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공동체 (시56:1-13,요일1:1-4)
본문
하나의 생명 공동체 여러 곳에서 들은 익숙한 비유 이야기를 하나 말씀 드림으로 이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어떤 한 눈먼 장님과 앉은뱅이가 마음을 합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장님은 앉은뱅이의 다리가 되고 앉은뱅이는 장님의 눈이 되어 그들은 함께 살아가면서 일을 하여, 자신들이 얻은 모든 소득을 똑 같은 분량으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눈뜬 앉은뱅 이의 마음에 장님이 전혀 모든 사물을 볼 수 없으므로 자기가 좀더 많은 사물을 취하여도 장님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이 들어 그는 분배하는 일을 달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앉은 뱅이는 점점 살이 찌고 장님은 더욱 야위어만 갔습니다. 어느 날 극 도로 야위어진 장님이 살이 너무 오른 배뚱뚱이 앉은뱅이를 엎고 길 을 가다가 함께 넘어지므로 그 둘이 모두 다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장님 과 앉은뱅이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따로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서로의 부족한 것을 보완하여 함께 살아갈 때 그들의 생존이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바로 장 님과 앉은뱅이의 관계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밀접한 공동체로 지음 을 받았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을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 직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모든 것을 공급하는 기계 혹은 재료로만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자연도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라는 사실을 무 시한 채 오직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함부로 개 발하여 착취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환경이 오염되고 자원 이 바닥이 났으며, 생태계가 파괴되어 온갖 재앙이 인간에게 쏟아지 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 세계가 하나의 생명 공동체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생명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자연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바로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갖는 생명인 것입니다. 자연의 큰 부 분인 하늘과 땅과 물을 우리는 무생물체로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 모두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돌과 흙과 그 사이를 흐르는 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돌 한 개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지만, 그 돌이 있으므로 이루어지는 전 체적인 자연으로 볼 때 그것은 엄연한 하나의 생명의 한 부분을 이 루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전체가 갖는 생명을 뜻합니다. 즉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를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끊어지면 결국 모두가 그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은 서로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유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 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이 인간도 자연도 그 생명을 올바로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 공동체에서 어느 한 부분이 떨어 져 나가면 결국 그 생명 공동체가 파괴되면서 함께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장님과 앉은뱅이 이야기에서 앉은뱅이는 장님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적당히 나누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 야기에는 빠져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계셔서 그가 다 알고 계시 다는 사실을 앉은뱅이는 몰랐던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 하는도다" 시 53:4 인간의 탐욕에 의한 이기주의의 발로가 오늘의 세계를 20대 80이 라는 불공평한 세계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세계의 80%가 빈곤하 게 된 까닭은 20%가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가 아무 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무차별하게 세계 여러 나라를 먹어 들어 가지만, 그것은 분명히 죄악입니다. 그런 탐욕은 하나님이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들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셔서 이 탐욕적인 행위를 지켜보고 계시며, 여기에 대해 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오늘 읽어 드린 시편 56편은 탄원시입니다. 시편에는 이런 탄원 시가 여러 편 있습니다. 압제자의 착취와 박해 때문에 고난에 처한 약자가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 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여기 보면, 원수가 '삼킨다' '치며 압제한다'고 하였습니다. 결 국 이것은 강한 자, 가진 자, 권력자가 약한 자, 없는 자, 가난한 자를 착취하며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개인 탄원시이지만, 이런 탄원을 하나님께 드리는 약자는 개 인일 수도, 민족일 수도 있고, 당하기만 하는 '자연'일 수도 있습니다. 20대 80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볼 때 이런 탄원의 기도를 하나님 께 드리는 사람들은 바로 20%의 잘 사는 사람들이나 나라들에 의해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80%의 사람들이나 나라들이 될 것입니다. 동시 에 20%의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자연까지도 마구 개발하고 그 자원을 낭비하였기에, 그렇게 당하기만 하는 자연이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의 시인이 이런 탄원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결국 모두 빼앗기고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마지막으 로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마지 막 절에서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원수에게 압제를 당한 결과 죽음에 몰렸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 계가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굶주림으로 수 백 만 명이 죽어가고 있으며, 무모한 인종차별로 많은 사람이 죽고 수 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고, 자연은 더 이상 정화의 능력을 상 실한 채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죽어 가는 자들의 탄원의 울부짖음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일어 나셔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압제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멸망하기 전에 무모한 압제자들을 심판하시므로 이 생명 공동체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죽어 가는 생명 공동체를 살리는 길은 생명의 주 님이신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백성을 낮추소서." 시 56:7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 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 니이다." 