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권징에 관한 지혜 (고전5:1)
본문
고린도 교회는 분열된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타락한 교회였습니다. 교회 내에 죄행(罪行)이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교회 내외의 사람들이 다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불완전성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가 그 자녀들을 사랑으로 징계해야 하는 것처럼, 지역 교회도 그 지체들을 징계(치리)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징계는 범인을 색출하는 경건한 경찰관이 하는 일은 아닙니다. 교회의 징계는 성도들의 잘못에 마음 아파하며 그들의 잘못을 사랑으로 고쳐 주고자 하는 영적 형제나 자매들에 의해 실행되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그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세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을 제시합니다.
1.교회의 징계(5:1-13) “이 죄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1:2)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방관하지도 않으며 죄를 허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교회를 무력하게 하고 복음 사역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은 교회가 좇아야 할 세 가지 구체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죄를 통한히 여기라(5:1-2) 통한히 여긴다는 말은 죽은 자를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말로서, 어떤 사람이 느끼는 가장 깊고도 애절한 슬픔을 뜻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교회 내에 만연된 죄들을 애통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죄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지극히 ‘관용적’이어서 음행 하는 자들까지도 버젓한 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문제삼고 있는 음행 죄는 일종의 근친상간 죄였습니다. 즉,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일원이 된 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계모와 재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계모에 대해서는 정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9-13), 그 계모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종류의 죄는 구약성경의 율법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레18:6-8/20:11), 이방 민족의 법에서도 죄로 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고 그 교회에게 수치를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명절이지만(8절). 그 명절
1)(유월절)이 장례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가 죄를 저지른다면, 그때가 바로 그 가족인 교회가 그 타락한 신자들로 인해 통한히 여기고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갈6:1-2참조)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고린도 교회의 그 음행 죄를 저지른 자는 주님의 일에 관한 죽은 자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자이며 거룩히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할 자격도 상실한 자입니다.
둘째, 죄를 심판하라(5:3-5).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해서도 안 되고 사역자는 더욱 판단할 수 없기는 하지만(마7:1-5/고전4:5 참조). 서로의 행위에 대해 정직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교회 내의 어떤 잘못을 책망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잘못된 일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범죄한 사람을 성경의 지시하는 바에 따라서 다스릴 의무가 있는 교회의 공식 회의에 대해 언급합니다. 공공연한 범죄는 공개적으로 판단 받고 정죄되어야 합니다.(마18:15-20참조) (마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범죄는 은밀히 처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범죄는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며 더욱이 불신자들에게까지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함께 모여 의논해서 그 범죄자를 추방해야 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가르치는 강경한 어투를 주의해 보면 압니다. (고전5:2)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전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바울은 범죄자를 부드럽게 처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그 범죄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회개시키도록 힘써야 함은 물론입니다. 한편, 범죄자를 처리하는 일은 단순히 지역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이름의 권세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교인된 자격을 정하는 일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부주의하거나 경솔하게 처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교회 내의 범죄자로부터 구원을 박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교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또 지역 교회와 교제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교회에서 축출된 성도는 엄밀히 말해 사단의 먹이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범죄자의 몸을 해하는 것을 허용하셔서 죄지은 신자들이 회개하고 다시 당신에게 돌아서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이 씻으라(5:6-13) 본문에서 사용된 비유적 표현은 출애굽기의 유월절 전야의 만찬에서 빌려온 것입니다(출12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요1:29/벧전1:18-25). 애굽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무교병을 먹으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은 적은 양이라도 급속히 퍼지는 힘이 있습니다. 누룩은 은밀히 펴지면서 반죽된 밀가루를 부풀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범죄한 교인은 마치 한 덩어리의 누룩처럼 교회 전체를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죄는 몸 안에 있는 암 세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수술로써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묵은 누룩”, 곧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옛 사람을 깨끗이 씻어 없애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과거 지녔던 악의와 사악함을 철저히 제거하고(고린도 교회 교인들 간에는 완악한 감정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대신 진리와 신실함으로 그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떡으로서(10:17) 가능한 한 순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신자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9-13절에서 바울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격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구별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로 인해 더럽혀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이 본문에 언급된 것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는, 교회가 마땅히 그를 치리 해야 합니다. 개개의 신자들은 그러한 자와 교제해서는 안 되며(9절). 더욱 함께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자와 함께 먹는 것은 개인적인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11:23-34참조). 교회가 권징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더우기 인기 있는 일도 못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의 징계가 정당하게만 시행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잘못을 범한 신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또 그를 돌이키실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1절에는 고린도 교회의 이 범죄자가 회개하고 다시 교제를 회복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성도의 허물(6:1-8)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시에서 복음 사역을 수행할 능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음행뿐 아니라 법적 송사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 덕스럽지 못한 문제들이 불신자들에게도 모두 알려졌습니다.고린도 교회 내에는 육체적 죄뿐만 아니라, 영적인 범죄도 있었습니다(고후7:1). 당시의 헬라인들은 대부분, 특히 아테네인들은 툭하면 법정에서 송사를 벌이기로 유명했습니다. 헬라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자기 작품에 나오는 등장 인물 한 사람에게 지도를 보이며 ‘헬라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라고 묻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배우가 헬라의 위치를 지도 상에서 지적하면, 그는 그곳에서(지도 상의 위치) 법정 소송이 벌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곳은 헬라가 아니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도 그러한 평판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미국 연방 법정에는 민사 소송만 20만여 건이 넘게 제기되었답니다. 이 소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1만여 명의 변호사가 필요했습니다.(그리고 그 수효는 지금도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세 가지의 불행한 사실을 간파해 냅니다.
