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류의 사람 (고전3:1-3)
본문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세 가지 모습을 설명합니다.
첫째로, 1절에서 4절까지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목표는 신자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5절에서 9절 상반절까지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밭과 같다고 했으며, 그 목표는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셋째로, 9절 하반절에서 23절까지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 목표는 신자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밭이요, 성전입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교회의 사역은 어떠해야하며 어떤 목표를 가져야하는가를 설명합니다. 먼저 오늘은 1-4절까지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역할부터 말씀하는데, 집인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그 신앙이 성장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나눕니다. 이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은 이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해 아래에 있는 자연인은 다 영이 죽었고, 육으로 사는 육 뿐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서 구속하신 대 속의 은혜를 입힌 그리스도인은 그 영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크게 나누면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과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영이 죽어있는 사람과 그 영이 살아난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자연인, 곧 ‘육의 사람’, 육 뿐인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그 영이 살리심을 받은, 구원을 받은 사람을 신자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신자라, 성도라,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죽었던 영은 진리와 성령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 속의 공로를 힘입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영은 살아난 신자에게 아직 죽어 있는 마음과 몸이라는 육이 있습니다. 이것 까지 구속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신자에게도 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곧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입니다. 영은 살아났지만, 여전히 그의 행위가 육을 따라서 악령과 악성과 악습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영에 속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이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성령님과 말씀의 인도를 받아서 중생한 영을 따라 그 몸과 마음이 순종하는 자입니다. 1절의 ‘육신에 속한 사람’은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님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2장 14절의 육에 속한 사람이나, 3장 3절에서도 말하는 불신자와는 다릅니다. 그러면 사람은 세 종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연인 육의 사람/, 중생했으나 여전히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육신에 속한 사람,/ 중생받아서 영의 인도를 따르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자 중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아직은 신앙이 미숙한 단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의 사람, 곧 불신자는 아니지만, 그는 아직은 불신자의 생활, 행위, 마음을 가지고 여전히 그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믿을 때에 들어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사는 사람입니다. 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 역사하심을 인하여 믿고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 중에 임하여 계십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고 계신 성령님이시지만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또 성령님에 속한 사람이라도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했다가 영에 속했다가 이 삶은 계속 교체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성령님의 사람이었다가 즉시로 육신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회개하여 성령님의 사람이 즉시 되기도합니다. 육신의 인도를 따르면 사망이요,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면 생명과 평안입니다. 성령님으로 중생을 받아서 죽었던 영은 살아났지만, 아직 그 마음과 몸은 변화를 입지 못하고 있어 옛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님께 붙잡힌 바 되어 하나된 중생한 영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과 몸이 된 사람, 곧 새 사람으로 사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 영이 중생을 했을지라도 우리의 삶이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목표합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당장에 그 생각이나, 행동이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되지는 못합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난 것은 기쁨이요, 그 보다 놀라운 일이 없지만, 그 아이가 다 성숙한 자로 자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중생은 출생이라면 우리의 성화는 자람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어 신앙이 아직 장성하지 못했을 때에 우리들의 걸음의 실수 조차 하나님께 기쁨이요, 관대하심으로 용납하심을 입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이 가고, 지식적으로 많이 알게되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현실에서 보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라면 우리를 보시는 성령님께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시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피와 성령님과 진리로 거듭난 바 되었습니다. 출생된 자로서는 이제 성장을 해야합니다. 주님을 푯대로 자라가야합니다. 얼마나 자랐습니까 앞선 자가 뒤서고 뒤선자가 앞선다고 하셨는데, 앞 자리를 다 내어 놓고 뒷짐지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교회를 미숙한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오늘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성령님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리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신앙의 성장과 미숙을 다음 두가지를 기준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첫째,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의 성장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갓난 아기들은 무엇을 먹습니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젖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느시간까지는 젖을 먹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라도 조금 자라면 이유식을 먹고, 좀 더 자라면 야문 음식은 못 먹어도 죽이나 밥을 먹게 됩니다. 