시 54:1-3 죽어 가는 이 생명 공동체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부짖는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수 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수 만 명의 난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 면서도, 그리고 이 생태계가 신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를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 생명 공동체의 고통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그 고 통 한복판에 우리가 있음을 기억할 때 어찌 탄원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별로 탄원의 기도를 드릴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 일이 아니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 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직자가 수 백만 명이어도,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은 문제를 갖고 우리 주변을 서성거려도, 북한의 형제자매들이 굶어 죽어가도,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기근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당 하여도, 코소보 지역의 난민들이 발생하여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데 도 우리는 그 고통을 내 아픔으로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의 자연 환경이 말할 수 없이 오염되어 죽어가고 있다는 데도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한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 공동체에 대한 유기적인 연대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공동체 의식의 부족은 공동체가 만난 위기 앞에서도 우리로 태연하게 기도조차 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연결된 생명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만 구원받기 위한 것 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을 받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 죽어 가는 생 명 공동체를 구원하시어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파괴된 생명 공동체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을 잃은 이 공동체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우리 인간의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양들은 사람만이 아닌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를 포함한 다고 본다면 그리스도는 우주 생명 공동체 전체에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우리 속에 깃들인 생명을 파괴하는 탐욕을 버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 명 공동체에 연결된 진정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위한 생명은 실상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전체 생명 공동체에 연결된 생명 을 얻게 되므로 나의 생명 나 하나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체 속에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명 공동체 속에 연결된 생 명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공동체적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 원 줄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 생명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가지가 줄기에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지는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 줄기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것은 말라 불 속에 던져 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나의 생명은 독립적인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생명 공동체와 연결된 생명입니다. 따라서 나의 생명 이 끊어진다 하여도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체 의 생명 속에 포함되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 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만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 공동체를 살리는 삶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 회복의 역사를 거들고 함께 이루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 니라 생명 공동체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여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밥상은 가족끼리만 둘러앉는 밥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만찬 밥상에 둘러앉을 때 거기에는 생명 공동 체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밥상에서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전혀 없이 거기에 참여하였다면 되겠습니까 같은 밥상에서 어떤 사람은 배가 부르도록 먹고도 남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없 어 영양 실조에 걸리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게 된다면 그 밥상의 주 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용납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가진 사람 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서 같이 먹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둘러앉아 있는 밥상에는 북한의 먹지 못해 비쩍 마 른 어린이도 앉았고, 아프리카의 뼈만 앙상하고 눈만 둥그런 아이들 도 앉았으며, 코소보의 난민들도 거기에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런 가 하면 한쪽에는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사 입는 부인들이 앉아 있 고, 고가의 수입품으로 치장한 집에 살면서 돈을 물쓰듯하는 사람도 앉아 있습니다. 같은 밥상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불평등한 현실을 그대로 보고 넘어 갈 수 있겠습니까 서로 나누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불평등이 계속되면 앉은뱅이와 장님 모두가 쓰러지듯 우리 모두가 함께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6월 4일) '한겨레' 신문에 "놀부나라가 부끄럽다"는 기획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은 국제난민이나 빈민 구제활동에 매우 인색하다는 내용입니다. 이웃 일본 유니세프 국가위원회는 한 해에 4000만 달러를 기부하고 있는데, 우리는 220만 달러밖에 안 된 다고 합니다. 핑계는 경제위기 구제 금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난을 당하기 이전에도 우리 나라는 남의 어려움을 돕는데 인색하였다는 것입니다. 탤런트 김혜자씨는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를 갔다가 그 너무나 도 비참한 현실을 보고서는 일주일 동안 울기만 하였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그가 적극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발벗고 나섰다 고 합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르완다, 소말리아, 케냐, 방글라데시, 베트남, 라오스, 보스니아, 캄보디아 등을 다녔고, 작년에는 북한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나라 안에도 굶는 사람이 많은데 뭐 하러 외국까지 돕느냐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외국을 다녀보니까 우리는 그래도 천국입니다. 