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찾습니까? (요20:1-18)
본문
꿈과 전설로만 여겨 오던 수많은 사연들이 현대의 과학에 의하여 하나둘 정복을 당해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간의 생명마저도 어머니의 인체 밖에서 형성되어지는 놀라운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우리의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학이 생명의 창조에 신기원을 이룩할 수 있다는 소식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사실만은 의학을 비롯한 어떠한 세계에서도 정복하지 못한 체 우리 인류는 그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뜻은 아무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앙드레 말로가 인간의 조건에서 고백한 것처럼 “인간이란 자기가 죽게 마련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정의를 겸손히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언어에서 제외되어야 할 명제들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과 경험은 우리를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공할 수밖에 없는 첨단의 무기들, 권력의 쟁취 때문에 발생되는 인간 존엄의 상실, 노동의 현장에서 들려 온 신음의 숨결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생활과 감정 속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헛되고 인생이 헛되고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절망을 합니다. 그 결과로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초조, 피곤과 허무, 좌절과 절망 속에 긴 한숨을 내 쉽니다.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만약, 이처럼 이 땅의 인생이 태어나 불안과 피곤과 좌절에만 머물다가 병들고 죽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 인생은 너무나 허무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生老病死가 우리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그렇게만 고달프고 불쌍한 실존들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그렇게 허무한 존재들로 만들지 아니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생존의 의미가 내 개인의 능력과 지혜로는 깨닫기가 불가능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죽음으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난 석가나, 공자나, 마호멭을 통하여도 이 영원한 삶의 진리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 땅의 죽음을 정복하고 진정한 생의 의미를 부여한 참 길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누구를 이 아침 찾아야 합니까 피곤과 허무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자신을 희망과 용기 속으로, 모순과 죄악으로 정복당한 자신을 살아 움직이는 참 생명으로, 해방시켜 줄 분이 어디 있으며 그 분이 누구입니까
이 새벽 그 위대한 진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을 우선적으로 만나 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우리 개인 개인에게 들려주시는지를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고, 새 세계의 한 인간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참 희망과 용기와 기쁨 속에 오늘을 도전해 가는 생명력을 지닌 변화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패배자로만 보였던 그분)
이 놀랍고 신기한 세계를 위하여 우리는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이 대답의 주인공은 이 천년 전 역사의 분명한 사실 속에 이미 나타나셨고 지금도 우리 곁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분이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외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왕 중의 왕이요 모든 머리 중에 머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요즈음 많은 성도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의미 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습관적이요 직업적인 입술의 장식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엄숙한 부활의 새벽, 한 번 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의 생애와 그 깊은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가난과 질병과 억눌림 속에 신음하면서 생의 의미를 포기해 가는 민중들의 곁을 찾아 오셨습니다. 힘없이 방황하는 인생들과 동고동락을 했습니다. 이 하늘 아래서 산 속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집이 있건만 우리 주님은 머리 둘 곳마저 없었던 무일푼의 인생을 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시간은 승리감만을 안겨 주는 부활의 아침입니다. 괴로운 것, 죽음의 세력권에 들어 있는 것일랑 모두 잊은 채 광명한 아침 햇살 속에 승리의 이야기만을 듣고 싶은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패배를 되새겨 보지 않은 승리의 도취는 실감이 나지 아니합니다. 우리 주님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부활의 사건이란 깊은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의 손자국에 의하여 잔인한 고초와 멸시 속에 죽음을 감수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어느 종교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이 아픈 수난은, 가증한 한 제자의 입맞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갖은 조롱과 모욕,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 위에 그 귀하신 손과 발에 못을 박은 망치 소리가 갈보리 산정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목숨이라도 함께 하면서 따르겠다던 제자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은 고독한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가시에 상하신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갖은 조롱과 수취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시던 주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로마 군병의 예리한 창끝이 옆구리를 뚫고, 심장까지 뚫어서 물과 피를 흐르는 것으로 족히 증명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33년의 지상에서 베풀어졌던 구속의 생애는 끝이 났습니다. 그 시체는 돌무덤에 안치되었던 거대한 바위 덩이로 문은 닫혀졌습니다. 그리고 무장된 군병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사신 그 분)
