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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의 신앙 (고전15:10-11)

본문

이 본문은 신앙을 참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이 말은 “오늘 내가 존재하고 주님을 통해 구원을 받아서 사도가 되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다” 그 말입니다. 참 멋있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신앙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앙이 표현되고 고백되고 전달되고 그래서 내가 행복하고 남들이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보다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소극적인 신앙에서 적극적인 표현으로 고백되고 나타나야 더 향기롭습니다. 오늘은 신앙도 정적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표현됩니다. 참 많이 변했습니다. 소극적으로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권위주의나 형식주의 같은 것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가리켜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이미 현대도 지났습니다. 지금은 초현대의 시대입니다. 근엄하고 엄숙하고 권위주의적인 것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시대입니다. 젊은이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적극적이고 솔직하고 대담합니까 공항에서 젊은이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고 헤어집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 민망한 마음도 들었지만 또한편으로 그게 정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은 애정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부부들은 출근할 때마다 키스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퇴근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니 얼마나 신선하고 자연스럽고 좋습니까 우리는 이미 구세대니까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이대로 살아가는 것이 편합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를 한다면 불편해서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용기를 내어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아내들은 “왜 안하던 짓 하느냐”며 퉁명스럽게 굴지 말고 뛰어가서 목을 끌어안고 메달리십시오. 그래야 이런 고백을 자주 들을 수가 있습니다. 남편들도 자주 이런 말을 해주면 좋을 것입니다. 처음에 입을 때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번만 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신앙 표현도 가슴에만 묻어둔 채 근엄하고 권위적으로 살아가지 말고 적절히 표현하고 고백하고 나타내고 표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표현되고 고백됩니다. 신앙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생활이 되고 생활 용어로 표현되고 그래야 합니다. 사람의 몇 마디 말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지, 고향이 어디인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인지, 직업이 무엇인지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붙잡고 열심히 전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 듣고 하는 말이 “나는 집사입니다.” 그러더랍니다. 또한 사람을 붙들고 열심히 전도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더랍니다. 그것은 사전에 상대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먼저 잠시 몇 마디 이야기를 해보면 그 사람이 집사인지 목사인지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만 대화해 보면 그 사람이 신앙인인지 비신앙인인지를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의 내면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신앙도 표현하십시오. 신앙을 표현하고 살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용기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을 적적하게 표현하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면 참 좋은 전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표현할 수 있는 신앙 용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에서 이기거나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을 때 꿇어 앉아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말하자면 그것이 신앙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때 선수들이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선수들이 선뜻 대답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마나 좋은 표현입니까 이것이 “생활 속의 신앙”입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신앙입니까 언젠가 TV에서 연기자들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코미디 부문 시상을 하는데 어느 여자 개그맨이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개그맨은 상을 받을 만큼 예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순간 저 여자는 못생겨서 출세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자가 소감을 말하라고 하니까 그 개그맨이 서슴지 않고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눈이 크게 뜨였습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신앙고백입니까 그 소리를 듣고 나니까 그 얼굴이 그렇게 예쁘게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한마디 말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하고 만인 앞에서 선포하는 것 아닙니까 아주 대단한 용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되느냐고 말하지만 아닙니다. 그래야 합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고백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용기 있는 표현입니까 옛날처럼 속으로 고백하고 뼈 속으로 사랑하는 그런 침묵의 시대는 지났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침묵할 수 없습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정말 감격스러우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슬프면 권위나 체면을 뒤로 하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수치도 아니고 권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면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까 그것이 왜 부끄럽고 이상합니까 1997년 괌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 때 있었던 몇 가지 숨겨진 이야기들입니다.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여승무원이 넷인데 그중 세 명이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그중 한 명의 어머니는 자기 딸이 십일조 생활을 아주 잘해서 살아난 것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명은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살아난 다음 기자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하고 물으니까 첫마디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이 이렇까까지 위대하고 힘이 있습니다. 왜 가만히 속으로만 감사하고 있어야 합니까 참 감격스러운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은 어느 순간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그런 고백을 자주하다 보니까 그날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나온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일상 생활속에서 찬송이 있고 신앙고백이 있고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이것이 생활 속의 신앙입니다. 신앙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이 표현이 튀어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신앙 표현입니다. 