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혜 (고전1:1-31)
본문
1. 고린도는 향락과 범죄로 유명한 허영시였습니다. 고린도 지협 에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위에는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서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1 천명의 여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거룩한 매춘부들이었습니다. 밤이 되 면 아크로폴리스의 언덕을 내려와서 고린도 거리에서 몸을 팔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린도화 한다."(고린티아제스타이, korinthiazesthai.)는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고린도 여자"는 창 녀라는 뜻으로 쓰여졌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인"이라면 무모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진 부자집 탕아를 두고 한 말이 되어 버 렸습니다. 고린도는 부요와 사치, 술취함과 방탕이란 말 뿐 아니라 불결이란 말과도 같은 뜻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시에는 희랍 제일의 큰 원형 경기장의 시설이 있어 자랑 이었습니다. 도시 곳곳에는 모든 향락 시설과 잡다한 군중의 구미 에 맞는 여러 가지의 극장, 사우나, 술집, 상점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요는 고린도 시는 오로지 향락과 이윤을 위하여 문이 열린 자유시 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험을 좋아하는 헬라인, 유산 계급의 로마인,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베니게인이라는 이종(異種), 잡종의 인구, 거기에 유 대인, 군인 출신, 철학자, 상인, 선원, 자유인, 노예, 소매상인, 행상 인, 모든 악독의 주동자 등의 대집단"으로 법석대는 고린도는 "귀 족도 없고, 전통도 없고, 확실히 자리잡힌 시민도 없는" 식민지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의 배경, 부요와 사치, 주색과 음란과 악덕, 그리고 말할 수 없이 파렴치한 생활들을 반영하여 고린도전서 6:9-10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 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6:10) 도적 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 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 교회 중에 이와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 은 어떤가 1996년 10월 23일자 경향 신문 칼럼은 그 음란과 타락 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매춘과 불륜의 천국이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만큼 매춘 과 불륜의 기회가 많고 장소 제공이 잘 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매춘 시장에 대한 한 통계에 따르면 업소는 40만 곳, 외형 신고액은 3조 2천 3백억원, 무허가 업소를 포함한 실제 연간 매출액은 43조원, 접대부 수는 1백 20만-1백 50만명에 이른다. 작년 우리 기업들의 접대비는 1조 6천억이었는데 이 돈의 가장 큰 몫은 룸살롱. 요정. 호텔 등에서 소비된다. 정중한 접대에 매춘 이 포함된다는 건 업계의 상식이다. 접대비는 세무서도 인정하고 있는 당당한 비용이므로 우리는 국가가 매춘을 실질적으로 장려하는 희한한 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매춘의 형태도 다양화되고 있다. 기존의 매춘 여성들과는 달리 주로 미성년자, 주부, 직장 여성 등 다양한 연령과 직업의 여성들이 아르바이트나 쾌락을 위해 이른 바 '보도 사무실'을 통해 매춘에 가담하고 있다. 최근 적발된 사례 를 본다면 그런 신종 매춘은 꽤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 하다. 술집에서 일하는 접대부의 연령도 하향화되고 있다. 이른바 '영 계'라는 10대 소녀를 두고 장사하는 곳이 많다. 최근엔 아예 여고 생들끼리 모여 술집을 차린 사례도 있었거니와 초등학교 학생들을 고용한 술집마저 등장했다. 매춘과 불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러브 호텔'은 어떠한가 전 국 방방곡곡에 길만 뚫렸다 하면 가장 먼저 들어서는게 러브 호텔 이다. 서울 근교에만도 러브 호텔의 수는
2,600여 개에 이른다. 시 내 여관들도 '낮 손님'장사로 재미를 보는 러브 호텔로 변신하고 있다. 카바레는 어떤가 미혼 남녀 또는 부부가 카바레를 찾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젠 '무도 교실'이나 '노인 교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카바레 영업을 하는 업소도 부지기수로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매춘과 불륜에 미쳐 있는 나라다." 같은 날자 조선 일보 칼럼은 이 나라의 사치와 허영의 단면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건 TV, 그중에서도 드라마의 영향때문이라고 국내의 한 언론학자가 갈파한 일이 있다. 실제로 선진국 어디를 가봐도 방 송출연자들의 옷차림이 우리처럼 고급스럽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탤런트가 입고 나온 옷이나 머리모양, 심지어 액세서리까지 불티나게 팔리는 기현상을 빚고 있다. .
첫째, 국제적인 환경변화에 대비해 보자. 세계는 지금 20세기를 마감하며 다가올 새로운 천년에 대한 비전과 설계에 한창인데 우리는 한강에서 뱃놀이 하듯 축축 늘어지는 연속극으로 국민들의 방향 감각을 무디게 하고 있다.
둘째, 국내 상황은 어떤가. 세계에서 유 일하게 남북이 분단돼 있는데다 최근에는 긴장감까지 감도는 현실 일 뿐 아니라 경제는 내년까지도 어둡다는 전망이다.
