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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체와 개체를 분명히 알자 (고전12:12-27)

본문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세상 일에도 어떤 일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제대로 될 때까지 고난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대해서도 올바르게 이해해야 그 바른 이해가 바른 믿음과 신앙을 갖다 줍니다. 몸과 지체의 관계에서 몸은 둘이 아닙니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몸은 주님을 말씀하고, 교회를 말씀합니다. 역사 이래로 수많은 교파가 살아 왔고 또 살다 가지만 몸은 하나뿐입니다. 지체는, 남자냐 여자냐 똑똑하냐 무식하냐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 하는 것에도 있지 않습니다. 단,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지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붙어 있는 가지와 몸을 알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겉보기에는 같지만. 내게 있어서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 이를 가꾸느니라. 떨어진 가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한 15:2,5) 이런 말씀을 여러분이 깊이 생각하면 참 좋습니다. 몸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교회 생활을 못하거나 봉사나 충성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몸에 붙어 있어야 지체가 중요하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지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 손이 참 귀합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내 손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만큼 귀중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로 손이 잘렸다고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손의 가치는 없습니다. 또 그 손을 향해서 불쌍하다거나 딱하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서 그것을 정리해서 파묻든지 태우든지 눈으로 안 보는 것이 낫습니다. 육에 붙은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이런 것같이, 신령한 지체도 주님의 몸에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나가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몸에서 떨어진 지체나 몸을 알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귀합니다. 천하보다 귀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받는 영광과 존귀와 거룩함을 지체가 함께 누리기 때문입니다. 집사님들도 붙어 있는 지체고 나도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그런데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도 몸과의 관계가 생명처럼 흘러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몸인즉 지체요, 지체인즉 몸이라야 합니다. 이론이 아니고 우리 심령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몸인즉 지체요, 지체인즉 몸이 됩니다. 아주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교회관입니다. 또 주님의 교회관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울의 교회관, 주님의 교회관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너무너무 유감입니다. 몸의 영광이 지체의 영광이고 지체의 영광이 몸의 영광입니다. 몸과 지체를 따로 분리하지 않습니다. 몸이 영광을 받으면 지체가 영광을 받고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몸이 같이 영광을 받습니다. 또 지체는 몸과 운명을 같이합니다. 지체가 다 없어지면 몸은 유지되지 못합니다. 만일 지체된 성도들이 없다고 하면 주님 자신도 영광과 존귀와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며 하나님께도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단독으로, 주님 단독으로 있어서는 귀하고 영광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지체와 함께 몸을 이루었을 때에 몸의 영광이 지체의 영광이고 지체의 영광이 몸의 영광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체가 몸에서 독립되면 지체는 귀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말할 때나 일할 때나 신앙의 전부가 주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일치되었을 때에 존귀함이 더하여지는 것이지 지체된 내가 독립적으로 말하거나, 독립적으로 생각하거나, 독립적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 존귀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이 안됩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몸에 붙어 있을 때에 몸에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이 모든 것을 아름답고 귀하게 보존해 나갑니다. 또한가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 해도 각각 다릅니다. 몸에 붙어 있으면 전부 같아야 되는 줄 알지만 각각 다릅니다. 바울 선생은 육신의 몸과 지체를 비유해서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도 몸에 붙어 있습니다. 발도 몸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하지 않고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를 못합니다. 손이 왜 이해를 못하는고 자기같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체가 손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해를 못합니다. 이 점을 우리는 특별히 귀하게 여기고 생각해야 됩니다.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귀와 눈이 몸에 함께 붙어 있지만 다릅니다. 모양도 다르고 사명도 다르고 직무도 다릅니다. 발이 해야 될 일이 따로 있고 눈이 해야 될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몸과 지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은혜 받은 고상한 사람은 그 신앙의 경험이나 삶이 자기와 똑같아야 되는 줄 압니다. 자기와 같지 않으면 소중히 여기지 않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고린도전서 12:16) 몸에 붙어 있다는 말입니다. 단지 모양이 다르고 소명이 다를 뿐입니다.
