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에 관한 지혜 (고전1:1-31)
본문
예수님은 받아드리지만 교회는 거부한다! 196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인기었던 이 구호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주후 56년 경의 고린도 교회에서도 일찌기 발견됐었다. 뿐만아니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교회 내에서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교회밖의 불신자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고린도 교회는 타락한 교회였다. 어떤 교인은 음행죄를 저질렀고 또 어떤사람들은 술에 취해 방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삼아 자신들의 세상적인 삶을 묵인하고 있었다. 그 뿐아니라 고린도 교회는 네 개의 상이한 그룹으로 나뉘어져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분열된 교회였다.(1:12). 이는 곧 고린도 교회가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킨 교회였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고린도에 만연된 죄악들이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고린도시는 아주 타락한 도시였으며 온갖 종류의 악행과 세상적 향락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당시의 사회에서 고린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주 저속하고 방탕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고린도인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당시 사람들은 다 알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반면 고린도 시는 많은 순회 교사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설파하고 다니던, 자부심 있는 철학의 도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회내의 몇몇 교인들이 이 철학적 접근 방식을 복음에까지 적용시키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분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는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각의 다른 학파들로 사분오열 되었다. 이러한 고린도를 자세하게 기록된 곳은 롬1:18-32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는데 1:18-32에서 어급한 죄목들이 바울이 고린도에서 직접 목격한 죄들이었다. 롬 1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 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 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 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살인,분쟁,사 기,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교회내에 세상적 지혜를 의존하고 세상적 삶의 방식을 수용하며, 교만한 자들이 있으면 곧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위해서 편지 초두부터 그리스도안에서의 그들의 소명을 상기시킨다. 1장에서는 3가지 국면의 부르심이 있다. 1-9에서는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다.
1.거룩함에로의 부르심(1:1-9) 바울은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타락 문제들을 꾸짖으려 하지만, 그 문제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대신 그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린도 교인들의 고귀하고 거룩한 신분을 상기시켜 준다. 1-9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10-31에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얻어진 우리의 신분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그에 합당한 모습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교회는 거룩하다는 특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존재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1하나님의 부르심이다.(1:1-3)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교회는 두 가지 주소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지리적 주소이며(고린도에 있는교회 등), 다른 하나는 영적 주소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교회는 성도들로 일루어지는데 성도란 하나님에 의해 ‘성별’(聖別)된 자들이다. 성도란 거룩한 삶을 산 것으로 인해 후대에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죽은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다.-바울은 살아 있는 성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특별한 기쁨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분께 쓰임받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된 신자는 모두 성도이다.
왜냐하면 모든 참된 신자들은 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따로 세워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진사가 결혼사진을 찍기 위해 출사 나갔다.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가 식장을 나와 승용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신부가 갑자기 신랑을 뿌리치고 길 건너 편에 세워둔 차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시동이 걸려 있는 그 차 안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차가 신부를 태우고 떠나버리자 뒤에 남은 신랑은 속수무책이었다. 차를 몰고 달아난 남자는 신부의 옛 남자 친구로 밝혀졌다. 신랑이 그 결혼식을 무효로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을 맹세한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남자 또는 다른 여자에게서 구별된 것이다. 상대방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모두 죄에 해당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속해 있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구별되어 있다. 또한 성도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는 교회, 즉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2)의 일부이다. 타락하고 신실치 못한 신자들은 주님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2풍족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1:4-6)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신령한 은사를 주어진다. 풍족하다(enriched)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금권가”(Plutocrat),즉 “매우 부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영적 은사가 특히 풍부했다.(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그러나 그들은 그 은사들을 신령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셨다.
