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빛이시라 (요일1:5-6)
본문
오늘은 요한일서 1장 5절 부터서 6절까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1장 5절에 ,여기서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선포 라 혹은소식 이라 하는 단어는 우리말에 소식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잘된 번역입니다.소식혹은사실 ,알리는 말씀 사실은라고 쓴 자리에복음이라고 하는 말, 복된 소식이라는 말과 전혀 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들은 바가 그 들은 소식이 그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가 아니고 생명의 말씀이신 이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시니라 부터서 직접 받은 말씀이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한사코 그의 글들에을 택하지 아니하고 를 택한 것은 아마 혹 그노시스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그들이 전하는 것을 복음이라, 그들이 갖는 특별한 신비한 비밀의 지식을복음이라고 한 것에 반해서라고 썼을 것으로 많이 추측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에게서 우리가 직접 들었던 그 복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서 들은 것이 사도들이 전하는 그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에게서 친히 그의 입으로 부터서 들은 말씀 그 소식 입니다. 그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 듣고 그리고 전하는데 그 전하는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 .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그 앞에는 조금도 없으시다 고 하는 것이 그 복음의 내용 입니다. 즉 들었으니 들은 것을다시 선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다시 선포해야 합니다. 들은 것을! 들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사도적 증거 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들은 내용, 그것이 바로 사도적 증거인데 그 증거는 . , 다시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선포한다. 들은 것을 계속해서 다시 다시 선포해야 합니다. 선포될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그에게서 우리가 들었던 수없이 들었던 복음을 다시 다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빛이시다. 여기의 빛이 무엇이 냐에 대해서 그 다음에 빛 그 다음에빛이 나오고 어두움이 나옵니다. 사도요한 이와 함께 특이한 것은 도 어두움인데 사도요한이 자기의 글들에 를 전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를 대조시키므로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키므로 그노시스주 의자들이 대변한 빛은 저 밝은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이고 또 어두움은 그 하급 악의 세력 들을 표시하기 위해서와 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전통적으로 고대 동방인들에게 내려온 것은 항상 빛은 저 위의 상부세계이고 어두움은 하급 육에 속한 육의 세계로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키므로 形而上學的 양 대립된 세계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서신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봐서 전적으로 倫理的인 의미를 뜻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저 상급세계 神들의 세계를 뜻하고 로 어두움 의 물질의 세계 흑암의 세계 악령들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빛이라고 말하 므로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 사도요한이 이라고 하므로 창세기 1장 3절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 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그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무엇이냐 진리라고 이 전체 서신 문맥에서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빛을 가지실 수가 있었느냐 그가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영광의 광채가 빛으로 나타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 되심에 있어서 그의 神性에 있어서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 완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영광의 광채가 바로 빛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완전하심 그 자신 그대로 이시고 그 자신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가 빛으 로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빛이란 말씀 속에 진리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빛이 있었으니 이 빛이 곧 사람들의 생명이라 이 빛이 바로 생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사람들의 생명이십니다. 그가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그 아들안에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빛이란 말은 성경에서 특별히 바울은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바울도 창세기 1:1과 연관시켜서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광채를 그 아들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게 하셨느니라하므로 창세기 1장에 나타나 있는 빛이 다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음을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음을 말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빛이시므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 나타내심으로 그 나타내심이 사람의 생명 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진리이시고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생 명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타나심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고 아들을 통해서이고 아들 안에서 만 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 빛은 어디서 알 수 있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어디에 나타나 있느냐 그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항상 나타나실 때에는 아들을 통해서 아 들 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빛을 그 다음 문맥에서 보면 사랑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그 말과 그 다음 문장에서어두움 속에 행한다고 할 때에 그 를 미워함 물론 비진리를 뜻하지만 미워함으로 연관시 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에 바울이 상당히 많은 경우에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켰는데 그 때도 윤리적이지요. 전혀 형이상학적인 두 양대 대립 세력의 의미로서의 빛과 어두 움을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모든 고대 동방인들에게 공통된 사상 중에는 항상 빛을 저 밝은 神들의 세계로 그리고 어두움 혼돈을 흑암의 세력으로 形而上學的으로 둘이 대립되는 二元論으로 항상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것은 전혀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빛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빛이 영광을 발휘하심으로 세상에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의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대립된 존재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 과 연관시켜 빛이라고 할 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니까 불신세력이 있던 데서 아들에게로 되돌아감을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어두움의 권세의 살던데서 아들의 나라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감을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로 개종함을 가리켜서 빛이라고 했고 그리고 감춰져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다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된 것, 비진리인 것, 그리고 생명이 아닌 것이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와.