그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생명은 개인의 생명이 아 닌 전체 공동체의 생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정으 로 살고자 한다면 병든 공동체 전체를 돌아보면서 여러분의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며 그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굶주리는 아프리카와 북한 의 주민들에게 우리의 먹을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 공동체에 대한 깊은 연대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의 쓸 것을 절약하면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의 배고픔을 덜어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북한을 돕고 있는 월 드 비전, 만주와 베트남의 어려운 지역에 자립을 돕고 있는 세계 선 린회, 유니세프 같은 기관에 회비를 보내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 이 열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환경연대와 같은 기관에 우리가 적극 협력하여 환경 운동도 지속적으로 펼쳐 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생명 공동체에 대한 유기적 연대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생명 구원 운동에 나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을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지 않고 오 직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모든 것을 공급하는 기계 혹은 재료로만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자연도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라는 사실을 무 시한 채 오직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함부로 개 발하여 착취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환경이 오염되고 자원 이 바닥이 났으며, 생태계가 파괴되어 온갖 재앙이 인간에게 쏟아지 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 세계가 하나의 생명 공동체임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생명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자연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바로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갖는 생명인 것입니다. 자연의 큰 부 분인 하늘과 땅과 물을 우리는 무생물체로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그 모두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돌과 흙과 그 사이를 흐르는 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돌 한 개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지만, 그 돌이 있으므로 이루어지는 전 체적인 자연으로 볼 때 그것은 엄연한 하나의 생명의 한 부분을 이 루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전체가 갖는 생명을 뜻합니다. 즉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관계를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끊어지면 결국 모두가 그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은 서로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유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 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이 인간도 자연도 그 생명을 올바로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 공동체에서 어느 한 부분이 떨어 져 나가면 결국 그 생명 공동체가 파괴되면서 함께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장님과 앉은뱅이 이야기에서 앉은뱅이는 장님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적당히 나누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 야기에는 빠져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에 계셔서 그가 다 알고 계시 다는 사실을 앉은뱅이는 몰랐던 것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 하는도다" 시 53:4 인간의 탐욕에 의한 이기주의의 발로가 오늘의 세계를 20대 80이 라는 불공평한 세계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세계의 80%가 빈곤하 게 된 까닭은 20%가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가 아무 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무차별하게 세계 여러 나라를 먹어 들어 가지만, 그것은 분명히 죄악입니다. 그런 탐욕은 하나님이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들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셔서 이 탐욕적인 행위를 지켜보고 계시며, 여기에 대해 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오늘 읽어 드린 시편 56편은 탄원시입니다. 시편에는 이런 탄원 시가 여러 편 있습니다. 압제자의 착취와 박해 때문에 고난에 처한 약자가 하나님께 탄원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 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여기 보면, 원수가 '삼킨다' '치며 압제한다'고 하였습니다. 결 국 이것은 강한 자, 가진 자, 권력자가 약한 자, 없는 자, 가난한 자를 착취하며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개인 탄원시이지만, 이런 탄원을 하나님께 드리는 약자는 개 인일 수도, 민족일 수도 있고, 당하기만 하는 '자연'일 수도 있습니다. 20대 80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볼 때 이런 탄원의 기도를 하나님 께 드리는 사람들은 바로 20%의 잘 사는 사람들이나 나라들에 의해 빼앗기고 억압당하는 80%의 사람들이나 나라들이 될 것입니다. 동시 에 20%의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자연까지도 마구 개발하고 그 자원을 낭비하였기에, 그렇게 당하기만 하는 자연이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시편의 시인이 이런 탄원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결국 모두 빼앗기고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마지막으 로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마지 막 절에서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가 원수에게 압제를 당한 결과 죽음에 몰렸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건져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 계가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굶주림으로 수 백 만 명이 죽어가고 있으며, 무모한 인종차별로 많은 사람이 죽고 수 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고, 자연은 더 이상 정화의 능력을 상 실한 채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죽어 가는 자들의 탄원의 울부짖음이 커질수록 하나님은 일어 나셔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압제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멸망하기 전에 무모한 압제자들을 심판하시므로 이 생명 공동체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죽어 가는 생명 공동체를 살리는 길은 생명의 주 님이신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백성을 낮추소서." 시 56:7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 를 기울이소서.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 니이다." 시 54:1-3 죽어 가는 이 생명 공동체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부짖는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수 백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수 만 명의 난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 면서도, 그리고 이 생태계가 신음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이를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 생명 공동체의 고통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그 고 통 한복판에 우리가 있음을 기억할 때 어찌 탄원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별로 탄원의 기도를 드릴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 일이 아니면 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 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직자가 수 백만 명이어도,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은 문제를 갖고 우리 주변을 서성거려도, 북한의 형제자매들이 굶어 죽어가도,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기근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당 하여도, 코소보 지역의 난민들이 발생하여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데 도 우리는 그 고통을 내 