3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게하기위해서(1: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15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주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성도들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요일2:28-3:3) (요일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거룩함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지해야 합니다.(1:8-9) 하나님의역사는 성도들 안에서 견고케(confirmed)된다.(6절) 또 이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안에서 성도들에게 확고해진다.(confirmed). 즉,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신다. ”견고케한다“는 말은 어떤 사실이 인준 됐음을 보증한다는 의미의 법률 용어이다.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증거가 있고 우리 앞에 선포된 말씀의 증거가 있다. 이 두가지 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지키실 것이고 끝날에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러나 이 보증이 죄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보다 이 보증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사랑과 진리와 순종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의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은 위대한 진리의 조명하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세상의 죄와 육체의 죄에 빠져들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었고,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따로 세움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삶은 그처럼 고귀한 신분과 조화되지 못했다. 고린도 교회를 교훈 삼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음 기억하면서 순간 순간을 지내시고 위기를 넘어가고 시험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2.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로의 부르심(1:10-25) 고린도 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한 후,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언급한다. 분열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항상 존재해 온 문제이며, 신약성경 기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한 논제(論題)로 취금하거나 다양한 방법들로 언급합니다. 열두 사도들조차도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더불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영광이 되리라! 그러나 성도를 그저 알기만 하고 저급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관한 삶이리라! 1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이 바로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1:10-13) 바울의 이 말은 매우 기괴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나누다”(divide)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조각으로 분할되어 이 사람들에게는 이 조각, 저 사람들에게는 저 조각이 주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저 사람에게는 아볼로를, 또 다른 사람에게 베드로를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구주도 한 분이시요. 복음도 하나뿐입니다(갈1:6-9).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이렇게 네 파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을까! 또 그들이 분쟁(논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그들은 철학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고린도 시는 교사와 철학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각처에서 모여들어 자신들이 지닌 지혜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던 곳이었습니다.
둘째로, 인간은 그 본질상 인간 지도자를 따르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도와주고, 또 이해하기 쉽고 쉽게 응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일수록 영적 능력이 풍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말씀의 멧세지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하는 사역자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그 대신 주님의 종들에게로 그 초점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에는 결코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3장에서 지적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들을 서로 비교한다거나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인간의 제자를 좇는 것은 죄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개인을 숭상하는 사교(邪敎)”적인 풍조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장 드러나 보이는 분이어야 합니다(골1:18).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은 몇 개의 핵심적인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형제”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이 한 가족 속에 속해 있음을 주지시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는데, 이 말은 신체의 각 기관이 서로 긴밀하게 직조(織造)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의학 용어입니다. 즉, 그들은 한 몸의 지체로서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확인된 한 신분(身分)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 그들이 모두 똑같은 세례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말일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바, “글로에의 집”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매우 존중할 만합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들을 자신의 짐으로 여기고 올바른 해결자인 바울을 용감히 찾아왔습니다. 그런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준것이 자신들임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음모극(陰謀劇)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행동은 문제를 호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 악화시킬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역자였으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은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해 회심한 자들이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의 동역자로(행18:24-28).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고린도전서 9장5절을 통해 흐미하게 추측해 볼 뿐입니다. 바울, 베드로, 아볼로, 이 사람덜은 각각 개성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방법 역시 각각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였습니다(3:3-8/4:6).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1:13-17) 세례는 신약 교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명심합시다.