도 강조된 부정형인데를 또 넣었습니다. 우리말에도 조 금도 어두움이 없다는 말은 잘 번역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언어들이 부정을 두번 반복하면 긍정이 되지만, 희랍어는 부정을 두번 반복함으로 그 부정을 아주 강하게 긍정합니다. . 결코 어두움은 조금도 없음이라.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빛이시고 빛의 원천이시고 그가 생명이시고 그 만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 아닌 것, 진리 아닌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빛이신데 사도요한은 6절 이하를 도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가
그런데 그와 코이노니아 교제 를 사귐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어둠 안에서 행한다면 . 우리가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했던 대로 그와 함께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며 있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로 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줄이 무 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그의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마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를 이 절이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께로 온 그 생명이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생 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져서 그의 생명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었으므로 그의 생명으로 자 라고 그에게까지 자라며 그의 풍성한 생명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갖는 생 명이 그리스도와 다른 생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그 새 생명을 우리가 지금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가진 그 생명은 충만한 생명이 아닙니다. 종 말에 우리가 영으로 완전히 상게 될 때에 우리의 생명의 원리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자연적 인 순환의 질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살게 될 때에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 만해서 바로 그리스도의 보좌로 부터 흘러 내리는 생수의 강이 우리에게 넘쳐나서 우리에 게 생명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도 낙심하고 힘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이하은 단순과거 가정법을 썼음 에도 불구하고 이하는 그냥현재 직설법 능동태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생명과 연결되 어서 그와 함께 살고 그래서 마침내 그의 몸을 이루고 그의 생명에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은 생명의 연결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면, 비진리 가운데 행하면, 혹 여기서는 사랑의 반대 미워함 속에 행함을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한다고 하는 말을 사도 요한은 항상 형제를 미워하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미워하고 진리대로 행하지 아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두움 입니다. 여기은. 이것도 사도요한이 특별히 거의 자기의 것으로 전용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성경 구문에도 나 와 있지만 특별히 사도요한이 빛 안에서 행한다 즉 빛으로 산다. 특히 구약성경에 (할라) 혹은 (히할라) 행한다 혹은 그 안에서 산다 하는 말씀을 70인경에으로 번역함으로 그 안에서 생활함, 그 진리를 사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은 희랍사람들이 쓰지 아니하는 희랍사람들은,를 주 로 사용하고 를 사용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렇게 를 사용함으로 그냥 한번 걷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사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그대로 행하면, 아직도 형제를 미워하고 거짓되이 살면 우리는 거짓말 하는 자요 .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 여기서
그런데 사도요한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의 연결을 가 졌지만 죄와 전혀 무죄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면 우리는 거짓말 하는 자,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 바로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며 우리가 진리 대로 행치 아니하며 그 생명으로,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바로 생명의 표현입니다. 생명을 가진 자는 남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빈약한 자들이 남을 미워합니다. 자기의 생명이 풍성하면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남에게까지 흘러 넘칩니다. 자기의 풍성한 생명이 항상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도 그가 풍성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사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두움 가운 데 행한다, 아직도 형제를 미워한다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을 바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가 그 생명의 원리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 생 명의 원리가, 생명의 표현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물론 육적으로 사랑하는 것도, 육적으로 부부간의 사랑도 너무 과도히 육체적으로 빈약하고 어려워지면 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생명으로 우리 속에 늘 자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 기 때문에 우리가 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미워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체험하시겠지만 여러분이 다 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이 반복해서 일면 여러분의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생각이 자꾸 교차하면 바른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으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지 미워하 면 바로 어두움에 행하는 것이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비진리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짓말 하는 자라, 지리를 바로 고백하는 자들이 못 됩니다. 바로 생명이 연결된 자로서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생 명으로 살아야 하고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하니까 우리가 그 생 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짓말 하는 것이 되고 그리고 진리를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여기서 무엇이냐 아들 안에서 전해 주신 그 생명의 법이 진리요 곧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형제를 미워하면 아들의 복음을 좇 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그리스도의 생명줄 에 연결되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누구든지 간에,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다 자기의 부족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늘 자기의 아쉬운 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장 모 자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부족한 의식 부족의식 그것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자기에 대한 부족한 의식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합당하게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 기 때문에 항상 많은 감투를 갖다 붙여요. 