그토록 힘없이 죽어 간 분위기 속에서는, 그 예수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아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예수를 독립의 기수로, 또는 왕으로 이해하고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과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마저 예수 그리스도의 처참한 죽음이 자신들에게도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슬픔과 공포 속에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으로부터 살리신 일을,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장례 행렬을 멈추고 그 아들을 관속으로부터 살려내신 일을, 무덤 속에 장사 지낸지 나흘째 된 나사로의 썩은 시체를 살리셨던 우리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사흘 만에 인간의 손에 의한 자신의 죽음을 정복하고 스스로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사실을 아무도 믿거나 기다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만의 하나라도 그 죽음 그대로 끝났더라면 다른 일반적인 종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이 땅에 나서 훌륭한 교훈을 남기고 죽어, 오늘도 무덤이 그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실을 이 아침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 무거운 바위 덩어리의 무덤의 문을 박차고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사셨습니다. 아무리 큰 바위 덩이도 이 위대한 역사적 순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의 무력이 우리 주님의 다시 사시는 현장을 막거나 조작하기에는 너무나 불가능했습니다. 더 이상 죽은 예수를 그 무덤과 로마의 군병들이 지키지 못했습니다.
공포의 거리를 벗어나 그 무덤 속에 있는 예수를 찾아 나선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기 있지 아니하고 말씀하신 대로 살아 나셨다. 산 자를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일찍이 인류의 역사에 없던 새롭고 유일한 역사의 창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셨습니다. 전 인류가 제 아무리 애써도 아직도 이룩하지 못한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영원한 삶의 길을 이 아침 몸소 보이셨습니다.
(나를 찾아 주시는 부활의 주님)
이로써 승리의 개가를 부르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악마의 세력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인 승리 그것은 지극히 요란하고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참 승리는 영원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기 어려운 희생과 아픔 위에서 이룩됩니다. 참 승리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 위대한 승리와 참 진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무덤으로부터 없어진 예수를 애타게 울며 찾아 헤매던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무덤을 가 보았으나 보지 못하였다고 슬픈 빛으로 투덜대는 엠마오 도상의 두 사람에게 동행해 주시면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일일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믿어도 나만은 그 손에 못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 보기까지는 믿지 않겠다는 제자 도마에게 나타나
“네 손가락을 이리 내 밀어 내 손을 만지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다.”
고 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예수를 여러분은 보지 못하고도 믿습니까
영접하셨습니까 더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아침도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를 찾아 주시고 만나 뵙기 원하는 무리들에게 모두 만나도록 해 주십니다.
(감격의 노래와 결단)
이러한 부활의 주님 앞에 어찌 우리의 입술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외쳐야 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만왕의 왕이 다시 살아 나셨다.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 나셨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기리 다스리신다.
사셨다 사셨다. 예수 다시 사셨다
이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 보지 못했을 지라도 영접하고 믿던 사람들은 새 인생의 방향을 찾아 나섰습니다.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정하던 베드로는,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뵌 이후로는, 그 비굴한 인간이 자기의 생명 전체를 주님께 바쳐 살다가, 순교의 죽음을 당할 때 그는, 주님처럼 죽는 것 마저 감히 송구스러워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율법이 자신의 생의 전부라고 알고 크리스천들을 죽이던 바울은 이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이후로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독침은 죄고, 죄의 힘은 율법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주께 감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새 생명의 원천을 찾았을 때)
이토록 죄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계십니까 영접하셨습니까 만나 뵈셨습니까 경험하셨습니까
이제는 행동 속으로 움직여 나가야 합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어 무덤에 머문 예수님을 안고 있는 자만이 실망과 허무와 피곤과 공포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그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내 온 정신을 쏟고, 그 말씀에 부딪쳐야 합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부딪치는 자는 무덤 속의 한 시체처럼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 느낌 없이, 더 나은, 변화 없이 썩어져 갈 수는 없습니다.