첫째,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조차도 동족 간에 발생한 문제는 그들 자신의 회당 내에서 처리하였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키 위해 “불의한 자”이며 “믿지 않는 자”인 세상 법정에 송사한다는 것은 복음의 증거를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신분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은 장차 세상과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여기 이 땅에서 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받은 영적 은사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영적 은사를 사용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4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의 의임에 대한 성경 학자들의 해석은 일치되지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약간 야유조로, “너희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의 똑똑한 법관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기보다는 교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에게 문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곧 세상 법관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분별시키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가장 경히 여기는 자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이라고 바울의 말에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법정에 나가 송사하는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결론은 똑같습니다. 물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그러한 적법 절차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된 신분으로 서로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법정에 송사한 듯합니다. 오늘날 도시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인 법률가들이 성도 간에 발생한 송사 문제를 중재하고 그 문제들을 세상 법정에 나가 해결하지 않도록 도와 주고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세째, 서로 고소하던 그들이 이미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어느 편이 송사에서 이기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해서 더 큰 손실을 당케 되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7절)라는 말은 “이미 너희는 완전히 패배하였으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수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지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형제를 잃고 복음 전도의 능력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돈이나 소유물을 잃는 것이 휠씬 낫습니다. 오랫 동안 교회가 커가면서 성도 간에 발생한 문제를 법정에서 해결하려고 한 교회와 그 성도들이 결국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만을 얻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성도들이 법정에서 송사할 때 결코 어느 누구도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승리자는 사단뿐입니다. 법정 송사를 벌였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근친상간의 죄를 저질렀던 성도 못지 않게 주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므로 이들도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6:1-11:불신자들의 재판정에서의 재판의 문제 바울은 성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다 마치지 않았다(6:12ff, 7:1ff). 그러나 5:12f에서 바울은 심판에 관해서 언급하게 되었는데, 자체 고린도 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인 재판의 문제를 다루고 넘어가기로 한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끼리 정부의, 즉 불신자들의 재판정에 나아가 서로 송사하였다. 이에 대해 바울의 충고는
1)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끼리의 다툼을 그들 스스로 재판정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v1-6).
