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름의 권세=죄사함 (요일2:12-14)
본문
요한일서 2장 12절부터 14절까지 입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 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 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 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장 12절 , ,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가 너희들에게 사해져 있느니라. 우선 거기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는 이미 2장 1절 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사도 요한이 이 자기의 편지 받는 자들을 자녀들아 라고 해서 자기의 지도를 절 실히 필요로 하는 영적으로 어린 자녀들임을 분명히 했고 뿐만 아니라 또 사도 요한이 편 지를 받는 성도들과의 관계가 말씀 안에서 부모와 자녀 같은 그와 같은 친숙한 관계임을 말씀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주님만이 주님, 그리고 사도 요한이 자기의 말씀을 듣는 자들을특별히 요한도 후에 자기를 돕느라고 수고한 제자들을 향해서 자녀들아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정신을 가장 잘 이어받은 사도가 바로 사도 요한이라 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항상 베드로가 제자단의 대변인이고 그리고 밖으로 대변자이 었다면 요한은 주님의 심정을 가장 잘 알고 잘 이해한 사도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말씀들을 잘 기억했고 그리고 그 말씀을 깊이 깊이 명상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래 살므로 주께서 생전에 계시면서 하신 말씀들의 깊이를 잘 반성하고 그리고 반성해서 남은 것들이 요한복음과 요한
1,
2,3서 특히 요한일서라고 할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도가 그리고 그가 사랑의 사도로서 사랑 을 강조했기 때문에 정말 사랑의 대상으로 볼 때는 자기의 편지를 받는 그의 독자들이 혹 은 교회들이 그의 눈에 자녀들로 보였을 것임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도 요한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 이냐 . 그 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에게 죄가 사해졌다. 초대교회에 복음 선포를 그리고 주된 내용은 항상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사해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건 사도 요한만의 선포가 아니었고 베드로와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공통으로 외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인 제사해진다고 하는 말을죄를 사해 준다 혹은 사해지다 하는 속전을 드림으로 빚을 변제해 주다 하는 이 단어에 현재분사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죄만 용서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용서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장에 나타나 있는, 1장 7절에 . 예수 그의 아들의 피가 우리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는 말씀과 마찬가지 같은 문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9 절에도우리가 우리들의 죄들을 고백 하면신실하시고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들에게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그 말씀과 한 말씀으로 같은 문맥에 서 있습니다. 과거의 죄만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도 요한에 의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피 때문에 죄로부터 지켜지고 죄로부터 깨끗함을 입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앞에서는 죄가 예수의 피로 깨끗해진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죄가 용서된다고 하는 말은 산헤드린 공회의에 가서 매를 맞을 때 사도들이 증거한 말, 천하에 우리에게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나니 한 그 고백과 마찬가지 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단지 그의 이름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만 용서되게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지금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사실 입니다. 그의 이름의 권세로, 우리말 번역이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 음이요 .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권세로 말미암 아 사해진다. 이 말의 문맥을 따라서 번역을 하면 그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사해지느냐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자 주 기호화된 세상이어서 믿음이 한낱 기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많이 정보화된 시 대가 아니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다마는 우리의 이름들이 앞으로 이제 중앙 재료 은행 에 저장될 때는 우리의 이름 앞에 전부 다 부호화 되서 그 부호로 처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스위치판 위의 한낱 부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부호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여러분 이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도시인들의 특징입니다. 도시가 왜 좋으냐 왜 자유를 누 릴 수 있느냐 바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무명성, 이름이 없다. 곁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도 나는 모릅니다. 지금 내가 과천에 이사를 와 가지고 1년 삽니다. 내가 아는 얼굴이 이웃집에 사는 사람 들 중에 세 사람,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 그 어머니하고 그리고 아래층에 사는 두 세 사람 얼굴 그 정도 밖에 모릅니다. 1년이 지났는데도 그 층층에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얼굴도 모른다. 