“막달라야” 하고 개인적으로 부리시는 음성이, “너 아무개야”하고 부르시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으면 마음에 뜨거운 변화가 옵니다.
그때 우리는 권력 앞에 비굴해 질 수 없습니다. 국민이 애타게 부르짖는 사연들을 외면하는 권력 앞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그늘진 사연 앞에서도 비굴해질 수 없습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인권을 무참히 짓밟은 무리들을 옹호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 자신의 부와 지위를 누리는 오늘의 가롯 유다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의 거리를 함께 거닐면서 그들과 더불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돈이라는 현대의 우상 앞에 아부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지극하게 모실 수 없습니다. 나를 달콤하게 유혹하는 죄 앞에서 쓰러질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의 간악한 죄악과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합시다)
수십 년의 신앙생활을 해 왔으나 아직도 우울한 생활만 계속되십니까 수십 번 성경을 반복하여 읽었지만 아직도 생명력 있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보십시오. 그럴 때 엠마오의 두 사람의 가슴 마냥 뜨거워집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그분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근심이라도 변하여 기도의 제목이 되고 어떤 한숨이라도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오늘의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하고 담대한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 무덤 등의 단어들은 모두 패배의 상징들입니다. 그러나 부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은 영원한 승리의 표이며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길입니다. 그러기에 외칩니다.
우리도 부활합시다.
나를 점유하고 있는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부활합시다.
절망과 피곤과 허무한 것들로부터 부활합시다.
부정과 부패와 낭비와 공포와 잔인성의 돌무덤으로부터 부활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지상 명령처럼,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썩어져 부패한 것을 막는 소금이 되어서 힘찬 행진을 합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한 손에 밝은 빛을 쥐고 한 손에 방부제인 소금을 쥐고 일어서야 합니다. 참 크리스천으로서의 승리의 정복을, 부활의 행군을, 내 자신 속에서, 내 가정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민족 속에서, 더 나아가 전 세계 속에서 쉼 없이 계속합시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아침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20:26)
그러나 단 하나의 사실만은 의학을 비롯한 어떠한 세계에서도 정복하지 못한 체 우리 인류는 그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뜻은 아무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앙드레 말로가 인간의 조건에서 고백한 것처럼 “인간이란 자기가 죽게 마련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정의를 겸손히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언어에서 제외되어야 할 명제들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과 경험은 우리를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공할 수밖에 없는 첨단의 무기들, 권력의 쟁취 때문에 발생되는 인간 존엄의 상실, 노동의 현장에서 들려 온 신음의 숨결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생활과 감정 속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헛되고 인생이 헛되고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절망을 합니다. 그 결과로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초조, 피곤과 허무, 좌절과 절망 속에 긴 한숨을 내 쉽니다.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만약, 이처럼 이 땅의 인생이 태어나 불안과 피곤과 좌절에만 머물다가 병들고 죽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 인생은 너무나 허무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生老病死가 우리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그렇게만 고달프고 불쌍한 실존들이 아님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그렇게 허무한 존재들로 만들지 아니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분명한 생존의 의미가 내 개인의 능력과 지혜로는 깨닫기가 불가능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죽음으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난 석가나, 공자나, 마호멭을 통하여도 이 영원한 삶의 진리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 땅의 죽음을 정복하고 진정한 생의 의미를 부여한 참 길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누구를 이 아침 찾아야 합니까 피곤과 허무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 자신을 희망과 용기 속으로, 모순과 죄악으로 정복당한 자신을 살아 움직이는 참 생명으로, 해방시켜 줄 분이 어디 있으며 그 분이 누구입니까
이 새벽 그 위대한 진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을 우선적으로 만나 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우리 개인 개인에게 들려주시는지를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발견하고, 새 세계의 한 인간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참 희망과 용기와 기쁨 속에 오늘을 도전해 가는 생명력을 지닌 변화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패배자로만 보였던 그분)