그런데 TV를 보면 가무가 넘쳐나고 사랑타령에 흥청망청이다. 가정이나 개인에 게 미치는 영향은 접어두고라도 우리 TV드라마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고, 국가와 국민에게 생산적이 아니라 소모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최근의 한 조사를 보면, 한주간에 총 34개 84편의 드 라마가
3,965분, 66시간 이상을 4개 공중파 채널이 쏟아내고 있다. 자그마치 전체 방송시간의 15.3%를 한 장르로 채우는 '드라마 왕 국'이다. . 드라마를 내더라도 우리 시대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 내야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과 삶의 활력소를 주어야 한다. 올해 미국의 에미 상을 받은 드라마 'ER(Emergency Room)'은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료인들의 헌신적인 열정을 사실감있게 그리고 있고, '프렌드'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는 인간형을 스스로 만들어 내며 21세 기의 중심인물로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드라마에 비해 메시지 가 강하면서도 생산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와 도시는 물론 시골까지도 방대한 양의 지식이 축적되어 있고 성적 타락, 술, 담배, 마약 등 향락 추 구의 분위기가 극에 달아 당시 고린도 시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본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 사 분오열(四分五裂)되는 현금(現今) 교회의 분쟁과 분열의 문제, 성도 의 결혼, 성생활, 교회 지체로서의 임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절제, 은사의 바른 활용 등 실질적이면서도 다양한 삶의 문제, 이 시대에 안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그리고 정신적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바 른 진리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먼저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자신의 사도권을 밝 히고 있습니다.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 을 입은 바울은"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극구 변호한 것은 자 신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첫째로는, 바울의 빈약한 외 모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과거 행적으로 인해 일부 교인들이 그의 사도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자신의 소명의 진실성을 증거하고,
셋째로는, 그가 쓴 서신들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를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14:36,37). 결국 사도로서 권 위가 도전받거나 무시될 경우 복음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1:17) 바울은 스스로 사도권을 변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집필할 무 렵 그는 세 가지 소식을 입수하게 됩니다(11절).
첫째는 글레오의 문중으로 교회 내부의 분열과 바울 사역에 대 한 오해(1-4장) 등이 생겼다고 하는 전언인데, 내용인즉 교회가 선 호하는 지도자의 교훈이나 지혜를 서로 자랑하여 여러 소 그룹이 생겨나므로 사도 바울을 긴장시켰습니다.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 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1: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 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같은 분열에 대한 글레오의 소식에 대한 바울의 회답은 고전 1:10에서 4:21에 나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입수한 소식은 교회가 대표로 보낸 세 사람 스데바나 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통하여 전달된 편지로 교회 내에 근친상 간(고전 5:1,2)과 회중간에 벌어진 법정고소이고(고전 6:1) 성적 부 패였습니다(고전 6:6:12,13). 이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회답은 고린 도 전서 5장 1절에서 6장 20절에 나옵니다. 세 번째 입수된 정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빚은 혼란입니다. 여 러 가지 문제 중에는 혼인과 미혼상태(7:25-40), 우상에 바 친 식물(8:1-11:1), 예배에 관련된 것으로 공공 기도시 여자가 머리 에 수건을 쓰는 일, 무질서한 만찬, 성령님의 은사 활용 등 예배의 무 질서한 행위(11:2-14:40), 그리스도의 부활과 육체의 부활에 대한 그 릇된 이해(15:1-58), 그리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성도 를 위한 헌금(16:1-4)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 변은 장장 긴 문장으로 고린도전서 7장 1절에서 16장 12절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간곡한 편지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계속적으로 여러 문제로 혼미에 빠지자 바울은 갑자기 자기가 직접 방문할 생각을 합니다. 바울이 당도하자 그 교회는 사도 바울의 예상하지 못한 방 문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달받은 모든 소 식이 사실임을 확인합니다. 동시에 바울이 고린도전서로 당부한 목회지침이 이행되지 않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바울 이 일러준대로 목회치리를 이행하여 잘못을 교정하라고 강력히 경 고한 후에(고후 13:2) 그곳을 떠납니다. 그가 떠난 후 교회 중 교만 한 자들이 회중을 설득하여 바울이 떠나간 것은 그가 약하기 때문 이며(고후 10:1,2) 바울의 권면은 무시해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건의 귀추로 판단하여 바울은 자기의 2차 방문이 고통스러 운 것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고후2: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 로 결단하였노니." 오래지 않아 디모데가 당도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냉대하였 습니다. 그 교회는 바울의 책망을 원한으로 생각하는 자가 생겨 자 기들의 편견을 절제없이 그대로 피력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은 바울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에 돌아와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보 고하니 바울이 다시 준엄한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 편지는 너무나 격렬한 감정의 글이라서 쓰면서 바울은 통곡하게 됩니다.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 눈물의 편지 역시 보존이 되지 않아 우리는 다만 그 내용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눈물의 편지의 목적은 디모데에게 어려움을 준 자들을 책벌하라고 한 최후 통첩이고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통보였습니다.
3. 바울은 교회 안에 네 개의 분파(스키스다마)를 말하고 있습니다. "스키스다마"는 옷의 해진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해진 옷과 같이 보기 흉하게 될 위험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들고 있는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훌륭한 인물들은 사실 이 분열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 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의견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동의 한 일도 전혀 없는데 고린도 교회의 무리들은 그들의 이름을 자신 들의 분파를 위해서 마음대로 이용하여 파벌을 형성하여 상호 적대 감을 유발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생긴 파당들은 자기 파당을 자랑 하며 교회를 분열의 위기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1) 바울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이방 인들로 이루어진 분파로 아마도 제일 먼저 개종하여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주장한 자유의 복음과 율법의 종 말을 믿으나 자유를 잘못 해석하여 자유를 방종으로 만들려고 했으 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자기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무리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망각한 무리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바울이 처음에 전해준 말밖에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보다 그 전하는 사람을 믿는 실수를 저질 렀던 것입니다.
2) 아볼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볼 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웅변가이며 학문이 높고 성경에 능통한 자이었습니다(행 18:24-28). 헬라의 철학에 밝아 교리와 성경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볼로는 지식인 이 많이 사는 고린도에서 깊은 호응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참 으로 기독교를 지성화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볼로에게 속한 자 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분명히 기독교를 종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으로서 급속도로 전환시키고자 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아볼로 에게 속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순박한 바울의 전도 따위는 은근 히 멸시하기가 일쑤였으며 그 일로 다투는 일까지 일어났을 것입니다.
