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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됨 (요일2:5-8)

본문

성경말씀은 요한 일서 2장 입니다. 요한 일서 2장 5절부터서 봉독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 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 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속에 거리낌 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하였음이니라 여기,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 전케 되느니라. 그리고 이것으로서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로 안다.하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사랑을 행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온전케 된다는 것을 생각 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처음에 역사하여 나타나 객관화 된 것이, 물론 그렇게 여기 다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이의도 제기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내에 이 사랑을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객관화 된 것이 그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사랑이 다 시 아버지에게로 귀환되게 되는 것이 그의 영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의 생활은 그리고 하나님 내에서의 운동은 항상 아버지에게 출발하여 아들을 통해서 나타 나고 그리고 영을 통하여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가므로 완성에 이릅니다. 그 사랑의 역사 가 아들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났고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사랑이 나타나서 우리만 가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나타내면 그 사랑이 아버지의 처음 사랑에 상 응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야 할 완전한 구원을 다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면에 있 어서 하나님 사랑이 온전케 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무엇이냐 그것은, 요한이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사랑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 시고 구속하시기로 하신 모든 그 역사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실려고 하는 그 역사를 목표하여 왔고 그리고 준비됐는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사랑이 나타나서 세상을 구원하게 되고 우리의 죄를 속하 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사랑이고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것이 또 그의 모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이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죽으심으로 그의 역사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 셨기 때문에, 바로 이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루신 일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몇몇 개인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인류를 목표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 이웃에게로 연결되고 나타날 때 하나님 사랑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증거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완전하게 되는 거는 실행하므로 만이 가능합니다. 사랑을 그러면 보통 쉬운 말로 알기 쉽게 정의하면 무엇이냐 자기의 즉각적인 감각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 이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을 내 어 놓으시므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아히비' 라는 말로 사랑을 나타냈는데(물론 그외에 유사한 단어도 있지만) 그 사랑을 나타낼 때에 아직 구약 백성들에게는 희랍 사람들처럼 여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그와 같은 구분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랑을 특별히 언약 관계 내에 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약에서 말한 사랑도 신약의 아가페에 상응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 하면, 항상 무조건 모든 걸 다 덮어버리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는 것을 사랑으로 은혜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사랑되게 못하며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구원하실려고 역사하셨으되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공의를 소멸하시고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의 공의를 세우시므로 자기가 사랑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공의의 법이 무너지면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공의만 말하면 사랑을 우리가 생각할 수 없지요. 제가 화면에서 이런 걸 비슷한 걸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참 선량한 시민이었습니다. 잘 못하다가 법망에 걸려들게 됐습니다. 어떻게 잘해서 세상적으로 잘해서 이름을 바꿔가지고 다른 데 가서 참 선한 시민으로 사회에 많은 유익을 주면서 큰 유익한 일을 벌이게 됐습니다. 그것이 이름을 감추고 일한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소위는 다 이야기할 필 요 없고 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래서 당장 주지사로부터서 사람들이 파송되어 그 사람을 잡 으러 왔습니다. 이름을 바꿔가지고 아주 선량한 시민으로 많은 공을 세우며 훌륭한 일을 많 이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과 많은 주위에 소속되어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 또 그 당사자의 형님이 목사여서 주지사에게 청원을 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고 그랬으니 그의 선 한 시민됨을 참작해서 그 사람의 과거의 죄과를 용서해줘야 옳지 않느냐 그렇게 하고 열심히 신문도 노력하고 탄원도 하고 여러 사람이 노력했습니다. 변호사가 와서 말했습니다. 변호사가 그 주지사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그 주지사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새로된 주지사는 참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 해보자. 변호사가 주지사를 만났습니다. 형님된 목사가 주지사를 만났습니다. 많은 신문기자들이 그 리고 사회의 유지들이 주지사를 만났습니다. 