봐도 저 사람이 우리 동에 사는지, 혹은 같은 층층대를 사용하는데 어디 사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도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명성이 특성인데, 이름들이 기 호화 되어 있어서 자기 실체하고 분리되 있어서 이름 자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에게서는 특별히 이름이 곧 실재이고 그 이름이 단지 한낱 부호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름이 그 인격 전체를 다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단지 한낱 부호가 아니라 그 의 인격 전부를 대변한 것이 그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인격 뿐만 아니라 그의 사정관계, 생활사가 그 이름에 전부 다 들어있는 것이 옛날 이름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단지 한낱 부호나 부르는 기호가 아니라 이름은 실제적인 것이어서 이름이 바로 실체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 그러면 그 이름만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와 있는 곳에 여호와가 와 계신 것을 나타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봉헌기도를 할 때 하나님은 높은 데 계시고 어 두운 데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도 어두운 데 계신다고 할 때도 단지 저 위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데 계신다고 하는 그런 뜻 만은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이 계신 다고 하는 그 지성소 안에 법궤를 두었는데 그 법궤에 소위 거기 그룹들 위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고 거기 임재해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지성소는 사방을 완전히 밀 폐해서 사방에 빛이 전혀 통과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곳에 자기 이름을 두신다고 할 때에 자기와 자기 이름과를 구분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내 이름 거기 둔다하고도 자기를 분리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자기가 분리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성전에 매이지 않는 분이심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방의 신들처럼 바알의 신, 아세라 신, 그모스라든지 이방의 여러가지 신들 처럼 어떤 성전에 국한해서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로우시고 주권적인 하나님이어 서 그리고 성전에 매이지 아니하는 분이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셔서 내 이름을 거기 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그렇게 말씀하셔서 자기 이름을 거기 두신다고 하셨을 때는 이름만 거기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신이 그곳에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난 곳은 이름만-여호와라고 그럴 때 야웨라고 그럴 때 네 글자로 되어서 테트라그라마톤만-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와 주심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실재를 묻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내가 조상들의 하나님 내가 보냈다 고 할 때에그러면 그들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무엇이라고 답할 것 입니까하고 모세가 물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야웨라.창조의 이름으로 알리지 하지 아니했지마는 전능자로 엘샤다이로 자신을 하나님으로 알렸지마는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말할 때에야웨라!
I am that
I am. 이름이 누구시 냐고 물을 때 단지 그분을 어떻게 부르는 분이냐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의 전 인격과 실체가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은 그 인격 전체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자기 이름을 나타내신다고 할 때는 그 이름이 나타나 있는 다고 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지배가 와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난 곳이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남을 뜻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할 일은 나타나 있는 계시해 주신 이름을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백성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첫 머리에도 예수께서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 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우리처럼 그런 소박 한 뜻으로가 아니고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 이름이 나타나는 곳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지배가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곳에 그의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그거에다 한가지 더 붙였는데 자기 이름을 좇 아서 내 이름으로 불리운다 할 때에 그데 라고 하는 전치사를 앞에 붙여서 예수님 이름으 로 불리운다 할 때에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됨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의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되돌아와서 그래도 그 구약의 설명 가지고 이 본문이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사해지느냐 피로 씻어진다. 피로 사해진 다고 하면 이해가 쉬운데 어째 이름으로 사해지느냐