그 안에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만 어린아이 때에 먹는 젖을 나이들어서 계속먹고는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영양있고, 좋은 것으로 바꾸어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는 신령한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떡, 단단한 식물, 꿀 등으로 말씀합니다.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균형있는 식사를 해야하듯이 우리의 속 사람도 균형잡힌 식사를 해야합니다. 날마다 식사를 하듯이 이 신령한 음식도 날마다 먹어야 신앙생활의 피곤함도, 약함도, 병듬도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자랍니다. 어린아기의 젖을 밥으로 바꾸어주듯,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영적인 양식도 처음믿을 때와는 달리 더 야물고, 영양이 많은 것으로 먹여야합니다. 그가 어떤 영의 양식을 좋아하는가를 보면 그의 신앙상태를 알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젖을 먹습니까 밥을 먹습니까 여기에 젖도 신령한 양식 중 하나요, 밥도 신령한 양식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젖은 어릴 때에 먹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나 그 믿음의 동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받기만 원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의 첫 걸음에서는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만나서 하나님을 찾아서 도음과 지혜를 구하기도 합니다. 또 그보다 나은 사람은 영혼의 구원을 갈급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진리는 젖과 같이 중생의 교리입니다.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한 없는 은혜와 사랑입니다. 어린아이가 그 부모를 위하여 무엇을 합니까 그저 부모가 주는대로 잘 먹고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라도 어느정도 자라면 제가 스스로 해야할 의무와 책임을 찾아야합니다. 이제 아이가 자라면 밥을 먹는 것 같이 신앙이 장성하면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실 복만 원하는 자 아닙니다. 이제는 제가 할 일을 찾습니다.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받는 것만 아는 사람이 이제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고하신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전에 어린 신앙 때에는 이 세상의 소망으로 가득차서 구하는 것도 그의 소원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그의 소원이 주를 닮는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의 것은 헛된 줄 알고, 이것을 드려 영원한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 십자가 그늘 아래로 왔으나,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는 줄 알고 그 고난을 당하면서 주님을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젖을 떼고 밥을 먹는 장성한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렇게 자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둘째로, 그가 장성했는지 아는 방법을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는가 않는가를 보아서 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가만히 보면 이기적입니다. 주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가 제것이고, 저를 위한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있어도 제 맘에 들면 꼭 제것을 만들어야합니다. 아이들은 잘 다툽니다. 아이들은 소란하고, 떠듭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성입니다. 바울은 아직 고린도교회가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은 아직 미숙해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제 유익만을 구하고, 제게 없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을 때에 시기 질투하고, 또 잘 다투는 사람은 저는 잘나고 똑똑한 줄 알지만 이 사람은 어린 아이같이 유치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 잘라면 친구도 알고, 나눌 줄도 알고, 제것과 남의 것을 압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면 남의 은사를 보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중심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 다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자기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툼보다는 화해와 용서와 온유가 있는 사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시비가 일어나면 그 교단의 지도자되는 분을 찾아갑니다. 그분은 …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어린아이의 신앙인가, 장성한 신앙인가,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젖이나 먹고 있는가 도의 초보를 걷고 있습니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점점 신의 성품에 이르도록 자라고 있습니가 세상에서는 실력을 가져야된다고 생각하여 부지런히 배우기도하고,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약도 먹습니다. 한 끼도 안 먹고는 못산다고 부지런히 밥을 챙겨먹습니다.
그렇다면 내 신앙생활의 성장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는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것입니가 이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고, 직장도, 공부도 해야하는 것 아닙니가 나는 이제 믿을 때의 도의 유치한 초보의 걸움에서 성장해서 천국을 바라면서. 주님을 푯대로하여, 주는 자로, 사랑을 베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신앙중심에서 모든 것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받으려고만하고, 이 세상 소망 뿐이고, 인본주의의 신앙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신앙생활은 아닌지. 어릴 때에 부모가 좋아하는 모습과 행위도 그것을 나이 먹은 이후에도 계속한다면 그것을 부모가 좋아하겠습니까 처음 믿을 때에야 주일 오전에만 나와도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술만 끊어도 자랑거리가 되고 대단한 믿음으로 칭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일년이 지나도 어린아이는 돌지나면 이제 아장 아장 걷는데,이 사람의 신앙은 아직까지 비틀거리고 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다면. 십년이 넘었습니까 년수 자랑하지 맙시다. 년수는 지나갔는데 자람이 없다면 텃세를 할 것이 아니라, 병신으로 알고 부그러워해야합니다. 아직도 신앙이 자발적, 자원적이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고,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고 있습니가 이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갑시다. 언제까지 느즉거리고 다른 사람 덕 보면서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신앙생활한다고 하겠습니까 자라지 않는 것이 죄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아무 음식이나 먹고 소화해서 영양을 섭취합니까 다툼이나 시기심이나 아이 때의 유치함 같은 내 중심의 마음이 내게 아직까지 있습니까 고칩시다. 자랍시다.