2) 그들 가운데 다툼이 아예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v7f). 1:“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와 사건이 있을 때 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지, 성도들 앞에서 하지 않느냐” 바울은 여기서 “감히(개혁:구태여, cf,롬5:7, 15:18)”라는 강한 말을 써서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불의한 자들”과 “성도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개념들(즉 나쁜,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에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로서 전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을 아직 얻지 못한 자들을 지칭하고(cf.v.6), 후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자들(cf고전1;
2)을 말한다. 2:고린도인들의 그와같은 행동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됨의 특권을 완전히 망각한 행위이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심판을 받는게 아니고 사실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은 5:12이하에서 교회 밖의 불신자들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고는 여기서 무슨 뜻으로 “성도들”이 “세상(곧 세상 사람들)”을 심판 한다고 하는가 5:12이하의 요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세상 사람들의 부도덕 함에 대하여 비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 6:2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 한다고 하는 것은 단 7장 22절 이하 등에 근거한 예수님의 가르침(마19:28, 눅22:30, cf계20:4)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최후의 심판에 참여 할 것을 말한다. 종말에 세상을 심판할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는 지극히 소소한 갈등하나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3:“천사들” 가운데 좋은 천사들도 있고 사단의 종 노릇하는 나쁜 천사들도 있다(cf고후 12:7).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때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동참할 성도들은 천사들도 심판할 것이다.그러기에 그들의 일상생활에 관계된 사건들을 심판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4:“
그런데 너희가 일상 생활에 관계된 사건들이 있을 때, 교회에서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하는 자들을 판사로 세우느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다툼을 판정해 주도록 불신자들을 심판자로 세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5: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인들을 “부끄럽게”하기 위하여 이 말을 쓴다고 한다. 서로 지혜를 자랑하며 날뛰는 고린도인들이 이 지경이 되었다는 말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기 자랑하는 교회치고 그 내면의 실제는 그 자랑하는 바의 반대가 아닌 경우가 없다. 6:고린도 교회의 실상은 형제들(신자들)간의 갈등을 잘 판정해 줄 지혜로운 자가 있기는 커녕,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송사하고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송사하는 것이다. 한 교회의 교인들이 교회 내의 “형제들”로부터가 아니라 불신자들로부터 공정한 판단과 정당한 해결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7:원문을 직역하면“사실 너희들이 서로와 더불어 송사하는 것 자체가 너희에게 벌써 전적으로 패배를 의미한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말지 않으며 왜 차라리 사기 당(또는 강탈을 당하고)하고 말지 않느냐”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다투어 제3자로 하여금 재판케 한다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욕망이 사랑과 정의를 압도해 버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서로 송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송사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사랑과 정의를 저버렸음을 공포하는 것이고 그들의 그리스도인적 실체(Identity)를 포기 했음을 공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송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며 설사 그들 중 한 쪽이 그 재판에서 “승리”한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그리스도인적 의미로의) “승리”가 아니고 실제로는 “실패”인 것이다. 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5:39-42)과 모범을 따라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강탈 당하고 말지 않느냐! 8:그리스도인의 이상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강탈 당할지언정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의 실상은 이 이상과는 너무 멀다. 아니 정반대이다. 직역하면 “너희가 (바로) 불의를 자행하고 강탈 짓을 한다. 그것도 형제들에게!” 9:죄악의 목록을 열거-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 갈5:19-21절과 비교해 보라.-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신약 성경에서 엄밀한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서 그 수단과는 관계 없이 “완전히 소유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3.삼위일체 하나님(6:9-20) 고린도 시는 성적(性的)으로 지극히 문란한 곳이었습니다. 고린도 시는 오늘날과 유사한 철학, 즉 성은 정상적인 육체의 기능인데 원할 때에 그 기능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는 사고가 만연하던 방종한 사회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으로써 성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성의 올바른 사용법을 우리에게 일러 주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여기서 지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 범죄를 정죄하십니다. 바울은 9절에서 성에 관련된 몇가지 범죄를 열거합니다. 그 당시, 우상숭배와 성 범죄는 늘 병했습니다. “탐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는 동성애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바울은 로마서1장 26-27절에서도 이 동성애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10절에서 바울은 탐욕스러운 마음 때문에 서로를 송사하는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행죄도 깨끗이 하시어 그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ㄹ 피조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님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 본 구절에 쓰인 동사의 시제는 과거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결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해 주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사용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6:12-14)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지으셨고 뜻하신 날에 우리 몸을 영광 가운데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부활에 관해서는 15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우리의 몸이 놀라운 기원(起源)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장래에는 우리의 몸이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 몸을 그렇게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음행을 변호하기 위해서 두 가지 내용을 주장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모든 것이 나에게 가하다”고 주장했습니다(12절)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던 말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그릇된 인식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속박을 받으려고 자유함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 일이 나를 노예로 만드는가 이러한 행위가 정말 나의 영적 생활에 유익할 것인가”
둘째, 그들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고 주장했습니다(13절). 그들은 성(性)을 충족되어야 할 일종의 욕구로만 취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을 소중히 여기고 조심스레 사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음행은 성욕에 의한 것이며 탐식은 식욕에 의한 것입니다. 이 둘다 죄에 해당하며 둘 다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인간에게는 정상적인 어떤 욕구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 욕구에 굴복하거나 늘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혼외(婚外)의 성관계는 파멸을 초래합니다. 이에 비해 결혼에 의한 합법적인 성관계는 창조적인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혼외의 성관계에는 확실히 묘한 흥분과 쾌락이 숨겨져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혼외의 성관계는 은행에서 돈을 강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얻을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며 언젠가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반면, 합법적인 결혼에 의한 성관계는 은행에 돈을 예금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간의 성관계는 안전이 있고 안도감이 있으며 후에는 이익 배당금을 받습니다. 결혼에 의한 성관계는 장차 기쁨을 가져다 줄 관계를 수립할 수 있지만, 혼외의 정사는 양자의 관계를 파괴하는 길을 마련할 뿐입니다. 성자 하나님(6:15-18) 신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12:12 이하 참조).