탄원을 해서 그로 하여금 석방되게 자유민으로 살도록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도 주지사가 고개를 흔들면서 아무리 그가 선한 일을 많이 했 기로서니 그가 법을 어겼으니 그 벌은 받아야지 그냥 방면하면 법이 서지 못합니다. 누차 말했습니다. 누차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끝내는 주지사가 사면될 거를 거부해버렸 습니다. 참 많은 형 기간을 받아서 오래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참 이 사람 젊은이에게는 너무 치명적이었습니다. 늘 탈출을 시도합니다. 탈출하면 또 잡히고 또 감옥의 강제 수용소 에 들어가서 또 강제 중노동을 합니다. 또 잡히고 또 탈출하고. 그리고는 그의 인생이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이 끝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걸 보고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정말 미국 사람들의 법 개념이 저렇게 철두철미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 같으면 십분 사면해 줄 수 있는 그와 같은 정상을 참작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용납해 주지 않 았습니다. 그러니 법은 섰습니다. 하나님에게서는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세우고 죄는 용서 해주시는 방향으로 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용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은 무조건 용서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할 때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가 있습니다. 그냥 지나고 나면 세월이 다 해결 해주는 걸로 압니다. 세월이 해결 해줘도 그 주지사가 아무리 세월이 지났기로서니 아직도 그에게 내린 판결은 유효하기 때문에 그걸 취소할 수 없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냥 세월만 지나면 용서되는 걸로 알고 제거되는 줄로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 용서 받는 길은 반드시 용서를 구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국 교회에 있어 서 한 가지 잘못 인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해 바치며는 형제간의 잘못 한 것은 용서를 빌고 사과하지 안해도 다 해결되어 버리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건 전적으 로 성경에 배치(背馳)이고 특히 주님의 가르침에도 배치된 해결의 방식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제사를 드리러 제물을 갖고 가다가 제단에 다 가서 형제와 문제가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그 제단에 두고 가서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와서 제사를 드 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그 제물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요한일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간에 문제가 있을 때 사 과하고 용서를 빌고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용서가 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요한 일서 2장 초반까지 오면서 반복해서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 입니다. 반드시 하나님 앞에 용서 받는 길은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기도 없이 용서되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 또 우리의 소설에도 용서되는 길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님과 시간이라, 그냥 무작정 용서만 해 주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아는 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웃에게 나타낼 때, 사랑을 나타낼 때 우리가 진짜 주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사랑은 나타나 야 됩니다. 사랑은 열매를 맺어야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은 하지 아니하고 그렇게 믿음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지 아니하며 믿음의 성취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기도하고 믿음으로 우리가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참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바른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없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신학 의 용어를 빌린다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혹은 그리스도와 접붙여져 있다. 혹은 요한일서 처음에 말하고 강조했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냥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런 장소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생명줄에 연결되어 있다는 말 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슴이 나 타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에 남을 도우며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임 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기도 많이 해서 소원 성취 많이 하는 것으로 그렇게 예수 믿는 것을 그리스도인 됨을 나타낼려고 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으 로 서로 사랑하는 일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남에게 전해 줘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 의 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6절 보면, . 그리고 그 안에 머무른다 고 말하는 자는 바로 주님이 걸으신 것처럼 행하신 것처럼 그 자신도 이와 마찬가지로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가 행하신 것처럼 저가 걸 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은 다 남을 위해서 자기를 내어주는 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은 일생 다 자기를 위한 생이 아니라 남을 위한 생이고 마지막까지 자기의 마지막에서는 자기의 목숨을 다 내어놓으며 그러므로 남을 구원하고 남을 잘되게 하는 그의 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면그 안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러면 그와 함께 한 생명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역사했던 그 생명이 지금 우리에게 와서 동일한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행했던 것처럼 우리도 행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이 이 사도의 주장입니다. 그가 바로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처럼 바로 그처럼 그 자신도 이처럼그렇 게 행해야 된다. 