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교제 (요일1:3-4)
본문
요한일서 1:314 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먼저 그 부분 우리가 다 보았고 그리고 들었던 것을 너희들에게 지금 선포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너희도 우리와 함께 교제를 갖게 하려 함이라. 여기 지 난 시간에 이어서 본래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을 볼 수, 특히 구약에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 육체에 그렇게 나타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도 성전, 하나님이 계시는 법궤를 성전 내부 가장 깊은 데 두 었습니다. 그래서 그 지성소가 전혀 외부하고 연결되지 아니하도록 성전 내부에 지성소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와 계셔도 아무도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솔로몬이 그 기도에서 하기를, 하나님은 어두운 데 계시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 성전에 감히 계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보통 우리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하고 볼 수 있는 분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도 동일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 두운 데 계시는 하나님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이가 나타나심으로 분명하고 똑똑하게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지실 수 있게 되었 습니다. 나타나셨으므로 분명하게 보았고 계속해서 보았으며, 그냥 보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육체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바로 그 생명의 말씀을 볼 수 있었다고 증거했 습니다. 그렇게 나타나신 이가 그냥 이방의 종교들처럼 그냥 현현의 종교로 그렇게만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므로 그에게서 말씀을 들었 습니다. 계속해서 그가 지상에 계시는 동안 계속해서 보았고 계속해서 들 었습니다. 그냥 들은 것이 아니라 이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바로 그가 생명의 말씀이었을 뿐만 아 니라 그가 하신 말씀이 또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들은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었 습니다. 사도들이 본 것은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늘 경탄과 감탄이 계속되 면서 해결되지 못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체 안에 와 계시면서 우리의 눈에 나타나실 수 있었는가! 사도 요한은 그 육체 안에 가리워진 그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보았는데, 무슨 영광을 보았느냐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 보았습니다. 여기 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현재완료형으로 말하고 있는 속에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보았슴을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았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명의 말씀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나 함께 왔으므로 그가 같은 사도들과 함께 생명의 말씀을, 또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 을 바라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냥 이방의 종교들, 그냥 나타나 경배 대 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으로 전부여서 말씀이 없는 그들에게, 나타남 만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말씀이 없고 주술과 마력 만이 횡행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종교는 항상 말씀을 듣는 종교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나타난 생명의 말씀, 곧 그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그들 이 곧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다. 전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아니라 소리내어, 소리내서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냥 보통으로 은밀 하게 옛날 그노시스 주의자들 중에 은밀하게 자기들 중에 높은 영적인 수준에 있는 자들이 은밀하게 은밀한 지식의 비밀을 나누는 그런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높이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지금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선포하고 있다. 너희에게도 이미 선포했지만 이 편지를 받는 여러분들에게도여러분들에게도 전파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것을 전파하느냐 하면 그 다음 절에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 너희도 너희들도 여러분들도 우리와 함께 교제를 혹은 우리말로는 사귐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 너희도, 너희들 도, 여러분들도 우리와 함께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것을 선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선포의 목적은 바로 선포를 듣는 자들로 함께 교제를 나누게 하는 데 있습니다. 달리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들이 다 사도들과 함께 교제를 갖게 하 기 위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냥 어떠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어떤 철학적인 지식을 알 리기 위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포는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지식을 알리므로 그 지식을 많게 하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지식을 받는 자 들이 함께 교제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러했습니다. 여기 라 할 때에 란 말은 여기에 여러 가지로 동참하다 혹은 나누어 갖다 어떤 것을 서로 나누어 갖는다 그런 뜻이 일차적 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도 요 한이 라 할 때에 그것은 그냥 나누어 가짐에 어떤 것을 서로 나누어서 분여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교제가 아니라 신령한 생명의 연결을 말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그것이 다음절에 가 그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슴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절에 . 우리의 교제 혹은 우리의 사귐은 바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라. 그 말 속에 분명히 이 교제가 그냥 어떤 것을 나누어 갖는다, 제물을 나누어 먹는다. 희랍 본래의 통속적인 그런 의미의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신령한 연결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이 지금 자기의 증인들과 함께 자기들이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과 들었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느냐 하면 바로 말씀을 듣는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 그 생명의 연결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라고 하면서 우리와 함께 함이라. 