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어떻게 그와 동시에 죄와 연합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은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방 신전의 매춘굴에 출입하고 있었습니다(당시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정에는 천여 명 정도의 성창(聖娼)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한 영(靈)이며,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께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12:1-2). 날마다 자신의 몸을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으로써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날 하루 동안 그 몸으로 행하는 일들이 그전과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바울은 성 범죄의 심각함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 기사를 언급합니다(창2:24 참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면 그들은 곧 전인격(全人格)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육체적 결합 속에는 다른 어떤 결합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깊은 “하나됨”(oneness)이 있고, 이는 깊고도 지속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바울은 음행죄는 인간이 자기 몸에 대해 지을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죄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 범죄에는 전 인격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18절). 남녀의 성은 단순히 몸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남성”이라는 것, 그리고 “여성”이라는 것에는 인격의 총체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성관계는 인격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창기와 합하는 것을 결혼과 동등한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합법적인 결혼에는 책임이 내포되나 매춘에는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남녀가 장성하면 그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합법적인 결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가 어떻게 풍요한 성장의 체험이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책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맹세하고 서로에 충실할 것을 서약할 때, 그들은 튼츤한 터를 놓는 것입니다. 그 터 위에 그들은 새로운 가정을 건설합니다. 결혼은 성(性)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며, 서로 헌신을 약속한 부부로 하여금 이 경이로운 체험에서 날로 성장해갈 수 있게 해줍니다. 성령님 하나님(6:19-20)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지으셨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몸의 지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성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에 내주하시면서 우리의 몸을 바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어떻게 부도덕한 행위로 그것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너희”(your)말은 복수이나, “몸”(body)과 “성전”(temple)은 단수 명사입니다(19절).
이것으로 보아 바울은 여기서 개개인의 신자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 전체를 언급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지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의 몸입니다. 따라서 성도 개인의 행실은 교회 전체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를 말하는 것이든 개개의 신자을 말하는 것이든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요16:14).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며 그분을 드높이실 수 있습니다(빌1:20-21). 우리가 성령님과 맺는 특별한 관계에는 특별한 의무가 수반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하는 일에는 이와같이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三位)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음행죄는 한 개인의 인격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음행죄는 정서(情緖)에 영향을 끼치며 그 당사자를 노예로 만듭니다.(12하반절). 음행은 사람을 사로잡고 그의 전 삶을 타락시키며 그를 파멸로 이끄는 습관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더욱 음행은 개인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18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음행자, 간음자, 동성애에 빠진 자들은 그들의 죄를 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결코 그들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님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님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비록 더딜 때도 있지만 그 대가는 확실히 받게 됩니다.
죄는 용서받았으되 그 죄로 인한 결과에 영향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성에 관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결과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음란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9절과 10절에서 두 번씩이나 거듭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다윗처럼 자칫 그런 죄를 저지르고 또 사함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죄는 아예 저지르지를 말아야 합니다(요일3:1-10). 엄밀하게 말하자면, 음행죄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죄들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교회는 탕자의 죄는 지적하면서도 그 형의 죄는 망각하고 있습니다(눅15:11-32참조). 죄에는 육체적인 죄도 있지만 마음의 죄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망각하지만 바울은 10절에서 마음의 죄의 종류를 열거합니다. 탐심은 가진 자도 간음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지옥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고전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꾸짖어서 욕설을 퍼부음)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과 그 죄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님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구후5:17,21)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만드신 성부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범죄하면 복음 전도 사역에 방해가 되며 성도의 교제를 더럽히게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 각주)-유월절을 의미하며 유월절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구원과 저주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성도로서 죄를 범하고 또 그것을 회개치 아니하면 그는 십자가와 같은 죽음의 형벌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명절이 장례식이 되는 것이다. 각주)-
1.교회의 징계(5:1-13) “이 죄가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1:2)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진실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방관하지도 않으며 죄를 허용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교회를 무력하게 하고 복음 사역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은 교회가 좇아야 할 세 가지 구체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죄를 통한히 여기라(5:1-2) 통한히 여긴다는 말은 죽은 자를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말로서, 어떤 사람이 느끼는 가장 깊고도 애절한 슬픔을 뜻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교회 내에 만연된 죄들을 애통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죄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가 지극히 ‘관용적’이어서 음행 하는 자들까지도 버젓한 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문제삼고 있는 음행 죄는 일종의 근친상간 죄였습니다. 즉,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의 일원이 된 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계모와 재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계모에 대해서는 정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9-13), 그 계모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종류의 죄는 구약성경의 율법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레18:6-8/20:11), 이방 민족의 법에서도 죄로 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고 그 교회에게 수치를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명절이지만(8절). 그 명절
1)(유월절)이 장례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형제나 자매가 죄를 저지른다면, 그때가 바로 그 가족인 교회가 그 타락한 신자들로 인해 통한히 여기고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갈6:1-2참조)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고린도 교회의 그 음행 죄를 저지른 자는 주님의 일에 관한 죽은 자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자이며 거룩히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교회의 성도들과 교제할 자격도 상실한 자입니다.