비행기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에게 인터부에서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습니까” “재수가 좋았지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재수”라는 말은 기독교적인 신앙용어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주님의 은혜였지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게 나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많은 일을 했는데 그것조차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얼마나 자연스럽고 흐믓한 고백입니까 신앙은 이렇게 생활 속에서 만들어지고 표현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인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말도 마십시오. 내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하고 “나”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이 인간주의입니다. 그러니까 자만이 나오고 교만이 나오고 인간주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해야 합니다. 이 고백 속에 신앙고백이 들어 있고 겸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갈등도 많고 생각도 많을 것입니다. 학생들이 모두 한번 쯤은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런 생각을 다 하겠습니까 그런 아이들에게 눈에 띄기만 하면 “들어가 공부해라” 하니 그 아이들이 살맛이 나겠습니까 그렇게 어렵게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조용히 다가가서 “힘들지 주님께서 도와주실거야” 하고 격려를 해보십시오. 그 말 한마디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용기가 되고 힘이 되겠습니까 사람은 말 한마디에 감격하고 힘을 얻고 살아갑니다. 지금 한참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에게 가서 위로할 때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오늘은 무서운 병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걸렸다 하면 죽을 병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한결같이 두려움과 고민과 걱정에 싸여 있습니다. 그런 환자들을 찾아가서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침착하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고 위로하면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이런 신앙적인 격려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늘 신앙을 고백하고 표현하던 사람이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 속의 신앙입니다.
4.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은 참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기도 하고 풀 길 없는 고뇌스러운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신앙인의 입에서도 체념의 소리가 나오고 운명 운운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그런 말을 내뱉으면 힘을 잃게 됩니다. 말은 하기에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다 팔자지요” 하고 말하면 더 낙심이 되고 힘이 빠집니다. “재수 없어서 그렇지요” 그런 말은 신앙인의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천박한 대답입니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라는 말도 많이 하는데 좋지 않은 표현입니다. 그렇게 대답한다면 그 처지가 얼마나 불행하고 한심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어 표현에서부터 그 시작이 달라야 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면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지요”가 아닙니다. 그때 나와야 할 대답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지요”입니다. 벌써 그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일의 해결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암시가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초연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원인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생활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말 한마디가 미치는 영향은 상당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차피 될대로 되라지, 원래 나는 재수가 없으니까.” 이런 말은 성도들이 할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 첫머리에 이 말을 꼭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된 나 바울은” “주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도 된 나 바울은.” 그러니까 그 삶이 그렇게 엄숙하고 진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성도들의 생각입니다. 괌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고의 원인을 기장의 실수로 돌리고 관제소에 돌리고 하니까 더 불행해지는 것이고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일반인들도 화가 나는데 가족들은 얼마나 더 원망스럽고 분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사건도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됩니다. 이 사건 하나만 보면 분명 비극이고 불행한 일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는 종말론적인 느낌이나 삶의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경종의 소리들이 얼마나 크게 들리겠습니까 그동안 느슨해져 있던 기강들이 다시 잡히고 그래서 더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게 해 준다면 얼마나 큰 다행입니까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사건은 분명 그 나무한테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 나무가 말라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각성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고를 보고서도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면 얼마 있다가 어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또 말라 죽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입니다. 사람이 한 가지 사건만 보면 분통이 터져서 못 삽니다.
그런데 그 속에 들어 있는 교훈들을 보면 그 일이 일방적으로 불행만 안겨 준 사건도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사건을 보는 관점이나 해석의 기준이나 상황을 보는 시각이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금을 그렇게 신앙으로 표현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라.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는데 그것조차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얼마나 정감 넘치는 신앙고백입니까 오늘 이 시대는 이렇게 표현하고 고백하면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사랑하면 용기 있게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오늘은 남자들이 용기가 없어서 사랑도 대신 고백해 주는 대행사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사랑도 제대로 고백 못하는 남자에게 어떻게 미래를 맡기고 일생을 함께 살겠습니까 “찜당한 남자, 찜한여자” 이제 우리 신앙도 은은하게 조용히 침묵만으로 일관해서는 안 됩니다. 과감하게 표현하고 고백하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만인 앞에서 내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나 자신에게 강력한 암시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은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는 때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얼마나 시원한 신앙고백입니까“ 이 같은 적극적인 신앙으로 발전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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