그냥 먼저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라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는 교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처음부터서 직접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직접 하나님께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미 하나님과 교제되어 있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 과 교제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생명 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사도들의 교제에, 즉 이 생명 의 교제에 동참하므로 바로 그 다음 절에 그 다음 문장에 이어져 있는 것과 같이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수립은 그냥 직접적으로 사람 없이 독자적으로 이 루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물론 잘못하면 혹시 구교의 사제 제도와 같은 해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아무나 선포없이 이미 교제를 하나님과 가진자가 없이 독자적으 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지 못합니다.그리고 여기서 와 을 연결할 때에 하나님과 갖는 사람의 그 생명의 교제의 연결은 반드시 선포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오실 때도 이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함께 옵니다. 그리고 이 선포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에게 연결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말씀을 선포할 때 늘 주의할 것은 바로 이 사도들의 증거를 증거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선포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었던 것, 즉 사도들의 증거 를 우리가 지금도 계속하는 것이 우리의 선포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도들의 증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외의 어떠 한 길로도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의 연결은 이루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냥 어떤 설교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 즉 사도들의 증거를 증거할 때 만이 하나님의 생명에,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항상 주의하고 항상 설교할 때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느냐 안 되느냐는 여러분들이 사도적 증 거를 계속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적 증거의 계속에 만 하나님과의 교제, 혹은 사도들 과의 교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은 영으로 오시지만 항상 일차적으로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다른 말로 하면 사도적 증거를 통해서 오시고 그리고 그 사도적 증거와 함 께 오셔서, 그리고 생명을 연결 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너희도여러분도라고 하는 속에 다른 또한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선포가 증거되는 자들에게 누구이든지 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선포를 받는 여러분들도 전부 우리와 함께 보고 듣지는 못하였지만 이 선포를 받음으로 여러분들도 우리가 갖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에 이를 뿐만 아니라를 여기다 넣으므로 누구든지 이 증거를 이 선포를 선포가 이른 자들에 게도 동일한 교제가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설교에 있어서 항상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항상 기적을 생 산해 냅니다. 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설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 설교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 시킵니다. 그 다음절에 . 여기에서 우리들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그냥 보통 교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여러분들이 지금 내가 선포하는, 우리가 선포하는 이 말씀을 받아 들이므로 우리와 같은 생명의 연결에 이르는데 그 생명의 연결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라!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 명의 연결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된 생명이라. 그러니 여기서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들은 것, 사도적 증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형성되는 교 제는 혹은 사귐은 그것은 바로 생명의 기원인 아버지와 연결됨이요 그리고 그 생명의 출처 인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들과 연결되는 생명의 연결 입니다. 바로 이 연결로 만이 사람들 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 다음 4절이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들이 지금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되기 위함이라' 참 기쁨은 생명의 원 천에 연결될 때 만이 가능 합니다. 그것은 다른 데서 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 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그 생명은 처음에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었던 생명이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 그 생명이 우리에게 함께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타나신 그분 자신이 바로 아버지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생명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도가 정상적인 순서 대로 하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함 께 한 교제라고 할텐데 그 생명의 유래처부터서 말함으로 아버지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순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처음에 아버지에게 있었던 게 그 아버지 에게 있던 생명이 그대로 아들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아들 안에 있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 나심으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 시키는 끈이요 통로 입니다. 칼빈은 요한복음 어디에서 주석하기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직도 하나님의 생 명이 우리에게 오는 통로라 도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 해석을 여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고 그에게 서 만이 유래 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길이 없 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갖는 교제는 그냥 보통 사람들 만이 갖는 교제와 생명의 연결이 아 니라 세상의 모임들이 세상의 조직체들이 갖는 서로의 사귐과 즐거운 교제들이 아니라 바 로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연결된 생명을 뜻합니다. 그러니 바로 이 생명에 연결되는 길은 사도적 선포로 만이 가능합니다. 