둘째, 죄를 심판하라(5:3-5). 그리스도인들은 판단해서도 안 되고 사역자는 더욱 판단할 수 없기는 하지만(마7:1-5/고전4:5 참조). 서로의 행위에 대해 정직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교회 내의 어떤 잘못을 책망한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 잘못된 일들을 책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범죄한 사람을 성경의 지시하는 바에 따라서 다스릴 의무가 있는 교회의 공식 회의에 대해 언급합니다. 공공연한 범죄는 공개적으로 판단 받고 정죄되어야 합니다.(마18:15-20참조) (마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마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범죄는 은밀히 처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범죄는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며 더욱이 불신자들에게까지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함께 모여 의논해서 그 범죄자를 추방해야 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가르치는 강경한 어투를 주의해 보면 압니다. (고전5:2)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전5: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고전5: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바울은 범죄자를 부드럽게 처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그 범죄자를 개인적으로 만나 회개시키도록 힘써야 함은 물론입니다. 한편, 범죄자를 처리하는 일은 단순히 지역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이름의 권세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교인된 자격을 정하는 일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부주의하거나 경솔하게 처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교회 내의 범죄자로부터 구원을 박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교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또 지역 교회와 교제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교회에서 축출된 성도는 엄밀히 말해 사단의 먹이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범죄자의 몸을 해하는 것을 허용하셔서 죄지은 신자들이 회개하고 다시 당신에게 돌아서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셋째, 죄를 깨끗이 씻으라(5:6-13) 본문에서 사용된 비유적 표현은 출애굽기의 유월절 전야의 만찬에서 빌려온 것입니다(출12장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요1:29/벧전1:18-25). 애굽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무교병을 먹으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누룩은 적은 양이라도 급속히 퍼지는 힘이 있습니다. 누룩은 은밀히 펴지면서 반죽된 밀가루를 부풀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범죄한 교인은 마치 한 덩어리의 누룩처럼 교회 전체를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죄는 몸 안에 있는 암 세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수술로써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묵은 누룩”, 곧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옛 사람을 깨끗이 씻어 없애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과거 지녔던 악의와 사악함을 철저히 제거하고(고린도 교회 교인들 간에는 완악한 감정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 대신 진리와 신실함으로 그 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떡으로서(10:17) 가능한 한 순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불신자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9-13절에서 바울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격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구별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로 인해 더럽혀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고백을 한 그리스도인이 본문에 언급된 것과 같은 죄를 지었을 때는, 교회가 마땅히 그를 치리 해야 합니다. 개개의 신자들은 그러한 자와 교제해서는 안 되며(9절). 더욱 함께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자와 함께 먹는 것은 개인적인 친절을 베푸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고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11:23-34참조). 교회가 권징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더우기 인기 있는 일도 못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의 징계가 정당하게만 시행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잘못을 범한 신자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또 그를 돌이키실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1절에는 고린도 교회의 이 범죄자가 회개하고 다시 교제를 회복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성도의 허물(6:1-8)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시에서 복음 사역을 수행할 능력을 급속히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음행뿐 아니라 법적 송사 문제도 있었습니다. 이 덕스럽지 못한 문제들이 불신자들에게도 모두 알려졌습니다.고린도 교회 내에는 육체적 죄뿐만 아니라, 영적인 범죄도 있었습니다(고후7:1). 당시의 헬라인들은 대부분, 특히 아테네인들은 툭하면 법정에서 송사를 벌이기로 유명했습니다. 헬라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자기 작품에 나오는 등장 인물 한 사람에게 지도를 보이며 ‘헬라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라고 묻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배우가 헬라의 위치를 지도 상에서 지적하면, 그는 그곳에서(지도 상의 위치) 법정 소송이 벌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곳은 헬라가 아니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도 그러한 평판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미국 연방 법정에는 민사 소송만 20만여 건이 넘게 제기되었답니다. 이 소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1만여 명의 변호사가 필요했습니다.(그리고 그 수효는 지금도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세 가지의 불행한 사실을 간파해 냅니다.