그런데 실재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뜻 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가 그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 로 죄를 속하시기 위한 중보자의 이름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그냥 사람의 인 격이 아니고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분이 냐 그냥 하나님 만이 아니고 그냥 사람 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중보자 되시고 죄를 속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 바로 죄를 속하기 위한 중보자이 시다. 그러니까 그 이름으로 죄를 속하시고 죄가 용서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의 권세로 만 이 죄가 속해질 수 있다. 왜 그가 죄를 속하기 위한 중보자 되심으로 그의 인격이 바로 이러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바로 그 인격으로 그분에 의해서 그의 목숨에 의해서 마찬가지로 다 같은 문맥으로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가 용서됨에 그의 인격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이름은 그냥 한낱 이름 이 아니고 죄를 속하시기 위한 중보자의 이름입니다. 그런 인격이시다. 그러니까 바로 이 증명으로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름으로 이 이름의 권세로 죄가 용서됐고 깨끗 해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든지 죄가 용서될 수 있는 이름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 이 이름의 권세에 대해서 그렇게 큰 권세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게 참 큰 문제입니다. 교회는 번성하고 잘 되는데도 교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느끼지 못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사해지는 그런 것을 지금 우리 현대 한국 교회에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예배는 하고 설교는 쭉 하지요. 그래도 예수의 그 이름의 권세가 느껴지지 못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선포될 때마다 죄가 사해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설교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무슨 설교들 을 대부분 하시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많이 듣지 않고 한 교회만 출석을 하니 여러분께서 어떻게 잘 했는지 모르지마는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에 의하면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 대부분의 설교들에 예수의 이름의 선포가 적고 이름이 언급되도 그 이름으로 죄가 용 서되는 그와 같은 권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교회가 병들어 있지요. 예수 의 이름이 좋아야 될텐데 그러지를 못한다. 결국 예수의 이름으로 죄가 용서되고 있는 것이 말해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요한은 , 자녀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라고 하는 현재 동사하고라고 하는 동사하고 같은 시제예요.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너희들의 죄가 계속적으로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해지고 있다.죄는, 우리 한국 교회는 많은 경우에 죄가 용서되는 것은 옛날 일이요. 처 음 예수 믿을 때 일이지! 그 다음부터는 별로 죄하고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 이름이 그렇게 자주 언급될 필요가 없지요. 죄는 옛날에 다 사해져 버렸는데 뭐할려고 귀찮게 자꾸 죄! 죄! 하느냐고! 괴롭고! 하는 사람도 자꾸 죄 죄 하니 괴롭고 듣는 사람도 책망하면 안 좋지! 그러니 할 수 있는대로 빼고, 죄는 빼고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셔서 은혜를 많이 주신다. 복을 많이 내리신다. 이런 은혜로운 말씀만 해야 교회가 은혜가 넘치고 헌금도 많이 나 오지. 회개해라 회개해라. 회개하라고만 해도 회개가 되는게 아닙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하고 결부되어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자꾸 해봐도 회개가 안 돼요. 왜 공허한 소리요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그 회개하라고 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하고 연관되어야 할텐데 예수의 이름하고 연관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의 많은 경우들에 회개해도 죄는 열심히용서해 주십시요 용서해 주십시요자꾸 하는 데 하나님도 뭘 보고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뭘 보고! 용서해 주실 뭐가 있어야 용서해 주 시지!
그런데 예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용서해 주시겠냐고! 죄만 남용 하고 용서해 주시라고 하면 용서해 주시는 게 아니다. 많은 경우에 복음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죄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하고 자꾸 나열하면 하나님의 화만 불러 일으키는 것이지! 화만 자꾸 불러! 용서가 안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해야지! 당 연히! 죄는 많이 지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짓는양 용서해 주시라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노니 그 이름으로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그 피에 호소하니 그 피로 내 죄를 씻으시옵소서.그래야 하나님도 즉각 즉각 용서해 주시고 그 죄를 도말하 시지 그냥 죄만 나열해도 그 용서 용서 하니 하나님도 귀가 아픕니다. 그런 소리를 안 들으 십니다. 그러니 죄는 회개했어도 진짜 내 죄가 용서됐는지 안 됐는지 확신이 없어요. 그러 니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용서 구하고 또 회개하고 또 하고 반복 자꾸 해도 용서된 것 같지 않다! 왜 용서될 방법으로 용서를 구하지 안 했어요. 용서될 방법으로 죄를 고백 하지 안 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이름의 권세에 의지해서 구해야 했을 텐데 그러지 안 했다. 이 복음을 분명하고 바르게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서 변화되고 어 떻게 참 헤아릴 수 없이 진보하고 발전해도 죄가 용서되는 것은 예수의 이름의 권세로 만 이요. 죄가 씻음 받는 것은 예수의 피에 의해서 만 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일부 천년기론자들 중에서 특히 세대론자들 중에서는 예수님 오셔 도 구약의 피제사가 다시 복귀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복음을 너무 모르고 엉터리로 해석하 다 보니까 그런 해괴한 종말론을 만들어내요. 어째서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와 같은 해괴한 종말론의 이론이 교회에 성행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칼빈이 지금 당 대에 살았더라면 정말 이 이걸 투쟁하느라고 사력을 다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지금은 예수 피로 구원 받고 그때 가서는 또 짐승 피로 또 고기도 먹고 하니 좋은 생각만 든다. 신천신지에 더 이상 살생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살생이 진행되지 안 해요.
