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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관한 지혜 (고전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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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질문에 답변한 뒤, 바울은 그들로부터 받은 편지에서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급박한 해결을 요했던 그 문제는 현대의 성도들에게는 별반 흥미가 없으며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러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의 문제들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현대의 성도들은 바울이 결코 알지 못했던 훨씬 더 많은 문제들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화 구경을 하는 것이 옳은가” “성도들이 가정에 꼭 T.V 수상기가 있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느 정도까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 8-10장에서 바울은 성도의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의문스러운 문제들을 판단하고 결정함에 있어 신자들에게 지침이 될 만한 네 가지 근본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 네 가지 원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식은 사랑과 조화되어야 한다(8장)
둘째, 권위는 절제와 조화되어야 한다(9장)
셋째, 체험은 경계와 조화되어야 한다(10:1-22) 네째, 자유는 책임과 조화되어야 한다(10:23-33) 바울이 전하는 대상은 주로 강건한 그리스도인들, 영적 지식과 체험을 소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권위와 자유를 알고 있는 신자들입니다. 약한 자를 돌보아야 할 의무는 바로 강한 자에게 있습니다.(롬14-15장).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8장과 10장에 언급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8장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게 될 것입니다.
1. 지식과 사랑의 조화(8:1-13) 당시 고린도에서 고기를 얻을 수 있는 장소는 두 군데로서, 한 곳은 시작이고 다른 한 곳은 각처에 있는 신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의 고기 가격은 매우 비쌌으나, 신전에서 제물로 바쳤던 짐승의 고기는 언제라도 살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 믿음이 장성한 사람들(강한 자)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고 해서 더러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신전에서 고기들을 싼 값에 구입하여 돈을 절약했습니다. 더욱이, 아직 회심하지 않은 친구들이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들로 음식을 차려 놓고 초대를 할 경우, 그들은 가정이건 신전이건 장소를 불문하고 참석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태도는 약한 성도들에게는 하나의 시험거리였습니다. 아직 믿음이 장성치 못한 이 약한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이방 신들을 섬기다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롬14-15장에는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식물(食物)과 절기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많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근본적으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동일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도 교회가 분열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문제를 바울에게 서한으로 문의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일깨워 줍니다. 지식 (8:1-6)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 지식이 풍부했고(1:5), 그 지식에 대해 다소 교만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며 , 그것을 섬기는 자들의 미련하고 어두운 마음에만 존재하는 거짓된 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전에 우상의 형상이 있다는 것은 그 우상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못 되었습니다(후에 바울은 우상을 섬기는 것은 곧 사단을 섬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신은 그의 재단에 바쳐진 음식을 더럽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강한 성도들의 지식은 이 정도까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입장이 그처럼 논리적인데, 약한 자들이 그들을 부당하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문제가 다 논리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켜도 밤을 무서워합니다. 어린이들이나 형들이 밤을 무서워하지 않는 태도를 취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은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쟁용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덕성을 함양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지식을 함부로 떠 벌이면 그것은 훌륭한 성품을 함양해 주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한 태도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의식합니다. 더욱, 기독교의 교리를 안다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성경 지식은 날로 더해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서나 그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지식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사랑(8:1-3) 사랑과 지식은 병행되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엡4:15). “사랑 없는 지식은 야만이요, 지식 없는 사랑은 위선이다”라는 말은 우리는 흔히 듣습니다. 지식은 힘이며, 그 힘은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반면 사랑은 반드시 지식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합니다(빌1:9-11)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를 보라). 고린도 교회의 강한 신자들은 지식을 구비하고 있었으나 그 지식을 사랑 안에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지식으로 약한 성도들을 세워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강한 성도들은 약한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그들이 연약한 상태에 머물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울의 큰 관심사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강한 그리스도인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즉, 강한 자란 원칙과 규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안도감을 느끼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를 꺼려하는 자들은 오히려 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신자들을 판단하고 그들이 하는 행위로 인해 실족하는 사람들이 바로 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로 인해 강한 자들이 보다 연약한 그들의 형제나 자매를 도와주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등장해야 하는 때가 바로 이 시점입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며” 또한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식이 사랑 안에서 사용된다면, 강한 성도들은 연약한 성도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을 일으켜 걷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도와줄 수 있게 됩니다. 아직 미숙한 성도들을 강제적으로 성장시켜 거인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지식엔 사랑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커지지 않고 머리만 커진 성도가 생깁니다. 어느 유명한 목사님은 말하길 “어떤 성도들은 자라지만 어떤 성도들은 부풀기만 한다”고 합니다. 지식과 사랑은 모두 중요한 신앙적 요소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올바르게 향유하려면 지식과 사랑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양심(8:7-13) 양심이란 용어는 단순히 “아는 것”(to know with)을 의미하며, 신약 성경에서 32 차례 쓰였습니다. 양심은 우리 행동이 판단되어, 그에 따라 용인되거나 정죄를 받는 마음의 법정입니다(롬2:14-15) 양심은 율법이 아닙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도덕 율법을 증거하는 증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양심은 지식에 근거한다는 점입니다. 영적 지식이 더욱 많아지고 더욱 그에 따라 행동할수록 우리는 보다 양심적인 성도가 됩니다. 구원받은 지가 얼마 안되어 신앙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이 약합니다. 그들은 갓난아기들처럼 조심스럽게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또 영적으로 성장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양심이 약한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소홀히 하며, 그 결과 유약한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3:1-4 / 히5:11-14).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 누리기를 두려워하는 탓에 연약한 상태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으나 집 떠나는 것을 무서워하여 매일 어머니가 학교까지 데려다 주어야 하는 아이들과 같습니다. 약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쉽게 더러워지고(7절). 