첫째,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조차도 동족 간에 발생한 문제는 그들 자신의 회당 내에서 처리하였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키 위해 “불의한 자”이며 “믿지 않는 자”인 세상 법정에 송사한다는 것은 복음의 증거를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신분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은 장차 세상과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하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여기 이 땅에서 그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받은 영적 은사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영적 은사를 사용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4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의 의임에 대한 성경 학자들의 해석은 일치되지 않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약간 야유조로, “너희는 구원받지 못한 세상의 똑똑한 법관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하기보다는 교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에게 문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곧 세상 법관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분별시키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가장 경히 여기는 자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이라고 바울의 말에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하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법정에 나가 송사하는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결론은 똑같습니다. 물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는 그러한 적법 절차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된 신분으로 서로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법정에 송사한 듯합니다. 오늘날 도시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인 법률가들이 성도 간에 발생한 송사 문제를 중재하고 그 문제들을 세상 법정에 나가 해결하지 않도록 도와 주고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세째, 서로 고소하던 그들이 이미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어느 편이 송사에서 이기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해서 더 큰 손실을 당케 되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7절)라는 말은 “이미 너희는 완전히 패배하였으니”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마태복음 5장 39-42절에 수록된 예수님의 가르침을 주지시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형제를 잃고 복음 전도의 능력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돈이나 소유물을 잃는 것이 휠씬 낫습니다. 오랫 동안 교회가 커가면서 성도 간에 발생한 문제를 법정에서 해결하려고 한 교회와 그 성도들이 결국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만을 얻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성도들이 법정에서 송사할 때 결코 어느 누구도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승리자는 사단뿐입니다. 법정 송사를 벌였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근친상간의 죄를 저질렀던 성도 못지 않게 주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므로 이들도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6:1-11:불신자들의 재판정에서의 재판의 문제 바울은 성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다 마치지 않았다(6:12ff, 7:1ff). 그러나 5:12f에서 바울은 심판에 관해서 언급하게 되었는데, 자체 고린도 교회의 또 하나의 문제인 재판의 문제를 다루고 넘어가기로 한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 끼리 정부의, 즉 불신자들의 재판정에 나아가 서로 송사하였다. 이에 대해 바울의 충고는
1)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끼리의 다툼을 그들 스스로 재판정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v1-6).
2) 그들 가운데 다툼이 아예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v7f). 1:“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와 사건이 있을 때 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지, 성도들 앞에서 하지 않느냐” 바울은 여기서 “감히(개혁:구태여, cf,롬5:7, 15:18)”라는 강한 말을 써서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모욕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불의한 자들”과 “성도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개념들(즉 나쁜, 사악한 사람이 아니라 에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로서 전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곧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됨)을 아직 얻지 못한 자들을 지칭하고(cf.v.6), 후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자들(cf고전1;
2)을 말한다. 2:고린도인들의 그와같은 행동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됨의 특권을 완전히 망각한 행위이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심판을 받는게 아니고 사실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바울은 5:12이하에서 교회 밖의 불신자들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고는 여기서 무슨 뜻으로 “성도들”이 “세상(곧 세상 사람들)”을 심판 한다고 하는가 5:12이하의 요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세상 사람들의 부도덕 함에 대하여 비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 6:2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 한다고 하는 것은 단 7장 22절 이하 등에 근거한 예수님의 가르침(마19:28, 눅22:30, cf계20:4)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의 최후의 심판에 참여 할 것을 말한다. 종말에 세상을 심판할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는 지극히 소소한 갈등하나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3:“천사들” 가운데 좋은 천사들도 있고 사단의 종 노릇하는 나쁜 천사들도 있다(cf고후 12:7).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때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 동참할 성도들은 천사들도 심판할 것이다.그러기에 그들의 일상생활에 관계된 사건들을 심판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4:“
