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 (고전15:20-49)
본문
뉴욕에서 신문에 보도된 재미있는 토픽 한 토막입니다. 뉴욕 써니 사이드에 있는 한 공장에서 사장이 자기 얼굴을 닮은 고무 인형을 매 달아 놓고 "누구든지 화가 나면 이 인형을 두들겨 패라."고 써붙였습니다. 직공들이 그 인형을 하도 많이 두들겨서 일 주일에 한 번씩 새 것 으로 갈아 놓아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작업능률이 올라 성공적이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맞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먼저 눈 위를 밟고 지나가야 길이 생기는 법입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져야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만 달면 모든 쥐는 안심 하게 살 수 있다."라는 이론은 누구나 압니다.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누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다느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없이는 인간에게 참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다음 성구에 있습니다. "(레23: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레23: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곡물의 첫 이삭 한 단" 즉 첫 열매를 하나님께 먼저 바치라는 것입니다. 바쳐진 "곡물의 첫 이삭 한 단", 즉 보리단을 연한 방망이로 보 리 알이 상하지 않도록 떨어서 껍질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알갱이는 방아에 찧어서 그 가루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이 바로 첫 열매였 습니다. 이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햇 보리를 상점에서 사 고 팔지를 못했으며, 햇 보리에서 나온 가루로 떡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어 들일 추수의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은 앞으로 있을 모든 신자들의 부활 의 표시였습니다. 첫 열매를 정식으로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햇 보리 를 먹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명의 새 추수는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 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 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 리라."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모든 사람이 죽음에서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에서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의 뿌 리가 깊지 못할 때 쉽게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성경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린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 문입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 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 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기도 하고 성경대로 죽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톨릭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가 불교의 대표적 경전, 반야심경을 번 역 출판했습니다. (책명, 가자! 가자! 함께 가자!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정신부는 '반야심경과의 만남을 소중한 인연으로 삼고 있다.'며 '좀더 사람다워지고 함께 하나가 되려 하는 것에 종교간 구분은 무의미하다.' 고 말했습니다(경향신문. 1997.6.6일자). 기독교는 착하게 살거나 사람이 사람다워지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 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는 것이 "(고전15:19) 만일…다만 이생뿐이면 모 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 백성 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그 믿음 이 유익되지 못한 것은 그 들은바 말씀이 믿음과 화합하여 순종치 아 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 속받았을지라도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 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 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4: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 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 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 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히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 라 (히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 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 명령에 대한 순종의 싸움인 것이지 착해지려는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진리 사수(眞 理死守)의 생활입니다. 부활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은사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부활 신앙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느 교회 보다 은사와 지식이 앞섰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활 신 앙을 저버리므로 분파가 생기고 부활 신앙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전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 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 전1: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고전1:7) 너희가 모 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 이라." 고린도 교회의 특징은 지식과 지혜와 은사가 넉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사를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신앙 생활로 나타나지 못하고, 현세에서 자기들을 증명하는 우월하고 형통한 보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자주 충돌하는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가장 신령한 자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자이어야 하는데 왜 늘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늘 실패하고 어려움 속에 있느냐며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생긴 것도 이런 연 유에서입니다. 예수 믿고 고난받으며 만물의 찌끼처럼 대우받는 것은 신령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종으로 의심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면 하는 일마다 앞 길에 대로가 열려 승승장구 성 공하고 출세하여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어야 신령한 것이며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것은 무 엇입니까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 뇨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 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 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 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 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 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어 "부요하고 왕노릇하고 강하고 지혜롭고 존귀 하게" 되는 것이 신령한 신앙생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는 비천 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 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 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 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이고 세상에서 걷게 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보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여기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만물의 찌끼 같이 대접하겠습니까 우리의 영원 한 상급과 지위는 결국 내세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훈련되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하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판단, 올 바른 믿음을 가진다면 병에 걸리지 않고 실패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바울이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부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목표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환란과 고난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환난을 당 하고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날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란 누구입니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할지 라도 복음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님이 각 성 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 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진정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과 환란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 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 냐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 후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 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고후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고후11: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 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조지 워싱턴 장군이 1776년 겨울 펜실베이니아 주의 포지 계곡에 주 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겨울은 몹시 추웠으며 식량은 떨어지고, 옷과 신발이 해어졌으며,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인들이 쓰러지는 비참한 겨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은 워싱턴 장군의 군대에 대 하여 몹시 불친절했습니다. 