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하여 (요일3:14-18)
본문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성숙해야 할 구체적 부분에 대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생활에 온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알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난과 비판의 말이 아니라 격려와 위로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려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진실되게 거짓없이 말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가 성숙하고 온전해져야 할 믿음의 삶의 또 다른 부분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럼 우리들이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힘써야 할 두번째 일은 무엇이니까 그것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 사도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살전4:9) 형제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살후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베드로 사도의 말씀도 동일합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도 요한의 말씀도 일치합니다.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렇게 기독교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사랑이 서로간의 사랑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 서로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한 쪽만 베푸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서로 사랑은 서로간에 인격적인 교감이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가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이 아니라 둘 이상이 서로 사랑을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혼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7:8-9)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몸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럴때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버리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시도록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단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해서는 않됩니다. 사랑을 주려고 해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고 사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함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시는 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와 부패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함입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을 구원하시려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지옥의 멸망을 향해 가던 우리를 구원하시려 사랑을 주셨습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죄와 사망으로 가득찬 세상! 이 세상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세상”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이 세상의 세속적인 삶을 본 받아선 않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저주하고 비난하고 멸망하기를 원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요즈음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세상을 저주하고 세상을 향하여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존파라는 조직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 사회의 가진자를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온보현이란 사람도 그랬습니다. 자기 나이 만큼의 사람을 죽이려고 까지 계획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남을 죽이는 살인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닥치는 대로 자기의 차로 어린이들과 사람들을 치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저주하고 자기 삶의 비참함을 세상의 탓으로 돌리며 이런 극단적인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이 세상을 타락한 세상이요 하나님의 곁을 떠난 부패한 세상이지만, 이 세상의 구원을 원합니다. 타락과 부패 부정과 온갖 죄악들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상을 사랑하는 눈으로 봅니다. 이것은 세상의 구원을 바라는 눈초리입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멸망에서 구원을 소망하는 눈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구원을 여러차례 간구했듯이 우리도 이 세상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세상을 저주하거나 세상에 대해 악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장망성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성숙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저주하고 도피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각자의 처소에서 전도와 선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서로 사랑이 말로만 그쳐서는 않될 것을 말씀합니다(요3:17-18). “(요일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우리의 물질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것을 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교인들은 그 장로님이 참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모두가 칭찬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기 떄문입니다. 어느날 그 장로님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께서 새벽에 무슨 기도를 그렇게 하시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새벽 기도를 따라 갔습니다. 그리곤 자기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며,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참 훌륭하시구나 이렇게 많은 기도를 하시다니” 그는 다음 날도 따라가서 무슨 기도를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기도는 어제와 별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항상 간절한 모습의 기도였습니다. 어느날 장로님이 자기의 금고를 열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고 문이 잠겨 있질 않았습니다. 깜짝 놀란 장로님은 급히 돈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혹시 자기 아들이 이런 짓을 했나 해서 자기 아들을 불렀습니다. 이떄 마침 아들이 들어오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영문을 모른 아버지는 “그게 무슨 소리냐 내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아 아버지께서 새벽마다 기도하시지 않으셨어요 전도사님께 등록금을 마련해 주시고 이웃 김집사가 끼니가 없어 굶는데 쌀을 보내 주시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거지요” 그러자 이 장로님은 어이가 없어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 장로님과 같지 않습니까 자기의 것을 움켜쥐고 말로만 사랑을 외치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한 몫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웃 사랑을 우리의 돈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시간을 내어 실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제 우리 공덕교회도 나누고 베푸는 교회,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성숙해야 합니다. 또한 세번째로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사회에 대한 봉사를 통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사랑으로 충만해지도록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교회 안에서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 봉사를 통해 이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습니다. 자기 몫만을 챙기려는 이기주의가 더욱 기세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에 우리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이 사회에 심어야 합니다. 자기 희생과 섬김, 베풂과 나눔의 기독교의 덕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 봉사라 해서 무슨 사회단체에 가입하거나 큰 돈을 내는 일로만 생가해선 않됩니다. 