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이기는 피의 권세 (요일1:8-9)
본문
저가 빛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 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 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8절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우선 8절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 . 자,우리가 죄를 현재 가지고 있지 아니한다고 말하면여기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정의함이 없이 그냥 7절에도 죄를 말하고 8절에도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죄를 용서함 받았는데, 오늘 여기 보니까우리가 죄를 가지지 아니했다고 말하면죄를 가짐을 현재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갖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면그러니까 죄를 가진 것은 사 실인데 말하는 것은이 되었기 때문에과거 가정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사실은 우리가 다 죄를 가졌는데 죄가 없다고 말하면 그러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속 임이라 정말 우리가 다 죄를 생각하면 창세기 3장에 나타난 하나님 반역에 대한 혹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죄가 도입되 었고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사망이 인류에게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 나심으로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9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의 계시가 죄가 무엇인지를 계시를 했습니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한다고 하는 말을 시편에서 인용함으로 백성들이 아무런 자기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미워한다고 말함으로 죄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물론 결과로 나타난 여러가지 죄의 유형들도 그것이 죄이지만, 성경은 그보다 더 깊이에 있어서 우리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처음에 구체적으로 명령을 불순종한 그 경우에 그가 구 체적인 계명들을 범할 때에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죄된 본성입니다. 이 사실을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잘 말하였습니다.내가 죄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나를 죄중에 잉태하였음이라.자기가 지금 죄 지은 것은이와 같은 주변 환경 때문에 이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하고 죄 짓는 책임을 자기 밖에 바깥 세상에다가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자기의 본성이 본래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본성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니외부로 부터서 유혹이 와서 내가 죄를 지었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 가 아니라본래 내 본성이 내 바탕 자 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 하고 전적으로 죄의 책임이 자 기에게 있음을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해서 바로 합당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그것만 그것으로 인해서 죄가 다 도입되었지만 그것 만이 죄이고 그에게 언약관계 때문에 죄가 우리에게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그 죄과가 우리에게 건너오므로 우리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우리의 본성이 죄임을 지적하 기 위해서 죄의 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보통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 을 얻었다 혹은 칭의 되었다고 할 때 그 칭의는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죄책을, 죄의 책임 을 제하셨습니다. 죄의 책임을 제하셨기 때문에 죄책이 제거됨으로 사망에서 면제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책임이 벗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책임이 벗겨졌다고 해서 그 죄의 본성 자체까지 제거되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어도 우리의 죄짓는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우리의 옛 사람 대 로 늘 우리가 죄 짓는 사람이고 죄인 입니다. 죄 라고 하는 용어를 바울의 용어로 하면옛 사람 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자연 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책을 면제 받았어도 우리의 본성이 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 짓는 본성까지 적대하는 본성까지 없 어지고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의 본성의 죄까지 부정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구원하 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책, 죄의 책임의 면제 뿐만 아니라 그 죄의 본성까지도 제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런데 그 죄가 없다고 말하면 결 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었어도 죄 짓고 살며, 물론 구체적으로 손을 들어 발로 죄를 짓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이 성령님의 계속적인 주장과 억제가 없으면 발동 되는 것이 죄악된 생각 뿐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가장 실제적인 의미 로 현실적으로 그것이 면백한 죄이고 그 죄가 하나님 앞에 사망에 해당되는 죄를 정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죄의 본성을 죄짓는 것, 하나님에 대해 적해하는 이 감정, 적대하는 것, 이 죄 짓는 본성 혹은 타락한 본성 그것이 바로 죄이지요. 죄가 다른 데서 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지금 현대의학에 있어서 심리학에 있어서 특히 프로이드의 메시야주의가 전세계를 휩쓴 이후 부터서는 죄의 책임이 전부 다 자기 밖에 다른데로 옮아갔습니다. 전부 다 죄의 책임이 어떻게 자기 밖에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같은데서는 심리분석소, 심리상담소가 아주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 사람 이 갖는 죄의 원인들을 전부 다 자기 밖의 다른 사람에게로 사회에게로 전가할려는 노력을 많이 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1년에 미국 사람이 수백 만 달러씩 그 소위 심리분석소에 투자해도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빵을 벌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로 부터서 차츰 비판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요 돈을 많이 받아가지고 그래도 양심이 있지요.