3) 게바에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바란 베드로의 유대인 이름입니다. 이 파에 속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베 드로가 바울이나 아볼로보다 더 권위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볼로나 바울과 비교하면 그 누구보다도 예수께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 은 바로 예수의 직계 제자였던 베드로가 진정한 사도라고 여기면서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교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하고 예루살렘 교회 의 중심 인물인 베드로가 바울보다 더 권위가 있다 하면서 베드로 를 따르며 남들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 파당만이 참된 교회의 정통 을 잇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유대의 율법을 지 켜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은총을 경히 여긴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4)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아무 당에도 속하지 않고 파당이 없는 고린도에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라고 주장하는 완고한, 자기들 만이 옳다는 소수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데 있지 않고,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만 속해 있는 것 같이 행동한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하고 그의 명령만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들은 실 상 그리스도파라고 하는 또 다른 파를 만든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자기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로 알고 다른 사람들 곧 바울이나 게바 역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인정치 않고 그들을 배격하였기 때문입니다(고후 10:7).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를 중심한 당파들은 사람들을 너무 높인 점에서 잘못이고,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파도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그리스도를 너무 낮추어 당쟁의 당수와 같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낮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당파적 영웅 숭배"를 심각하게 다루면서 이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저들이 교회의 이상적 성격을 파괴한다는 것(1-9절)이요
둘째는 저들의 당파가 그리스도를 훼손하는 결과 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며(10-17)
셋째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 력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당파가 제거되어야 하며 결국 이 당파 란 어리석은 교만에서 유발된 것이므로(18-31절)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될 부덕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분열의
첫째 원인은, 사람이 낮은 본능에 의해서 살 기 때문입니다(3:1-4).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 라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 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 요 (고전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두번째 원인은 영적 생활을 하지 않고 육적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 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 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 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4) 육에 속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님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 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셋째로는, 자신의 지혜와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는 교만에서 분열 이 생기며(4장), 마지막으로 경쟁심이 교회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은 온전한 분이시므로 우리는 분파를 초월 해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믿되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로서만 믿고 다른 이들과 분쟁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 들어오세요. 그러나 다리는 들어오지 말고 밖에 그대로 두세 요."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는 온전한 분이 십니다. 또한 교회가 일치해야 할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 거룩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 단 한 분뿐이십니다. 아볼로나 바울이나 게바 그 누구도 우리 를 용서하거나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음으로써 명실 상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 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받은 자들에게 자신은 망해야 할 자이 며 예수만이 흥해야 할 분이라고 증언했던 것처럼, 성도들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며 성도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을 깨닫고 분파를 일소하고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 로 일치할 것을 간곡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4. 다음으로, 교회 일치의 근거가 되며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 의 능력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지혜는 그 말이 아니라 내용과 능력으로 판단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는 비록 미련한 것으 로 보일지라도 생명을 구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는 아무리 고상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못하며 결국 멸망을 자 초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지혜는 일시적이며 궁극적인 결실이 없고 하나님을 절대로 찾지 못하며 때때로 속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 셨습니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로마 정치가이자 철학 자인 세네카, 여류시인 사포,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프랑스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음악가 로버트 슈만 등 이들은 당대의 존경받는 지성인들 이었지만 모두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지식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 마저 악마에게 팔아넘긴 '파우스트'는 "나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통달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독백합니다. 주님은 인생의 행복과 인간의 문제가 지식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 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인간은 다 죄인인 만큼 모두 다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만 없이하면,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사람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글을 아주 모르는 사람도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을 알 것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지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성령님으로라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 니 성령님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 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 느니라." 신령한 감동이란 오직 받는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자라면 큰 권력이나 세력이나 영광의 소유자라야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그가 어떻게 구주가 되느냐 고 세상 사람은 의문을 가 집니다. 십자가는 사형도구로서도 가장 천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 을 못박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자랑할 수 있 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구원의 도라고 말할 때에 이 세상 사람은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이 세상 사람의 보기에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 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 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 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 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 니라." 위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네 가지 형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련함", "약함", "천함", "없는 것" 등입니다.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Moody) 그 네 가지 가 하나님의 손에 잘 사용되어 승리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미련함"은 지식의 부족함을 의미하는데, 지식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무시하는 선입주견이 있는 것보다 미련함이 더 선하고 아름 다운 것입니다. "(고전8:1).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약함"은 그 자체에 있어서 아직 승리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하여 교만함보다 "약함"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언제나 교만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통하 여 영광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약한 자가 그 약한 것 때문에 겸 손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미련하여야 됩니다." 미련함은 세상 사람 이 보기에 미련함인데 이는 미련한 듯이 주를 믿음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믿음은 인간 의 지혜를 희생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약한 생활을 하 여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약하다 함은 도덕적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력없고 완강한 적대 행위를 취하지 않는 처 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마와 죄악의 침해 앞에서는 지지 않으나 그 밖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적대행위 앞에서 필요하다면 지는 처 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취급하실 때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추시며 완강하게 행하는 자는 약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독수리나 사자의 고기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지 못하나, 양이나 비둘기는 제물로 사용됩니다. 흔히 영웅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합 당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생활을 보면 "연약"의 생애를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곧 그가 우물을 팠다가 불레셋 사람에게 세 번이나 빼았 겼어도 양보한 일이 있었습니다.(창26:12-21) 그러나 하나님께서 필 경 축복하여 그를 안전지대에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창26: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또한 기독교인은 업신여김이 되는 자리에 있어야 세상에서 승리 합니다. 다시말해 세상 사람의 업신여김을 달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처지의 사람들을 통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기독교인은 남들이 업신여기기 전에 먼저 자기로서 자기를 업신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여 기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자기 자랑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기 자랑은 해로운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망하는 데로 가는 발 걸음입니다. 인생은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고 했으나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칭찬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자기 자랑할 것이 아니 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 니라."