첫째로 남녀가 다릅니다. 여자가 남자같이 될 수 없고 남자가 여자같이 될 수 없습니다. 모양도 성품도 사상도 다릅니다. 다른 것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몇명 안되는 우리 교회가 주님 안에서 한 피로 구속함을 받고 한 성령님의 세례를 받고, 은혜에 동참했다 해도 왜 시비가 많으냐 하면 몸에 표준을 두지 않고 자기에게 표준을 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몸이 지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지체가 몸에 붙어 있다는 것뿐입니다. 주님 자신이 이렇게 진행해 가십니다. 형제(지체)가 내게 잘못했을 때에 용서한다거나 참는다고 하는 것은 부족한 말입니다. 나 자신도 잘 참지 못하고 용서도 못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체, 이 신앙의 요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한다, 참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집사님이 나한테 잘못했을 때 ‘내가 용서해 주지, 내가 참지’ 하는 것은 서로가 지체인 줄을 모를 때에 하는 말입니다. 용서하거나 참는다기보다는 같은 마음이어야 합니다.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잘못한 것이 곧 내가 잘못한 것이고, 그가 과오를 범한 것이 곧 내가 과오를 범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 여김, 이 앎이 몸에 붙어 있는 지체의 아름다운 흐름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에서 한 지체로 삽니다. 이 지체가 잘못했습니다. 과오를 범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여러 지체가 흉을 보고 원망과 저주는 해도, 내가 잘못한 그 잘못을 함께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일이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아름답고 귀하게 살아 가려고 하면, 우리가 한 지체이지만 각각 다르다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발은 실수를 안해도 손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손과 손이 교회에서 실수를 합니다. 망치를 가지고 못을 박을 때에 못이나 때리지, 왜 손을 때립니까 손의 잘못입니다. 실수입니다. 그러나 그 상한 손이 자기를 때린 손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고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나아가서 완전한 지체를 이룩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형제의 모든 잘못을 자기가 다 책임지고, 교회의 잘못한 것을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짊어지고 나아가서 기도한 사람입니다. 그런 지체를 많이 보질 못했습니다만 성경 자체는 이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이 땅 위에 많은 지체를 두셨습니다. 이 지체가 저 지체를 향해서 시비하고 분쟁하고 저주하고 멸시하는 것은 몸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갑이 잘못한 것을 을이 고소해서 그 고소가 분명히 승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갑과 을을 위해서 한몫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심령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주님의 심령도 모르고 지체다운 지체의 흐름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사실은 이렇습니다. 교인이 잘못한 것을 교인이 이해하지 못하면, 교인이 감싸 주지 않으면 누가 감싸 줍니까 이런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이 일로 나가다가 자빠지고 넘어질찌라도 이런 근본적인 일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체가 지체를 원망할 뿐 아니라 판단도 다 합니다. 승패를 다 가릅니다. 주님이 승패를 가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다 합니다. 지체라 해도 이름만 지체일 뿐입니다. 육의 지체는 오른손의 잘못으로 왼손이 끊긴다 해도 왼손은 오른손을 향해서 원망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는데 신령한 지체는 왜 이런가 하는 사실을 마음 가운데 두고 크게 느끼는 사람, 목마른 사람, 그 사람만이 그 안에 몸으로부터 흐르는 흐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큰 집에는 금.은그릇이 있습니다.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동시에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습니다. 성경은 할 말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큰 집에는 금과 같이, 은과 같이 귀한 그릇이 있습니다. 동시에 질그릇과 나무그릇이 있습니다. 질그릇과 금그릇을 비교하면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보시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이 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다만 그가 주님에게 붙어 있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그릇이 질그릇을 보고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도 주의 죽으심으로 구속을 얻었고 나도 주의 죽으심으로 구속을 얻었습니다. 그도 주의 사심으로 의를 가졌고 나도 주의 사심으로 의를 가졌습니다. 바울의 구원이나 바울의 성결이나 바울의 의가, 나의 구원과 나의 성결과 나의 의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릇으로 말하면 큰 차이가 납니다. 그는 금그릇이고 나는 질그릇입니다. 짝할 수 없는 굉장한 차이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잘 알아서 신앙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의 불만과 불평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창세로부터 주님이 오실 때까지 많은 사람이 왔다 갑니다. 현재 사는 사람들 중에도 얼굴이 똑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각각 다릅니다. 쌍태라도 다릅니다. 앞에 간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었고 또 오는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얼굴이 같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다 각각입니다. 이 각각의 것이 지체로서 몸을 이룩해 나가는 이 비밀을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금그릇이 좋다 해도 주인이 귀하게 쓰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금이라고 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는 주인이 쓰시는 데에 있습니다. 질그릇이라도 비록 질그릇 자체는 가치가 없지만 주인이 요긴하게 쓰면 그 그릇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그릇을 쓰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금, 은, 나무, 질그릇이 있지만 각각 자기를 깨끗케 하면,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됩니다. 우리가 똑같은 사람으로 나서 주님으로 인해 구원과 성결과 의를 입고 삽니다.