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는 옛 생활의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로 인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지 않은 것(요4:1-2)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베드로(행10:48)도 자신의 동역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직접 세례를 주기도 했으나 세례를 주는 것이 바울의 주된 사역은 아니였습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는 세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히의 사람들이 세례으 의미를 너무 확대하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잘못된 점은,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다”라고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 그래요, 그렇지만 나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지요라고 공공연히 뽑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례받은 것을 확언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교회 분열이 비롯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목사에게 어떤 물을 사용해서(대개는 요단 강에서 길어온 물) 어떤 특별한 날에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마치 그러한 것들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처럼 그들은 자랑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교회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보다는 사람을 높이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리스보는 고린도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장이었습니다(행18:8). 가이오는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롬16:23). “스데바나 집 사람”은 고린도전서 16장 15-18절에 언급된 자들 중 한 명일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세례를 준 사람들의 명단을 지니고 다닌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너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뇨”(1:18-25) 17절에서 십자가를 언급한 것은 인간의 지혜가 지닌 약점을 복음의 능력과 대조하고 있는 이 긴 단락의 도입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어떤 접근방식을 썼는가를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의 접근 방법은 세 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설명했습니다. 즉, 구주도 한 분이시며 그 몸인 교회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둘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세례받은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세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로 들어가는 영적 세례를 받았다는 증표입니다(12:13)
셋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매우 끔찍한 죽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치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또 예의 와 법도가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형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식탁에 앉아서 개스실이나 전기 의자의 잔인성등을 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용어는 지혜입ㅈ니다. 지혜란 단어는 이 단락에서 여덟번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멧세지에 감히 인간의 지혜가 혼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지혜를 주제로 하고 있는 본 단락(1:17-2:16)에서 바울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지혜를 여러 번 대조시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로 계시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에 계시된 그 지혜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세 가지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첫째, 십자가를 그릇 이해함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기적적인 표적을 중요시했는데, 십자가는 너무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출애굽 때부터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적적인 사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유대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달라고 예수께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에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강력한 정복자로서 모든 대적들을 멸하실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은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했던 질문은 유대인들이 이 소망을 얼마나 강하게 갖고 있었는는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 그와 동시에, 유대의 서기관들은 메시야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구약성경에서 간파해 내었습니다.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이 그 대표적인 것들로 유댕니들의 메시야관과는 아주 상이한 메시야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대 학자들은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 두 가지의 메시야의 모습을 조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께서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고통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눅24:13-35참조). 또한 장차의 메시야 왕국이 교회 시대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영광되고 전능하신 메시야를 갈망했기 때문에 비천한 십자가를 보고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해 빠진 범죄자의 하나로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나사렛 출신의 할일 없는 목수를 메시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십자가는 연햑함의 표상이 아니라 놀라운 능력의 도구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연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1:25)
둘째. 십자가를 비웃움 이것은 헬라인들이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헬라 철학자들의 심오한 저서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에서 아무런 지혜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인간적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았다면, 그들은 위대한 구원 계획이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나타나 있음을 분별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증거자로 언급하니, 그들은 곧 “지혜있는자”, “선비” 및 “변사” 등입니다.(20절). 바울은 이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인간의 지혜를 언구함으로 해서 각각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바울의 이 질문에 그들은 아니요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십자가를 비웃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멸망해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18절0. 바울은 19절에서 이사야서 29장 14절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의 큰 글씨로 “점!” 이라는 점수를 주셨음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에서, 헬라와 로마의 역사는 한갓 “알지 못하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과감히 단언했습니다.(행17:30).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헬라 철하자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 사상가들에게도 어떤 업적이 있음을 바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을 체험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셋째, 십자가의 능력과 지헤를 믿음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의 내용을 절대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 그는 동일한 내용의 멧세지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1:21)이라는 말은 전도 행위가 미련하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NIV 성경은 이 말을 “선포되는 것의 미련한 것을 통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은(살후2:13-14참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심을 깨닫습니다. 즉, 말구유의 예수님, 성전의 예수님, 또는 장터의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인간 지혜의 미련함과 인간 능력의 연약함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부름받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는 영적 연합을 위한 얼마나 놀라운 토대입니까!