이 놀랍고 신기한 세계를 위하여 우리는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이 대답의 주인공은 이 천년 전 역사의 분명한 사실 속에 이미 나타나셨고 지금도 우리 곁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분이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외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왕 중의 왕이요 모든 머리 중에 머리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요즈음 많은 성도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의미 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습관적이요 직업적인 입술의 장식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엄숙한 부활의 새벽, 한 번 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의 생애와 그 깊은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는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가난과 질병과 억눌림 속에 신음하면서 생의 의미를 포기해 가는 민중들의 곁을 찾아 오셨습니다. 힘없이 방황하는 인생들과 동고동락을 했습니다. 이 하늘 아래서 산 속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집이 있건만 우리 주님은 머리 둘 곳마저 없었던 무일푼의 인생을 지내셨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시간은 승리감만을 안겨 주는 부활의 아침입니다. 괴로운 것, 죽음의 세력권에 들어 있는 것일랑 모두 잊은 채 광명한 아침 햇살 속에 승리의 이야기만을 듣고 싶은 우리의 심정입니다. 그러나 패배를 되새겨 보지 않은 승리의 도취는 실감이 나지 아니합니다. 우리 주님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부활의 사건이란 깊은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의 손자국에 의하여 잔인한 고초와 멸시 속에 죽음을 감수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어느 종교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이 아픈 수난은, 가증한 한 제자의 입맞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갖은 조롱과 모욕,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 위에 그 귀하신 손과 발에 못을 박은 망치 소리가 갈보리 산정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어디든지 목숨이라도 함께 하면서 따르겠다던 제자들의 흔적도 보이지 않은 고독한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가시에 상하신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갖은 조롱과 수취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시던 주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로마 군병의 예리한 창끝이 옆구리를 뚫고, 심장까지 뚫어서 물과 피를 흐르는 것으로 족히 증명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33년의 지상에서 베풀어졌던 구속의 생애는 끝이 났습니다. 그 시체는 돌무덤에 안치되었던 거대한 바위 덩이로 문은 닫혀졌습니다. 그리고 무장된 군병이 그 무덤을 지켰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사신 그 분)
그토록 힘없이 죽어 간 분위기 속에서는, 그 예수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아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예수를 독립의 기수로, 또는 왕으로 이해하고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과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제자들마저 예수 그리스도의 처참한 죽음이 자신들에게도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슬픔과 공포 속에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으로부터 살리신 일을,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장례 행렬을 멈추고 그 아들을 관속으로부터 살려내신 일을, 무덤 속에 장사 지낸지 나흘째 된 나사로의 썩은 시체를 살리셨던 우리 주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은지 사흘 만에 인간의 손에 의한 자신의 죽음을 정복하고 스스로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사실을 아무도 믿거나 기다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만의 하나라도 그 죽음 그대로 끝났더라면 다른 일반적인 종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이 땅에 나서 훌륭한 교훈을 남기고 죽어, 오늘도 무덤이 그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실을 이 아침 가져왔습니다. 그는 그 무거운 바위 덩어리의 무덤의 문을 박차고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정복하고 다시 사셨습니다. 아무리 큰 바위 덩이도 이 위대한 역사적 순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의 무력이 우리 주님의 다시 사시는 현장을 막거나 조작하기에는 너무나 불가능했습니다. 더 이상 죽은 예수를 그 무덤과 로마의 군병들이 지키지 못했습니다.
공포의 거리를 벗어나 그 무덤 속에 있는 예수를 찾아 나선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은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기 있지 아니하고 말씀하신 대로 살아 나셨다. 산 자를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일찍이 인류의 역사에 없던 새롭고 유일한 역사의 창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셨습니다. 전 인류가 제 아무리 애써도 아직도 이룩하지 못한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영원한 삶의 길을 이 아침 몸소 보이셨습니다.
(나를 찾아 주시는 부활의 주님)
이로써 승리의 개가를 부르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악마의 세력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인 승리 그것은 지극히 요란하고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참 승리는 영원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참기 어려운 희생과 아픔 위에서 이룩됩니다. 참 승리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 위대한 승리와 참 진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무덤으로부터 없어진 예수를 애타게 울며 찾아 헤매던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무덤을 가 보았으나 보지 못하였다고 슬픈 빛으로 투덜대는 엠마오 도상의 두 사람에게 동행해 주시면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일일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믿어도 나만은 그 손에 못자국과 그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 보기까지는 믿지 않겠다는 제자 도마에게 나타나
“네 손가락을 이리 내 밀어 내 손을 만지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다.”