자기의 부족이 보충되는 줄 알고 자기의 의식을 많이 갖다 붙여야 자기의 부족이 보충되는 줄로 압니다. 자기의 돈을 많이 갖다가 붙여야 (여기다가!) 자기가 넉넉해 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생명이 아니요.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전부 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돈과 권력, 그래서 육체적인 환락을 누리는 것 아마 그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지 그것은 참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육체적인 환락을 꾀하고 그것은 죽음을 독촉하는 죄악을 자꾸 반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바탕 치고 돈 많아가지고 죄짓지 않을려고 생각 가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불신 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 되는 장로들, 잘 되는 목사들, 잘 되는 집사들 죄 안지을려고 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이 외적인 것을 많이 갖다 붙이므로 우리에게 생명이 풍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곧 참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계속하면 더욱 깊이하면 우리에게 생명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교제의 악수를 담대히 나눌 수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내 관찰이 틀렸을런지 모릅니다. 내 눈이 그릇되었을런지 모릅니다. 우리 목사님들도 돈 많은 사람들, 지위 높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당하게 자기를 표현 하는 사랑의 악수를 모릅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김정기 목사님 이 대통령하고 악수 했다는데 정말 그렇게 뻣뻣하게 바르게 서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참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러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부러워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백성들은, 한 국 교인들은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저 권찰님까지 예수 덕에 어쩌든지 잘 됨으로 세상적 으로 잘 됨으로 이것이 정말 자기가 본래 자기로서 자기 되는 것인 줄 많이 착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부조리, 물의 등은 바로 이 그릇된 사고에서 비 롯하였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이 생명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여러분이 복음을 전도하는 전도자로 할 일이 가장 절실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말씀 받는 사람들에게 사도적 증거를 선포함 으로 그 사람들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생명에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그 이상 더 절 박하고 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 이상 더 사람으로서 보람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보람되게 되고 높임을 받고 싶은 것이 남을 잘 되게 해주고 복을 많이 빌어주는 것으로 지금까지 대개 알고 있는데 그런 사람 끝나면 가면 그만이요, 가는걸로 bye! bye! 그러나 언제 만나도 다시 기쁘고 감사하고 정말 돈을 주는 것 없이 여러분들이 교인들로 부터 감사를 늘 넘치게 하는 길이 꼭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적 증거를 늘 강하게 선포함으로계속적으로 다시 다시 선포함으로 사람들의 생명 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 교회가 문제가 많 습니다. 달리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갖는 교제가, 생명의 연결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이 연 결할 때에 우리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 이 생명이 영원에 까지 이를 생명을 받았는데 세상의 것에 그렇게 눈이 뒤집힐리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말하면 세상 것은 무조건 다 반대 하고 배척해 버리고!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지요. 참 생명을 갖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졌으면 그 물질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관계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교회가 계속해서 분란하고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자, 이번에 우리가 합동을 했습니다. 합동을 해도 전체 합동이 아니고 부분 합동이 되었어요. 물론 부분 합동이 아니고 전체 합동인데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요. 전체 합동인데 부 분이 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우리 중에 그리스도의 교제가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 까 그리스도 보다 더 지방이 우선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 보다 돈이 권력 이, 이미 갖고 있는 기득권이 더 우선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제가 정말 있다면!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얼마나 크게 병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거의가 다 많은 경우에 영리에 정말 급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당 옆에 APT 지어가지고 함께 돈 버는 교회들 그리고 백화점 지어서 함께 버는 교회 들, 분명한 영리단체이니까 重稅를 물려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데 돈을 안 받습니까 받 아도 중세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 국가가 교회에 세금을 받지 아니하느냐 하면 그것이 정말 비 영리단체이고 그리고 남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돈, 헌금만 모아오는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APT 지어주지, 사무실 지어주 지, 백화점 지어가지고 돈을 법니다. 이건 정말 보통 크게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기에 힘쓰면 이렇게 돈 버는데 열을 낼런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급시키는 곳입니다. 돈 버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이 돈버는 데만 열을 갖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시키는데 그리고 그 생명으로 사는 일에 그렇게 등한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분명히 하고 깊게 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에게서 문제가 비롯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지요. 