돈을 받아서 저들의 문제를 해 결해 준다고 해서 돈을 받아갔는데 사실 해결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한 심리상담소에서 몇달 간 돈을 몇 백 달러를 지불하고서 상담이 다 끝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심 리상담소를 찾아갑니다. 또 몇 달을 두고 문제를 고민하고 또 몇 백불씩 지불합니다. 그리고 또, 그다음. 그래도 문제 해결이 없으니까 빙빙빙 돕니다. 해결이 없어요. 아무리 죄의 책임을 밖의 사회로 전가해 볼려고 해도 전가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근본 책임이 인간에게 있고 그리고 죄의 기원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바깥 사회도 물론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죄를 짓도록 하는 근본 많은 큰 역할을 하 지요. 그러나 바깥사회가 죄 짓게 하는 것은 속에서 죄 짓게 하는 근본에 비기면 더 적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7계를 범한 간음죄를 범한 것은 물론 우발적으로 순식간에 충동을 일으켜서 7계를 범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마음속에서 반복적으로 오래도 록 이루어졌기 때문에 밖으로 나타납니다. 살인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에는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그 사람이 죽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자연적인 그 다음 단계가 그것입니다. 미워하는 미움의 대상이 없어지고 사라지기 바랍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구체적으로 제거하기를 바랍니다. 구 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살인이 처음 그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살인 이 이루어지고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밖에서 살인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워 하는 것이 바로 살인죄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싫어하고 미워하지요. 그것이 자꾸 그 도를 반복하고 반복해서 강화해서 격화하면 그 사람이 없어지고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그러 니 밖의 외부세력에서 제거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도 안 되면 자기 손으로 자기가 제거 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일을 이루어 냅니다. 죄의 근원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성, 타락한 본성, 이것이 바로 구체적 죄 입니다. 우리 가 예수 믿었어도 이것 가지고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무죄하 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본성이 다 해결되고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어도 아직도 죄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 니 아무리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나는 죄짓지 아니한다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바로 이와 같은 죄의 본성 혹은 하나님 앞에 대해서 적대하는 죄 짓는 그것이 바 로 우리의 죄이고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그릇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하고 정반대를 사실로 믿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속이는 것이 지요. 속이는 것이 무엇이냐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고 사실과 반대되는 사실로 받 게하는 것이 바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임받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에 사람들 이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용하기 위해서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인 것으로 합리화 하며 위로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언제까지 마지막까지 죄인일 것입니다. 마지막 우리가 죽어서 주앞 에 가는 것도 순전히 은혜이지요. 우리가 무죄해졌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죄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대로 어거스틴이 젊을 때에는 희 대의 타락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표준으로 보면 그렇게 많은 죄를 짓지 아니했다고 할 것입니다. 아마 사생아까지 낳아가지고 데리고 살았으니까 한사람 하고만 그와 같은 일을 하였 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누가 바르게 기억하고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기가 젊을 때 그렇게 모질게 어머니를 배역하고 죄지으며 방황하였던 것을 마지막 죽어가 면서 침상이 젖도록주여! 사하여 주옵소서!용서를 빌며 용서해 주시기를 빌며 주 앞으 로 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지막 숨거둘 때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그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가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죄를 짓는 본성 혹은 죄를 가졌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된단 말 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정말 죄책 뿐만 아니라 죄의 본성이 죄 짓는 본성을 제거하기 위 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죄짓지 못하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의 욕정에 충동되었을 때는 그때는 그와 같은 것이 죄인줄 잘 생각하지 못하지요. 그것이 여기서 어느정도 떨어져 나올 수 있어야 그것이 죄인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칼빈이 우리의 개혁신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칼빈이 늘 강조하고 강조하였듯이 늘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아마 여러분들도 내가 오늘 저녁에 눈을 감으면 떳떳이 그 앞에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산다면 여러분들이 죄 짓는 일에 담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 짓고도 죄 아닌 것처럼 무던하게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 있는 것과 죄를 짓는 것과는 전혀 별개 입니다. 우리는 죄 짓는 일을 참으로 두려워하고 조심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성경은 철학책이 아니어서인지 일체 정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을 할 때에도 진리에 속한 자들은 내 음성 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고 빌라도가 반문했습니다만 진리를 정의해 서 말해주지 안 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진리라고 할 때에라,이란 동사에서. .희랍적인 사고에서 진리란 항상 대상과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혹은 인간의 이성에 합 치된 것을 진리라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구약적인 사고에서 성경의 사고에 있어서 진리란 항상 신실성이라 신실함이라, 하나님의 미쁘심에 진리를 연결시켜 왔습니다. 물론 이 에메 트란 말 속에 단지 신실성이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사실이 사실대로 표현되는 것도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연관해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이성을 발동해서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므로 진리 를 탐구해 내지 않습니다. 최소한 구약의 종교에 만은 우리의 이성을 활용해서 진리를 발견 해 내는 그와 같은 것은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종교에 의하면 항상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 왔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계시됨, 혹은 하나님의 본성 이 계시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계시 중에서 가장 큰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기를 계시하시기 바란 모든 것의 계시고 자기를 계시하기 바란 것의 전부를 다 계시하셨습니다. 물 론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처음 나타나고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전부가 다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진행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심, 혹은 하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혹은 이 앞절에서 하나님을 빛이라고 말씀했는데, 그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창조된 피조물이 자기를 떠나 서 이렇게 이탈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맞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 지 으신 본래 창조를 자기 본래의 지으신 목적에로 되돌이키심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 께서 영광을 받으신 일이지요.