둘째 주 안에서 자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 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 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는 우리를 구원시키는 모든 축복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축복은 지혜, 의, 성결, 구속인데 이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므로 주만 자랑하여야 합니다. 이 자랑은 교만이 아니고 모든 다른 것들은 아무리 귀하다는 것이라도 배설물 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귀히 여김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 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 고."
5.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인간이 하나님의 택하 심을 입은 자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들의 율법을 내세웠습니다. "(신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 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사실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심을 증명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결정적으 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눈앞에 두고도 고난의 메시야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넘어가는데 큰 장애물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둘째,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 날 것을 그들이 기대했습니다. 기원 45년에 드다란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집을 버리고 자기 와 함께 요단강에 가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요단강 물이 둘로 갈라져 모두 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약속한 일이 있습니다. 또 기원 54년에는 애굽으로부터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3만명을 설득하여 감람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런 일들을 기대하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에게서 그들이 본 것은 온유하고 겸손 하며 인기를 끌만한 일은 고의로 피하시는 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생을 마치는 자였던 것입니다. 이 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라고는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여기 지혜를 나타내는 "소피스트"란 헬라어는 생각이 영리하고 말이 교묘하여 나쁜 것도 좋게 보이도록 하는 재변을 잘 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문제에 대 해 아무 해결책도 없이 논쟁을 몇 시간이라도 거듭하는 인간, 문제 의 해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소풍"을 즐기고 있는 사람, 교묘히 기지와 매끈한 변설을 자랑하여 청중의 갈채를 받 고 득의한 사람을 말합니다. 헬라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무뚝뚝하게 말하는 기독교의 전도자들은 그들이 볼 때 교양이 없는 조잡한 인간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네들은 귀 기울여 들을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조소와 우롱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모두 노예들로만 구성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약 성서 시대에서 조차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가운 데는 사회의 상류층 출신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덴의 디오 누시오(행 17:34), 그레데의 지방 총독 서기오 바울(행 13:6-12), 데 살로니가와 베뢰아의 귀부인들(행 17:4,12), 아마 고린도의 재무인 에라스도(롬 16:23) 등 입니다. 네로 황제 시대에는 브리튼의 정복 자 플라우디오의 아내 폼포니아 글라에기나가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순교당했습니다. 도미니안 황제의 시대인 1세기 후반에는 황제의 사촌인 플라비오스 클레멘스가 역시 기독교인으로 순교당했습니다. 2세기 말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가 로마 황제인 트라얀에게 편지 를 보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나왔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비천한 사람들이 었다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는 6천 만명의 노예 들이 있었습니다.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이며 물건이자 인간일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늙은 노예를 필요없게 된 호미나 괭이와 같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고문하며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들 사이에는 결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아이들도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이와같이 물건에 불과한 사람들을 참된 인격으로서의 남자나 여 자로 만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영광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천히 여 기는 자에게 자존심을 주었으며, 생명이 없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 을 주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무시당하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지마는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위해서 죽을 수 있으리만큼 귀한 존재란 것을 기독교는 가르쳤습니다.
전 우주 에 있어서 기독교는 글자 그대로 인간의 가치를 가장 높여준 또 여 전히 높여 주고 있는 참 종교입니다.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여 주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여 주며, 천하고 멸시받는 자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며, 없는 자들을 부요케 만들어 주며, 불행한 자를 행복하 게 만들어 주며, 더러운 자를 깨끗하게 하여 주며, 죽어 가는 자를 살려 주는 종교가 참된 종교인 것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죄는 자기 주장, 혹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인식 위에 설 때 비로소 참다운 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 무지, 무능, 무력함을 알고 있는 인간이 결국은 강하고 지혜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생의 놀라운 진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만이 우리는 인생 의 길을 바로 걸으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만이 우리는 진리 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최봉석 목사라면 알 사람이 많지 않으나 최권능 목사라면 아는 이가 많습니다. 최봉석 목사가 곧 최권능 목사인데 그는 평생 전도하여 70여 교회를 세워서 70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 기도 합니다. 그는 핍박과 조소를 받으면서도 기사 이적을 많이 행 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 관한 일화도 많습니다. 한번은 최 목사 가 중학교 교장에게 전도하면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주장하는 분 이라고 설명하자 교장은 자기의 학식을 자랑하고 기독교를 미신시 하는 마음으로 벼락치는 것도 하나님이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최 목사가 죄인을 책망하기 위하여 벼락치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교장 은 비웃으면서 그러면 왜 사람을 치지 않고 나무와 돌을 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최 목사가 무심히 던진 말에 답변이 궁하여 대답할 말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으니 교장이 최 목사에게 답변을 추궁하 였습니다. 기도하고난 최 목사는 갑자기 대답할 말이 생각나서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떠들거나 잘못하면 주먹으로 칠판 과 교탁을 탁탁 두들릴 때 칠판이나 교탁이 잘못해서 두드립니까 학생이 잘못했는데 왜 교탁은 두드리십니까" 교장은 학생을 주의 시키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최 목사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도 나무와 돌에 벼락을 치셔서 죄인을 경계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학식을 자랑하던 교장이 머리를 숙이며 탄복했습니다. 세상적 안목으로 볼 때, 미련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은 소외받는 계층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사회의 모 든 기득권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핍박과 차별, 천대와 설움을 받는 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들어 당신의 유업을 잇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심판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나라가 도래할 때 그들을 그 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 로써 가진 자와 지혜있는 자,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십자가만을 자랑하 시는 여러분들이 되시므로 "(고후6:8)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 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시기 를 축원합니다.
