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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음 (고전15:1-19)

본문

1. 신앙의 핵심은 은사가 아닙니다. 신앙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5장 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를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은 은사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며, 이것이 신앙의 원리이며 목적이고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고린도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여 삶의 변화를 가져왔 습니다.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 복음은 곧 "(고전15:3).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가 자신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어서 구원을 받 았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굳게 지키었습니다. 금세와 내세에 있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며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2. 기독교 역사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서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4) 오직 부 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 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 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自己啓示)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 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신들처럼 자기를 높이는 분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인간 세 계로 오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그 인간 사회에서 버림과 멸시를 받 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죄의 심판 자리에 까지 자기를 낮추시는 분이 십니다. 그는 홀로 계시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계시고자 하며, 그 인간을 섬기시고자 자기를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무감각 한 분이 아니라 사랑의 정열을 가진 분이시며, 의로운 분인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인간을 섬기기 위해 자유를 유보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을 율법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 아 니라 그 심판을 자기가 대신 당하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된 인간을 높이시는 분이심을 십자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러 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내가 어떻게 신령한 체험을 했고, 그래서 내가 얼마나 기쁘고, 내가 얼마나 사명감에 불타는가로 자신의 신앙을 측정하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자는 항상 남을 위하여 기도하고, 자신이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털 깎는 자 앞의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고, 남의 죄를 대신 지고, 남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고, 마치 그것이 자신의 잘못 인 것처럼 묵묵히 지키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억울함을 하 소연하지 않고, 남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 참으로 좋은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 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 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능력이 그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귀 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해주고, 한 번 설교에서 수 천명씩 회개하는 것 등이 그 사람의 영성과 영력을 증거해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과 영력은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신의 성품에 있는 것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십자가를 연료로 하고 있으면 사랑의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왜 사랑의 불이 일지 않거나 쉽 게 꺼지는 것인가 그것은 연료를 잘못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결 심, 인간의 맹세, 인간적인 열심과 노력, 물질 등은 사랑의 연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곧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해주셨 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에너지로 할 때 비로 소 사랑의 불이 계속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전도의 불이 인간을 구원하며,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봉사의 불이 교회를 변화시키며, 사회 변화시 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연료로 하는 사랑의 불이 인간을 변화시키며, 인간을 구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 핼록(G.
B. Hallock) 목사의 목격담입니다. 그가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선 갑판에서 한 아이가 개 를 데리고 놀고 있었습니다. 공을 던지면 개가 그 공을 물어 오는 것이 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공을 잘못 던져 바다로 굴러 떨어졌고 개도 공을 따라 파도로 뛰어든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른 선장에게 달 려가 배를 돌이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커다란 배의 스케줄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가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선 장도 할 수 없이 배를 돌이켰다고 합니다. 희생의 크기에 따라 변화의 규모도 달라집니다. 작은 보트라면 개 한 마리를 위해서도 진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기선의 진로 변경은 한 인간의 생명이 달려 있 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 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땅으로 오셔서 십자가 몸을 던지신 것입니다.
3. 예수께서는 한 번도 부활을 말하지 않고는 자기의 죽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도 승리없는 수치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부활 의 승리와 광채를 생각지 않고는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 죽음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 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빌2:8)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 게 하려 함이니라.(고전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 를 다시 살리시리라." 십자가가 인간과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사건 이라면, 부활은 새로운 삶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예수가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받은 사건이라면, 부활은 심판을 받 은 예수를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는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그 외형에 있어서 하나님의 분노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과 수난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하나님의 자기 높이심과 영광의 사건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말합니다. 어떠한 인간 도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음 의 한계를 깨뜨렸음을 뜻합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하나의 한계일 수 있 으나 하나님에게는 한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창조의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죽음은 이제 예수 안에서 시작된 삶에 의해 삼키어졌습니다. 