아버지와 연결되는 길, 그의 아 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길은 사도적 선포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이 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 에게 연결될 때 만이 가능합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고 그 만이 생명의 원천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기운으로 그의 세력으로 살지만 우리 사람들이 사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야 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요한이 좀 특별한 것은 그의 요한복음에서 항상 삼위를 그 영에 관 해서 강조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서는 . 아버지와 아들만 이야기하고 영은 이야기하지 안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에서 전개한 것을 여기에 적용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오심은 곧 영의 오심이요. 그러니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 만 말하므로 영이 함께 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생명의 연결은 바로 영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 입니다. 이 두 말만 보아 가지고는 성령님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 같 지만 영의 본질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와 있으면 바로 영이 와 있음을 뜻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한 성령님에 관한 영의 본질론 이라고 할 것 입니다. 그 러니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님은, 영은 분명히 언급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그의 아들 만 말하여도 항상 거기에는 영이 전제되어 있슴을 우리가 이해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교제는 그리스도가 가져온 하나님의 생명 입니다. 바로 이 생명에 연결 됨으로 만이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생명이 지금은 완전하게 와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가서는 영에 의해서 이 생명이 완전하게 현시되고 완전하게 성취될 것 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사도 요한도 바울의 첫 열매 혹은보증금의 사상을 여기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절에 가서 , . 그리고 이것들을, 이것들이 무엇이냐 우리가 보았고 들었던 것들, 즉 우리가 이제까지 증거한 사도적 증거들을 우리들이 쓴다. 그냥만 해도 이미 우리가 들었을 터인데 우리가, 우리들이, 바로 우리들 만이 쓸 수 있다 고 하는 사도적 특권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속에 사도 들을 자기들이 증인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를 갖다 넣으므로 사도들 의 특권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어김 없이 확실하게 증인으로 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를 넣었습니다. 우리가 2절에서을 고찰하였습니다. 바로 이들이 이 성경을 기록하는 이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는 증이들이 바로 목숨으로 자기의 증거를 지키는 바로 자기들 자 신으로 이 증거를 보증하는 보증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록하느냐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니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성경 종교에 의하면 유대교와 달리 사람들이 많이 생명에 연결되면 연 결될수록 기쁨이 확대되고 증가되는 것이 신약의 종교이고 복음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 만케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쁨이 더 확대되게 하려 함이라. 뜻 입니다. 이렇게 기록하므로 이렇게 기록하여 그들이 증거를 받음으로 그들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 명에 연결됨으로 그들의 기쁨이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더 증가되기 때문입니다. 생 명이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항상 생명의 제일
첫째 가는 표현이요 특질이라고 할 것 입니다. 참 생명을 가진 자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기쁨이 흘러 나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속에 용솟음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이 어떤 기쁨이냐 바로 그 기쁨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와 함께 한 교제로 인한 흘러 나온 기쁨을 말합니다. 바로 이 교제를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확대하므로 그 기쁨과 즐거움이 흘러 넘쳐 나옵니다. 여기서. 충만케 하려 함이라. 오히려 그 말을 우리의 기쁨이 흘러 넘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까지 미쳐서 흘러 넘치게 하려 함이라고 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질려고 하지 아니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을 자기만 전유해서 가져야 될 것을 함께 나누어 갖게 되면 시기하고 질투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신약의 복음은, 우리가 가진 이 귀한 것을 나누어 가지면 가 진 만큼 우리의 기쁨이 확대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흘러 넘치는 범위가 더 확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쁨을 이야기 하기 전에 로 다시 되돌아가서 한 말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명의 원천에 연결되었으니 우리가 다 한 기쁨을 나누어 누립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과 동일하다고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곧 우리의 것으로 등치 됐습니다. 그러면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가질 뿐만 아 니라 그의 모든 전부를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므로 기쁨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도 우리의 것으로 나눠 갖는 기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냥 즐거움 만이 넘치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 한 구속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아파하며 나누는 기쁨 입니다. 기독교의 즐거움은 항상 쾌락주의자들의 항상 웃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을 함께 하면서 고난 속에서 즐거워하는 생명의 기쁨 입니다. 그러니 요사이 예수 믿어서 그의 기쁨 만을 소유하려고 그의 고난을 함께 하려고 아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바 로 연결된 소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바로 연결되었으면 그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그 생명은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얻은,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생명의 기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의 기쁨 속에 그의 고난을 함 께 나누어 가지는 아픔의 즐거움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완전하게 되어서 정말 완전히 충만케 되고 성취되는 것은 이 세상의 구속 이 완성되는 그 때요.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항상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 로 오는 생명의 즐거움 입니다.