우리는 이 사회봉사가 무슨 거창한 일을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님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의 실천을 통해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각자의 가정에서 부터 이 봉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그릇된 경쟁의식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을 짓 밟고라도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어서는 않됩니다. 남을 비난하고 시기하며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이겨야 한다는 “비열한 승자”가 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이기기를 다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인격자” “참 사람됨”의 중요함이,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함을 마음 깊이 새겨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직장에서 사회 봉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기독교적 사랑을 가지고 자기 직무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자기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를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점검하는 사람은 정직함으로, 수리를 맡은 사람은 성실함으로 그 일을 이루면 됩니다. 도로를 관리하는 사람은 부지런함으로 길을 살피고, 집을 짓는 사람은 설계대로 충실히 하면 됩니다. 높은 공직에 있는 사람은 뇌물과 청탁을 거부하며 부정과 부패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의 사회 봉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각자가 자기의 이웃에게 문을 열므로서 사회적 봉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과 더불어 건전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웃 사촌이 되어 서로 돕는 것입니다. 고층 아파트가 현대인이 선호하는 생활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삶의 방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욱 갈라 놓았습니다. 아파트 벽의 두께는 50CM도 않되지만 사람끼리의 거리는 천리나 떨어져 삽니다. 이웃 50CM 옆에서 살인이 저질러져도 모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맛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웃 사촌이란 말은 옛말이 되어 갑니다. 인정없는 세상, 삭막한 시멘트 덩어리만 있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더욱 기독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이웃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복음으로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로가 사랑하는 사랑의 봉사가 필요합니다. 교회의 심방과 구역예배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가 사랑의 관심으로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이 “심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동네의 성도끼리 굳게 닫힌 대문을 서로 열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구역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서로가 사랑의 섬김을 이루는 사랑의 실천장이 바로 구역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불신 가정의 문도 두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참석하도록 사랑의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역장과 구역의 지도자는 이웃 사랑의 실천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회봉사를 거창한데서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이 사회에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서는 온전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과 혀가 아닌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재물과 시간을 드려 사랑의 실천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이 죄 많은 사회에 사랑을 심기 위해 사랑의 사회 봉사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위해 살기보다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위로 충만하신 역사가,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여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를 다짐하는,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말을 진실되게 거짓없이 말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가 성숙하고 온전해져야 할 믿음의 삶의 또 다른 부분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럼 우리들이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힘써야 할 두번째 일은 무엇이니까 그것은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 사도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살전4:9) 형제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살후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베드로 사도의 말씀도 동일합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도 요한의 말씀도 일치합니다.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렇게 기독교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사랑이 서로간의 사랑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 서로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한 쪽만 베푸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서로 사랑은 서로간에 인격적인 교감이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 받는 자가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받는 사랑이 아니라 둘 이상이 서로 사랑을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혼자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7:8-9)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몸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럴때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버리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시도록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단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해서는 않됩니다. 사랑을 주려고 해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고 사랑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함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시는 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와 부패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세상입니다.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함입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을 구원하시려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지옥의 멸망을 향해 가던 우리를 구원하시려 사랑을 주셨습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죄와 사망으로 가득찬 세상! 이 세상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서로를 미워하는 세상! 바로 이런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세상”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이 세상의 세속적인 삶을 본 받아선 않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일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저주하고 비난하고 멸망하기를 원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요즈음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세상을 저주하고 세상을 향하여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지존파라는 조직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 사회의 가진자를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온보현이란 사람도 그랬습니다. 자기 나이 만큼의 사람을 죽이려고 까지 계획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남을 죽이는 살인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닥치는 대로 자기의 차로 어린이들과 사람들을 치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저주하고 자기 삶의 비참함을 세상의 탓으로 돌리며 이런 극단적인 범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이 세상을 타락한 세상이요 하나님의 곁을 떠난 부패한 세상이지만, 이 세상의 구원을 원합니다. 타락과 부패 부정과 온갖 죄악들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세상을 사랑하는 눈으로 봅니다. 