복음전도자들 소위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와의 연관이 없기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에 문제가 이렇게 많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있으면 진리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좇아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미움이 아니시며 어둠이 아니시니 바로 형제를 사랑하며 밝은 빛에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참으로 힘있게 풍성하 게 되고 그의 진리를 좇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왜냐하면 그의 들은 바가 그 들은 소식이 그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가 아니고 생명의 말씀이신 이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시니라 부터서 직접 받은 말씀이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한사코 그의 글들에을 택하지 아니하고 를 택한 것은 아마 혹 그노시스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그들이 전하는 것을 복음이라, 그들이 갖는 특별한 신비한 비밀의 지식을복음이라고 한 것에 반해서라고 썼을 것으로 많이 추측되고 있습니다. 특히 그에게서 우리가 직접 들었던 그 복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서 들은 것이 사도들이 전하는 그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에게서 친히 그의 입으로 부터서 들은 말씀 그 소식 입니다. 그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 듣고 그리고 전하는데 그 전하는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 .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두움이 그 앞에는 조금도 없으시다 고 하는 것이 그 복음의 내용 입니다. 즉 들었으니 들은 것을다시 선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다시 선포해야 합니다. 들은 것을! 들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사도적 증거 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들은 내용, 그것이 바로 사도적 증거인데 그 증거는 . , 다시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선포한다. 들은 것을 계속해서 다시 다시 선포해야 합니다. 선포될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그에게서 우리가 들었던 수없이 들었던 복음을 다시 다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빛이시다. 여기의 빛이 무엇이 냐에 대해서 그 다음에 빛 그 다음에빛이 나오고 어두움이 나옵니다. 사도요한 이와 함께 특이한 것은 도 어두움인데 사도요한이 자기의 글들에 를 전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를 대조시키므로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키므로 그노시스주 의자들이 대변한 빛은 저 밝은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이고 또 어두움은 그 하급 악의 세력 들을 표시하기 위해서와 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전통적으로 고대 동방인들에게 내려온 것은 항상 빛은 저 위의 상부세계이고 어두움은 하급 육에 속한 육의 세계로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키므로 形而上學的 양 대립된 세계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서신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봐서 전적으로 倫理的인 의미를 뜻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저 상급세계 神들의 세계를 뜻하고 로 어두움 의 물질의 세계 흑암의 세계 악령들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빛이라고 말하 므로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 사도요한이 이라고 하므로 창세기 1장 3절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그것을 마음에 두고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 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그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무엇이냐 진리라고 이 전체 서신 문맥에서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빛을 가지실 수가 있었느냐 그가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영광의 광채가 빛으로 나타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 되심에 있어서 그의 神性에 있어서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 완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영광의 광채가 바로 빛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완전하심 그 자신 그대로 이시고 그 자신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가 빛으 로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빛이란 말씀 속에 진리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빛이 있었으니 이 빛이 곧 사람들의 생명이라 이 빛이 바로 생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은 생명의 원천으로서 사람들의 생명이십니다. 그가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그 아들안에서 자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빛이란 말은 성경에서 특별히 바울은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바울도 창세기 1:1과 연관시켜서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광채를 그 아들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게 하셨느니라하므로 창세기 1장에 나타나 있는 빛이 다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 있음을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음을 말 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지각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빛이시므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 나타내심으로 그 나타내심이 사람의 생명 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진리이시고 그가 우리에게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생 명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타나심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고 아들을 통해서이고 아들 안에서 만 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 빛은 어디서 알 수 있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어디에 나타나 있느냐 그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항상 나타나실 때에는 아들을 통해서 아 들 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빛을 그 다음 문맥에서 보면 사랑과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그 말과 그 다음 문장에서어두움 속에 행한다고 할 때에 그 를 미워함 물론 비진리를 뜻하지만 미워함으로 연관시 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에 바울이 상당히 많은 경우에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켰는데 그 때도 윤리적이지요. 전혀 형이상학적인 두 양대 대립 세력의 의미로서의 빛과 어두 움을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모든 고대 동방인들에게 공통된 사상 중에는 항상 빛을 저 밝은 神들의 세계로 그리고 어두움 혼돈을 흑암의 세력으로 形而上學的으로 둘이 대립되는 二元論으로 항상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것은 전혀 불가능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빛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빛이 영광을 발휘하심으로 세상에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의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대립된 존재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복음 과 연관시켜 빛이라고 할 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러니까 불신세력이 있던 데서 아들에게로 되돌아감을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어두움의 권세의 살던데서 아들의 나라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감을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에로 개종함을 가리켜서 빛이라고 했고 그리고 감춰져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다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된 것, 비진리인 것, 그리고 생명이 아닌 것이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와.도 강조된 부정형인데를 또 넣었습니다. 우리말에도 조 금도 어두움이 없다는 말은 잘 번역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언어들이 부정을 두번 반복하면 긍정이 되지만, 희랍어는 부정을 두번 반복함으로 그 부정을 아주 강하게 긍정합니다. . 결코 어두움은 조금도 없음이라.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빛이시고 빛의 원천이시고 그가 생명이시고 그 만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 아닌 것, 진리 아닌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빛이신데 사도요한은 6절 이하를 도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가