물론 생명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즐거움도 그냥 있지마는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생명의 즐거움은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오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고난 속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항상 예수 믿어 가지고 잘되는 것 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것은 바른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면 그 기쁨은 항상 고난 속에서의 기쁨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오는 기쁨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우리가 갖는 그 기쁨은 늘 그 기쁨입니다. 그냥 막연한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생명은 사랑하고 찢기운 다음에 회복된 생명이요.
그러므로 그 생명은 머리에 연결된 사람들이 갖는 생명도 동일한 생명을 갖고 동일한 기쁨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생명에 연결되었으므로 바로 그가 걸어가신 그 길 에 동참하므로 오는 생명의 기쁨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 기억 하고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사도적 증거를 선포하고 그리고 글로 나타낼 때 에 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연결된 생명의 교제가 사람들에게 확대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확대되므로 기쁨과 즐거움이 더 흘러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편만케 하실려고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항 상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 교리 때문에 예정 교리 때문에, 소수의 몇 무리들을 모아다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실려고 한 것으로 알면 크게 오해 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편만케 하실려고 이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바로 이 사도적 증거를 계속해서 선포하고 글로 나타내어 많은 사람들 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므로 그 생명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도적 증거들을 맡은 자들, 즉 우리가 본 것과 들은 것들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지금은 고난 주간 입니다. 바로 이 고난 주간이,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 오기 위해 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가 가져오신 생명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가 당하신 고난을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이가 나타나심으로 분명하고 똑똑하게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지실 수 있게 되었 습니다. 나타나셨으므로 분명하게 보았고 계속해서 보았으며, 그냥 보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육체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바로 그 생명의 말씀을 볼 수 있었다고 증거했 습니다. 그렇게 나타나신 이가 그냥 이방의 종교들처럼 그냥 현현의 종교로 그렇게만 나타나신 분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므로 그에게서 말씀을 들었 습니다. 계속해서 그가 지상에 계시는 동안 계속해서 보았고 계속해서 들 었습니다. 그냥 들은 것이 아니라 이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1절에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바로 그가 생명의 말씀이었을 뿐만 아 니라 그가 하신 말씀이 또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들은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었 습니다. 사도들이 본 것은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늘 경탄과 감탄이 계속되 면서 해결되지 못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육체 안에 와 계시면서 우리의 눈에 나타나실 수 있었는가! 사도 요한은 그 육체 안에 가리워진 그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보았는데, 무슨 영광을 보았느냐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바라 보았습니다. 여기 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현재완료형으로 말하고 있는 속에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보았슴을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보았슴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명의 말씀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나 함께 왔으므로 그가 같은 사도들과 함께 생명의 말씀을, 또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 을 바라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냥 이방의 종교들, 그냥 나타나 경배 대 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것으로 전부여서 말씀이 없는 그들에게, 나타남 만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말씀이 없고 주술과 마력 만이 횡행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종교는 항상 말씀을 듣는 종교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나타난 생명의 말씀, 곧 그가 전하는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보통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을, 그들 이 곧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이 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지금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다. 전파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 아니라 소리내어, 소리내서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냥 보통으로 은밀 하게 옛날 그노시스 주의자들 중에 은밀하게 자기들 중에 높은 영적인 수준에 있는 자들이 은밀하게 은밀한 지식의 비밀을 나누는 그런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높이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지금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선포하고 있다. 