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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하시는 성령님 (요일4:12-13)

본문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몸도 연약하고, 정신도 연약하고, 영혼도 연약합니다. 그래서 실수도 많고, 잘못도 많고, 죄도 많습니다. 그리고 참담한 실패도 겪고, 쓰디쓴 좌절도 맛봅니다. 때론 하는 것마다 마음먹은 대로 잘 돼서 자신감에 넘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늘 마음속으로 하는 것마다 잘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그 바람대로 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는다는 것 또한 우리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불란서의 초대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고 기염을 토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유럽 정복에 나섰을 때 연전연승을 했습니다. 정말 자기가 원하고 계획하는 대로 다 됐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전에서 불가능이란 단어를 빼겠노라고 호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나가던 나폴레옹도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습니다. 끝내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했고, 황제에서 쫓겨나 유배를 가야만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나사렛 예수 한 분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패배를 자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자기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를 다시 써넣게 된 것입니다. 아니 더 큰 글자로 '불가능'이란 항목을 써넣고 만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사전에 불가능이란 항목을 지울 수 없는 존재,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 이게 우리 인생입니다. 인도자가 필요하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연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서는 예수도 제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서는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15절에서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가 한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서는 않될 일을 하고만 것입니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이것이 한 번의 실수면 좋겠으나 번번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런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존재를 사망의 몸이라 했습니다. 바울의 설명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자기 안에 속사람 곧 마음과 겉사람 곧 육신이 싸우고 있답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은 죄와 사망의 법을 기뻐한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번번이 육신이 자기를 사로잡아 죄의 법 아래로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육신이 바라는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내부에 마음과 육신의 싸움이 있는데 그 싸움에서 늘 육신이 이겨 죄짓고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는 이 내부의 영적 싸움을 이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곤고한 자신의 모습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어디 사도 바울만의 이야기입니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요,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적 모습이요, 곤고한 우리 신앙인의 굴레입니다. 그러면 이런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답을 롬 8장 2절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 답은 간단합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자 더 이상 육신을 따르지 않게 됐고, 악을 행치 않게 됐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바라던 선을 행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 혼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삶의 문제이든, 영적인 문제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고 내가 겸손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따를 때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본문 말씀이 이런 성령님의 역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13절에 보면 "그의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신 후에 우리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신 다음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 뒤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무지했던 우리가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과 멀었던 사이였는데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범죄한 뒤에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밑에 숨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셔서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 숨었나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려 하시지만 인간은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이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첫째,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안에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셔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석학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기독교 문화권 안에서 자랐고,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기독교에 관해 많이 듣고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열세 편의 짧은 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자기가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이유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우선 예수의 교훈은 훌륭하지만 공자나 맹자가 했던 말, 그리스 철학자들이 했던 말, 불교의 석가가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욱 예수는 인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 예로 예수가 지옥에 대해 강론할 때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심하게 꾸짖은 사건을 들었습니다. 아마 소크라테스였다면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랍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하나님과 모든 교리는 모두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겁쟁이들이 꾸며낸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지적이지 못하고 비지성적인 사람인양 몰아세웠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많은 지식인들이 그 책을 읽으면서 그의 말에 공감을 했을 것이고, 기독교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됐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선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게 됐습니다. 아무리 인간 지성이 고상하다고 해도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고상함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시편 14편 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러셀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러셀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 인간 지성이 아무리 탁월해도 자기 혼자만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러셀은 당대 세계 최고의 지성이었습니다. 영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이 존경해 마지않는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자기 힘만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더욱 성령님의 인도를 겸손하게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지식의 세계로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십니다. 롬 5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화해할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재를 해야 합니다. 바로 성령님이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령님이 어떻게 화해를 시키십니까 성령님의 화해 사건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화해는 원수 되었던 그 원인을 매듭 지어야 성립됩니다.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서로 간의 원수 관계가 해결됩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 해도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한번은 전도 특공대가 둘씩 조를 이루어 노방 전도를 하기 위해 보라매공원을 찾았습니다. 한적한 잔디밭에 혼자 햇볕을 쬐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전도지를 내밀면서 전도를 시작했답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본론에 들어가면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화를 벌컥 내면서 내가 왜 죄인이냐고 따지더랍니다. 나는 지금까지 법을 어긴 일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고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하는데 내가 왜 죄인이냐고 따지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점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성령님이 역사해야만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원래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자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랑했고, 유대교에 대한 헌신과 열심히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스스로 자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이름도 사울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그는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님이 임하자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벌레만도 못한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바꿨습니다. 바울 즉 작은 자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토록 변할 수 있습니까 그 동안 그가 전에 없던 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이 그에게 임하셔서 죄를 깨닫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혼자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는 의인이고, 대단한 사람입니다. 왜요 우리 자신의 장점, 자랑거리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 자신의 부족한 점, 우리 자신의 허물이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통회하게 되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진정한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내가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되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지하묘지에서 만날 때 다음과 같은 예화를 자주 들었다고 합니다. 한 총각이 처녀를 미칠 듯이 사랑했답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밤늦게 연인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날 좀 방안에 들여보내 달라 청했습니다. 그 때 처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총각이 대답했습니다. "나요(Its me)" 그러자 방안에서 처녀가 대답했습니다. " 이 방은 좁아요. 한 사람 밖에 들어올 수가 없답니다. 가세요!" 이 총각이 슬픔을 잊기 위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몇 년을 떠돌다 어느 날 문뜩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아 다시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같이 처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입니다(Its you)" 그러자 문이 열리고 연인이 뛰쳐나와 그를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좁은 곳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불사조와 거북이'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수가 암살 당했다. 사랑은 여러 개의 수와 공존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영혼과 마음이 하나이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그와 나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변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바뀌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닮게 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죽일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힘을 주십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릴 용기와 능력을 주십니다. 자꾸자꾸 새롭게 변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점점 더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로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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