사람을 죽이는 일만 없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죽이는 일도 더 이상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 만의 일이요. 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만이 용서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용서된다는 말을 맨 앞에다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란 말을 제일 뒤에다 두었어요. . 그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용서된다. 이 복음을 분명히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글을 쓰노니그때 아비들 은하고 다른자녀들 하고 다른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에 일부 인제 아비들을 독자층들을 골라서 일부러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처음부터서 계신자를 너희가 알았음이요. 현재로 쓰 지 않고과거로 썼습니다. . 처음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 태초부터 계신 자가 누구냐 하나님 아버지를 말한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권세있는 믿음을 가지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태초부터 계신 자가 누구냐 여기서 볼 때에!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태초부터 계신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를 너희들이 예수 믿은 것이 지금 믿은 것이 아니고 아비들이니까 복음을 받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13절 하 반절. 청년들아 혹은 젊은이들아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쓰는 것은 너희들이악한자를 이기었노라. 이기었다고 하는 라고 하는 동사를 예수님이 사용하실 때는 사탄을 결박하다는 의미로 사용을 했습니다. 여기서 똑같은라고 하는,이기다, 승리하다 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여기서 악한 자를 말합니다. 악한 자가 누구냐 악한 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14절까지에서 악한 자 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도 다른 말로 풀어 말하지 않았지마는 사도 요한은 악한 자는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을 이기었다. 사탄을 승리했다. 젊은들이 사탄과 싸워 이긴 승리의 용사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기었는지는 14절 마지막 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항상 이기었느냐 말씀으로 악한 자를 이기었다. 악한 자, 도덕적으로 나쁜 자, 이 사람을 지시하면서, 인격을 지시하는라고 할 때에 사도 요한은 반드시 사탄을 옛뱀을 지시했습니다. 젊 은이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믿음으로 말씀의 권세로 사탄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무엇이냐 바로 다른 것이 아니고 . 그 이름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그 말씀으로 죄의 근원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악한 자, 왜 여기서 이렇게 갑자 기 악한 자가 나오느냐 그거는 12절에 연관해서 말하고 있다. 죄의 근원인 자를, 죄를 짓 게 하는 근본인 자를 어떻게 이기느냐 그의 이름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그 말씀으로 그 죄 가 용서될 뿐만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근원인 사탄도 악한 자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유대인들의 아비들이 아니고 젊은 자들이다. 젊은 자 들이 힘이 있어서 사탄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젊은 자들이 사탄을 이겼으니 힘이 있 어서 이긴 것같이 생각되기 쉽지만, 14절 후반절에 너희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름으로 너희들이 항상 이기었다고 하는 강한 것은 젊었기 때문에 힘이 있어서 강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의 권세로 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용서된다고 하는 이것 만이 사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죄를 물리칩니까 여러분 은 어떻게 죄를 물리칩니까 어떻게 죄의 유혹에서 여러분들이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 까 바로 이 본문에 의해서 2장 12절과 1장 7절,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했고, 예수의 피가 지금 나를 구원했다. 예수의 이름의 권세가 나를 지킨 다고 하는 믿음 그 선언! 그것 만이 여러분들이 죄의 유혹에 빠져듦에서 여러분들이 이겨날 수 있습니다. 그외에 어떤 길로도 여러분들이 아무리 소리쳐서사탄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아무리 소리쳐 봐도 사탄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육욕의 발 동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만이 그의 이름의 권세로 내 죄가 지금 용서되고 있다. 그리고 나를 그의 피가 깨끗하게 지키고 있다고 하는 말씀으로 만이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외에 어떤 길로도 우리가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항상 문제는 간단해요. 복음으로만! 복음을 바로 이해하면 죄와의 투쟁에서 이기는 길은 항상 쉽 고 가까운데 있습니다. 능력있게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언해도, 내가 그래야지, 안 해 야지, 또
그런데 빠져들면 자기를 자책하고 그렇게 아무리 해도 다음에 더 능력있게 일이 진행되지 약화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죄의 유혹, 어떻게 사탄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느냐 예수의 이름의 권세로 내 죄가 용서되고 그 피가 지금 나를 깨끗하게 하고 있다. 그 피가 나를 두르고 있다. 그 말을 입으로 분명히 해야 됩니다. 분명히 해야 되지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말을 하므로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만 죄가 용서되고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20세기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한 복음입니다. 아멘. 다음절은 그 다음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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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서 특히 요한일서라고 할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도가 그리고 그가 사랑의 사도로서 사랑 을 강조했기 때문에 정말 사랑의 대상으로 볼 때는 자기의 편지를 받는 그의 독자들이 혹 은 교회들이 그의 눈에 자녀들로 보였을 것임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도 요한이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 이냐 . 그 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에게 죄가 사해졌다. 