그러면 바로 이 일을 이루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 명이라는 그 말 속에 길과 연관시키면,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로 가는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마지막 구절에내가 곧 생명이라 고 한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 뿐만 아니라 그가 생명 자체이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일 뿐만 아니라 그 목표 자체 입니다. 그러니 그가 진리에로 이르는 길일 뿐만 아니라 그가 진리 자체이십니다. 모든 진리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피 조물을 그의 생명에로 연결시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혹은 구원의 도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 다는 말 입니다. 왜 그러하냐고 하면 하나님은 죄있는, 죄있는 곳에는 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 있는 곳에 와 계시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의 내주 혹은 성령님의 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다고 해야 될 터인데! 왜 죄가 없다고 하면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바로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께서 오셨기 때문에 죄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고 그 의 인격을 부인하는 일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하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를 모 실 수 없는 것에 귀결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도 우리 안에 죄가 완전 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죄를 그냥 갖고 있으니까, 죄를 그냥 갖고 있어도 되는 것이냐 그 말이 아니지요. 바로 진리와 죄를 연결시킬 때에, 바로 죄와 진리를 연결시키므 로 우리에게 죄의 투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아니하지요. 그러나 9절의 죄의 고백과 연결시키면 죄와 의 투쟁을 강력하게 강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죄를 멸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 고 살기 때문에 죄와의 강력한 투쟁을 우리가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죄와 진리가 영 상극되는 것 같은데, 바로 이것이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우리 가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죄와의 투쟁이 강력하게 진행되어야 되는 것을 바로 8절 하반절 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고 뿐만 아니라, 말을 바꾸면 우리가 죄와의 투쟁을 전개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죄와의 투쟁을 하지 아니하시면 성령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죄 를 죄로 느끼지 아니하면 벌써 문제있는 사람입니다. 벌써 죽은 사람이거나 문제있는 사람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투쟁하는 사람입니다.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주여! 나 를 사하시고 받으시옵소서!할 때까지 우리는 죄와 투쟁해야 될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도요한이 보면 문맥적으로 완전히 모순되는 문장들을 함께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우리가 죄 짓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에 죄와의 투쟁 을 강력하게 전개해야 합니다. 그 다음 9절, 여기서 문법적인 이야기지만, . 보통의 경우에은 엑센트를 붙이지 않습니다. 보통의 문장들에 에 액센트가 없어 강조점이 없이 쓰이고 있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에 액센트 강조점을 붙여 놓았습니다. 바로 진리가 바로 이 시간 부터 있지 아니하다. 죄 없다 고 부정하면 예수님이 더 계셔야 할터인데 죄 없다고 할 때부터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계시 지 아니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어디에 계시냐 우리안에 계십니다. 우리 개개인에도 계시지만 주의 백성들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주의 교회에, 주의 교회에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항상 우리는 개신교의 교회간에는 개별자의 강 조가 더 많습니다. 루터의 친교의 강조가 키에르케골에서 아마 더 크게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 그래서 한국교회도 더구나 교회가 주의 교회로 하 나된 생각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진리가 맡겨진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교회에. 개별, 개인에게 맡겨졌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의 진리 만은 항상 우리 안에 교회 안에 교회에 진리가 맡겨져 있습니다. 복음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자 혼자 있을 때에는 어떠냐 전도자 혼자 있을 때에도 전도자 홀로 있는 경우 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면 반드시 교회가 거기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항 상 진리를 가진 자가 혼자 서 있는 법이 없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는 자 기 혼자 서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하나만 남아 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 교회가 타락해 속화되어 버렸어도 정말 눈을 씻 고 또 씻고 봐도 교회가 있느냐 아마 그런 날이 아마 올 것입니다. 머지 않아 올 것입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답이 그 때에도 반복될 것입니다. 그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세상에서 제거되지 아니합니다. 교회는 끝까지 지상에 진리의 터로 보루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지방으로 만 교회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분파되는 것, 우리말로 분파라고 하면 별로 그렇게 나쁜 뉘앙스가 없는데 영어에 Sect라고 하는 것 상당히 그들에게 있어서 강하게 뉘앙스를 갖습니다. 교회가 되지 못하는 말, 교회 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말 Sect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번 합동하는 일에 그런 불행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왜 생겼습니까 물론 사당동에서 부터 안 갈라졌으면 더욱 좋았지요.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는한 진리에 서서 진리의 담지자로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9절 그리고 우리의 죄들 을 우리가 고백하면. 고백 신앙고백이란 말을라 하고 혹은, 말을 같은 말을 한다는 말입니다. 한 말을! 그러니 까 신앙으로 단체가 공통으로 자기의 것으로 진술하는 것, 그것이혹은 ,한말 같은 말을, 같은 단체가 할 때 그것을 신앙고백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여기서 죄를 (신앙고백) 했습니다. 죄를! 예수 그리스도 믿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죄를 , 죄를 고백한다고 왜 죄를 신앙고백한다고 했습니까 그리고우리들의 죄들을 고백하면 . 물론 속에 어떤 것을 승인하고 인정하고 혹은 죄과를 고백하는 것도 속합니다.