이러한 고린도의 배경, 부요와 사치, 주색과 음란과 악덕, 그리고 말할 수 없이 파렴치한 생활들을 반영하여 고린도전서 6:9-10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 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6:10) 도적 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 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 교회 중에 이와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 은 어떤가 1996년 10월 23일자 경향 신문 칼럼은 그 음란과 타락 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매춘과 불륜의 천국이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만큼 매춘 과 불륜의 기회가 많고 장소 제공이 잘 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매춘 시장에 대한 한 통계에 따르면 업소는 40만 곳, 외형 신고액은 3조 2천 3백억원, 무허가 업소를 포함한 실제 연간 매출액은 43조원, 접대부 수는 1백 20만-1백 50만명에 이른다. 작년 우리 기업들의 접대비는 1조 6천억이었는데 이 돈의 가장 큰 몫은 룸살롱. 요정. 호텔 등에서 소비된다. 정중한 접대에 매춘 이 포함된다는 건 업계의 상식이다. 접대비는 세무서도 인정하고 있는 당당한 비용이므로 우리는 국가가 매춘을 실질적으로 장려하는 희한한 제도를 갖고 있는 셈이다. 매춘의 형태도 다양화되고 있다. 기존의 매춘 여성들과는 달리 주로 미성년자, 주부, 직장 여성 등 다양한 연령과 직업의 여성들이 아르바이트나 쾌락을 위해 이른 바 '보도 사무실'을 통해 매춘에 가담하고 있다. 최근 적발된 사례 를 본다면 그런 신종 매춘은 꽤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음이 분명 하다. 술집에서 일하는 접대부의 연령도 하향화되고 있다. 이른바 '영 계'라는 10대 소녀를 두고 장사하는 곳이 많다. 최근엔 아예 여고 생들끼리 모여 술집을 차린 사례도 있었거니와 초등학교 학생들을 고용한 술집마저 등장했다. 매춘과 불륜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러브 호텔'은 어떠한가 전 국 방방곡곡에 길만 뚫렸다 하면 가장 먼저 들어서는게 러브 호텔 이다. 서울 근교에만도 러브 호텔의 수는
2,600여 개에 이른다. 시 내 여관들도 '낮 손님'장사로 재미를 보는 러브 호텔로 변신하고 있다. 카바레는 어떤가 미혼 남녀 또는 부부가 카바레를 찾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젠 '무도 교실'이나 '노인 교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카바레 영업을 하는 업소도 부지기수로 생겨나고 있다. 우리는 매춘과 불륜에 미쳐 있는 나라다." 같은 날자 조선 일보 칼럼은 이 나라의 사치와 허영의 단면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옷차림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건 TV, 그중에서도 드라마의 영향때문이라고 국내의 한 언론학자가 갈파한 일이 있다. 실제로 선진국 어디를 가봐도 방 송출연자들의 옷차림이 우리처럼 고급스럽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탤런트가 입고 나온 옷이나 머리모양, 심지어 액세서리까지 불티나게 팔리는 기현상을 빚고 있다. .
첫째, 국제적인 환경변화에 대비해 보자. 세계는 지금 20세기를 마감하며 다가올 새로운 천년에 대한 비전과 설계에 한창인데 우리는 한강에서 뱃놀이 하듯 축축 늘어지는 연속극으로 국민들의 방향 감각을 무디게 하고 있다.
둘째, 국내 상황은 어떤가. 세계에서 유 일하게 남북이 분단돼 있는데다 최근에는 긴장감까지 감도는 현실 일 뿐 아니라 경제는 내년까지도 어둡다는 전망이다.
그런데 TV를 보면 가무가 넘쳐나고 사랑타령에 흥청망청이다. 가정이나 개인에 게 미치는 영향은 접어두고라도 우리 TV드라마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고, 국가와 국민에게 생산적이 아니라 소모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최근의 한 조사를 보면, 한주간에 총 34개 84편의 드 라마가
3,965분, 66시간 이상을 4개 공중파 채널이 쏟아내고 있다. 자그마치 전체 방송시간의 15.3%를 한 장르로 채우는 '드라마 왕 국'이다. . 드라마를 내더라도 우리 시대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 내야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과 삶의 활력소를 주어야 한다. 올해 미국의 에미 상을 받은 드라마 'ER(Emergency Room)'은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료인들의 헌신적인 열정을 사실감있게 그리고 있고, '프렌드'는 주인공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는 인간형을 스스로 만들어 내며 21세 기의 중심인물로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드라마에 비해 메시지 가 강하면서도 생산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와 도시는 물론 시골까지도 방대한 양의 지식이 축적되어 있고 성적 타락, 술, 담배, 마약 등 향락 추 구의 분위기가 극에 달아 당시 고린도 시를 방불케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본 고린도 전후서를 통해 사 분오열(四分五裂)되는 현금(現今) 교회의 분쟁과 분열의 문제, 성도 의 결혼, 성생활, 교회 지체로서의 임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절제, 은사의 바른 활용 등 실질적이면서도 다양한 삶의 문제, 이 시대에 안고 있는 도덕적, 윤리적 그리고 정신적 영적인 문제들에 대한 바 른 진리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2. 사도 바울은 먼저 편지 서두에서 이렇게 자신의 사도권을 밝 히고 있습니다. "(고전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 을 입은 바울은"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극구 변호한 것은 자 신의 명예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첫째로는, 바울의 빈약한 외 모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과거 행적으로 인해 일부 교인들이 그의 사도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자신의 소명의 진실성을 증거하고,
셋째로는, 그가 쓴 서신들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를 확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14:36,37). 결국 사도로서 권 위가 도전받거나 무시될 경우 복음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에(1:17) 바울은 스스로 사도권을 변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집필할 무 렵 그는 세 가지 소식을 입수하게 됩니다(11절).
