 곧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 하반절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기 사랑의 위대한 목적성은 ‘살림’에 있었습니다. ‘구원함’에 있었습니다. ‘영생을 줌’에 있었습니다.
Ⅳ. 사랑의 선수성(先手性)입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특수성이 있고 차별성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죄인된 인생을 찾아오심입니다. 바로 자율주의 종교가 아닌, 타율주의 종교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 에덴의 범죄한 아담에게, 두려워 도망치고 있던 아담에게 하나님 편에서 찾아 오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찾아 오셨습니다(창 3:9).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계시하여 주었습니다(창 3:15). 하나님 편에서 노아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주를 계시하였습니다(창 6:13-15).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2:1-5). 하나님 편에서 모세와 그 백성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대명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출 3:1-14). 하나님 편에서 다윗을 찾아 오셨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삼상 16:12-13). 하나님 편에서 범죄한 요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을 회복해 주었습니다(욘 2:7, 10).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어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게 하였습니다(눅 19:9-10). 사랑은 여기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1선수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2 처음부터(먼저)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3 무조건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4 계획적이요, 목적적이요, 필연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5 그리고 불변적이요 부동적인 영원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6 자원적이요 감심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7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8 궁극적 구원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9절에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고 하였습니다.
Ⅴ. 사랑의 공유성(共有性)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함께 가지고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1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바람의 결과로 알 수 있습니다. 전기는 볼 수 없지만 그 전기가 끼치는 영향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산소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가 그것을 마시므로 살 수 있다는 결과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됨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통하여 알게 됩니다(요 1:18, 요일 4:12, 16).
2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요일 4:11, 20, 21).
3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게 됩니다(요일 4:15). 그리고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요일 4:16).
4 담대함이 일어나고 두려움이 물러가게 됩니다(요일 4:17-18).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가 함께 누리는 공유적 성질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탄생은 만민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눅 2:10).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뿐입니다. 병든 자에게는 의사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막 2: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사람된 위대한 행복과 가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여기에 있습니다. 태양은 지구보다 130만 배나 큽니다. 베델고이스(Betegeuse)란 별은 태양보다도
2,500만 배나 더 크다고 합니다. 그러나 크다고 하는 그 대형의 형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식물들 가운데 정말 신묘막측한 모양과 크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것들이 수없이 많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동물들 가운데도 얼마나 크고, 그 기능이 사람보다 우수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듣는 데 있어서, 보는 데 있어서, 뛰는 데 있어서, 힘에 있어서, 크기에 있어서 사람들보다 월등합니다.
그런데 저들에게 있는 그러한 조건들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류들 가운데도 사람보다 그 기능면이 우수한 것들이 많고, 어류들 가운데도 사람보다 그 기능면이 절대적으로 우수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저들 세계에는 사람들의 세계가 향유하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히 인간 세계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피조물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의 체구(體具)는 비록 다른 피조물보다 한없이 적지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가진 작은 인생은 큰 우주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그 사랑과 직결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주위의 공기는 숨쉬는 우리 사람들의 폐(肺)에 약과 같이 되었습니다. 태양 빛은 멀리서 공기를 통하여 땅에까지 비추게 함으로 우리 인생에 유익하도록 조절하였습니다. 흙은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는 식물들을 산출하는 간접적 자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물은 너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3:21). 물론 자연계로 인하여 사람이 손해를 입고 생명을 잃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자연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창 1:28)을 다하지 못한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 중에도 특히 사람이 죄 가운데서도 다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사람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게 된 피조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멸망에서 살리는 영원한 구원의 사랑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 아니 오늘 지구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사는 행복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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