그런데 죄들을 고 백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신앙고백 할 때 죄 고백합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 속에 죄의 고백이 늘 들어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신경에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죄의 용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함으로 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합당하고 바르게 고백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고백 뿐만 아니라 죄들을 고백하는 것이 고백하는 것 그것을 우리의 신앙고백에 필수적으로 넣어 야 맞습니다. 교회는 순전히 의인만, 본래부터가 의 있는 사람은 교회에 들어오지 아니합니다. 교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두 가지 종류의 존재가 들어오지 못 하는데 천사는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리고 의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들 어온 사람들은 다 죄인된 사람들이고 죄인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니 나만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함께 죄들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고백은 늘 같은 말로 반복합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한 것은 바른 예배입니다. 우리가 입을 모두어서 한 말로같은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언제 교회로 나타나느냐 바로 이신앙고백에서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됨이 어디에서 있느냐 바로 이신앙고백에서 죄를 고백하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데서 교회가 교회 됩니다.
그런데 이 죄를 고백함으로, 우리가 죄들을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표기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장로들이 하지요. 장로들이 하는 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대표라는 뜻으로 장로들이 하므로 아마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표기도는 항상 백성들의 사정들을 아뢰는 것만 하지 우리 한국교회에 죄의 고백 이 공예배에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일에 있어서 아마 모르겠으나 목사로 바꾸면 그런 죄의 고백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마 우리나라 현재 상황으로 조금 어렵지요. 목사가 대표 기도 해도! 그러나 공교회에서의 예배에서 항상 죄의 고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죄의 고백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함이 없어지게 됩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도덕적으로는 교사로, 종교의 훌륭한 교훈가로 그 교사의 현대와 같이 현대를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가로 변조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데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주로 고백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항상 공교회 예배에 죄의 고백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는 평신도들을 함께 예배에 동참시킴으로 장로로 하여금 기도케 하는 좋은 예배모범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목사가 대표기도 함으로 죄의 고백과 함 께 백성들의 전체 사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수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예배전에 어떻다는 사정을 장로에게 말해주지마는 그러나 목사가 갖는 가장 큰 특권중의 하나는 바로 이 교회 전체를 위하여 하는 도고가 목사가 갖는 가장 큰 특권에 속합니다. 그러니 공교회 예배에 공예배에 목사가 대표기도하는 것이 바르고 합당합니다. 죄를 고백하면, 죄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구체적인 죄를 말할 뿐 아니라 우리 전체가 죄인임을 고백해야 맞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들 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죄들을 하나님에 대한 적대라, 미워함이라, 혹은 죄 짓는 본성이 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복수를 썼습니다.
우리들의 죄들을우리의 본성이 우리가 죄인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은 구체적인 죄들을 또 고백해 야 맞습니다. 예배에 회개기도를 넣는 것은 필수적 입니다. 그것이 대표기도의 형식을 빌리 든지 아니면 전체가 회개하는 기도를 하든지 간에, 예배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죄의 고백으로 만이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바로 가질 수가 있습니다. 죄를 고백함이 없는 때는. 어제 부활절 설교 나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부활절 설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 대세계를 변화시키는 도표로 도식으로만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물론 부활의 권세가 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시키고 있으니까 시킬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에 이 세상을 전 창조를 변화 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고백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렇게 사회개혁에 갖다 직접 붙이면 자기의 인간적인 투쟁을 정당하게 하기 위한 신학적인 변조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반드시 죄를 고백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 . 그러면 그는 신실하고 의로우사 우리 로 부터서 모든 죄들을 용서하실 것이요 그릭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서 깨끗하게 하실 것 이요. 우리가 죄만 고백하면그는 신실하셔서, 신실하다 하는 말은 언제든지 믿 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 희랍적인 사고가 아니 고 언제 가도 그분은 첫 약속에 그대로 부착해 있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부인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본성대로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자기 가 내신 약속은 약속대로 지키시고 그 약속에 부착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구약에서 나타나 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성은 진리와 하고도 통합니다.