고 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예수를 여러분은 보지 못하고도 믿습니까
영접하셨습니까 더 행복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아침도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를 찾아 주시고 만나 뵙기 원하는 무리들에게 모두 만나도록 해 주십니다.
(감격의 노래와 결단)
이러한 부활의 주님 앞에 어찌 우리의 입술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외쳐야 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만왕의 왕이 다시 살아 나셨다.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 나셨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기리 다스리신다.
사셨다 사셨다. 예수 다시 사셨다
이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났던 사람들, 보지 못했을 지라도 영접하고 믿던 사람들은 새 인생의 방향을 찾아 나섰습니다.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정하던 베드로는,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뵌 이후로는, 그 비굴한 인간이 자기의 생명 전체를 주님께 바쳐 살다가, 순교의 죽음을 당할 때 그는, 주님처럼 죽는 것 마저 감히 송구스러워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율법이 자신의 생의 전부라고 알고 크리스천들을 죽이던 바울은 이 부활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은 이후로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독침은 죄고, 죄의 힘은 율법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주께 감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새 생명의 원천을 찾았을 때)
이토록 죄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계십니까 영접하셨습니까 만나 뵈셨습니까 경험하셨습니까
이제는 행동 속으로 움직여 나가야 합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죽어 무덤에 머문 예수님을 안고 있는 자만이 실망과 허무와 피곤과 공포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그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내 온 정신을 쏟고, 그 말씀에 부딪쳐야 합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에 부딪치는 자는 무덤 속의 한 시체처럼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 느낌 없이, 더 나은, 변화 없이 썩어져 갈 수는 없습니다.
“막달라야” 하고 개인적으로 부리시는 음성이, “너 아무개야”하고 부르시고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으면 마음에 뜨거운 변화가 옵니다.
그때 우리는 권력 앞에 비굴해 질 수 없습니다. 국민이 애타게 부르짖는 사연들을 외면하는 권력 앞에 침묵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그늘진 사연 앞에서도 비굴해질 수 없습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인권을 무참히 짓밟은 무리들을 옹호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 자신의 부와 지위를 누리는 오늘의 가롯 유다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부정과 부패의 거리를 함께 거닐면서 그들과 더불어 춤을 출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돈이라는 현대의 우상 앞에 아부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지극하게 모실 수 없습니다. 나를 달콤하게 유혹하는 죄 앞에서 쓰러질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의 간악한 죄악과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부활합시다)
수십 년의 신앙생활을 해 왔으나 아직도 우울한 생활만 계속되십니까 수십 번 성경을 반복하여 읽었지만 아직도 생명력 있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보십시오. 그럴 때 엠마오의 두 사람의 가슴 마냥 뜨거워집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고 그분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근심이라도 변하여 기도의 제목이 되고 어떤 한숨이라도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오늘의 어떠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하고 담대한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 무덤 등의 단어들은 모두 패배의 상징들입니다. 그러나 부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은 영원한 승리의 표이며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길입니다. 그러기에 외칩니다.
우리도 부활합시다.
나를 점유하고 있는 죄악과 죽음으로부터 부활합시다.
절망과 피곤과 허무한 것들로부터 부활합시다.
부정과 부패와 낭비와 공포와 잔인성의 돌무덤으로부터 부활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지상 명령처럼,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 되고 썩어져 부패한 것을 막는 소금이 되어서 힘찬 행진을 합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한 손에 밝은 빛을 쥐고 한 손에 방부제인 소금을 쥐고 일어서야 합니다. 참 크리스천으로서의 승리의 정복을, 부활의 행군을, 내 자신 속에서, 내 가정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민족 속에서, 더 나아가 전 세계 속에서 쉼 없이 계속합시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아침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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