첫째로, 1절에서 4절까지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목표는 신자의 신앙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둘째로, 5절에서 9절 상반절까지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밭과 같다고 했으며, 그 목표는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셋째로, 9절 하반절에서 23절까지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그 목표는 신자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밭이요, 성전입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교회의 사역은 어떠해야하며 어떤 목표를 가져야하는가를 설명합니다. 먼저 오늘은 1-4절까지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역할부터 말씀하는데, 집인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그 신앙이 성장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나눕니다. 이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은 이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해 아래에 있는 자연인은 다 영이 죽었고, 육으로 사는 육 뿐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서 구속하신 대 속의 은혜를 입힌 그리스도인은 그 영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크게 나누면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과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영이 죽어있는 사람과 그 영이 살아난 사람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자연인, 곧 ‘육의 사람’, 육 뿐인 사람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그 영이 살리심을 받은, 구원을 받은 사람을 신자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신자라, 성도라,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죽었던 영은 진리와 성령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 속의 공로를 힘입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영은 살아난 신자에게 아직 죽어 있는 마음과 몸이라는 육이 있습니다. 이것 까지 구속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신자에게도 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곧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입니다. 영은 살아났지만, 여전히 그의 행위가 육을 따라서 악령과 악성과 악습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영에 속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이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성령님과 말씀의 인도를 받아서 중생한 영을 따라 그 몸과 마음이 순종하는 자입니다. 1절의 ‘육신에 속한 사람’은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님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2장 14절의 육에 속한 사람이나, 3장 3절에서도 말하는 불신자와는 다릅니다. 그러면 사람은 세 종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연인 육의 사람/, 중생했으나 여전히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육신에 속한 사람,/ 중생받아서 영의 인도를 따르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자 중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아직은 신앙이 미숙한 단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의 사람, 곧 불신자는 아니지만, 그는 아직은 불신자의 생활, 행위, 마음을 가지고 여전히 그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믿을 때에 들어오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사는 사람입니다. 실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 역사하심을 인하여 믿고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 중에 임하여 계십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고 계신 성령님이시지만 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또 성령님에 속한 사람이라도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육신에 속했다가 영에 속했다가 이 삶은 계속 교체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성령님의 사람이었다가 즉시로 육신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육신의 사람이 회개하여 성령님의 사람이 즉시 되기도합니다. 육신의 인도를 따르면 사망이요,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면 생명과 평안입니다. 성령님으로 중생을 받아서 죽었던 영은 살아났지만, 아직 그 마음과 몸은 변화를 입지 못하고 있어 옛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령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님께 붙잡힌 바 되어 하나된 중생한 영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과 몸이 된 사람, 곧 새 사람으로 사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 영이 중생을 했을지라도 우리의 삶이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목표합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 당장에 그 생각이나, 행동이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으로 되지는 못합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난 것은 기쁨이요, 그 보다 놀라운 일이 없지만, 그 아이가 다 성숙한 자로 자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중생은 출생이라면 우리의 성화는 자람입니다. 우리가 처음 믿어 신앙이 아직 장성하지 못했을 때에 우리들의 걸음의 실수 조차 하나님께 기쁨이요, 관대하심으로 용납하심을 입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이 가고, 지식적으로 많이 알게되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현실에서 보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라면 우리를 보시는 성령님께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시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피와 성령님과 진리로 거듭난 바 되었습니다. 출생된 자로서는 이제 성장을 해야합니다. 주님을 푯대로 자라가야합니다. 얼마나 자랐습니까 앞선 자가 뒤서고 뒤선자가 앞선다고 하셨는데, 앞 자리를 다 내어 놓고 뒷짐지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교회를 미숙한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오늘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성령님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리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신앙의 성장과 미숙을 다음 두가지를 기준해서 살피고 있습니다.