아픔으로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의 자연 환경이 말할 수 없이 오염되어 죽어가고 있다는 데도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감각한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 공동체에 대한 유기적인 연대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공동체 의식의 부족은 공동체가 만난 위기 앞에서도 우리로 태연하게 기도조차 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연결된 생명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만 구원받기 위한 것 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을 받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 죽어 가는 생 명 공동체를 구원하시어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 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를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파괴된 생명 공동체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을 잃은 이 공동체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서 풍성함을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우리 인간의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양들은 사람만이 아닌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를 포함한 다고 본다면 그리스도는 우주 생명 공동체 전체에 생명을 주고 더 풍성하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우리 속에 깃들인 생명을 파괴하는 탐욕을 버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 명 공동체에 연결된 진정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위한 생명은 실상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전체 생명 공동체에 연결된 생명 을 얻게 되므로 나의 생명 나 하나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체 속에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명 공동체 속에 연결된 생 명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공동체적 존재입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 원 줄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체 생명 공동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가지가 줄기에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지는 생명을 얻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 줄기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것은 말라 불 속에 던져 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나의 생명은 독립적인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생명 공동체와 연결된 생명입니다. 따라서 나의 생명 이 끊어진다 하여도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전체 의 생명 속에 포함되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 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만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 공동체를 살리는 삶으로의 변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 회복의 역사를 거들고 함께 이루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 문제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 니라 생명 공동체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여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밥상은 가족끼리만 둘러앉는 밥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성만찬 밥상에 둘러앉을 때 거기에는 생명 공동 체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밥상에서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전혀 없이 거기에 참여하였다면 되겠습니까 같은 밥상에서 어떤 사람은 배가 부르도록 먹고도 남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없 어 영양 실조에 걸리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게 된다면 그 밥상의 주 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용납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가진 사람 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서 같이 먹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둘러앉아 있는 밥상에는 북한의 먹지 못해 비쩍 마 른 어린이도 앉았고, 아프리카의 뼈만 앙상하고 눈만 둥그런 아이들 도 앉았으며, 코소보의 난민들도 거기에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런 가 하면 한쪽에는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사 입는 부인들이 앉아 있 고, 고가의 수입품으로 치장한 집에 살면서 돈을 물쓰듯하는 사람도 앉아 있습니다. 같은 밥상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불평등한 현실을 그대로 보고 넘어 갈 수 있겠습니까 서로 나누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불평등이 계속되면 앉은뱅이와 장님 모두가 쓰러지듯 우리 모두가 함께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6월 4일) '한겨레' 신문에 "놀부나라가 부끄럽다"는 기획기사를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은 국제난민이나 빈민 구제활동에 매우 인색하다는 내용입니다. 이웃 일본 유니세프 국가위원회는 한 해에 4000만 달러를 기부하고 있는데, 우리는 220만 달러밖에 안 된 다고 합니다. 핑계는 경제위기 구제 금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난을 당하기 이전에도 우리 나라는 남의 어려움을 돕는데 인색하였다는 것입니다. 탤런트 김혜자씨는 우연한 기회에 아프리카를 갔다가 그 너무나 도 비참한 현실을 보고서는 일주일 동안 울기만 하였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그가 적극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발벗고 나섰다 고 합니다. 그는 에디오피아 르완다, 소말리아, 케냐, 방글라데시, 베트남, 라오스, 보스니아, 캄보디아 등을 다녔고, 작년에는 북한을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나라 안에도 굶는 사람이 많은데 뭐 하러 외국까지 돕느냐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외국을 다녀보니까 우리는 그래도 천국입니다. 그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생명은 개인의 생명이 아 닌 전체 공동체의 생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정으 로 살고자 한다면 병든 공동체 전체를 돌아보면서 여러분의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우며 그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파괴되어 가는 생태계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굶주리는 아프리카와 북한 의 주민들에게 우리의 먹을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 공동체에 대한 깊은 연대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의 쓸 것을 절약하면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들의 배고픔을 덜어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북한을 돕고 있는 월 드 비전, 만주와 베트남의 어려운 지역에 자립을 돕고 있는 세계 선 린회, 유니세프 같은 기관에 회비를 보내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 이 열려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환경연대와 같은 기관에 우리가 적극 협력하여 환경 운동도 지속적으로 펼쳐 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감당하여야 할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생명 공동체에 대한 유기적 연대의식을 가지고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생명 구원 운동에 나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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