초대교회에 복음 선포를 그리고 주된 내용은 항상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사해진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건 사도 요한만의 선포가 아니었고 베드로와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공통으로 외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인 제사해진다고 하는 말을죄를 사해 준다 혹은 사해지다 하는 속전을 드림으로 빚을 변제해 주다 하는 이 단어에 현재분사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죄만 용서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용서되고 있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장에 나타나 있는, 1장 7절에 . 예수 그의 아들의 피가 우리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는 말씀과 마찬가지 같은 문맥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9 절에도우리가 우리들의 죄들을 고백 하면신실하시고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들에게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그 말씀과 한 말씀으로 같은 문맥에 서 있습니다. 과거의 죄만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도 요한에 의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피 때문에 죄로부터 지켜지고 죄로부터 깨끗함을 입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앞에서는 죄가 예수의 피로 깨끗해진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죄가 용서된다고 하는 말은 산헤드린 공회의에 가서 매를 맞을 때 사도들이 증거한 말, 천하에 우리에게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나니 한 그 고백과 마찬가지 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단지 그의 이름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만 용서되게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지금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사실 입니다. 그의 이름의 권세로, 우리말 번역이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 음이요 .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권세로 말미암 아 사해진다. 이 말의 문맥을 따라서 번역을 하면 그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사해지느냐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자 주 기호화된 세상이어서 믿음이 한낱 기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많이 정보화된 시 대가 아니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합니다마는 우리의 이름들이 앞으로 이제 중앙 재료 은행 에 저장될 때는 우리의 이름 앞에 전부 다 부호화 되서 그 부호로 처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스위치판 위의 한낱 부호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부호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여러분 이름이 없습니다. 이것이 도시인들의 특징입니다. 도시가 왜 좋으냐 왜 자유를 누 릴 수 있느냐 바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무명성, 이름이 없다. 곁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도 나는 모릅니다. 지금 내가 과천에 이사를 와 가지고 1년 삽니다. 내가 아는 얼굴이 이웃집에 사는 사람 들 중에 세 사람, 할아버지 할머니 하고 그 어머니하고 그리고 아래층에 사는 두 세 사람 얼굴 그 정도 밖에 모릅니다. 1년이 지났는데도 그 층층에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얼굴도 모른다. 봐도 저 사람이 우리 동에 사는지, 혹은 같은 층층대를 사용하는데 어디 사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도시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명성이 특성인데, 이름들이 기 호화 되어 있어서 자기 실체하고 분리되 있어서 이름 자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에게서는 특별히 이름이 곧 실재이고 그 이름이 단지 한낱 부호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이름이 그 인격 전체를 다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단지 한낱 부호가 아니라 그 의 인격 전부를 대변한 것이 그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의 인격 뿐만 아니라 그의 사정관계, 생활사가 그 이름에 전부 다 들어있는 것이 옛날 이름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단지 한낱 부호나 부르는 기호가 아니라 이름은 실제적인 것이어서 이름이 바로 실체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 그러면 그 이름만 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와 있는 곳에 여호와가 와 계신 것을 나타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봉헌기도를 할 때 하나님은 높은 데 계시고 어 두운 데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도 어두운 데 계신다고 할 때도 단지 저 위에 우리가 볼 수 없는 데 계신다고 하는 그런 뜻 만은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이 계신 다고 하는 그 지성소 안에 법궤를 두었는데 그 법궤에 소위 거기 그룹들 위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고 거기 임재해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지성소는 사방을 완전히 밀 폐해서 사방에 빛이 전혀 통과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곳에 자기 이름을 두신다고 할 때에 자기와 자기 이름과를 구분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내 이름 거기 둔다하고도 자기를 분리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자기가 분리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성전에 매이지 않는 분이심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방의 신들처럼 바알의 신, 아세라 신, 그모스라든지 이방의 여러가지 신들 처럼 어떤 성전에 국한해서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자유로우시고 주권적인 하나님이어 서 그리고 성전에 매이지 아니하는 분이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셔서 내 이름을 거기 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그렇게 말씀하셔서 자기 이름을 거기 두신다고 하셨을 때는 이름만 거기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신이 그곳에 임재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난 곳은 이름만-여호와라고 그럴 때 야웨라고 그럴 때 네 글자로 되어서 테트라그라마톤만-그 자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와 주심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실재를 묻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내가 조상들의 하나님 내가 보냈다 고 할 때에그러면 그들이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에 무엇이라고 답할 것 입니까하고 모세가 물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야웨라.창조의 이름으로 알리지 하지 아니했지마는 전능자로 엘샤다이로 자신을 하나님으로 알렸지마는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말할 때에야웨라!