이 때 워싱턴 군병들에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여름철 군인과 햇빛 날 때의 애국자는 아무 일도 못한다. 장차 민족 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의 날을 이겨내는 사람들 이다." '여름철 군인' 즉 추위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좋은 계절에 사는 편안 한 군인, 그리고 '햇빛 날 때의 애국자' 즉 세상이 편하고 별 위험이 없 을 때에 애국을 부르짖는 애국자는 인류의 역사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있을 때,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할 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고 희생의 피를 흘려야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고 갈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와 영광은 십자가로 얻는 것입니다. "(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
3.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여름철의 군인'이나 '햇빛 날 때 의 애국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삶은 한 마디로 부도 덕함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합리 화하기 위해 부활의 진리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생명이 전부이며,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내일 은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고 즐겁게 놀자"고 말할 것입니다.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 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활과도 같은 것입니다.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 되." 내세의 생각을 버리면 현세의 가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현세의 삶 은 보다 위대한 내세의 생명을 위한 훈련이요, 준비라는 생각을 버린다 면 지조도 도의심도 해이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수를 바라고 선을 행하거나 지조를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소 용없습니다. 현세의 존재만을 믿는 사람은 현세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상종하면 어쩔 수 없 이 생명을 더럽히는 악 영향에 물들게 마련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부활 신앙없이는 새로운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앙 위인은 가가와 도요히꼬입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맥아더 장군이 군정관으로 일본에 상륙하기 전 미주리 전함 으로 가가와를 초청하여 자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만큼 가가와는 세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 무 척 단조롭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믿게 된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21세 때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자 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 색과 고민에 잠겼는데, 갑자기 그의 머리에 들어온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종말의 상징이 아니라 새 출발의 표라는 진리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청년 가가와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 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자기는 죽고 사선(死線)에서 재출발하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그 후의 생명은 덤으 로 사는 것이므로 아까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박 애정신과 희생은 사선을 넘어 재출발한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4.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위해 있는 것이며, 그의 부활은 장 차 있을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과 나의 부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과 관계 속에서 신앙의 의미가 있는 것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 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예수의 부활이 있어야만 우리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 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 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 리라.(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하는 그 날에 부활 신앙은 가진 사람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부활 신앙은 가진 사람은 온전한 구원을 기 다리는 사람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삶 이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체를 닮아서 변하는 자리까지 가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 뿐만 아니라 육신 에 이르기까지 거룩함과 생명과 진리로 충만해져 영광스럽게 되는 것 이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장차 누리게 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 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 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로드 아일랜드주의 창건자인 로저 윌리암스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곁에 있던 사과나무의 뿌리가 관 속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윌리암스의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썩어서 흩어진 몸이 어떻게 다시 부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추론(推論)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여!" 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은 육체가 재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부활 때에 하나님께서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우리의 이전의 몸으로 돌이킨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몸은 욕된 것으로 묻히나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땅에 묻히는 몸은 연약하나 부활 때의 변화된 몸은 강합니다. 예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적 환 경에 적합한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 죽이는 것을 이 한 마리 죽이는 것쯤으로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애인의 권면으로 경찰에 자수한 뒤 요한복음 11장에 나 오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기사에는 이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한 사람 의 인간이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단순한 살인자였든지 혹은 사회 혁명가였든지는 상관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인간의 삶이 란 한 인간을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100년 전 부활주일에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도착했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꺾으 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 녀로서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어둡고 괴로웠던 식민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나라는 어떻습 니까 부정과 부패, 허영과 사치, 향락과 음란, 우상숭배와 각종 미신 등으로 가득차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죄악으로 관영한 땅이 아닙니까 이 땅에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 소생의 빛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부활 신앙으로 재무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실주의적 기복신 앙을 벗어 던지고 자신과 나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부활 신앙으로 재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지않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진리 사수하며, 성결 보존 하며, 신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는 사명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할지라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성경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죽인 로마 제국은 온갖 권위와 횡포로 박해와 핍박을 서슴지 않았지만 300년이 지난 뒤 로마의 황제는 스스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 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차와 대포를 가진 로마가 빈 주먹으로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만을 가르치며 전하던 사람들 앞에, 그 힘 없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사의 아이러니, 복음의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까 교회의 역사는 감히 증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라고. 