그런데 너희가 일상 생활에 관계된 사건들이 있을 때, 교회에서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하는 자들을 판사로 세우느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다툼을 판정해 주도록 불신자들을 심판자로 세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5: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인들을 “부끄럽게”하기 위하여 이 말을 쓴다고 한다. 서로 지혜를 자랑하며 날뛰는 고린도인들이 이 지경이 되었다는 말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기 자랑하는 교회치고 그 내면의 실제는 그 자랑하는 바의 반대가 아닌 경우가 없다. 6:고린도 교회의 실상은 형제들(신자들)간의 갈등을 잘 판정해 줄 지혜로운 자가 있기는 커녕,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송사하고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송사하는 것이다. 한 교회의 교인들이 교회 내의 “형제들”로부터가 아니라 불신자들로부터 공정한 판단과 정당한 해결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7:원문을 직역하면“사실 너희들이 서로와 더불어 송사하는 것 자체가 너희에게 벌써 전적으로 패배를 의미한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말지 않으며 왜 차라리 사기 당(또는 강탈을 당하고)하고 말지 않느냐”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다투어 제3자로 하여금 재판케 한다는 것 자체가 이기적인 욕망이 사랑과 정의를 압도해 버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서로 송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송사로써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사랑과 정의를 저버렸음을 공포하는 것이고 그들의 그리스도인적 실체(Identity)를 포기 했음을 공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송사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며 설사 그들 중 한 쪽이 그 재판에서 “승리”한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그리스도인적 의미로의) “승리”가 아니고 실제로는 “실패”인 것이다. 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마5:39-42)과 모범을 따라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강탈 당하고 말지 않느냐! 8:그리스도인의 이상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강탈 당할지언정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의 실상은 이 이상과는 너무 멀다. 아니 정반대이다. 직역하면 “너희가 (바로) 불의를 자행하고 강탈 짓을 한다. 그것도 형제들에게!” 9:죄악의 목록을 열거-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 갈5:19-21절과 비교해 보라.-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신약 성경에서 엄밀한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로서 그 수단과는 관계 없이 “완전히 소유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3.삼위일체 하나님(6:9-20) 고린도 시는 성적(性的)으로 지극히 문란한 곳이었습니다. 고린도 시는 오늘날과 유사한 철학, 즉 성은 정상적인 육체의 기능인데 원할 때에 그 기능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는 사고가 만연하던 방종한 사회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으로써 성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성의 올바른 사용법을 우리에게 일러 주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여기서 지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 범죄를 정죄하십니다. 바울은 9절에서 성에 관련된 몇가지 범죄를 열거합니다. 그 당시, 우상숭배와 성 범죄는 늘 병했습니다. “탐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는 동성애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바울은 로마서1장 26-27절에서도 이 동성애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10절에서 바울은 탐욕스러운 마음 때문에 서로를 송사하는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행죄도 깨끗이 하시어 그 죄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ㄹ 피조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님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11절). 본 구절에 쓰인 동사의 시제는 과거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결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해 주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사용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6:12-14)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지으셨고 뜻하신 날에 우리 몸을 영광 가운데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부활에 관해서는 15장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우리의 몸이 놀라운 기원(起源)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장래에는 우리의 몸이 더욱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 몸을 그렇게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겠는가 고린도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음행을 변호하기 위해서 두 가지 내용을 주장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모든 것이 나에게 가하다”고 주장했습니다(12절)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던 말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그릇된 인식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속박을 받으려고 자유함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 일이 나를 노예로 만드는가 이러한 행위가 정말 나의 영적 생활에 유익할 것인가”
둘째, 그들은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고 주장했습니다(13절). 그들은 성(性)을 충족되어야 할 일종의 욕구로만 취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을 소중히 여기고 조심스레 사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음행은 성욕에 의한 것이며 탐식은 식욕에 의한 것입니다. 이 둘다 죄에 해당하며 둘 다 치명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인간에게는 정상적인 어떤 욕구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러한 이유로 해서 그 욕구에 굴복하거나 늘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혼외(婚外)의 성관계는 파멸을 초래합니다. 이에 비해 결혼에 의한 합법적인 성관계는 창조적인 것이며 아름다운 것입니다. 혼외의 성관계에는 확실히 묘한 흥분과 쾌락이 숨겨져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혼외의 성관계는 은행에서 돈을 강탈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무언가를 얻을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며 언젠가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반면, 합법적인 결혼에 의한 성관계는 은행에 돈을 예금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간의 성관계는 안전이 있고 안도감이 있으며 후에는 이익 배당금을 받습니다. 결혼에 의한 성관계는 장차 기쁨을 가져다 줄 관계를 수립할 수 있지만, 혼외의 정사는 양자의 관계를 파괴하는 길을 마련할 뿐입니다. 성자 하나님(6:15-18) 신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12:12 이하 참조).