너희에게도 이미 선포했지만 이 편지를 받는 여러분들에게도여러분들에게도 전파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은 것을 전파하느냐 하면 그 다음 절에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 너희도 너희들도 여러분들도 우리와 함께 교제를 혹은 우리말로는 사귐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 너희도, 너희들 도, 여러분들도 우리와 함께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것을 선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선포의 목적은 바로 선포를 듣는 자들로 함께 교제를 나누게 하는 데 있습니다. 달리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들이 다 사도들과 함께 교제를 갖게 하 기 위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냥 어떠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어떤 철학적인 지식을 알 리기 위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포는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지식을 알리므로 그 지식을 많게 하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지식을 받는 자 들이 함께 교제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러했습니다. 여기 라 할 때에 란 말은 여기에 여러 가지로 동참하다 혹은 나누어 갖다 어떤 것을 서로 나누어 갖는다 그런 뜻이 일차적 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도 요 한이 라 할 때에 그것은 그냥 나누어 가짐에 어떤 것을 서로 나누어서 분여 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교제가 아니라 신령한 생명의 연결을 말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그것이 다음절에 가 그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슴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절에 . 우리의 교제 혹은 우리의 사귐은 바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라. 그 말 속에 분명히 이 교제가 그냥 어떤 것을 나누어 갖는다, 제물을 나누어 먹는다. 희랍 본래의 통속적인 그런 의미의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신령한 연결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이 지금 자기의 증인들과 함께 자기들이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과 들었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느냐 하면 바로 말씀을 듣는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 그 생명의 연결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라고 하면서 우리와 함께 함이라. 그냥 먼저 하나님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라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와 함께 하는 교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처음부터서 직접적으로 신비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직접 하나님께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미 하나님과 교제되어 있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 과 교제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생명 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을 듣는 자들이 사도들의 교제에, 즉 이 생명 의 교제에 동참하므로 바로 그 다음 절에 그 다음 문장에 이어져 있는 것과 같이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수립은 그냥 직접적으로 사람 없이 독자적으로 이 루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물론 잘못하면 혹시 구교의 사제 제도와 같은 해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아무나 선포없이 이미 교제를 하나님과 가진자가 없이 독자적으 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지 못합니다.그리고 여기서 와 을 연결할 때에 하나님과 갖는 사람의 그 생명의 교제의 연결은 반드시 선포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오실 때도 이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함께 옵니다. 그리고 이 선포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들에게 연결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말씀을 선포할 때 늘 주의할 것은 바로 이 사도들의 증거를 증거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선포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었던 것, 즉 사도들의 증거 를 우리가 지금도 계속하는 것이 우리의 선포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도들의 증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외의 어떠 한 길로도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의 연결은 이루어지지 아니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냥 어떤 설교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 즉 사도들의 증거를 증거할 때 만이 하나님의 생명에,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항상 주의하고 항상 설교할 때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느냐 안 되느냐는 여러분들이 사도적 증 거를 계속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적 증거의 계속에 만 하나님과의 교제, 혹은 사도들 과의 교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은 영으로 오시지만 항상 일차적으로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다른 말로 하면 사도적 증거를 통해서 오시고 그리고 그 사도적 증거와 함 께 오셔서, 그리고 생명을 연결 시키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너희도여러분도라고 하는 속에 다른 또한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선포가 증거되는 자들에게 누구이든지 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선포를 받는 여러분들도 전부 우리와 함께 보고 듣지는 못하였지만 이 선포를 받음으로 여러분들도 우리가 갖는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에 이를 뿐만 아니라를 여기다 넣으므로 누구든지 이 증거를 이 선포를 선포가 이른 자들에 게도 동일한 교제가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설교에 있어서 항상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항상 기적을 생 산해 냅니다. 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설교가 다른 것이 아니라 설교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 시킵니다. 그 다음절에 . 여기에서 우리들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그냥 보통 교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여러분들이 지금 내가 선포하는, 우리가 선포하는 이 말씀을 받아 들이므로 우리와 같은 생명의 연결에 이르는데 그 생명의 연결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라!