첫째는 글레오의 문중으로 교회 내부의 분열과 바울 사역에 대 한 오해(1-4장) 등이 생겼다고 하는 전언인데, 내용인즉 교회가 선 호하는 지도자의 교훈이나 지혜를 서로 자랑하여 여러 소 그룹이 생겨나므로 사도 바울을 긴장시켰습니다. "(고전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 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고전1:12)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 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같은 분열에 대한 글레오의 소식에 대한 바울의 회답은 고전 1:10에서 4:21에 나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입수한 소식은 교회가 대표로 보낸 세 사람 스데바나 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를 통하여 전달된 편지로 교회 내에 근친상 간(고전 5:1,2)과 회중간에 벌어진 법정고소이고(고전 6:1) 성적 부 패였습니다(고전 6:6:12,13). 이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회답은 고린 도 전서 5장 1절에서 6장 20절에 나옵니다. 세 번째 입수된 정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빚은 혼란입니다. 여 러 가지 문제 중에는 혼인과 미혼상태(7:25-40), 우상에 바 친 식물(8:1-11:1), 예배에 관련된 것으로 공공 기도시 여자가 머리 에 수건을 쓰는 일, 무질서한 만찬, 성령님의 은사 활용 등 예배의 무 질서한 행위(11:2-14:40), 그리스도의 부활과 육체의 부활에 대한 그 릇된 이해(15:1-58), 그리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성도 를 위한 헌금(16:1-4)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답 변은 장장 긴 문장으로 고린도전서 7장 1절에서 16장 12절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간곡한 편지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계속적으로 여러 문제로 혼미에 빠지자 바울은 갑자기 자기가 직접 방문할 생각을 합니다. 바울이 당도하자 그 교회는 사도 바울의 예상하지 못한 방 문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달받은 모든 소 식이 사실임을 확인합니다. 동시에 바울이 고린도전서로 당부한 목회지침이 이행되지 않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바울 이 일러준대로 목회치리를 이행하여 잘못을 교정하라고 강력히 경 고한 후에(고후 13:2) 그곳을 떠납니다. 그가 떠난 후 교회 중 교만 한 자들이 회중을 설득하여 바울이 떠나간 것은 그가 약하기 때문 이며(고후 10:1,2) 바울의 권면은 무시해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사건의 귀추로 판단하여 바울은 자기의 2차 방문이 고통스러 운 것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고후2:1)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 로 결단하였노니." 오래지 않아 디모데가 당도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냉대하였 습니다. 그 교회는 바울의 책망을 원한으로 생각하는 자가 생겨 자 기들의 편견을 절제없이 그대로 피력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은 바울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디모데가 에베소에 돌아와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보 고하니 바울이 다시 준엄한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 편지는 너무나 격렬한 감정의 글이라서 쓰면서 바울은 통곡하게 됩니다. "(고후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 눈물의 편지 역시 보존이 되지 않아 우리는 다만 그 내용을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눈물의 편지의 목적은 디모데에게 어려움을 준 자들을 책벌하라고 한 최후 통첩이고 참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통보였습니다.
3. 바울은 교회 안에 네 개의 분파(스키스다마)를 말하고 있습니다. "스키스다마"는 옷의 해진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해진 옷과 같이 보기 흉하게 될 위험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들고 있는 바울, 아볼로, 게바와 같은 훌륭한 인물들은 사실 이 분열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 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의견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동의 한 일도 전혀 없는데 고린도 교회의 무리들은 그들의 이름을 자신 들의 분파를 위해서 마음대로 이용하여 파벌을 형성하여 상호 적대 감을 유발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생긴 파당들은 자기 파당을 자랑 하며 교회를 분열의 위기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1) 바울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이방 인들로 이루어진 분파로 아마도 제일 먼저 개종하여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주장한 자유의 복음과 율법의 종 말을 믿으나 자유를 잘못 해석하여 자유를 방종으로 만들려고 했으 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자기들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무리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망각한 무리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바울이 처음에 전해준 말밖에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보다 그 전하는 사람을 믿는 실수를 저질 렀던 것입니다.
2) 아볼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볼 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웅변가이며 학문이 높고 성경에 능통한 자이었습니다(행 18:24-28). 헬라의 철학에 밝아 교리와 성경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볼로는 지식인 이 많이 사는 고린도에서 깊은 호응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참 으로 기독교를 지성화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볼로에게 속한 자 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분명히 기독교를 종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으로서 급속도로 전환시키고자 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아볼로 에게 속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순박한 바울의 전도 따위는 은근 히 멸시하기가 일쑤였으며 그 일로 다투는 일까지 일어났을 것입니다.