영광의 그날, 부활의 그 날, 그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그 날, 홀연히 신령하며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바라보며 산 소망이 충만한 부활 신앙으로 이 땅의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나라 민족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이 땅에 부활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자신과 더불어 나라 민족이 다시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거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의 뿌 리가 깊지 못할 때 쉽게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성경 말씀에 뿌리를 깊게 내린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 문입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 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15:4) 장사지낸 바 되 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기도 하고 성경대로 죽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톨릭 안동교구 정호경 신부가 불교의 대표적 경전, 반야심경을 번 역 출판했습니다. (책명, 가자! 가자! 함께 가자!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정신부는 '반야심경과의 만남을 소중한 인연으로 삼고 있다.'며 '좀더 사람다워지고 함께 하나가 되려 하는 것에 종교간 구분은 무의미하다.' 고 말했습니다(경향신문. 1997.6.6일자). 기독교는 착하게 살거나 사람이 사람다워지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 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는 것이 "(고전15:19) 만일…다만 이생뿐이면 모 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 백성 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그 믿음 이 유익되지 못한 것은 그 들은바 말씀이 믿음과 화합하여 순종치 아 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 속받았을지라도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 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 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4:4)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 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4: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 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4: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 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히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 라 (히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 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 명령에 대한 순종의 싸움인 것이지 착해지려는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진리 사수(眞 理死守)의 생활입니다. 부활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은사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부활 신앙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느 교회 보다 은사와 지식이 앞섰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부활 신 앙을 저버리므로 분파가 생기고 부활 신앙까지도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전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 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고 전1: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고전1:7) 너희가 모 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 이라." 고린도 교회의 특징은 지식과 지혜와 은사가 넉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사를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신앙 생활로 나타나지 못하고, 현세에서 자기들을 증명하는 우월하고 형통한 보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자주 충돌하는 일이 생겼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가장 신령한 자이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자이어야 하는데 왜 늘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늘 실패하고 어려움 속에 있느냐며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생긴 것도 이런 연 유에서입니다. 예수 믿고 고난받으며 만물의 찌끼처럼 대우받는 것은 신령하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의 종으로 의심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면 하는 일마다 앞 길에 대로가 열려 승승장구 성 공하고 출세하여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어야 신령한 것이며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것은 무 엇입니까 "(고전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 뇨 (고전4: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 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 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 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 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 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이 세상에서 예수 믿어 "부요하고 왕노릇하고 강하고 지혜롭고 존귀 하게" 되는 것이 신령한 신앙생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는 비천 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 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 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 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이고 세상에서 걷게 하시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보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여기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만물의 찌끼 같이 대접하겠습니까 우리의 영원 한 상급과 지위는 결국 내세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훈련되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하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판단, 올 바른 믿음을 가진다면 병에 걸리지 않고 실패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바울이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부활 신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목표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환란과 고난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환난을 당 하고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날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란 누구입니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할지 라도 복음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이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20:23) 오직 성령님이 각 성 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행20:24) 나 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진정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과 환란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 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후11: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 냐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 후11: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 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고후11: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고후11: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 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조지 워싱턴 장군이 1776년 겨울 펜실베이니아 주의 포지 계곡에 주 둔하게 되었습니다. 그 겨울은 몹시 추웠으며 식량은 떨어지고, 옷과 신발이 해어졌으며,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인들이 쓰러지는 비참한 겨울이었습니다. 더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은 워싱턴 장군의 군대에 대 하여 몹시 불친절했습니다. 이 때 워싱턴 군병들에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여름철 군인과 햇빛 날 때의 애국자는 아무 일도 못한다. 장차 민족 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의 날을 이겨내는 사람들 이다." '여름철 군인' 즉 추위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좋은 계절에 사는 편안 한 군인, 그리고 '햇빛 날 때의 애국자' 즉 세상이 편하고 별 위험이 없 을 때에 애국을 부르짖는 애국자는 인류의 역사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있을 때, 그리고 십자가를 져야 할 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고 희생의 피를 흘려야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고 갈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와 영광은 십자가로 얻는 것입니다. "(골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