I am that
I am. 이름이 누구시 냐고 물을 때 단지 그분을 어떻게 부르는 분이냐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이름 속에 하나님의 전 인격과 실체가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은 그 인격 전체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자기 이름을 나타내신다고 할 때는 그 이름이 나타나 있는 다고 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지배가 와 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난 곳이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남을 뜻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할 일은 나타나 있는 계시해 주신 이름을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백성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첫 머리에도 예수께서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 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우리처럼 그런 소박 한 뜻으로가 아니고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 이름이 나타나는 곳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지배가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 곳에 그의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그거에다 한가지 더 붙였는데 자기 이름을 좇 아서 내 이름으로 불리운다 할 때에 그데 라고 하는 전치사를 앞에 붙여서 예수님 이름으 로 불리운다 할 때에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됨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의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되돌아와서 그래도 그 구약의 설명 가지고 이 본문이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사해지느냐 피로 씻어진다. 피로 사해진 다고 하면 이해가 쉬운데 어째 이름으로 사해지느냐
그런데 실재는 그리스도의 권세를 뜻 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가 그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 로 죄를 속하시기 위한 중보자의 이름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그냥 사람의 인 격이 아니고 죄를 속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분이 냐 그냥 하나님 만이 아니고 그냥 사람 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중보자 되시고 죄를 속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냐 바로 죄를 속하기 위한 중보자이 시다. 그러니까 그 이름으로 죄를 속하시고 죄가 용서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의 권세로 만 이 죄가 속해질 수 있다. 왜 그가 죄를 속하기 위한 중보자 되심으로 그의 인격이 바로 이러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바로 그 인격으로 그분에 의해서 그의 목숨에 의해서 마찬가지로 다 같은 문맥으로 같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가 용서됨에 그의 인격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이름은 그냥 한낱 이름 이 아니고 죄를 속하시기 위한 중보자의 이름입니다. 그런 인격이시다. 그러니까 바로 이 증명으로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름으로 이 이름의 권세로 죄가 용서됐고 깨끗 해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든지 죄가 용서될 수 있는 이름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 이 이름의 권세에 대해서 그렇게 큰 권세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게 참 큰 문제입니다. 교회는 번성하고 잘 되는데도 교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느끼지 못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사해지는 그런 것을 지금 우리 현대 한국 교회에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예배는 하고 설교는 쭉 하지요. 그래도 예수의 그 이름의 권세가 느껴지지 못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선포될 때마다 죄가 사해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설교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무슨 설교들 을 대부분 하시는지 나는 잘 모르겠어요. 