죽음의 독침 곧 죄의 세력은 지금도 활동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결정 적으로 단 한 번에 극복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 영원한 삶의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 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그의 부활로 새 하늘 새 땅, 새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부분적이지만 하나님의 미 래가 현재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과 함께 인간은 이제 새로운 삶,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며, 세계는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거짓과 죄와 무의미와 죽음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모습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의 여류 시인인 패트 반즈 씨는 어느 부활절 아침의 체험을 소 개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교회 대문 곁에 꽃파는 노파가 있 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주름살이 깊에 패인 노인이었으나 얼굴 전 체에 웃음꽃이 피고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반즈 씨는 "그렇게 웃고 계 신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꽃 파는 할머니 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 나이만큼 살면 슬픈 일,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를 지는 고통의 금요일은 끝이 아닙니다. 겨우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괴로울 때면 사흘만 기다리자고 혼자 말합니다." 이 노파의 지혜가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겨울 가지들은 죽은 것 이 아닙니다. 죽은 것 같을 뿐입니다. 봄이 오면 대지가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부활 신앙은 삶의 질(質)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삶의 어떠한 내용도 창조적 삶으로, 새 생명의 삶으로 변 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 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 게 하려 함이니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 절대 패배할 줄 모르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깨 끗하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부활은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며, 선이 악보다 강하며, 생명이 죽 음보다 강하며, 사랑이 미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도로 하여금 진리와 선, 생명과 사랑을 따라 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로마가 황제 숭 배를 점점 더 악랄하게 강요하자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땅 위에서 버 틸 만한 능력이 없어서 지하의 땅굴 속으로 숨게 되었습니다. 카타콤이 라고 불리는 이 땅굴은 로마 건축을 위해 오랫동안 토공들이 흙을 파 내기 위해 시작된 곳이었는데, 수 백년을 지나면서 이 땅굴은 끝을 헤 아리기 어려울 만큼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천혜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피해 이곳으로 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습기차고 어두운 이곳은 정상적으로 살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곳에 피신하면서 조악한 환경으로 인해 병약해지고 때로는 죽는 자들 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은 자들을 위 해 땅굴 속에 무덤을 파고 벽에다 내세의 소망을 말하는 성구와 자신 들의 소원을 새겨 넣었습니다. 때로 바깥 세상에 나왔다가 체포되어 큰 원형경기장으로 끌려가 며칠씩 굶긴 사자들의 밥으로 사라져 갈 때도 하늘을 바라 보고 기쁨으로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형 경기장의 사자들 앞에서 부른 고린도전서의 다음 찬송시는 도저히 잊 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 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될 순간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 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사망을 조소 하듯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미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카타 콤의 순교자들이었습니다. 미래의 이 소망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어려움과 무의미를 이길 수 있고 가치 있는 일에 수고를 진력할 수 있습니다. 한 때 미국의 팝송 가운데 젊은이들이 세태를 풍자한 노바디 (Nobody)라는 노래가 유행이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감이 있는가 노바디 (Nobody). 전쟁을 쉬게 할 사람이 있는가 노바디(Nobody). 존경할 사람이 있는가 노바디(Nobody). 이 노바디(Nobody)라고 하는 것은 무엇 을 말해주는 것인가 도대체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 한 신조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들은 "노우(No)족속"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입니다. 하나님이 없 으니까 모든 것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고 목표도, 초점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눈을 보면 초점이 없습니다. 초점을 잃은 세대에 우리는 살 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부활 신앙은 목적없이 방황하며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인간의 삶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며 그의 삶 하나 하나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의미 가 주어져 있습니다. 제아무리 얼어붙은 대지일지라도 봄이 오면 만물 이 소생하는 것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면 생명의 의미를 깨우치며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삶이 비록 무의미했을지라도 예수 믿고 부활 신앙을 가지심으로 천하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 깨우치시고 영생을 향한 분명한 삶의 목표 가운 데 하나 하나의 삶에 무한한 가치가 부여된 삶을 창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 그러나 유대교의 분파인 사두개인은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모 두 부인했습니다. "(행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헬라인들은 영혼 불멸은 믿었으나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육신을 벗어버리고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교와 헬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린도 교회에는 육신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육신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 부활 사건을 부인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복음의 진리와 신앙의 근본에 대한 부정이라고 지 적하면서 참된 부활의 의미와 신앙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라우폴의 '꿈'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라우폴 공이 예수님 께서 성만찬에 쓰신 은잔을 찾기 위해 자기가 살던 성을 떠날 때 말에 채찍을 가하여 막 성문을 나가고 있는데 아주 남루한 거지가 라우폴 공에게 자선을 청했습니다. 그는 그 내미는 손을 재수없다고 생각하면 서 돈 한 푼을 던져 주고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 잔 을 찾는 것인 줄로 생각하고 멀리멀리 그 은잔을 찾아다녔습니다. 세월 이 흘러 그가 가진 돈도 다 떨어지고 건강도 쇠하여졌으며 그는 지쳐 서 기진 맥진하였습니다. 백발이 성성하여 이제는 성화된 마음, 겸허하 고 가난한 마음으로 라우폴 공이 자기의 성을 향해서 쓸쓸히 돌아올 때 그는 무르익은 곡식처럼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동안 그에게는 깊 은 죄의식과 사랑이 생겼습니다. 그가 출발했을 때 손을 벌렸던 그 거 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구걸을 하자 그는 "네게 아무 것 도 줄 것이 없지만 내가 먹을 빵이라도 나눠 먹자."며 빵을 두 조각으 로 나누어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또 그 거지가 목말라 보여서 자기 의 표주박을 가지고 손수 우물에 가서 물을 한 잔 떠다가 그 거지를 대접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거지가 홀연 예수님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찾는 은잔은 바로 이 표주박이고 이 냉수는 나 의 피이며 네가 나눠준 이 빵조각이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베푸는 것이 실천적인 성만찬의 삶이며 부활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사신 것은 과거의 역사 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찢기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만찬은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켜왔으며 구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신앙은 우리 미래의 삶까지도 변화시키며 영생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며 구원하는 구원의 복음이 이 땅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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