살아야 된다. 여기서 행하다는 말은 바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의무, 당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행할 수 있느냐 하면 우리 안에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이 와 있어서 우리에게 있는 생명이 역사하는 생명이 그리스도에게서 역사했던 생명과 다른 생명 이 아니라 동일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그 부활의 새 생명을 받아 가져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역사하여 남을 위한 일생을 살게 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머무르면, 그 안에 있는다 머무른다는 말이 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혹은 접붙여져 있다 혹은 그리스도의 생명줄에 연결되어 있 다는 뜻입니다. 반복하지마는, 자꾸 사도가 계속해서 반복을 계속하기 때문에 반복할 수밖 에 없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가 사신 것처럼 우리 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백성 너무 이기적 입니다. 전부 다 자기 만을 위한 그와 같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교회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남의 교회 조금 돕기는 하지요. 그리고 더구나 우리 교단의 제일 약점이 무엇이냐 신학교 돕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대로 이 신학교 와 서 가르쳐 가지고 한푼이라도 더 가져가고 내가 총신 강사라고 하는 이런 명예를 낼려고 하는 생각은 많아도 도울려고 하지는 않는다. 전부 다 자기 만을 유익하게 할려고 애를 쓰 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랑을 나타낼 때이고 사랑을 연습할 때 입니다. 이제 더 이상 소원성취 되는 것, 자기가 잘 되는 것으로 자기 과시 하는 데에서 이제는 여기서 벗어나서 정말 사랑을 연습하고 사랑을 행할 때가 됐습니다. 지금 모든 교회들이 한결같이 다 개인의 잘됨 그리고 나아가서 그 개교회가 잘 되고 그거 만을 전부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남을 도울려고 하지 않습니다. 약한 교회를 도울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 기 교회는 행사가 많습니다. 일이 많습니다. 자꾸 일을 만들다 보면 행사가 더 많아지지요. 어느 교회고 돈 안 쓸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핑게 저 핑게 대고 가난한 농촌교회 를 가난한 개척교회를 그리고 신학교를 도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을 7백이다 8백이다 하는데 실제로 700인지 800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도울려고 하지 않는다. 다 자기 교회 예산은 1년에 몇 천만원 몇 억씩 되면서도 신학교 몇 푼 돕는 것은 예산이 없습니다. 해야 될 의무금도 안 하고. 아마 왜 그런지 신학교에서 교육을 쉽게 받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고생을 많이 하고 눈물을 흘리고 나가야 이 신학교가 좋은 지 알텐데 그런데 쉽게 미끄럼틀 타듯이 밀고 나갔으니 신학교의 교육이 얼마나 절박하고 절실한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잘됨과 개교회 잘 되는 것으로 자기 에고를 과시하는 데서 떠나서 이제 정말 피차 나눠 가지며 서로를 도우며 서로 위하는 이와 같은 사랑을 나 타낼 때가 됐습니다. 5절에 보니 . 이것으로서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줄 안다. 나타났으니 안다는 말 입니다. 나타났으니 알지요. 이제 우리는 사랑 을 나타낼 때가 됐습니다. 더 이상 방언 받아가지고 잘 되는 보장으로 신유 은사 받아가지 고 잘 되는 보장으로 또 무슨 예언 해가지고 잘 되는 보장으로 삼는 데서 벗어나서 정말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남을 사랑하는 것이 생활화 돼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킨다고 하는 말, 5절에지킨다고 할 때 우리는 아주 애써서자기 찾 던 자리에서 벗어나서. (Tape A면 끝).이 크게 잘못 돼있고 병들어 있습니다. 저가 행하셨던 것처럼 그도 이와 마찬가지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저 안에 거하면 그의 행하신 대로 잘 행함이라. 저가 행하셨던 것처럼 저가 살으셨던 것처럼 그도 이와 같이 살 아야만 할 것이다. 주님이 자기를 위하여서 살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여서 살았습니다. 우리 의 구속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 놓았습니다. 우리도 이 사랑을 받았으니 남을 남을 도우며 살아야 될 것입니다. 남을 도우며 살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남을 도우 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主從관계로 변합니다. 남을 좀 도우면 주종관계로 변합니다. 조금 돕는다고 그러면 우월감에서 그런지 말투가 벌써 달라집니다. 곧장 하대하는 말이 나옵니다. 돕는 사람이 할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제가 아는 대로는 그러지 않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가졌는데 수고해서 벌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벌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나누어 갖는 것을 자기들의 바른 본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 그런 생각을 합니까 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좀 돕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도움 받는 사람이 완전히 인격적으로 바로 설 수 없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거는 저 가 행하신 것처럼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가 커서 돈이 넘치는 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소원 성취 되는 것으로 자 랑하지 말고 우리 교회 교수가 몇 명이고 우리 교회 사장들이 몇 명이고 우리 교회 중앙부 서의 직원이 몇 명이고 그런 것으로 자기 과시를 하는 것을 그만하고 정말 그리스도처럼 종의 형상으로 남을 위해서 사는 봉사와 사랑을 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방궁 밖에 뭐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아방궁 되는 거 외에 뭐가 다릅니까 교회는 크게 크게 해서 돈은 많이 나와 돈 자랑 밖에 더 있습니까 35만 모인다는 교회가 왜 그렇게 부럽고 좋습니까 금년에 들으니까 53억 이상씩 나온다, 아니 백 억 내지 백 오십 억씩 나온다. 마포에 있는 어느 교회 2천 명 모이는데 1년에 9억 7천만원 작년에 나왔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정말 사랑을 나타내며 그가 살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살아야 할 그처럼 살 아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제는 사랑을 나타낼 때 입니다. 