그런데 그와 코이노니아 교제 를 사귐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우리가 어둠 안에서 행한다면 . 우리가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했던 대로 그와 함께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며 있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로 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줄이 무 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됨으로 그의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고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마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신비를 이 절이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께로 온 그 생명이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생 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져서 그의 생명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리스도와 한몸을 이루었으므로 그의 생명으로 자 라고 그에게까지 자라며 그의 풍성한 생명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갖는 생 명이 그리스도와 다른 생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그 새 생명을 우리가 지금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가진 그 생명은 충만한 생명이 아닙니다. 종 말에 우리가 영으로 완전히 상게 될 때에 우리의 생명의 원리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자연적 인 순환의 질서에 의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살게 될 때에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 만해서 바로 그리스도의 보좌로 부터 흘러 내리는 생수의 강이 우리에게 넘쳐나서 우리에 게 생명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도 낙심하고 힘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이하은 단순과거 가정법을 썼음 에도 불구하고 이하는 그냥현재 직설법 능동태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생명과 연결되 어서 그와 함께 살고 그래서 마침내 그의 몸을 이루고 그의 생명에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은 생명의 연결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면, 비진리 가운데 행하면, 혹 여기서는 사랑의 반대 미워함 속에 행함을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한다고 하는 말을 사도 요한은 항상 형제를 미워하는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미워하고 진리대로 행하지 아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두움 입니다. 여기은. 이것도 사도요한이 특별히 거의 자기의 것으로 전용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성경 구문에도 나 와 있지만 특별히 사도요한이 빛 안에서 행한다 즉 빛으로 산다. 특히 구약성경에 (할라) 혹은 (히할라) 행한다 혹은 그 안에서 산다 하는 말씀을 70인경에으로 번역함으로 그 안에서 생활함, 그 진리를 사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은 희랍사람들이 쓰지 아니하는 희랍사람들은,를 주 로 사용하고 를 사용하지 아니하였는데, 이렇게 를 사용함으로 그냥 한번 걷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사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그대로 행하면, 아직도 형제를 미워하고 거짓되이 살면 우리는 거짓말 하는 자요 .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 여기서
그런데 사도요한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이 주님의 연결을 가 졌지만 죄와 전혀 무죄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면 우리는 거짓말 하는 자,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 바로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며 우리가 진리 대로 행치 아니하며 그 생명으로,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바로 생명의 표현입니다. 생명을 가진 자는 남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빈약한 자들이 남을 미워합니다. 자기의 생명이 풍성하면 그 생명이 자기에게서 남에게까지 흘러 넘칩니다. 자기의 풍성한 생명이 항상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도 그가 풍성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 사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어두움 가운 데 행한다, 아직도 형제를 미워한다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을 바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면 우리가 그 생명의 원리를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 생 명의 원리가, 생명의 표현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물론 육적으로 사랑하는 것도, 육적으로 부부간의 사랑도 너무 과도히 육체적으로 빈약하고 어려워지면 바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 생명으로 우리 속에 늘 자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 기 때문에 우리가 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미워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체험하시겠지만 여러분이 다 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이 반복해서 일면 여러분의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미워하는 생각이 자꾸 교차하면 바른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생명으로 함께 연결되어 있으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지 미워하 면 바로 어두움에 행하는 것이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비진리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거짓말 하는 자라, 지리를 바로 고백하는 자들이 못 됩니다. 바로 생명이 연결된 자로서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생 명으로 살아야 하고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살아야 할 터인데 그러지 못하니까 우리가 그 생 명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짓말 하는 것이 되고 그리고 진리를 좇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여기서 무엇이냐 아들 안에서 전해 주신 그 생명의 법이 진리요 곧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형제를 미워하면 아들의 복음을 좇 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풍성한 그리스도의 생명줄 에 연결되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누구든지 간에,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다 자기의 부족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늘 자기의 아쉬운 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특별히 가장 모 자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부족한 의식 부족의식 그것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자기에 대한 부족한 의식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합당하게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 기 때문에 항상 많은 감투를 갖다 붙여요. 