그런데 신실성,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약이 깨어져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약속에 부착해 계심을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심을 늘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고백만 하면 고백하는 자에게 사죄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언제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 나심으로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9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의 계시가 죄가 무엇인지를 계시를 했습니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한다고 하는 말을 시편에서 인용함으로 백성들이 아무런 자기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미워한다고 말함으로 죄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이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죄가 무엇이냐 하면, 물론 결과로 나타난 여러가지 죄의 유형들도 그것이 죄이지만, 성경은 그보다 더 깊이에 있어서 우리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처음에 구체적으로 명령을 불순종한 그 경우에 그가 구 체적인 계명들을 범할 때에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죄된 본성입니다. 이 사실을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잘 말하였습니다.내가 죄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나를 죄중에 잉태하였음이라.자기가 지금 죄 지은 것은이와 같은 주변 환경 때문에 이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하고 죄 짓는 책임을 자기 밖에 바깥 세상에다가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자기의 본성이 본래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본성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니외부로 부터서 유혹이 와서 내가 죄를 지었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 가 아니라본래 내 본성이 내 바탕 자 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었음이라 하고 전적으로 죄의 책임이 자 기에게 있음을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죄에 대해서 바로 합당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그것만 그것으로 인해서 죄가 다 도입되었지만 그것 만이 죄이고 그에게 언약관계 때문에 죄가 우리에게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그 죄과가 우리에게 건너오므로 우리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 자체가 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우리의 본성이 죄임을 지적하 기 위해서 죄의 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보통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 을 얻었다 혹은 칭의 되었다고 할 때 그 칭의는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죄책을, 죄의 책임 을 제하셨습니다. 죄의 책임을 제하셨기 때문에 죄책이 제거됨으로 사망에서 면제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책임이 벗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책임이 벗겨졌다고 해서 그 죄의 본성 자체까지 제거되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믿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어도 우리의 죄짓는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우리의 옛 사람 대 로 늘 우리가 죄 짓는 사람이고 죄인 입니다. 죄 라고 하는 용어를 바울의 용어로 하면옛 사람 입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자연 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책을 면제 받았어도 우리의 본성이 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 짓는 본성까지 적대하는 본성까지 없 어지고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의 본성의 죄까지 부정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을 구원하 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책, 죄의 책임의 면제 뿐만 아니라 그 죄의 본성까지도 제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런데 그 죄가 없다고 말하면 결 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었어도 죄 짓고 살며, 물론 구체적으로 손을 들어 발로 죄를 짓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이 성령님의 계속적인 주장과 억제가 없으면 발동 되는 것이 죄악된 생각 뿐입니다. 그런 것들이 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가장 실제적인 의미 로 현실적으로 그것이 면백한 죄이고 그 죄가 하나님 앞에 사망에 해당되는 죄를 정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죄의 본성을 죄짓는 것, 하나님에 대해 적해하는 이 감정, 적대하는 것, 이 죄 짓는 본성 혹은 타락한 본성 그것이 바로 죄이지요. 죄가 다른 데서 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지금 현대의학에 있어서 심리학에 있어서 특히 프로이드의 메시야주의가 전세계를 휩쓴 이후 부터서는 죄의 책임이 전부 다 자기 밖에 다른데로 옮아갔습니다. 전부 다 죄의 책임이 어떻게 자기 밖에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같은데서는 심리분석소, 심리상담소가 아주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 사람 이 갖는 죄의 원인들을 전부 다 자기 밖의 다른 사람에게로 사회에게로 전가할려는 노력을 많이 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1년에 미국 사람이 수백 만 달러씩 그 소위 심리분석소에 투자해도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빵을 벌고 돈을 많이 번 사람들로 부터서 차츰 비판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요 돈을 많이 받아가지고 그래도 양심이 있지요.