쉽게 상처받으며(12절), 쉽게 실족합니다(13절). 이런 이유 때문에 강한 성도들은 약한 성도들에게 양보를 해야 하며 그들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의 전(殿)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장성한 성도에게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나 약한 성도는 그로 인해 실족할 수가 있습니다. 아직 장성치 못한 성도가 성숙한 성도를 흉내내다가 죄에 빠지고 마는 것을 바울은 10절에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강한 성도가 약한 성도에게 사랑으로 양보를 하는 것은 약한 성도가 장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약한 자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다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약한 자의 인격을 함양시켜 주고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약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지식이 사랑으로 조절되도록 주의해야 하며, 약한 성도가 그 양심을 감당치 못하는 일을 하도록 부추겨서도 안 됩니다. 사랑과 조화된 영적 지식이 발휘된다면, 강한 자들은 연약한 자들을 진정으로 도와줄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연약한 자들은 바르게 장성해 강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체험과 경계의 조화(10:1-22) 믿음이 강한 자는 시험을 물리칠 자신의 능력을 과신(過信)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바울은 경험 많은 성도들에게 주지시켜 줍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로 들어, 체험은 신중한 태도와 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장성한 신자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 사항의 경고를 줍니다. 특권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10:1-4)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구속된 것처럼, 역시 그분의 능력으로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되었습니다(5장 7-8절에서 바울은 이미 유월절 사건을 구원과 연결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고 고린도 성도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은 홍해의 세례에서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적 음식물로 영양을 섭취하는 것처럼(요6:63,68/7:37-39),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고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내신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특권을 누린 것이 유대인들이 죄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했습니다. 장성한 성도들에게도 미숙한 성도들 못지 않은 위험이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들이 갖는 위험의 하나는 지나친 자신감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우상의 전에서 음식물을 먹는 강한 신자는 자신이 힘에 부치는 적과 싸우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바울은 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헤매는 동안 진짜 반석이 그들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시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대 랍비들 중에는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반석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신령한 반석이며, 그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물은 반석에서 나오기도 했고 (출17:1-7)/민20:7-11). 또 어떤 경우에는 우물에서 나오기도 했습니다(민21:16-18).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물을 공급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출발이 좋다고 해서 그 끝도 좋은 것은 아니다(10:5-1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기사(奇事)를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의 시험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체험은 항상 경계와 조화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삶에는 항상 시험과 실패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광야 생활 동안 모두 죽었습니다(민14:26 이하참조) 고린도 교회의 성도 중 강한 자들은 그러한 구약의 사건이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의문을 제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던 것과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해 줍니다. 바울의 지적대로, 고린도 성도들은 악한 일에 대한 욕망 때문에 도덕적으로 불안했고(6장). 우상을 섬겼으며(8,10장), 하나님을 거스려 수군거렸습니다(고후12:20-21).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분께 대항했습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역시 바울이 어떤 사건을 언급하는지 다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탐욕”은 민수기 11장 4절 이하에서, 우상숭배는 출애굽기 32장에서, 그리고 음행은 민수기 25장에서 각각 그 실례(實例)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경우가 많지만, 바울은 아마 민수기 21장 4-6절에 기록된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불평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민수기 14장과 16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불평을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죄였으므로 하나님은 그 죄를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은 그 즉시 죽음을 당했습니다(고전 11:29-31 참조). 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마저도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요한 기업을 누리는 특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이미 얻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방종해져서 하나님의 용인을 받지 못하고 아무런 상급도 받지 못하는 자가 되면 어찌할까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 속에 있는 죄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짓는 죄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죄보다 훨씬 가증한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 있었으므로 그들의 죄가 우리들의 죄보다 훨씬 가증하며 따라서 더욱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저질러지는 죄가 훨씬 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서 경고를 받았으며 또한 말세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거스리는 죄와 은혜를 거스리는 죄는 별개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시험을 이기게 해주십니다(10:13-22).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또 시험 당할 때에도 우리가 그분을 의뢰하고 또 그 시험에서 교훈을 얻으려고만 한다면, 반드시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십니다. 스스로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넘어질 것이나,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은 시험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앞서 “음행을 피하라”(6:18) 고 경고한 바울은 이제 “우상수배하는 일을 피하라”(10:14)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죄악으로 이끄는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신32:17/시106:37). 우상의 상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귀신과 교제(교통)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죄와 구별된 삶을 살라는 중요한 교리를 재차 강조합니다(고후6:14-7:1). 바울은 주(主)의 만찬을 하나의 예증으로 사용합니다. 신자가 성찬상에서 잔과 떡을 나누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함으로써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케 됩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18절에서 제단과 제물을 또 하나의 예로 사용합니다. 바울의 설명은 매우 분명합니다. 성도는 주의 상(구약에서 제사, 신약에서는 성찬)과 귀신의 상(우상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주께서 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22절). 이 말은 ‘나는 믿음이 강해서 우상의 전(殿)에 있어도 아무 해를 받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강한 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입니다. 물론 연약한 형제들보다 비교적으로 강한 성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보다는 강하지 못합니다. 죄를 가지고 장난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3. 자유와 책임의 조화(10:23-33) 바울은 성숙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특권을 누릴 자유를 부인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며, 어떤 일들은 우리를 노예로 삼기도 합니다(6:12). 모든 것이 유익하나, 어떤 행동은 오히려 연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8:11-13) 자유를 책임과 병해시키는 것이야말로 성숙함의 표시입니다.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며, 결국은 무질서와 무법의 상태가 됩니다.