많이 듣지 않고 한 교회만 출석을 하니 여러분께서 어떻게 잘 했는지 모르지마는 일반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에 의하면 지금 우리 한국 교회에 대부분의 설교들에 예수의 이름의 선포가 적고 이름이 언급되도 그 이름으로 죄가 용 서되는 그와 같은 권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교회가 병들어 있지요. 예수 의 이름이 좋아야 될텐데 그러지를 못한다. 결국 예수의 이름으로 죄가 용서되고 있는 것이 말해지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요한은 , 자녀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라고 하는 현재 동사하고라고 하는 동사하고 같은 시제예요.지금 글을 쓰고 있는데 너희들의 죄가 계속적으로 이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해지고 있다.죄는, 우리 한국 교회는 많은 경우에 죄가 용서되는 것은 옛날 일이요. 처 음 예수 믿을 때 일이지! 그 다음부터는 별로 죄하고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 이름이 그렇게 자주 언급될 필요가 없지요. 죄는 옛날에 다 사해져 버렸는데 뭐할려고 귀찮게 자꾸 죄! 죄! 하느냐고! 괴롭고! 하는 사람도 자꾸 죄 죄 하니 괴롭고 듣는 사람도 책망하면 안 좋지! 그러니 할 수 있는대로 빼고, 죄는 빼고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셔서 은혜를 많이 주신다. 복을 많이 내리신다. 이런 은혜로운 말씀만 해야 교회가 은혜가 넘치고 헌금도 많이 나 오지. 회개해라 회개해라. 회개하라고만 해도 회개가 되는게 아닙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하고 결부되어서만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자꾸 해봐도 회개가 안 돼요. 왜 공허한 소리요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그 회개하라고 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하고 연관되어야 할텐데 예수의 이름하고 연관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의 많은 경우들에 회개해도 죄는 열심히용서해 주십시요 용서해 주십시요자꾸 하는 데 하나님도 뭘 보고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뭘 보고! 용서해 주실 뭐가 있어야 용서해 주 시지!
그런데 예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용서해 주시겠냐고! 죄만 남용 하고 용서해 주시라고 하면 용서해 주시는 게 아니다. 많은 경우에 복음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죄만 용서해 주세요 용서해 주세요하고 자꾸 나열하면 하나님의 화만 불러 일으키는 것이지! 화만 자꾸 불러! 용서가 안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해야지! 당 연히! 죄는 많이 지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짓는양 용서해 주시라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노니 그 이름으로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그 피에 호소하니 그 피로 내 죄를 씻으시옵소서.그래야 하나님도 즉각 즉각 용서해 주시고 그 죄를 도말하 시지 그냥 죄만 나열해도 그 용서 용서 하니 하나님도 귀가 아픕니다. 그런 소리를 안 들으 십니다. 그러니 죄는 회개했어도 진짜 내 죄가 용서됐는지 안 됐는지 확신이 없어요. 그러 니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용서 구하고 또 회개하고 또 하고 반복 자꾸 해도 용서된 것 같지 않다! 왜 용서될 방법으로 용서를 구하지 안 했어요. 용서될 방법으로 죄를 고백 하지 안 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이름의 권세에 의지해서 구해야 했을 텐데 그러지 안 했다. 이 복음을 분명하고 바르게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서 변화되고 어 떻게 참 헤아릴 수 없이 진보하고 발전해도 죄가 용서되는 것은 예수의 이름의 권세로 만 이요. 죄가 씻음 받는 것은 예수의 피에 의해서 만 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일부 천년기론자들 중에서 특히 세대론자들 중에서는 예수님 오셔 도 구약의 피제사가 다시 복귀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복음을 너무 모르고 엉터리로 해석하 다 보니까 그런 해괴한 종말론을 만들어내요. 어째서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와 같은 해괴한 종말론의 이론이 교회에 성행하도록 내버려 두는지 참으로 모를 일입니다. 칼빈이 지금 당 대에 살았더라면 정말 이 이걸 투쟁하느라고 사력을 다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지금은 예수 피로 구원 받고 그때 가서는 또 짐승 피로 또 고기도 먹고 하니 좋은 생각만 든다. 신천신지에 더 이상 살생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살생이 진행되지 안 해요.