돈을 받아서 저들의 문제를 해 결해 준다고 해서 돈을 받아갔는데 사실 해결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한 심리상담소에서 몇달 간 돈을 몇 백 달러를 지불하고서 상담이 다 끝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 심 리상담소를 찾아갑니다. 또 몇 달을 두고 문제를 고민하고 또 몇 백불씩 지불합니다. 그리고 또, 그다음. 그래도 문제 해결이 없으니까 빙빙빙 돕니다. 해결이 없어요. 아무리 죄의 책임을 밖의 사회로 전가해 볼려고 해도 전가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근본 책임이 인간에게 있고 그리고 죄의 기원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바깥 사회도 물론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죄를 짓도록 하는 근본 많은 큰 역할을 하 지요. 그러나 바깥사회가 죄 짓게 하는 것은 속에서 죄 짓게 하는 근본에 비기면 더 적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7계를 범한 간음죄를 범한 것은 물론 우발적으로 순식간에 충동을 일으켜서 7계를 범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마음속에서 반복적으로 오래도 록 이루어졌기 때문에 밖으로 나타납니다. 살인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처음에는 싫어합니다. 미워합니다. 그것이 반복되면 그 사람이 죽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자연적인 그 다음 단계가 그것입니다. 미워하는 미움의 대상이 없어지고 사라지기 바랍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구체적으로 제거하기를 바랍니다. 구 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살인이 처음 그 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살인 이 이루어지고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밖에서 살인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워 하는 것이 바로 살인죄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싫어하고 미워하지요. 그것이 자꾸 그 도를 반복하고 반복해서 강화해서 격화하면 그 사람이 없어지고 제거되기를 바랍니다. 그러 니 밖의 외부세력에서 제거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래도 안 되면 자기 손으로 자기가 제거 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일을 이루어 냅니다. 죄의 근원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성, 타락한 본성, 이것이 바로 구체적 죄 입니다. 우리 가 예수 믿었어도 이것 가지고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무죄하 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본성이 다 해결되고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어도 아직도 죄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 니 아무리 예수 잘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나는 죄짓지 아니한다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바로 이와 같은 죄의 본성 혹은 하나님 앞에 대해서 적대하는 죄 짓는 그것이 바 로 우리의 죄이고 우리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그릇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하고 정반대를 사실로 믿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속이는 것이 지요. 속이는 것이 무엇이냐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지 않고 사실과 반대되는 사실로 받 게하는 것이 바로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임받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에 사람들 이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용하기 위해서 사실 아닌 것을 사실인 것으로 합리화 하며 위로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언제까지 마지막까지 죄인일 것입니다. 마지막 우리가 죽어서 주앞 에 가는 것도 순전히 은혜이지요. 우리가 무죄해졌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죄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대로 어거스틴이 젊을 때에는 희 대의 타락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표준으로 보면 그렇게 많은 죄를 짓지 아니했다고 할 것입니다. 아마 사생아까지 낳아가지고 데리고 살았으니까 한사람 하고만 그와 같은 일을 하였 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누가 바르게 기억하고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기가 젊을 때 그렇게 모질게 어머니를 배역하고 죄지으며 방황하였던 것을 마지막 죽어가 면서 침상이 젖도록주여! 사하여 주옵소서!용서를 빌며 용서해 주시기를 빌며 주 앞으 로 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지막 숨거둘 때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그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가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죄를 짓는 본성 혹은 죄를 가졌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된단 말 입니까 그게 아니지요. 정말 죄책 뿐만 아니라 죄의 본성이 죄 짓는 본성을 제거하기 위 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죄짓지 못하도록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의 욕정에 충동되었을 때는 그때는 그와 같은 것이 죄인줄 잘 생각하지 못하지요. 그것이 여기서 어느정도 떨어져 나올 수 있어야 그것이 죄인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칼빈이 우리의 개혁신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칼빈이 늘 강조하고 강조하였듯이 늘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아마 여러분들도 내가 오늘 저녁에 눈을 감으면 떳떳이 그 앞에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산다면 여러분들이 죄 짓는 일에 담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 짓고도 죄 아닌 것처럼 무던하게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 있는 것과 죄를 짓는 것과는 전혀 별개 입니다. 우리는 죄 짓는 일을 참으로 두려워하고 조심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성경은 철학책이 아니어서인지 일체 정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을 할 때에도 진리에 속한 자들은 내 음성 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고 빌라도가 반문했습니다만 진리를 정의해 서 말해주지 안 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진리라고 할 때에라,이란 동사에서. .희랍적인 사고에서 진리란 항상 대상과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 혹은 인간의 이성에 합 치된 것을 진리라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구약적인 사고에서 성경의 사고에 있어서 진리란 항상 신실성이라 신실함이라, 하나님의 미쁘심에 진리를 연결시켜 왔습니다. 물론 이 에메 트란 말 속에 단지 신실성이란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사실이 사실대로 표현되는 것도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연관해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이성을 발동해서 우리의 지성을 활용하므로 진리 를 탐구해 내지 않습니다. 최소한 구약의 종교에 만은 우리의 이성을 활용해서 진리를 발견 해 내는 그와 같은 것은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종교에 의하면 항상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 왔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계시됨, 혹은 하나님의 본성 이 계시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계시 중에서 가장 큰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기를 계시하시기 바란 모든 것의 계시고 자기를 계시하기 바란 것의 전부를 다 계시하셨습니다. 물 론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처음 나타나고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전부가 다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진행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정에 이른 하나님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심, 혹은 하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혹은 이 앞절에서 하나님을 빛이라고 말씀했는데, 그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창조된 피조물이 자기를 떠나 서 이렇게 이탈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맞지 아니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 지 으신 본래 창조를 자기 본래의 지으신 목적에로 되돌이키심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 께서 영광을 받으신 일이지요.