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 명의 연결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된 생명이라. 그러니 여기서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들은 것, 사도적 증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형성되는 교 제는 혹은 사귐은 그것은 바로 생명의 기원인 아버지와 연결됨이요 그리고 그 생명의 출처 인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들과 연결되는 생명의 연결 입니다. 바로 이 연결로 만이 사람들 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 다음 4절이 그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너희에게, 우리들이 지금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되기 위함이라' 참 기쁨은 생명의 원 천에 연결될 때 만이 가능 합니다. 그것은 다른 데서 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 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그 생명은 처음에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었던 생명이니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 그 생명이 우리에게 함께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타나신 그분 자신이 바로 아버지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생명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도가 정상적인 순서 대로 하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와 함 께 한 교제라고 할텐데 그 생명의 유래처부터서 말함으로 아버지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순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처음에 아버지에게 있었던 게 그 아버지 에게 있던 생명이 그대로 아들에게 있게 되었습니다. 아들 안에 있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 나심으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 시키는 끈이요 통로 입니다. 칼빈은 요한복음 어디에서 주석하기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직도 하나님의 생 명이 우리에게 오는 통로라 도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 해석을 여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고 그에게 서 만이 유래 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길이 없 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갖는 교제는 그냥 보통 사람들 만이 갖는 교제와 생명의 연결이 아 니라 세상의 모임들이 세상의 조직체들이 갖는 서로의 사귐과 즐거운 교제들이 아니라 바 로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연결된 생명을 뜻합니다. 그러니 바로 이 생명에 연결되는 길은 사도적 선포로 만이 가능합니다. 아버지와 연결되는 길, 그의 아 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길은 사도적 선포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이 있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 에게 연결될 때 만이 가능합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고 그 만이 생명의 원천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기운으로 그의 세력으로 살지만 우리 사람들이 사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야 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요한이 좀 특별한 것은 그의 요한복음에서 항상 삼위를 그 영에 관 해서 강조를 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서는 . 아버지와 아들만 이야기하고 영은 이야기하지 안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에서 전개한 것을 여기에 적용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오심은 곧 영의 오심이요. 그러니 여기에 아버지와 아들 만 말하므로 영이 함께 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생명의 연결은 바로 영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진 교제 입니다. 이 두 말만 보아 가지고는 성령님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 같 지만 영의 본질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와 있으면 바로 영이 와 있음을 뜻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한 성령님에 관한 영의 본질론 이라고 할 것 입니다. 그 러니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님은, 영은 분명히 언급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그의 아들 만 말하여도 항상 거기에는 영이 전제되어 있슴을 우리가 이해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교제는 그리스도가 가져온 하나님의 생명 입니다. 바로 이 생명에 연결 됨으로 만이 우리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생명이 지금은 완전하게 와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가서는 영에 의해서 이 생명이 완전하게 현시되고 완전하게 성취될 것 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사도 요한도 바울의 첫 열매 혹은보증금의 사상을 여기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절에 가서 , . 그리고 이것들을, 이것들이 무엇이냐 우리가 보았고 들었던 것들, 즉 우리가 이제까지 증거한 사도적 증거들을 우리들이 쓴다. 그냥만 해도 이미 우리가 들었을 터인데 우리가, 우리들이, 바로 우리들 만이 쓸 수 있다 고 하는 사도적 특권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속에 사도 들을 자기들이 증인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를 갖다 넣으므로 사도들 의 특권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어김 없이 확실하게 증인으로 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를 넣었습니다. 우리가 2절에서을 고찰하였습니다. 바로 이들이 이 성경을 기록하는 이 사도적 증거를 기록하는 증이들이 바로 목숨으로 자기의 증거를 지키는 바로 자기들 자 신으로 이 증거를 보증하는 보증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록하느냐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니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성경 종교에 의하면 유대교와 달리 사람들이 많이 생명에 연결되면 연 결될수록 기쁨이 확대되고 증가되는 것이 신약의 종교이고 복음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 만케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쁨이 더 확대되게 하려 함이라. 뜻 입니다. 이렇게 기록하므로 이렇게 기록하여 그들이 증거를 받음으로 그들도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 명에 연결됨으로 그들의 기쁨이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더 증가되기 때문입니다. 생 명이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항상 생명의 제일