3.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부르심(1:26-31)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과장되게 자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4:6,18-19/5: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는 인간의 자랑이 기어들 만한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 사회적 지위, 어떤 일에 대한 업적, 유산, 재산 등에는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신약성경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신자들이 몇몇 등장하기도 하지만 신약성경에 언급된 성도들이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형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으 회심자들을 향해 한 말은 결코 아첨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6:9-11) 바울은 그들의 과거 상태를 상기시킵니다(1:26)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은 지혜도 없었고 능하지도 못했으며 문벌도 좋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람 됨됨이 때문에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잘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로 잔악했던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배해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울 역시 자기의 의를 포기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은ㄹ 바울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죄를 다 저지른 밑바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손을 내밀어서 구원하시지 못할 정도로 악한 죄인이란 없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헌신적인 목사인 머리 맥체인(R. Murray McCheyne)이 어느날 한 부인에게 복음 전도용 책자를 하나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매우 화를 내면서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부인을 향해 맥체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부인, 심판의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이 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이유를 상기시킵니다(1:27-29)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세상에 당신의 은혜를 나타내시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기 위해 세상의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 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가문, 사회적 지위, 재산, 권력 및 명예를 흠모합니다. 그러나 이 중에 어느 것도 영생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그 멧세지는 권력과 능력을 자랑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철저히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지혜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시는지알지 못합니다. 또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흉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들며, 하나님의 “약한 것”이 세상의 강한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변화시킵니다. 교회 역사는 이러한 예(例)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대부분,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법률가와 심리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불량 청소년들이 착실한 학생으로, 그리고 유능한 시민으로 변해가는 것을 봅니다. 이혼 법정까지 부부가 다시 원만한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 가정을 복구시키는 것, 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철학이나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세상의 체계에 복음의 미련한 것과 연약한 것을 계시하실까요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바울의 이 설명이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영광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진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사람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21). 만일 우리가 사람을 자랑한다면(그것이 비록 베드로, 바울, 아볼로 같은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회 내에 분열이 생기는 것을 조장하는 요인은 바로 교만이라는 이 죄된 행동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했던 모든 것을 상기킵니다(1:30-3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으너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데, 왜 서로 경쟁하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까 주께서 모든 일을 이미 이루어 놓지 않으셨습니까 “(고전1: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 (이 구절은 렘9:24을 인용한 것이며 고후 10:17에서 다시 인용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축복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혜이시요(골2:3). 우리의 의로움이시며(고후5:21). 우리의 거룩함이시고(요17:19). 우리의 구속함이십니다(롬3:24). 사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하게 된 의로움, 성화, 그리고 구속함을 수단으로 하여 당신의 지혜를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각각의 신학적ㄹ 용어들은 성도들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의롭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성화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택정함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힘입어 완전한 구속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가지 신학적 용어는 구원을 시간적 관점에서 설명해 줍니다. 과거에 우리는 이미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습니다(의로움). 현재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있습니다(성화). 미래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구원받을 것입니다(구속). 이 모든 은총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소유한 것 중에서 여러분들이 소유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드로가 소유한 것이 여러분들이 소유보다 더 많습니까(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하신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마태복음16장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 것) 우리는 주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본 장(章)을 통해서 고린도인들이 저지른 잘못된 교회 내에 문제가 생기게 만든 오류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적 기준을 좇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주님과의 놀라운 영적 교제에로, 또 피차간의 사랑의 교제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시실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알하기 보다는 그들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했고 인간을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는 타락한 교회요, 분열된 교회요, 망신거리가 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자신의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우리도 거룩해지라는 부름을 받았고, 교제에로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러므로 저 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 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 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 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살인,분쟁,사 기,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교회내에 세상적 지혜를 의존하고 세상적 삶의 방식을 수용하며, 교만한 자들이 있으면 곧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위해서 편지 초두부터 그리스도안에서의 그들의 소명을 상기시킨다. 1장에서는 3가지 국면의 부르심이 있다. 1-9에서는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을 강조하고 있다.
1.거룩함에로의 부르심(1:1-9) 바울은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타락 문제들을 꾸짖으려 하지만, 그 문제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대신 그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고린도 교인들의 고귀하고 거룩한 신분을 상기시켜 준다. 1-9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교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10-31에서는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교회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얻어진 우리의 신분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그에 합당한 모습을 나타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교회는 거룩하다는 특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존재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1하나님의 부르심이다.(1:1-3)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든 교회는 두 가지 주소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지리적 주소이며(고린도에 있는교회 등), 다른 하나는 영적 주소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교회는 성도들로 일루어지는데 성도란 하나님에 의해 ‘성별’(聖別)된 자들이다. 성도란 거룩한 삶을 산 것으로 인해 후대에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죽은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다.-바울은 살아 있는 성도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특별한 기쁨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분께 쓰임받기 위해 구별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된 신자는 모두 성도이다.