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어떻게 그와 동시에 죄와 연합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은 우리를 아연실색케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이방 신전의 매춘굴에 출입하고 있었습니다(당시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정에는 천여 명 정도의 성창(聖娼)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한 영(靈)이며, 우리의 몸을 그리스도께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12:1-2). 날마다 자신의 몸을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으로써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날 하루 동안 그 몸으로 행하는 일들이 그전과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바울은 성 범죄의 심각함을 설명하기 위해 창조 기사를 언급합니다(창2:24 참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육체적으로 결합하면 그들은 곧 전인격(全人格)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육체적 결합 속에는 다른 어떤 결합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깊은 “하나됨”(oneness)이 있고, 이는 깊고도 지속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바울은 음행죄는 인간이 자기 몸에 대해 지을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죄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 범죄에는 전 인격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18절). 남녀의 성은 단순히 몸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남성”이라는 것, 그리고 “여성”이라는 것에는 인격의 총체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성관계는 인격 전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창기와 합하는 것을 결혼과 동등한 것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합법적인 결혼에는 책임이 내포되나 매춘에는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남녀가 장성하면 그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합법적인 결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가 어떻게 풍요한 성장의 체험이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책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맹세하고 서로에 충실할 것을 서약할 때, 그들은 튼츤한 터를 놓는 것입니다. 그 터 위에 그들은 새로운 가정을 건설합니다. 결혼은 성(性)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며, 서로 헌신을 약속한 부부로 하여금 이 경이로운 체험에서 날로 성장해갈 수 있게 해줍니다. 성령님 하나님(6:19-20)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지으셨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몸의 지체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성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에 내주하시면서 우리의 몸을 바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어떻게 부도덕한 행위로 그것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너희”(your)말은 복수이나, “몸”(body)과 “성전”(temple)은 단수 명사입니다(19절).
이것으로 보아 바울은 여기서 개개인의 신자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 전체를 언급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지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의 몸입니다. 따라서 성도 개인의 행실은 교회 전체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를 말하는 것이든 개개의 신자을 말하는 것이든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요16:14).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며 그분을 드높이실 수 있습니다(빌1:20-21). 우리가 성령님과 맺는 특별한 관계에는 특별한 의무가 수반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으로 하는 일에는 이와같이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三位)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음행죄는 한 개인의 인격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음행죄는 정서(情緖)에 영향을 끼치며 그 당사자를 노예로 만듭니다.(12하반절). 음행은 사람을 사로잡고 그의 전 삶을 타락시키며 그를 파멸로 이끄는 습관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더욱 음행은 개인의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18절).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음행자, 간음자, 동성애에 빠진 자들은 그들의 죄를 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결코 그들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님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님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비록 더딜 때도 있지만 그 대가는 확실히 받게 됩니다.
죄는 용서받았으되 그 죄로 인한 결과에 영향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성에 관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결과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음란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9절과 10절에서 두 번씩이나 거듭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다윗처럼 자칫 그런 죄를 저지르고 또 사함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죄는 아예 저지르지를 말아야 합니다(요일3:1-10). 엄밀하게 말하자면, 음행죄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죄들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교회는 탕자의 죄는 지적하면서도 그 형의 죄는 망각하고 있습니다(눅15:11-32참조). 죄에는 육체적인 죄도 있지만 마음의 죄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망각하지만 바울은 10절에서 마음의 죄의 종류를 열거합니다. 탐심은 가진 자도 간음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지옥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고전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꾸짖어서 욕설을 퍼부음)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과 그 죄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고전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님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구후5:17,21)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를 만드신 성부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범죄하면 복음 전도 사역에 방해가 되며 성도의 교제를 더럽히게 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 각주)-유월절을 의미하며 유월절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구원과 저주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성도로서 죄를 범하고 또 그것을 회개치 아니하면 그는 십자가와 같은 죽음의 형벌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명절이 장례식이 되는 것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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