그러면 바로 이 일을 이루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 명이라는 그 말 속에 길과 연관시키면,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로 가는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마지막 구절에내가 곧 생명이라 고 한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 뿐만 아니라 그가 생명 자체이고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일 뿐만 아니라 그 목표 자체 입니다. 그러니 그가 진리에로 이르는 길일 뿐만 아니라 그가 진리 자체이십니다. 모든 진리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피 조물을 그의 생명에로 연결시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혹은 구원의 도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 다는 말 입니다. 왜 그러하냐고 하면 하나님은 죄있는, 죄있는 곳에는 와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 있는 곳에 와 계시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의 내주 혹은 성령님의 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다고 해야 될 터인데! 왜 죄가 없다고 하면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바로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께서 오셨기 때문에 죄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고 그 의 인격을 부인하는 일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하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를 모 실 수 없는 것에 귀결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도 우리 안에 죄가 완전 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죄를 그냥 갖고 있으니까, 죄를 그냥 갖고 있어도 되는 것이냐 그 말이 아니지요. 바로 진리와 죄를 연결시킬 때에, 바로 죄와 진리를 연결시키므 로 우리에게 죄의 투쟁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아니하지요. 그러나 9절의 죄의 고백과 연결시키면 죄와 의 투쟁을 강력하게 강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죄를 멸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 고 살기 때문에 죄와의 강력한 투쟁을 우리가 전개해야 할 것입니다. 죄와 진리가 영 상극되는 것 같은데, 바로 이것이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우리 가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죄와의 투쟁이 강력하게 진행되어야 되는 것을 바로 8절 하반절 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고 뿐만 아니라, 말을 바꾸면 우리가 죄와의 투쟁을 전개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죄와의 투쟁을 하지 아니하시면 성령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죄 를 죄로 느끼지 아니하면 벌써 문제있는 사람입니다. 벌써 죽은 사람이거나 문제있는 사람 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투쟁하는 사람입니다.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주여! 나 를 사하시고 받으시옵소서!할 때까지 우리는 죄와 투쟁해야 될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도요한이 보면 문맥적으로 완전히 모순되는 문장들을 함께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우리가 죄 짓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에 죄와의 투쟁 을 강력하게 전개해야 합니다. 그 다음 9절, 여기서 문법적인 이야기지만, . 보통의 경우에은 엑센트를 붙이지 않습니다. 보통의 문장들에 에 액센트가 없어 강조점이 없이 쓰이고 있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에 액센트 강조점을 붙여 놓았습니다. 바로 진리가 바로 이 시간 부터 있지 아니하다. 죄 없다 고 부정하면 예수님이 더 계셔야 할터인데 죄 없다고 할 때부터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계시 지 아니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어디에 계시냐 우리안에 계십니다. 우리 개개인에도 계시지만 주의 백성들 안에 진리가 있습니다. 주의 교회에, 주의 교회에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항상 우리는 개신교의 교회간에는 개별자의 강 조가 더 많습니다. 루터의 친교의 강조가 키에르케골에서 아마 더 크게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 그래서 한국교회도 더구나 교회가 주의 교회로 하 나된 생각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진리가 맡겨진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교회에. 개별, 개인에게 맡겨졌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기독교의 진리 만은 항상 우리 안에 교회 안에 교회에 진리가 맡겨져 있습니다. 복음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자 혼자 있을 때에는 어떠냐 전도자 혼자 있을 때에도 전도자 홀로 있는 경우 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면 반드시 교회가 거기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항 상 진리를 가진 자가 혼자 서 있는 법이 없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는 자 기 혼자 서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하나만 남아 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 교회가 타락해 속화되어 버렸어도 정말 눈을 씻 고 또 씻고 봐도 교회가 있느냐 아마 그런 날이 아마 올 것입니다. 머지 않아 올 것입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답이 그 때에도 반복될 것입니다. 그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세상에서 제거되지 아니합니다. 교회는 끝까지 지상에 진리의 터로 보루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 교회의 하나됨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지방으로 만 교회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분파되는 것, 우리말로 분파라고 하면 별로 그렇게 나쁜 뉘앙스가 없는데 영어에 Sect라고 하는 것 상당히 그들에게 있어서 강하게 뉘앙스를 갖습니다. 교회가 되지 못하는 말, 교회 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말 Sect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번 합동하는 일에 그런 불행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왜 생겼습니까 물론 사당동에서 부터 안 갈라졌으면 더욱 좋았지요. 우리는 우리가 진리를 갖고 있는한 진리에 서서 진리의 담지자로 교회의 하나됨을 힘써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9절 그리고 우리의 죄들 을 우리가 고백하면. 고백 신앙고백이란 말을라 하고 혹은, 말을 같은 말을 한다는 말입니다. 한 말을! 그러니 까 신앙으로 단체가 공통으로 자기의 것으로 진술하는 것, 그것이혹은 ,한말 같은 말을, 같은 단체가 할 때 그것을 신앙고백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여기서 죄를 (신앙고백) 했습니다. 죄를! 예수 그리스도 믿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죄를 , 죄를 고백한다고 왜 죄를 신앙고백한다고 했습니까 그리고우리들의 죄들을 고백하면 . 물론 속에 어떤 것을 승인하고 인정하고 혹은 죄과를 고백하는 것도 속합니다.