더 이상 나 만을 위해서 더 많이 구하는 데에서 남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남에게 손을 벌리고 끝까지 펼치고 그래서 참 이 땅에 물질적으로 너무 이렇게 구분이 심하므로 어려움 겪는 데서 물질의 평준화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을 지금부터 시작하고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 어떻게 사랑을 나타낼 것이냐 6절이 그렇게도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행하셨던 것처럼 주님이 종의 형상으로 남 을 위해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남을 위해서 도우며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남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우월하다고 하는 생각을 내버려야 될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남을 도우면 자기가 우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월감을 맛 봅니다. 그것은 저가 행하신 것처럼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행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사랑할 것입니까 바로 주님이 행하신 것처럼 종의 형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그리고 일생 남을 위해서 사신 그와 같은 생을 우리도 본 받아서 우리도 바로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7절,, . . 사랑하는 자들아, 여기서 사랑을 받는 자 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 을 받았다는 뜻하고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언약관계에서 이루 어졌기 때문에 바로 언약관계에 들어간 택한 자들이라고 하는 말과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말은 하나님 택하셨다는 말과 일치합니다.사랑하는 자들아는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혹은나는 택함 받았다 고 하는 말입니다.그러니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 옛 계명, 처음부터서 너희들이 듣고 있었던 옛 계명을 쓴다. 지금 계속해서 사도가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계명을 말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새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 계명을 처음부터서 여러분들이 들었던 복음을 선포 받았을 때부터가 언제냐 복음을 선포받았을 때부터 너희들이 들어서 갖고 있는 계명,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 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사랑하라고 하는 이 사랑의 계명은 지금 처음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었던 그때 부터서 다 갖 고 있는 계명을 쓴다는 말 입니다. 그러니 새 계명이 아니고 옛 계명 입니다.
왜냐하면 이 제 내가 처음 써야 그것이 새 것인데 이미 받아 가지고 있던 계명에 대해서 다시 쓰니까 옛 계명이다. 그가 언제냐 복음을 처음 듣고 믿어 알 때부터 갖고 있던 그 때를 말합니다.그 옛 계명은 무엇이냐 너희들이 들었던 이미 들었던 말씀, 하나님이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랑이시고 그가 우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는 그 말씀 그것이 바로 옛 계명입니다.
그런데 8절 그런데도 다시 새 계명 을 내가 너희들에게서. 자, 이제까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옛 계명인데 다시 새 계 명을 또 쓴다. 그러니 이 계명이 다른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옛 계명인데 새 계명이 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하나님 의 사랑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내어 놓으시고 그 피에 자기가 흘 리신 피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실제로 구약이 지향하고 목표하고 왔던 사랑은 바 로 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구약 백성들은 아직 이 사랑을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시고 그리고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사랑하신 그 계명은 구약의 백성 들이 바로 알지 못했던 정말 새로운 계명입니다. 피로 세운 피로 확립시키신 사랑,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만 나타난 계명이고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그렇기 때문에 바로 새 계명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라는 그 계명이 바로 새 계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 하반절에그것이 그 계명이 진실 로 그에게 먼저 있었고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있다. 왜 새 계명이냐 그 냥 서로 사랑하라.서로 사랑하라그렇게 주신 계명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계명은 구약에도 있고 랍비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친히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시고 그 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시고 자기를 주시면서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아직 구약 백성들이 분명히 깨닫지 못했던 새 계명 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랑에 비추어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구약의 백성들이 그리고 주님 당시에 백성들이 알지 못했던 계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이들이 처음부터서 예수 믿을 때 부터서 받아 가진 계명입니다. 그 계명은 구약 에서는 아직 알지 못하던 그와 같은 분명한 새 계명 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됩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시듯 그렇게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바른 사랑이고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바른 계명입니다. 그 계명이 그 말씀이 그의 안에 있었고 그리고 지금 너희에게도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그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남 기시고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명령만 해서 되는 새 계명이 아니라 실제로 그가 싱행하시고 살으시고 나타내신 계명이기 때문에 그것이 새 계명이고 그것이 아버지로부터서. 왜 그 안에 있었다고 했느냐
그런데 왜 그 새 계명이 그 안에 있었다고 했느냐 그 계명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가졌기 때문에 그 안에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처 음 유래된 것이 아니라, 물론 처음 그리스도에게서 유래됐다고 할 수 있지만 그 계명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놓는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명이 었습니다. 그러니 그 계명이 그의 안에 먼저 있었고 그리고 그의 생명이 우리에게도 오니 우리에게도 있는 것이 됐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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