3.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여름철의 군인'이나 '햇빛 날 때 의 애국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삶은 한 마디로 부도 덕함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합리 화하기 위해 부활의 진리를 부정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생명이 전부이며,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내일 은 죽을 터이니 오늘은 먹고 마시고 즐겁게 놀자"고 말할 것입니다. "(사56:12)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 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이는 어리석은 부자의 생활과도 같은 것입니다.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 되." 내세의 생각을 버리면 현세의 가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현세의 삶 은 보다 위대한 내세의 생명을 위한 훈련이요, 준비라는 생각을 버린다 면 지조도 도의심도 해이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수를 바라고 선을 행하거나 지조를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고 말해도 소 용없습니다. 현세의 존재만을 믿는 사람은 현세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상종하면 어쩔 수 없 이 생명을 더럽히는 악 영향에 물들게 마련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부활 신앙없이는 새로운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앙 위인은 가가와 도요히꼬입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맥아더 장군이 군정관으로 일본에 상륙하기 전 미주리 전함 으로 가가와를 초청하여 자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만큼 가가와는 세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보면 무 척 단조롭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믿게 된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몸소 실천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21세 때 폐결핵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자 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 색과 고민에 잠겼는데, 갑자기 그의 머리에 들어온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종말의 상징이 아니라 새 출발의 표라는 진리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청년 가가와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빈민굴로 들어 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한 번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자기는 죽고 사선(死線)에서 재출발하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그 후의 생명은 덤으 로 사는 것이므로 아까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박 애정신과 희생은 사선을 넘어 재출발한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4.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위해 있는 것이며, 그의 부활은 장 차 있을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과 나의 부활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나의 부활과 관계 속에서 신앙의 의미가 있는 것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고전15: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 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예수의 부활이 있어야만 우리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 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15:22) 아담 안에 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 리라.(고전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하는 그 날에 부활 신앙은 가진 사람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부활 신앙은 가진 사람은 온전한 구원을 기 다리는 사람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삶 이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롬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 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체를 닮아서 변하는 자리까지 가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 뿐만 아니라 육신 에 이르기까지 거룩함과 생명과 진리로 충만해져 영광스럽게 되는 것 이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인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장차 누리게 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 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 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엡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로드 아일랜드주의 창건자인 로저 윌리암스의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곁에 있던 사과나무의 뿌리가 관 속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윌리암스의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썩어서 흩어진 몸이 어떻게 다시 부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추론(推論)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여!" 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은 육체가 재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부활 때에 하나님께서 흩어진 조각들을 다시 모아 우리의 이전의 몸으로 돌이킨다고 말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몸은 욕된 것으로 묻히나 장차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영광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땅에 묻히는 몸은 연약하나 부활 때의 변화된 몸은 강합니다. 예수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적 환 경에 적합한 신령한 몸, 영광스러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람 죽이는 것을 이 한 마리 죽이는 것쯤으로 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애인의 권면으로 경찰에 자수한 뒤 요한복음 11장에 나 오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기사에는 이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한 사람 의 인간이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단순한 살인자였든지 혹은 사회 혁명가였든지는 상관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인간의 삶이 란 한 인간을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100년 전 부활주일에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상륙하자마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도착했습니다. 이날 죽음의 철장을 꺾으 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 녀로서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절 아침에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어둡고 괴로웠던 식민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나라는 어떻습 니까 부정과 부패, 허영과 사치, 향락과 음란, 우상숭배와 각종 미신 등으로 가득차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죄악으로 관영한 땅이 아닙니까 이 땅에 한 걸음 한 걸음 갱생의 길, 소생의 빛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부활 신앙으로 재무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실주의적 기복신 앙을 벗어 던지고 자신과 나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부활 신앙으로 재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신하지않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진리 사수하며, 성결 보존 하며, 신의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사는 사명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할지라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성경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죽인 로마 제국은 온갖 권위와 횡포로 박해와 핍박을 서슴지 않았지만 300년이 지난 뒤 로마의 황제는 스스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 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전차와 대포를 가진 로마가 빈 주먹으로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만을 가르치며 전하던 사람들 앞에, 그 힘 없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사의 아이러니, 복음의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까 교회의 역사는 감히 증거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라고. 영광의 그날, 부활의 그 날, 그 기업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그 날, 홀연히 신령하며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그 날을 바라보며 산 소망이 충만한 부활 신앙으로 이 땅의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여 나라 민족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이 땅에 부활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자신과 더불어 나라 민족이 다시 태어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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