왜냐하면 모든 참된 신자들은 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따로 세워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진사가 결혼사진을 찍기 위해 출사 나갔다.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가 식장을 나와 승용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신부가 갑자기 신랑을 뿌리치고 길 건너 편에 세워둔 차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시동이 걸려 있는 그 차 안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 차가 신부를 태우고 떠나버리자 뒤에 남은 신랑은 속수무책이었다. 차를 몰고 달아난 남자는 신부의 옛 남자 친구로 밝혀졌다. 신랑이 그 결혼식을 무효로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을 맹세한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남자 또는 다른 여자에게서 구별된 것이다. 상대방 이외의 어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모두 죄에 해당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속해 있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구별되어 있다. 또한 성도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는 교회, 즉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2)의 일부이다. 타락하고 신실치 못한 신자들은 주님에게 죄를 짓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2풍족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1:4-6)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신령한 은사를 주어진다. 풍족하다(enriched)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금권가”(Plutocrat),즉 “매우 부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영적 은사가 특히 풍부했다.(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그러나 그들은 그 은사들을 신령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은혜를 주셨다.
3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게하기위해서(1: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15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주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성도들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요일2:28-3:3) (요일2: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2: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거룩함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지해야 합니다.(1:8-9) 하나님의역사는 성도들 안에서 견고케(confirmed)된다.(6절) 또 이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안에서 성도들에게 확고해진다.(confirmed). 즉,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신다. ”견고케한다“는 말은 어떤 사실이 인준 됐음을 보증한다는 의미의 법률 용어이다.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증거가 있고 우리 앞에 선포된 말씀의 증거가 있다. 이 두가지 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지키실 것이고 끝날에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러나 이 보증이 죄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보다 이 보증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사랑과 진리와 순종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의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은 위대한 진리의 조명하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세상의 죄와 육체의 죄에 빠져들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었고,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따로 세움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삶은 그처럼 고귀한 신분과 조화되지 못했다. 고린도 교회를 교훈 삼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셨음 기억하면서 순간 순간을 지내시고 위기를 넘어가고 시험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2.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로의 부르심(1:10-25) 고린도 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한 후,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언급한다. 분열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항상 존재해 온 문제이며, 신약성경 기자들은 거의 모두가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한 논제(論題)로 취금하거나 다양한 방법들로 언급합니다. 열두 사도들조차도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과 더불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분명 영광이 되리라! 그러나 성도를 그저 알기만 하고 저급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신앙과 무관한 삶이리라! 1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이 바로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1:10-13) 바울의 이 말은 매우 기괴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나누다”(divide)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조각으로 분할되어 이 사람들에게는 이 조각, 저 사람들에게는 저 조각이 주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저 사람에게는 아볼로를, 또 다른 사람에게 베드로를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구주도 한 분이시요. 복음도 하나뿐입니다(갈1:6-9).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이렇게 네 파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을까! 또 그들이 분쟁(논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그들은 철학적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고린도 시는 교사와 철학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각처에서 모여들어 자신들이 지닌 지혜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던 곳이었습니다.
둘째로, 인간은 그 본질상 인간 지도자를 따르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도와주고, 또 이해하기 쉽고 쉽게 응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일수록 영적 능력이 풍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말씀의 멧세지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하는 사역자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그 대신 주님의 종들에게로 그 초점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에는 결코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3장에서 지적합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들을 서로 비교한다거나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인간의 제자를 좇는 것은 죄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개인을 숭상하는 사교(邪敎)”적인 풍조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가장 드러나 보이는 분이어야 합니다(골1:18).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은 몇 개의 핵심적인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형제”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이 한 가족 속에 속해 있음을 주지시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하는데, 이 말은 신체의 각 기관이 서로 긴밀하게 직조(織造)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의학 용어입니다. 즉, 그들은 한 몸의 지체로서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확인된 한 신분(身分)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 그들이 모두 똑같은 세례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말일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바, “글로에의 집”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매우 존중할 만합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들을 자신의 짐으로 여기고 올바른 해결자인 바울을 용감히 찾아왔습니다. 그런 소식을 바울에게 전해 준것이 자신들임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음모극(陰謀劇)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행동은 문제를 호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 악화시킬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역자였으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대부분은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인해 회심한 자들이었습니다. 아볼로는 바울의 동역자로(행18:24-28).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고린도전서 9장5절을 통해 흐미하게 추측해 볼 뿐입니다. 바울, 베드로, 아볼로, 이 사람덜은 각각 개성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방법 역시 각각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였습니다(3:3-8/4:6).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1:13-17) 세례는 신약 교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을 명심합시다. 