첫째,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의 성장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갓난 아기들은 무엇을 먹습니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젖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느시간까지는 젖을 먹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라도 조금 자라면 이유식을 먹고, 좀 더 자라면 야문 음식은 못 먹어도 죽이나 밥을 먹게 됩니다. 그 안에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만 어린아이 때에 먹는 젖을 나이들어서 계속먹고는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영양있고, 좋은 것으로 바꾸어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서는 신령한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떡, 단단한 식물, 꿀 등으로 말씀합니다.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균형있는 식사를 해야하듯이 우리의 속 사람도 균형잡힌 식사를 해야합니다. 날마다 식사를 하듯이 이 신령한 음식도 날마다 먹어야 신앙생활의 피곤함도, 약함도, 병듬도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자랍니다. 어린아기의 젖을 밥으로 바꾸어주듯,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영적인 양식도 처음믿을 때와는 달리 더 야물고, 영양이 많은 것으로 먹여야합니다. 그가 어떤 영의 양식을 좋아하는가를 보면 그의 신앙상태를 알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젖을 먹습니까 밥을 먹습니까 여기에 젖도 신령한 양식 중 하나요, 밥도 신령한 양식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젖은 어릴 때에 먹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나 그 믿음의 동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받기만 원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의 첫 걸음에서는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만나서 하나님을 찾아서 도음과 지혜를 구하기도 합니다. 또 그보다 나은 사람은 영혼의 구원을 갈급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진리는 젖과 같이 중생의 교리입니다.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한 없는 은혜와 사랑입니다. 어린아이가 그 부모를 위하여 무엇을 합니까 그저 부모가 주는대로 잘 먹고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라도 어느정도 자라면 제가 스스로 해야할 의무와 책임을 찾아야합니다. 이제 아이가 자라면 밥을 먹는 것 같이 신앙이 장성하면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실 복만 원하는 자 아닙니다. 이제는 제가 할 일을 찾습니다.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받는 것만 아는 사람이 이제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고하신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전에 어린 신앙 때에는 이 세상의 소망으로 가득차서 구하는 것도 그의 소원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그의 소원이 주를 닮는 것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의 것은 헛된 줄 알고, 이것을 드려 영원한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 십자가 그늘 아래로 왔으나,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내 몫에 태인 십자가가 있는 줄 알고 그 고난을 당하면서 주님을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젖을 떼고 밥을 먹는 장성한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렇게 자라가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둘째로, 그가 장성했는지 아는 방법을 바울은 사랑을 실천하는가 않는가를 보아서 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가만히 보면 이기적입니다. 주는 것은 없습니다. 전부가 제것이고, 저를 위한 것입니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있어도 제 맘에 들면 꼭 제것을 만들어야합니다. 아이들은 잘 다툽니다. 아이들은 소란하고, 떠듭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특성입니다. 바울은 아직 고린도교회가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했습니다.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은 아직 미숙해서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제 유익만을 구하고, 제게 없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을 때에 시기 질투하고, 또 잘 다투는 사람은 저는 잘나고 똑똑한 줄 알지만 이 사람은 어린 아이같이 유치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 잘라면 친구도 알고, 나눌 줄도 알고, 제것과 남의 것을 압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면 남의 은사를 보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중심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 다 신앙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자기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툼보다는 화해와 용서와 온유가 있는 사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시비가 일어나면 그 교단의 지도자되는 분을 찾아갑니다. 그분은 …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어린아이의 신앙인가, 장성한 신앙인가,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젖이나 먹고 있는가 도의 초보를 걷고 있습니가 그리스도를 본 받아 점점 신의 성품에 이르도록 자라고 있습니가 세상에서는 실력을 가져야된다고 생각하여 부지런히 배우기도하고,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약도 먹습니다. 한 끼도 안 먹고는 못산다고 부지런히 밥을 챙겨먹습니다.
그렇다면 내 신앙생활의 성장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는 해도되고, 안해도 되는 것입니가 이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고, 직장도, 공부도 해야하는 것 아닙니가 나는 이제 믿을 때의 도의 유치한 초보의 걸움에서 성장해서 천국을 바라면서. 주님을 푯대로하여, 주는 자로, 사랑을 베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신앙중심에서 모든 것을 하고 있는지. 여전히 받으려고만하고, 이 세상 소망 뿐이고, 인본주의의 신앙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신앙생활은 아닌지. 어릴 때에 부모가 좋아하는 모습과 행위도 그것을 나이 먹은 이후에도 계속한다면 그것을 부모가 좋아하겠습니까 처음 믿을 때에야 주일 오전에만 나와도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술만 끊어도 자랑거리가 되고 대단한 믿음으로 칭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일년이 지나도 어린아이는 돌지나면 이제 아장 아장 걷는데,이 사람의 신앙은 아직까지 비틀거리고 제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다면. 십년이 넘었습니까 년수 자랑하지 맙시다. 년수는 지나갔는데 자람이 없다면 텃세를 할 것이 아니라, 병신으로 알고 부그러워해야합니다. 아직도 신앙이 자발적, 자원적이지 않고, 남에게 의지하고,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고 있습니가 이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갑시다. 언제까지 느즉거리고 다른 사람 덕 보면서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신앙생활한다고 하겠습니까 자라지 않는 것이 죄라고 생각해야합니다. 아무 음식이나 먹고 소화해서 영양을 섭취합니까 다툼이나 시기심이나 아이 때의 유치함 같은 내 중심의 마음이 내게 아직까지 있습니까 고칩시다. 자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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