첫째 가는 표현이요 특질이라고 할 것 입니다. 참 생명을 가진 자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기쁨이 흘러 나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속에 용솟음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쁨이 어떤 기쁨이냐 바로 그 기쁨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와 함께 한 교제로 인한 흘러 나온 기쁨을 말합니다. 바로 이 교제를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확대하므로 그 기쁨과 즐거움이 흘러 넘쳐 나옵니다. 여기서. 충만케 하려 함이라. 오히려 그 말을 우리의 기쁨이 흘러 넘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까지 미쳐서 흘러 넘치게 하려 함이라고 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 가질려고 하지 아니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을 자기만 전유해서 가져야 될 것을 함께 나누어 갖게 되면 시기하고 질투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신약의 복음은, 우리가 가진 이 귀한 것을 나누어 가지면 가 진 만큼 우리의 기쁨이 확대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흘러 넘치는 범위가 더 확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쁨을 이야기 하기 전에 로 다시 되돌아가서 한 말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명의 원천에 연결되었으니 우리가 다 한 기쁨을 나누어 누립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과 동일하다고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곧 우리의 것으로 등치 됐습니다. 그러면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가질 뿐만 아 니라 그의 모든 전부를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므로 기쁨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도 우리의 것으로 나눠 갖는 기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냥 즐거움 만이 넘치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 한 구속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아파하며 나누는 기쁨 입니다. 기독교의 즐거움은 항상 쾌락주의자들의 항상 웃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 을 함께 하면서 고난 속에서 즐거워하는 생명의 기쁨 입니다. 그러니 요사이 예수 믿어서 그의 기쁨 만을 소유하려고 그의 고난을 함께 하려고 아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바 로 연결된 소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바로 연결되었으면 그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그 생명은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얻은,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생명의 기쁨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제의 기쁨 속에 그의 고난을 함 께 나누어 가지는 아픔의 즐거움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완전하게 되어서 정말 완전히 충만케 되고 성취되는 것은 이 세상의 구속 이 완성되는 그 때요. 그러나 그 이전까지는 항상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 로 오는 생명의 즐거움 입니다.
물론 생명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즐거움도 그냥 있지마는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생명의 즐거움은 항상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오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고난 속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항상 예수 믿어 가지고 잘되는 것 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것은 바른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면 그 기쁨은 항상 고난 속에서의 기쁨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오는 기쁨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우리가 갖는 그 기쁨은 늘 그 기쁨입니다. 그냥 막연한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생명은 사랑하고 찢기운 다음에 회복된 생명이요.
그러므로 그 생명은 머리에 연결된 사람들이 갖는 생명도 동일한 생명을 갖고 동일한 기쁨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생명에 연결되었으므로 바로 그가 걸어가신 그 길 에 동참하므로 오는 생명의 기쁨을 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늘 기억 하고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사도적 증거를 선포하고 그리고 글로 나타낼 때 에 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연결된 생명의 교제가 사람들에게 확대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확대되므로 기쁨과 즐거움이 더 흘러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편만케 하실려고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항 상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 교리 때문에 예정 교리 때문에, 소수의 몇 무리들을 모아다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것으로 삼으실려고 한 것으로 알면 크게 오해 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으로 이 세상에 편만케 하실려고 이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바로 이 사도적 증거를 계속해서 선포하고 글로 나타내어 많은 사람들 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므로 그 생명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도적 증거들을 맡은 자들, 즉 우리가 본 것과 들은 것들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책임입니다. 지금은 고난 주간 입니다. 바로 이 고난 주간이,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 오기 위해 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가 가져오신 생명에 동참하기 위하여 그가 당하신 고난을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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