이것은 세상의 구원을 바라는 눈초리입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멸망에서 구원을 소망하는 눈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의 구원을 여러차례 간구했듯이 우리도 이 세상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세상을 저주하거나 세상에 대해 악을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장망성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성숙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저주하고 도피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각자의 처소에서 전도와 선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서로 사랑이 말로만 그쳐서는 않될 것을 말씀합니다(요3:17-18). “(요일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는 우리의 물질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것을 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교인들은 그 장로님이 참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모두가 칭찬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기 떄문입니다. 어느날 그 장로님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께서 새벽에 무슨 기도를 그렇게 하시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새벽 기도를 따라 갔습니다. 그리곤 자기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며, 교회를 위해, 목사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님을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참 훌륭하시구나 이렇게 많은 기도를 하시다니” 그는 다음 날도 따라가서 무슨 기도를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기도는 어제와 별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항상 간절한 모습의 기도였습니다. 어느날 장로님이 자기의 금고를 열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금고 문이 잠겨 있질 않았습니다. 깜짝 놀란 장로님은 급히 돈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돈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은 혹시 자기 아들이 이런 짓을 했나 해서 자기 아들을 불렀습니다. 이떄 마침 아들이 들어오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영문을 모른 아버지는 “그게 무슨 소리냐 내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아 아버지께서 새벽마다 기도하시지 않으셨어요 전도사님께 등록금을 마련해 주시고 이웃 김집사가 끼니가 없어 굶는데 쌀을 보내 주시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거지요” 그러자 이 장로님은 어이가 없어 어쩔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 장로님과 같지 않습니까 자기의 것을 움켜쥐고 말로만 사랑을 외치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한 몫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웃 사랑을 우리의 돈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시간을 내어 실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제 우리 공덕교회도 나누고 베푸는 교회,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성숙해야 합니다. 또한 세번째로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사회에 대한 봉사를 통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며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사랑으로 충만해지도록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교회 안에서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 봉사를 통해 이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습니다. 자기 몫만을 챙기려는 이기주의가 더욱 기세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에 우리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이 사회에 심어야 합니다. 자기 희생과 섬김, 베풂과 나눔의 기독교의 덕을 가르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 봉사라 해서 무슨 사회단체에 가입하거나 큰 돈을 내는 일로만 생가해선 않됩니다. 우리는 이 사회봉사가 무슨 거창한 일을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님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의 실천을 통해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각자의 가정에서 부터 이 봉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교육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그릇된 경쟁의식으로 몰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을 짓 밟고라도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주어서는 않됩니다. 남을 비난하고 시기하며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이겨야 한다는 “비열한 승자”가 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이기기를 다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인격자” “참 사람됨”의 중요함이,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함을 마음 깊이 새겨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직장에서 사회 봉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기독교적 사랑을 가지고 자기 직무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각자가 자기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이 사회를 더 아름답게 가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점검하는 사람은 정직함으로, 수리를 맡은 사람은 성실함으로 그 일을 이루면 됩니다. 도로를 관리하는 사람은 부지런함으로 길을 살피고, 집을 짓는 사람은 설계대로 충실히 하면 됩니다. 높은 공직에 있는 사람은 뇌물과 청탁을 거부하며 부정과 부패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의 사회 봉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각자가 자기의 이웃에게 문을 열므로서 사회적 봉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과 더불어 건전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웃 사촌이 되어 서로 돕는 것입니다. 고층 아파트가 현대인이 선호하는 생활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삶의 방식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욱 갈라 놓았습니다. 아파트 벽의 두께는 50CM도 않되지만 사람끼리의 거리는 천리나 떨어져 삽니다. 이웃 50CM 옆에서 살인이 저질러져도 모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맛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웃 사촌이란 말은 옛말이 되어 갑니다. 인정없는 세상, 삭막한 시멘트 덩어리만 있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더욱 기독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사랑하는 이웃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복음으로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로가 사랑하는 사랑의 봉사가 필요합니다. 교회의 심방과 구역예배는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서로가 사랑의 관심으로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이 “심방”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같은 동네의 성도끼리 굳게 닫힌 대문을 서로 열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구역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서로가 사랑의 섬김을 이루는 사랑의 실천장이 바로 구역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불신 가정의 문도 두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참석하도록 사랑의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역장과 구역의 지도자는 이웃 사랑의 실천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사회봉사를 거창한데서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이 사회에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서는 온전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과 혀가 아닌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재물과 시간을 드려 사랑의 실천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이 죄 많은 사회에 사랑을 심기 위해 사랑의 사회 봉사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위해 살기보다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위로 충만하신 역사가,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하여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랑의 실천자가 되기를 다짐하는,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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