3) 게바에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게바란 베드로의 유대인 이름입니다. 이 파에 속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베 드로가 바울이나 아볼로보다 더 권위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볼로나 바울과 비교하면 그 누구보다도 예수께 더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 은 바로 예수의 직계 제자였던 베드로가 진정한 사도라고 여기면서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교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하고 예루살렘 교회 의 중심 인물인 베드로가 바울보다 더 권위가 있다 하면서 베드로 를 따르며 남들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 파당만이 참된 교회의 정통 을 잇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유대의 율법을 지 켜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은총을 경히 여긴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4)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파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아무 당에도 속하지 않고 파당이 없는 고린도에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라고 주장하는 완고한, 자기들 만이 옳다는 소수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데 있지 않고,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만 속해 있는 것 같이 행동한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하고 그의 명령만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들은 실 상 그리스도파라고 하는 또 다른 파를 만든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자기들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로 알고 다른 사람들 곧 바울이나 게바 역시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인정치 않고 그들을 배격하였기 때문입니다(고후 10:7).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를 중심한 당파들은 사람들을 너무 높인 점에서 잘못이고,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파도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그리스도를 너무 낮추어 당쟁의 당수와 같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런 낮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당파적 영웅 숭배"를 심각하게 다루면서 이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저들이 교회의 이상적 성격을 파괴한다는 것(1-9절)이요
둘째는 저들의 당파가 그리스도를 훼손하는 결과 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며(10-17)
셋째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 력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 당파가 제거되어야 하며 결국 이 당파 란 어리석은 교만에서 유발된 것이므로(18-31절)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될 부덕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 분열의
첫째 원인은, 사람이 낮은 본능에 의해서 살 기 때문입니다(3:1-4). "(고전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 라 (고전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 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 요 (고전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두번째 원인은 영적 생활을 하지 않고 육적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 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 전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 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2:14) 육에 속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님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 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셋째로는, 자신의 지혜와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는 교만에서 분열 이 생기며(4장), 마지막으로 경쟁심이 교회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은 온전한 분이시므로 우리는 분파를 초월 해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믿되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로서만 믿고 다른 이들과 분쟁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 들어오세요. 그러나 다리는 들어오지 말고 밖에 그대로 두세 요."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는 온전한 분이 십니다. 또한 교회가 일치해야 할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고 거룩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 단 한 분뿐이십니다. 아볼로나 바울이나 게바 그 누구도 우리 를 용서하거나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받음으로써 명실 상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 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받은 자들에게 자신은 망해야 할 자이 며 예수만이 흥해야 할 분이라고 증언했던 것처럼, 성도들의 삶에 영향력을 끼치며 성도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인 것을 깨닫고 분파를 일소하고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 로 일치할 것을 간곡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4. 다음으로, 교회 일치의 근거가 되며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 의 능력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지혜는 그 말이 아니라 내용과 능력으로 판단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는 비록 미련한 것으 로 보일지라도 생명을 구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는 아무리 고상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못하며 결국 멸망을 자 초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지혜는 일시적이며 궁극적인 결실이 없고 하나님을 절대로 찾지 못하며 때때로 속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 셨습니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 수학자 피타고라스, 로마 정치가이자 철학 자인 세네카, 여류시인 사포, 미국의 작가 헤밍웨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프랑스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음악가 로버트 슈만 등 이들은 당대의 존경받는 지성인들 이었지만 모두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지식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 마저 악마에게 팔아넘긴 '파우스트'는 "나는 세상의 모든 학문을 통달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독백합니다. 주님은 인생의 행복과 인간의 문제가 지식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고전13: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 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인간은 다 죄인인 만큼 모두 다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만 없이하면,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사람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러나 글을 아주 모르는 사람도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을 알 것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지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성령님으로라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 니 성령님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 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 느니라." 신령한 감동이란 오직 받는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자라면 큰 권력이나 세력이나 영광의 소유자라야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니 그가 어떻게 구주가 되느냐 고 세상 사람은 의문을 가 집니다. 십자가는 사형도구로서도 가장 천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 을 못박아 죽이는 형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자랑할 수 있 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구원의 도라고 말할 때에 이 세상 사람은 어리석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는 이 세상 사람의 보기에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 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 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1:28) 하나님 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 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 니라." 위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네 가지 형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련함", "약함", "천함", "없는 것" 등입니다.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Moody) 그 네 가지 가 하나님의 손에 잘 사용되어 승리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미련함"은 지식의 부족함을 의미하는데, 지식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무시하는 선입주견이 있는 것보다 미련함이 더 선하고 아름 다운 것입니다. "(고전8:1).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약함"은 그 자체에 있어서 아직 승리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하여 교만함보다 "약함"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언제나 교만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통하 여 영광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약한 자가 그 약한 것 때문에 겸 손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미련하여야 됩니다." 미련함은 세상 사람 이 보기에 미련함인데 이는 미련한 듯이 주를 믿음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믿음은 인간 의 지혜를 희생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약한 생활을 하 여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약하다 함은 도덕적 연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력없고 완강한 적대 행위를 취하지 않는 처 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마와 죄악의 침해 앞에서는 지지 않으나 그 밖에는 천 가지 만 가지의 적대행위 앞에서 필요하다면 지는 처 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취급하실 때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추시며 완강하게 행하는 자는 약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독수리나 사자의 고기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사용되지 못하나, 양이나 비둘기는 제물로 사용됩니다. 흔히 영웅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합 당하지 않습니다. 이삭의 생활을 보면 "연약"의 생애를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곧 그가 우물을 팠다가 불레셋 사람에게 세 번이나 빼았 겼어도 양보한 일이 있었습니다.(창26:12-21) 그러나 하나님께서 필 경 축복하여 그를 안전지대에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창26:32)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또한 기독교인은 업신여김이 되는 자리에 있어야 세상에서 승리 합니다. 다시말해 세상 사람의 업신여김을 달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처지의 사람들을 통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십니다. 기독교인은 남들이 업신여기기 전에 먼저 자기로서 자기를 업신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여 기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자기 자랑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고전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기 자랑은 해로운 것입니다. 자기 자랑은 망하는 데로 가는 발 걸음입니다. 인생은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고 했으나 사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를 칭찬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자기 자랑할 것이 아니 라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 니라."