그런데 죄들을 고 백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 신앙고백 할 때 죄 고백합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 속에 죄의 고백이 늘 들어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신경에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 죄의 용서가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함으로 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합당하고 바르게 고백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고백 뿐만 아니라 죄들을 고백하는 것이 고백하는 것 그것을 우리의 신앙고백에 필수적으로 넣어 야 맞습니다. 교회는 순전히 의인만, 본래부터가 의 있는 사람은 교회에 들어오지 아니합니다. 교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두 가지 종류의 존재가 들어오지 못 하는데 천사는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리고 의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들 어온 사람들은 다 죄인된 사람들이고 죄인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니 나만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함께 죄들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고백은 늘 같은 말로 반복합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한 것은 바른 예배입니다. 우리가 입을 모두어서 한 말로같은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언제 교회로 나타나느냐 바로 이신앙고백에서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됨이 어디에서 있느냐 바로 이신앙고백에서 죄를 고백하는 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데서 교회가 교회 됩니다.
그런데 이 죄를 고백함으로, 우리가 죄들을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표기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장로들이 하지요. 장로들이 하는 것도 틀리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대표라는 뜻으로 장로들이 하므로 아마 바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표기도는 항상 백성들의 사정들을 아뢰는 것만 하지 우리 한국교회에 죄의 고백 이 공예배에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일에 있어서 아마 모르겠으나 목사로 바꾸면 그런 죄의 고백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마 우리나라 현재 상황으로 조금 어렵지요. 목사가 대표 기도 해도! 그러나 공교회에서의 예배에서 항상 죄의 고백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죄의 고백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함이 없어지게 됩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도덕적으로는 교사로, 종교의 훌륭한 교훈가로 그 교사의 현대와 같이 현대를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가로 변조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죄의 고백이 없는데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주로 고백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항상 공교회 예배에 죄의 고백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는 평신도들을 함께 예배에 동참시킴으로 장로로 하여금 기도케 하는 좋은 예배모범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목사가 대표기도 함으로 죄의 고백과 함 께 백성들의 전체 사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수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예배전에 어떻다는 사정을 장로에게 말해주지마는 그러나 목사가 갖는 가장 큰 특권중의 하나는 바로 이 교회 전체를 위하여 하는 도고가 목사가 갖는 가장 큰 특권에 속합니다. 그러니 공교회 예배에 공예배에 목사가 대표기도하는 것이 바르고 합당합니다. 죄를 고백하면, 죄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구체적인 죄를 말할 뿐 아니라 우리 전체가 죄인임을 고백해야 맞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들 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죄들을 하나님에 대한 적대라, 미워함이라, 혹은 죄 짓는 본성이 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복수를 썼습니다.
우리들의 죄들을우리의 본성이 우리가 죄인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은 구체적인 죄들을 또 고백해 야 맞습니다. 예배에 회개기도를 넣는 것은 필수적 입니다. 그것이 대표기도의 형식을 빌리 든지 아니면 전체가 회개하는 기도를 하든지 간에, 예배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죄의 고백으로 만이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바로 가질 수가 있습니다. 죄를 고백함이 없는 때는. 어제 부활절 설교 나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부활절 설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 대세계를 변화시키는 도표로 도식으로만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물론 부활의 권세가 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시키고 있으니까 시킬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에 이 세상을 전 창조를 변화 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고백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렇게 사회개혁에 갖다 직접 붙이면 자기의 인간적인 투쟁을 정당하게 하기 위한 신학적인 변조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반드시 죄를 고백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 . 그러면 그는 신실하고 의로우사 우리 로 부터서 모든 죄들을 용서하실 것이요 그릭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서 깨끗하게 하실 것 이요. 우리가 죄만 고백하면그는 신실하셔서, 신실하다 하는 말은 언제든지 믿 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 희랍적인 사고가 아니 고 언제 가도 그분은 첫 약속에 그대로 부착해 있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부인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본성대로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자기 가 내신 약속은 약속대로 지키시고 그 약속에 부착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구약에서 나타나 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성은 진리와 하고도 통합니다.
그런데 신실성,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모든 언약이 깨어져 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 약속에 부착해 계심을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심을 늘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를 여기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고백만 하면 고백하는 자에게 사죄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언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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