첫째, 우리는 교회내의 형제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23-30절). 우리는 다른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4절 말씀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훈계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지만 그 자유는 다른 성도들을 해치는 자유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러한 신앙적 원리를 ‘우상에게 바쳤던 재물을 먹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에 적용합니다. 앞서 바울은 공공연히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자들에게 주의를 준 적이 있습니다(8:9-13).
그런데 이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사로이 먹는 음식 문제까지 이야기 합니다. 25-26절에서 바울은 가정에서 쓰기 위해 시장에서 산 고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고 가르칩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그는 시24:1을 인용합니다) 신자에게는 모든 식물(食物)이 다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막7:14-23/행10:9-16, 28/딤전 4:3-5). 성숙한 신자는 우상에게 바쳤던 재물일지라도 자신의 가정에서는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또 시장에서 구입했다고는 하나 원래는 우상 신전에서 유출된 고기(고러한 경우가 당시에 흔했다)를 먹더라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의 집에 초대되었을 때는 어떠합니까 바울은 이 문제를 27-30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초대에 응해야 한다고 생각된다면(바울은 초대에 응하고 응하지 않고를 결정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삼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든 아무 말 없이 먹어야 합니다(눅10:8/ 딤전6:17참조) (눅10: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그러나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은 먹지 않으려고 그 음식의 출처를 알아보는 연약한 성도들이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연약한 성도가 성숙한 성도에게 그 음식들이 우상에 바쳤졌던 것이라고 알려 주면, 성숙한 성도는 그것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먹는다면 그것은 연약한 성도들을 실족케 하는 것이며 죄에 빠뜨리는 셈입니다.
둘째,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책임을 지고 있다(31절) 바울은 “어찌 내가 감사한 음식을 먹지 못하겠는가 어찌 내 자유가 연약한 성도들의 양심 때문에 제약을 받겠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31절에서 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합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실족케 하면서 하나님을 영광되이 할 수는 없습니다. 확신컨데, 우리들의 양심은 아무런 제약없이 어떤 모임이나 활동에 참여하고 또 그로 인해 아무런 해도 받지 않을 만큼 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 해도 연약한 형제에게 해가 되는 방향으로는 그 자유를 행사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우리는 잃어버린 자들의 영혼을 구원에로 이끌 책임을 지고 있다(32-33)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주님을 의뢰하는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아야 하며, 또 교회의 다른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도 함께 구하는 삶, 즉 그들로 구원받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33절)라는 말은 바울이 사람을 죽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타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갈1:10참조). 이 말은 바울의 생와 사역이 자신의 유익과 욕망을 채우려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데 그 목적을 두었다는 사실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을 끝마치기 전에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 바울이 말하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바울의 태도가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비취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때때로 바울은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유대인들과 같이 정결한 식물(食物)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이 장에서 언급한 바, 성도의 삶의 원리와 전적으로 일치되는 것이었습니다. 풍향계는 늘 다른 방향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지만, 처음에는 한 방향만 가리키다가 그 다음에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풍향계는 항상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만을 가르킵니다. 풍향계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가 어렸을 때 집 안에서 카드 놀이와 주사위 놀이를 금지시켰다. 그러다가 그들이 자라서 지각력이 생기자 그러한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성도로서 우리는 자유를 소유합니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루고 사 주신 것이므로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자유는 지식으로부터 옵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원자(原子)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할 자유를 더 많이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사랑과 조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은 건설적인 도구가 아니라 파괴적인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그러나
1.그 일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어떤 제재를 주는가(6:12)
2. 그 일은 나를 거치는 돌이나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자로 만들지는 않는가(8:13)
3. 그 일은 나를 덕을 세우는가, 아니면 나를 파괴하는가(10:23)
4. 그 일은 나만을 기쁘게 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는가(10:31)
5. 그 일로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으며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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