사람을 죽이는 일만 없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죽이는 일도 더 이상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 만의 일이요. 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만이 용서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용서된다는 말을 맨 앞에다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란 말을 제일 뒤에다 두었어요. . 그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용서된다. 이 복음을 분명히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글을 쓰노니그때 아비들 은하고 다른자녀들 하고 다른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에 일부 인제 아비들을 독자층들을 골라서 일부러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처음부터서 계신자를 너희가 알았음이요. 현재로 쓰 지 않고과거로 썼습니다. . 처음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라. 태초부터 계신 자가 누구냐 하나님 아버지를 말한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권세있는 믿음을 가지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태초부터 계신 자가 누구냐 여기서 볼 때에! 다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태초부터 계신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를 너희들이 예수 믿은 것이 지금 믿은 것이 아니고 아비들이니까 복음을 받고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13절 하 반절. 청년들아 혹은 젊은이들아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쓰는 것은 너희들이악한자를 이기었노라. 이기었다고 하는 라고 하는 동사를 예수님이 사용하실 때는 사탄을 결박하다는 의미로 사용을 했습니다. 여기서 똑같은라고 하는,이기다, 승리하다 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여기서 악한 자를 말합니다. 악한 자가 누구냐 악한 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14절까지에서 악한 자 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도 다른 말로 풀어 말하지 않았지마는 사도 요한은 악한 자는 사탄을 말합니다. 사탄을 이기었다. 사탄을 승리했다. 젊은들이 사탄과 싸워 이긴 승리의 용사들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기었는지는 14절 마지막 절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항상 이기었느냐 말씀으로 악한 자를 이기었다. 악한 자, 도덕적으로 나쁜 자, 이 사람을 지시하면서, 인격을 지시하는라고 할 때에 사도 요한은 반드시 사탄을 옛뱀을 지시했습니다. 젊 은이들이 사탄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믿음으로 말씀의 권세로 사탄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무엇이냐 바로 다른 것이 아니고 . 그 이름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그 말씀으로 죄의 근원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악한 자, 왜 여기서 이렇게 갑자 기 악한 자가 나오느냐 그거는 12절에 연관해서 말하고 있다. 죄의 근원인 자를, 죄를 짓 게 하는 근본인 자를 어떻게 이기느냐 그의 이름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그 말씀으로 그 죄 가 용서될 뿐만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근원인 사탄도 악한 자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유대인들의 아비들이 아니고 젊은 자들이다. 젊은 자 들이 힘이 있어서 사탄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젊은 자들이 사탄을 이겼으니 힘이 있 어서 이긴 것같이 생각되기 쉽지만, 14절 후반절에 너희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름으로 너희들이 항상 이기었다고 하는 강한 것은 젊었기 때문에 힘이 있어서 강 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의 권세로 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의 권세로 죄가 용서된다고 하는 이것 만이 사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죄를 물리칩니까 여러분 은 어떻게 죄를 물리칩니까 어떻게 죄의 유혹에서 여러분들이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 까 바로 이 본문에 의해서 2장 12절과 1장 7절,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들을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했고, 예수의 피가 지금 나를 구원했다. 예수의 이름의 권세가 나를 지킨 다고 하는 믿음 그 선언! 그것 만이 여러분들이 죄의 유혹에 빠져듦에서 여러분들이 이겨날 수 있습니다. 그외에 어떤 길로도 여러분들이 아무리 소리쳐서사탄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아무리 소리쳐 봐도 사탄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죄의 유혹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육욕의 발 동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만이 그의 이름의 권세로 내 죄가 지금 용서되고 있다. 그리고 나를 그의 피가 깨끗하게 지키고 있다고 하는 말씀으로 만이 우리가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외에 어떤 길로도 우리가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항상 문제는 간단해요. 복음으로만! 복음을 바로 이해하면 죄와의 투쟁에서 이기는 길은 항상 쉽 고 가까운데 있습니다. 능력있게 이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언해도, 내가 그래야지, 안 해 야지, 또
그런데 빠져들면 자기를 자책하고 그렇게 아무리 해도 다음에 더 능력있게 일이 진행되지 약화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죄의 유혹, 어떻게 사탄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느냐 예수의 이름의 권세로 내 죄가 용서되고 그 피가 지금 나를 깨끗하게 하고 있다. 그 피가 나를 두르고 있다. 그 말을 입으로 분명히 해야 됩니다. 분명히 해야 되지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 말을 하므로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만 죄가 용서되고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20세기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동일한 복음입니다. 아멘. 다음절은 그 다음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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