그런데 각각 다릅니다. 이 다른 점으로 해서 ‘하나님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다른 사람은 귀하게 쓰시면서 나에게는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고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 원망은 주인에게 대한 원망입니다. 몸에 대한 원망입니다. 그러나 참 지체는 몸에 대한 원망이 없습니다. 질그릇이 금그릇을 보고서 비난하거나 원망하거나 낙심하는 법이 아닙니다. 동시에 지체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금그릇이 질그릇을 보고 ‘너에 비해서 나는 가치가 있다. 영광스럽다’ 하면서 교만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요, 하나님의 나라에 나아가서 얻는 소유입니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은 참 귀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깨끗케 한 후,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만 된다고 하면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의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지체와 지체 사이에는 용서라는 말, 참는다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안됩니다. 같은 지체가 뭐를 잘못하고 뭐를 용서합니까 같은 운명입니다. 그가 잘못한 것을 내 잘못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그 심령, 그 마음, 그것이 몸에 붙어 있는 지체에 흐르는 흐름입니다. 지나간 일을 얘기합니다. 거의 20년 전의 일입니다. 왕중생이라는 분이 한국에 와서 교회를 시작할 때입니다. 그에 대한 말은 다 할 수 없지만, 그들도 좋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과 같지 않은 지체는 지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회관입니다. 잘못되었습니다. 그 때, 임목사님이 노형제하고 길선교사하고 임목사님의 형님이 계신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임목사님이 그 형님한테도 신앙에 대한 신용을 잃었고, 그 교회에도 그랬습니다. 그가 복음을 깨닫고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회를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 한 번만 전하면 교회가 훌떡 뒤집어질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궁리를 하다가, 자기가 설교한다고 말하지 않고 길선교사를 앞세워서 집회를 한다고 말하고 교회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집회 첫날 저녁에 길선교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저녁 집회를 마치고 직원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눈치가 이상하니까 이 집회를 누가 인도하느냐고 길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시작하는 날 저녁과 마치는 날 저녁에만 자기가 설교를 하고 다른 시간에는 임목사님이 한다고 대답하자 교회에서 그만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집회 안한다’고 반대가 일어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그 이튿날, 집회도 못하고 셋이 다 쫓겨 왔습니다. 며칠 뒤에 임목사님을 방문했더니 이불을 덮어 쓰고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지 말고 왕중생한테 가자’ 하고 같이 갔습니다. 왕중생, 임목사님, 노형제하고 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왕중생이 임목사님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복음을 받았느냐 빛의 사람이냐 그렇다고 하면 왜 어두운 생활을 하느냐’ 하며 몹시 면박을 줍니다.
그런데 면박을 받는 사람도 ‘네,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방법은 나빴을찌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다’ 고 하며 말을 주고 받습니다. 나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앉아 있었는데 한참 야단을 치더니 날 보고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했습니다. ‘임형제가 잘못했습니다. 먼저는 길기수 형제에게 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됩니다. 남의 이름을 팔아서 집회를 하려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또 교회한테도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중생에게도 임목사님을 정말로 형제로 생각하느냐, 구원받은 형제로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합니다. ‘형제라고 생각을 안하면 왈가왈부할 것이 없습니다. 나무라고 칭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라고 생각한다면 이 형제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 공동 책임을 질 수 없겠습니까’ 하고 얘기를 좀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들이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는 못해도 내 마음, 내 사상은 늘 그렇습니다. 참 형제가 잘못했을 때에 내가 그 돌을 함께 맞는 것, 불만 없이, 원망 없이 맞는 것이 형제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체와 지체의 관계입니다. 발이 잘못해서 몸이 넘어졌습니다.