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그는 옛 생활의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로 인해 가족과 친구들에게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시지 않은 것(요4:1-2)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베드로(행10:48)도 자신의 동역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기까지 직접 세례를 주기도 했으나 세례를 주는 것이 바울의 주된 사역은 아니였습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축소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도는 세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히의 사람들이 세례으 의미를 너무 확대하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잘못된 점은,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았다”라고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 그래요, 그렇지만 나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지요라고 공공연히 뽑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례받은 것을 확언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교회 분열이 비롯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목사에게 어떤 물을 사용해서(대개는 요단 강에서 길어온 물) 어떤 특별한 날에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마치 그러한 것들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처럼 그들은 자랑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교회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보다는 사람을 높이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리스보는 고린도에 있던 한 회당의 회당장이었습니다(행18:8). 가이오는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같이 있었던 것입니다(롬16:23). “스데바나 집 사람”은 고린도전서 16장 15-18절에 언급된 자들 중 한 명일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세례를 준 사람들의 명단을 지니고 다닌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너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뇨”(1:18-25) 17절에서 십자가를 언급한 것은 인간의 지혜가 지닌 약점을 복음의 능력과 대조하고 있는 이 긴 단락의 도입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이 어떤 접근방식을 썼는가를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의 접근 방법은 세 가지로 구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설명했습니다. 즉, 구주도 한 분이시며 그 몸인 교회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둘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세례받은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세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로 들어가는 영적 세례를 받았다는 증표입니다(12:13)
셋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십자가형은 매우 끔찍한 죽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치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또 예의 와 법도가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형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식탁에 앉아서 개스실이나 전기 의자의 잔인성등을 논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용어는 지혜입ㅈ니다. 지혜란 단어는 이 단락에서 여덟번 쓰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멧세지에 감히 인간의 지혜가 혼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지혜를 주제로 하고 있는 본 단락(1:17-2:16)에서 바울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지혜를 여러 번 대조시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주로 계시되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십자가에 계시된 그 지혜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세 가지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첫째, 십자가를 그릇 이해함 유대인들의 태도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기적적인 표적을 중요시했는데, 십자가는 너무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출애굽 때부터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적적인 사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유대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달라고 예수께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에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강력한 정복자로서 모든 대적들을 멸하실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은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했던 질문은 유대인들이 이 소망을 얼마나 강하게 갖고 있었는는지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행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 그와 동시에, 유대의 서기관들은 메시야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구약성경에서 간파해 내었습니다.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이 그 대표적인 것들로 유댕니들의 메시야관과는 아주 상이한 메시야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대 학자들은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 두 가지의 메시야의 모습을 조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께서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고통을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눅24:13-35참조). 또한 장차의 메시야 왕국이 교회 시대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영광되고 전능하신 메시야를 갈망했기 때문에 비천한 십자가를 보고는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해 빠진 범죄자의 하나로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나사렛 출신의 할일 없는 목수를 메시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 십자가는 연햑함의 표상이 아니라 놀라운 능력의 도구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연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1:25)
둘째. 십자가를 비웃움 이것은 헬라인들이 보여준 태도였습니다.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강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헬라 철학자들의 심오한 저서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에서 아무런 지혜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인간적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았다면, 그들은 위대한 구원 계획이라는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나타나 있음을 분별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증거자로 언급하니, 그들은 곧 “지혜있는자”, “선비” 및 “변사” 등입니다.(20절). 바울은 이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인간의 지혜를 언구함으로 해서 각각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가” 바울의 이 질문에 그들은 아니요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십자가를 비웃고 미련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멸망해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합니다(18절0. 바울은 19절에서 이사야서 29장 14절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의 큰 글씨로 “점!” 이라는 점수를 주셨음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에서, 헬라와 로마의 역사는 한갓 “알지 못하던 시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과감히 단언했습니다.(행17:30).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헬라 철하자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 사상가들에게도 어떤 업적이 있음을 바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을 체험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셋째, 십자가의 능력과 지헤를 믿음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메세지의 내용을 절대 변경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 그는 동일한 내용의 멧세지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1:21)이라는 말은 전도 행위가 미련하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NIV 성경은 이 말을 “선포되는 것의 미련한 것을 통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은(살후2:13-14참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심을 깨닫습니다. 즉, 말구유의 예수님, 성전의 예수님, 또는 장터의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인간 지혜의 미련함과 인간 능력의 연약함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에로 부름받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는 영적 연합을 위한 얼마나 놀라운 토대입니까!