둘째 주 안에서 자랑하기 위해서 입니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 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 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1: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 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는 우리를 구원시키는 모든 축복이 주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축복은 지혜, 의, 성결, 구속인데 이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므로 주만 자랑하여야 합니다. 이 자랑은 교만이 아니고 모든 다른 것들은 아무리 귀하다는 것이라도 배설물 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귀히 여김을 말하는 것입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 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 고."
5.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 위에서 그의 생애를 마친 인간이 하나님의 택하 심을 입은 자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들의 율법을 내세웠습니다. "(신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 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의 사실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심을 증명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결정적으 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눈앞에 두고도 고난의 메시야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넘어가는데 큰 장애물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둘째,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 날 것을 그들이 기대했습니다. 기원 45년에 드다란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집을 버리고 자기 와 함께 요단강에 가자고 했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요단강 물이 둘로 갈라져 모두 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약속한 일이 있습니다. 또 기원 54년에는 애굽으로부터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는 3만명을 설득하여 감람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런 일들을 기대하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에게서 그들이 본 것은 온유하고 겸손 하며 인기를 끌만한 일은 고의로 피하시는 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생을 마치는 자였던 것입니다. 이 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라고는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여기 지혜를 나타내는 "소피스트"란 헬라어는 생각이 영리하고 말이 교묘하여 나쁜 것도 좋게 보이도록 하는 재변을 잘 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문제에 대 해 아무 해결책도 없이 논쟁을 몇 시간이라도 거듭하는 인간, 문제 의 해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소풍"을 즐기고 있는 사람, 교묘히 기지와 매끈한 변설을 자랑하여 청중의 갈채를 받 고 득의한 사람을 말합니다. 헬라인들은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무뚝뚝하게 말하는 기독교의 전도자들은 그들이 볼 때 교양이 없는 조잡한 인간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네들은 귀 기울여 들을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조소와 우롱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모두 노예들로만 구성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신약 성서 시대에서 조차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가운 데는 사회의 상류층 출신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덴의 디오 누시오(행 17:34), 그레데의 지방 총독 서기오 바울(행 13:6-12), 데 살로니가와 베뢰아의 귀부인들(행 17:4,12), 아마 고린도의 재무인 에라스도(롬 16:23) 등 입니다. 네로 황제 시대에는 브리튼의 정복 자 플라우디오의 아내 폼포니아 글라에기나가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순교당했습니다. 도미니안 황제의 시대인 1세기 후반에는 황제의 사촌인 플라비오스 클레멘스가 역시 기독교인으로 순교당했습니다. 2세기 말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가 로마 황제인 트라얀에게 편지 를 보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나왔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비천한 사람들이 었다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는 6천 만명의 노예 들이 있었습니다.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이며 물건이자 인간일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늙은 노예를 필요없게 된 호미나 괭이와 같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들을 고문하며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들 사이에는 결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아이들도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이와같이 물건에 불과한 사람들을 참된 인격으로서의 남자나 여 자로 만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영광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천히 여 기는 자에게 자존심을 주었으며, 생명이 없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 을 주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무시당하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무가치한 것으로 보였지마는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위해서 죽을 수 있으리만큼 귀한 존재란 것을 기독교는 가르쳤습니다.
전 우주 에 있어서 기독교는 글자 그대로 인간의 가치를 가장 높여준 또 여 전히 높여 주고 있는 참 종교입니다.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하여 주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여 주며, 천하고 멸시받는 자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며, 없는 자들을 부요케 만들어 주며, 불행한 자를 행복하 게 만들어 주며, 더러운 자를 깨끗하게 하여 주며, 죽어 가는 자를 살려 주는 종교가 참된 종교인 것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죄는 자기 주장, 혹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인식 위에 설 때 비로소 참다운 종교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 무지, 무능, 무력함을 알고 있는 인간이 결국은 강하고 지혜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생의 놀라운 진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만이 우리는 인생 의 길을 바로 걸으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만이 우리는 진리 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최봉석 목사라면 알 사람이 많지 않으나 최권능 목사라면 아는 이가 많습니다. 최봉석 목사가 곧 최권능 목사인데 그는 평생 전도하여 70여 교회를 세워서 70 교회의 아버지라 불리 기도 합니다. 그는 핍박과 조소를 받으면서도 기사 이적을 많이 행 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 관한 일화도 많습니다. 한번은 최 목사 가 중학교 교장에게 전도하면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주장하는 분 이라고 설명하자 교장은 자기의 학식을 자랑하고 기독교를 미신시 하는 마음으로 벼락치는 것도 하나님이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최 목사가 죄인을 책망하기 위하여 벼락치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교장 은 비웃으면서 그러면 왜 사람을 치지 않고 나무와 돌을 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최 목사가 무심히 던진 말에 답변이 궁하여 대답할 말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으니 교장이 최 목사에게 답변을 추궁하 였습니다. 기도하고난 최 목사는 갑자기 대답할 말이 생각나서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떠들거나 잘못하면 주먹으로 칠판 과 교탁을 탁탁 두들릴 때 칠판이나 교탁이 잘못해서 두드립니까 학생이 잘못했는데 왜 교탁은 두드리십니까" 교장은 학생을 주의 시키는 것이라고 대답하자 최 목사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도 나무와 돌에 벼락을 치셔서 죄인을 경계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학식을 자랑하던 교장이 머리를 숙이며 탄복했습니다. 세상적 안목으로 볼 때, 미련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 없는 것들은 소외받는 계층 전체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사회의 모 든 기득권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핍박과 차별, 천대와 설움을 받는 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들어 당신의 유업을 잇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심판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나라가 도래할 때 그들을 그 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 로써 가진 자와 지혜있는 자,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십자가만을 자랑하 시는 여러분들이 되시므로 "(고후6:8)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 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시기 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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