그렇다고 발을 끊어내지 않습니다. 발에 책임을 지우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점입니다. 각각 다릅니다. 나도 실수를 하고 다른 지체도 실수를 합니다. 내가 실수할 때가 있고 다른 지체가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 점을 내가 통감하고 함께 책임을 지고 나아가지 않으면 아름다운 교회 생활을 못합니다. 세상 없이 다녀 보세요. 내 신앙 자체, 생활 자체가 몸과 지체를 모르면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는 몇 안되는 사람이 모여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어떤 교파 안에 어떤 지체가 있는지 모릅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고소하면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가 이렇습니다. ‘여호와여! 하나님의 종, 나만 살아 있습니다. 여호와의 제단도 다 불에 타고 여호와의 종들도 다 죽임을 당하고 나만 살아 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나까지, 하나 남은 내 생명까지 찾습니다.’ 이것이 고소입니다. 이 백성을 하나님 앞에 고소하는 격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네가 알지 못하는 7000명을 준비해 놓았다’고 하십니다. 그는 7000명을 모릅니다. 만나 본 일이 없습니다. 숨겨져 있는 지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교파든지 어떤 모임이든지 주님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영동에 가서 집회를 하면서 다른 교파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신 교회 장로님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그 교회 목사님과 기독교 장로회의 목사님과 함께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때 고신 교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은 저절로 흐려집니다. 저 흘러가는 물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윗물이 아무리 흐려도 맑은 아랫물이 있습니다. 고신 교회 목사님이 또 하시는 말씀이 기독교 장로회에는 성령님이 없다고 합니다. 성령님이 없다는 말은 저주 중에 가장 큰 저주입니다.
그런 저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는 말이고 거기에는 알곡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라고 하니까 그렇다고 시인을 합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교단에는 성령님이 계시지요’ ‘그렇다’ ‘그럼, 목사님 교회에는 쭉정이가 하나도 없겠네요, 다 알곡이겠네요’ 라고 하니까 그때 가서는 말을 돌이켜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고 합니다. 쭉정이가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앞뒤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하는 말을 목사님 말 자체가 지금 번복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없는데 어떻게 알곡이 나옵니까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이 어떻게 맑습니까 그럼 당신들의 교파는 윗물이 맑으니까 그 아랫물도 다 맑아야 되는 게 아닙니까 전부 알곡이 아닙니까’ 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몸과 지체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합니다. 지체는 교만할 것도 없고 또 낙심하거나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단계를 넘어갑니다. 사람은 몇 안되지만 작년이 다르고 금년이 다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전진이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죽을 때까지 참고 바라고 붙들고 나갈 것은 ‘지체와 몸의 관계’ 입니다. 몸을 바로 알고 지체를 바로 알아서 주님의 뜻을 이룩해야 될 것입니다.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지체입니다. 그러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도 각각 다릅니다. 그릇이 다릅니다. 금그릇과 질그릇이 다른 것같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 각각 다른 지체를 몸이 통괄합니다. 몸이 주장합니다. 말씀에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각 지체라’고 했습니다. 이 지체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또 몸인 동시에 각각 다른 분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합해서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후에 나가서 모이는 모임은 이러한 모임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바울의 영원한 교회관입니다. 바뀌지 않는, 변동되지 않는, 철저한 교회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품고 신앙 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지체가 잘못한 것을 흉보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내가 잘못한 것으로 끌어 안을 수 있는 아량,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 참 필요합니다. 그래야 성령님을 만족케 하고 주님을 만족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 ) 사랑하시는 주님, 우리가 주를 부를 때에 그 부름이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나의 주가 되시오며 나의 선한 목자로 군림하셔서 지체로서 살기에 합당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각각 모양이 다른 그릇들을 주님은 지체로 삼으시고 주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참으로 주님 앞에서는 주님 안에서는 용서한다, 참는다는 말이 소용 없는 말인 것을 알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지체의 모든 부족을 나 자신이 함께 통감하면서 주께 나가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적지마는 이 위에 은혜를 입혀 주시고 하나님의 뜻이 위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시기를 비옵니다. 다시 모일 때까지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옵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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