3.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부르심(1:26-31)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과장되게 자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4:6,18-19/5: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는 인간의 자랑이 기어들 만한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 사회적 지위, 어떤 일에 대한 업적, 유산, 재산 등에는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신약성경에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신자들이 몇몇 등장하기도 하지만 신약성경에 언급된 성도들이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형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으 회심자들을 향해 한 말은 결코 아첨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6:9-11) 바울은 그들의 과거 상태를 상기시킵니다(1:26)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은 지혜도 없었고 능하지도 못했으며 문벌도 좋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람 됨됨이 때문에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잘것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로 잔악했던 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배해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울 역시 자기의 의를 포기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인들은ㄹ 바울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죄를 다 저지른 밑바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손을 내밀어서 구원하시지 못할 정도로 악한 죄인이란 없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헌신적인 목사인 머리 맥체인(R. Murray McCheyne)이 어느날 한 부인에게 복음 전도용 책자를 하나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매우 화를 내면서 “당신은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부인을 향해 맥체인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부인, 심판의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이 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이유를 상기시킵니다(1:27-29)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세상에 당신의 은혜를 나타내시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기 위해 세상의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 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가문, 사회적 지위, 재산, 권력 및 명예를 흠모합니다. 그러나 이 중에 어느 것도 영생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그 멧세지는 권력과 능력을 자랑하는 이 세상 사람들을 철저히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지혜자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시는지알지 못합니다. 또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흉내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이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들며, 하나님의 “약한 것”이 세상의 강한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변화시킵니다. 교회 역사는 이러한 예(例)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대부분,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법률가와 심리학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불량 청소년들이 착실한 학생으로, 그리고 유능한 시민으로 변해가는 것을 봅니다. 이혼 법정까지 부부가 다시 원만한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 가정을 복구시키는 것, 등등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철학이나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 세상의 체계에 복음의 미련한 것과 연약한 것을 계시하실까요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바울의 이 설명이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영광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진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사람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21). 만일 우리가 사람을 자랑한다면(그것이 비록 베드로, 바울, 아볼로 같은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도적질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교회 내에 분열이 생기는 것을 조장하는 요인은 바로 교만이라는 이 죄된 행동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했던 모든 것을 상기킵니다(1:30-3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으너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데, 왜 서로 경쟁하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까 주께서 모든 일을 이미 이루어 놓지 않으셨습니까 “(고전1: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 (이 구절은 렘9:24을 인용한 것이며 고후 10:17에서 다시 인용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축복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혜이시요(골2:3). 우리의 의로움이시며(고후5:21). 우리의 거룩함이시고(요17:19). 우리의 구속함이십니다(롬3:24). 사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하게 된 의로움, 성화, 그리고 구속함을 수단으로 하여 당신의 지혜를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각각의 신학적ㄹ 용어들은 성도들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의롭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성화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도록 택정함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힘입어 완전한 구속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가지 신학적 용어는 구원을 시간적 관점에서 설명해 줍니다. 과거에 우리는 이미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았습니다(의로움). 현재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있습니다(성화). 미래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구원받을 것입니다(구속). 이 모든 은총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소유한 것 중에서 여러분들이 소유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드로가 소유한 것이 여러분들이 소유보다 더 많습니까(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부여하신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마태복음16장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신 것) 우리는 주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영적 지도자들을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본 장(章)을 통해서 고린도인들이 저지른 잘못된 교회 내에 문제가 생기게 만든 오류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적 기준을 좇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주님과의 놀라운 영적 교제에로, 또 피차간의 사랑의 교제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시실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알하기 보다는 그들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했고 인간을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는 타락한 교회요, 분열된 교회요, 망신거리가 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삶과 우리 자신의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우리도 거룩해지라는 부름을 받았고, 교제에로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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