자기의 부족이 보충되는 줄 알고 자기의 의식을 많이 갖다 붙여야 자기의 부족이 보충되는 줄로 압니다. 자기의 돈을 많이 갖다가 붙여야 (여기다가!) 자기가 넉넉해 지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생명이 아니요. 지금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전부 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돈과 권력, 그래서 육체적인 환락을 누리는 것 아마 그것일 것입니다. 그것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그렇게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지 그것은 참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육체적인 환락을 꾀하고 그것은 죽음을 독촉하는 죄악을 자꾸 반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바탕 치고 돈 많아가지고 죄짓지 않을려고 생각 가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불신 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 되는 장로들, 잘 되는 목사들, 잘 되는 집사들 죄 안지을려고 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와 같이 외적인 것을 많이 갖다 붙이므로 우리에게 생명이 풍성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 곧 참 생명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계속하면 더욱 깊이하면 우리에게 생명이 흘러 넘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교제의 악수를 담대히 나눌 수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내 관찰이 틀렸을런지 모릅니다. 내 눈이 그릇되었을런지 모릅니다. 우리 목사님들도 돈 많은 사람들, 지위 높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당하게 자기를 표현 하는 사랑의 악수를 모릅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 김정기 목사님 이 대통령하고 악수 했다는데 정말 그렇게 뻣뻣하게 바르게 서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참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러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부러워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백성들은, 한 국 교인들은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저 권찰님까지 예수 덕에 어쩌든지 잘 됨으로 세상적 으로 잘 됨으로 이것이 정말 자기가 본래 자기로서 자기 되는 것인 줄 많이 착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부조리, 물의 등은 바로 이 그릇된 사고에서 비 롯하였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이 생명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여러분이 복음을 전도하는 전도자로 할 일이 가장 절실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말씀 받는 사람들에게 사도적 증거를 선포함 으로 그 사람들의 생명을 그리스도의 생명에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그 이상 더 절 박하고 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 이상 더 사람으로서 보람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보람되게 되고 높임을 받고 싶은 것이 남을 잘 되게 해주고 복을 많이 빌어주는 것으로 지금까지 대개 알고 있는데 그런 사람 끝나면 가면 그만이요, 가는걸로 bye! bye! 그러나 언제 만나도 다시 기쁘고 감사하고 정말 돈을 주는 것 없이 여러분들이 교인들로 부터 감사를 늘 넘치게 하는 길이 꼭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적 증거를 늘 강하게 선포함으로계속적으로 다시 다시 선포함으로 사람들의 생명 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 교회가 문제가 많 습니다. 달리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갖는 교제가, 생명의 연결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이 연 결할 때에 우리가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 이 생명이 영원에 까지 이를 생명을 받았는데 세상의 것에 그렇게 눈이 뒤집힐리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말하면 세상 것은 무조건 다 반대 하고 배척해 버리고!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지요. 참 생명을 갖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졌으면 그 물질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바른 관계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교회가 계속해서 분란하고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자, 이번에 우리가 합동을 했습니다. 합동을 해도 전체 합동이 아니고 부분 합동이 되었어요. 물론 부분 합동이 아니고 전체 합동인데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요. 전체 합동인데 부 분이 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우리 중에 그리스도의 교제가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 까 그리스도 보다 더 지방이 우선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 보다 돈이 권력 이, 이미 갖고 있는 기득권이 더 우선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교제가 정말 있다면!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얼마나 크게 병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거의가 다 많은 경우에 영리에 정말 급급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당 옆에 APT 지어가지고 함께 돈 버는 교회들 그리고 백화점 지어서 함께 버는 교회 들, 분명한 영리단체이니까 重稅를 물려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데 돈을 안 받습니까 받 아도 중세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 국가가 교회에 세금을 받지 아니하느냐 하면 그것이 정말 비 영리단체이고 그리고 남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돈, 헌금만 모아오는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APT 지어주지, 사무실 지어주 지, 백화점 지어가지고 돈을 법니다. 이건 정말 보통 크게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기에 힘쓰면 이렇게 돈 버는데 열을 낼런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급시키는 곳입니다. 돈 버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이 돈버는 데만 열을 갖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시키는데 그리고 그 생명으로 사는 일에 그렇게 등한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분명히 하고 깊게 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에게서 문제가 비롯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서가 아니지요. 복음전도자들 소위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와의 연관이 없기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에 문제가 이렇게 많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있으면 진리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좇아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미움이 아니시며 어둠이 아니시니 바로 형제를 사랑하며 밝은 빛에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으로 참으로 힘있게 풍성하 게 되고 그의 진리를 좇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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