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따를 것인가 (눅18:18-34)
본문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군가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아들은 장차 커서 은연 중에 자기 아버지의 행동을 답습하고 딸은 어머니의 행동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행동을, 하급자는 상급자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익히게 됩니다. 한보청문회에서 정태수 총회장이 “돈 문제는 주인이 알지 머슴이 뭘 알겠습니까” 하며 집요하게 추궁하는 국회의원의 질문을 되받아쳐 장안의 화재가 되고 있습니다. 대기업의 중역인 사람에게 구시대의 머슴이라는 모욕적인 용어를 사용했으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도 증인으로 청문회에 소환되었는데 사회에서 정씨를 만나면 다시 함께 일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부정했습니다. 젊음을 다 바치고난 후 자신의 지난 삶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 그 사람뿐이겠습니까 비록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이처럼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신은 일생 동안 누구를 좇고 누구를 위해서 살겠습니까 당신이 선택하게 되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대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이자 관원인 청년에게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주고 자신을 좇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그들이 가진 재물이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 가치 있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돈이 아까와서 가치 있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재물이 신처럼 군림합니다. 이 청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제쳐두고 자신을 좇으라고 단호히 요구하셨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하여 그것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29절과 30절에는 따르는 자들에게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라는 그분의 요구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다른 곳에서 그분 자신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대체 그분이 누구이길래 우리의 가진 재물을 다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아내보다도 자신을 더 위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목숨까지도 버리라고 주저 없이 말씀하시는 그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자기의 지위가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헌신과 봉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행정직 말단 공무원인 동사무소 직원이 누구에게 자기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백화점 말단 직원인 현관 안내를 맡는 사람이 누구에게 자기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상인들은 자기가 가진 상품의 질이 보잘 것 없을 때 비싼 가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상거래에서 가격이 비싼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것과 같은 주장을 한 사람은 역사상 한 명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요구하신 것과 같은 헌신을 요구한 사람도 역사상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최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습니다(요5:18). 자기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 하여 사실상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셨습니다(요14:9). 최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있는 그분을 따르는 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한 때 이런 말을 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제, 시이저, 샤를마뉴, 그리고 나는 무력으로 제국을 건설했으나 그리스도는 사랑의 제국을 세웠고 이 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죽는구나”
둘째로, 최고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헌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권력을 휘둘러 위협을 가하며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건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보상을 주겠다는 미끼를 던지며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것에 수반되는 희생을 먼저 분명하게 밝히시며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몸소 행하면서 자신이 행한 것을 따라하라고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모범을 보이시고 그 모범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0).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내가 너희의 주와 선생이나 종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긴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셨습니다(요13:14). 비폭력, 무저항부의로 유명한 간디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그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이의 사탕먹는 버릇을 아무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아이가 들을 겁니다. 사탕 먹지 말라고 아이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이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며 입을 뗄듯 하던 간디가 눈길을 어머니에게 돌리고 말했다. 보름 후에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세요. 그때 말해 주겠습니다. 저희는 먼 곳에 살기 때문에 보름씩 여기 머물기도 어렵고, 보름 후에 다시 오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간디는 다시 한번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보고는 또 말했다. 아무래도 보름 후라야 말해줄 수 있겠습니다.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갔던 어머니가 보름 후 다시 찾아왔다.
간디는 아이의 눈을 한 동안 그윽이 들여다 보다가 말했다. 얘야, 사탕을 먹지말렴.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고 고마워하며 어머니가 물었다. 왜 그 말씀을 보름 전에는 해주실 수 없었느냐고. 간디가 대답했다. 그때는 저도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평범한 일화이지만 간디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기에 충분한 이야기입니다. 간디는 이처럼 행동하는 사람으로 여러 면에서 훌륭한 본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의 위대함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인간적인 결함과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일화에서는 사탕을 먹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자신도 이것을 중단하기까지는 아이에게 충고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하셨습니다. 그분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언제까지 그분처럼 완전한 사람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모범은 도저히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1-33절).
어느 누가 그분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강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그리고 자기 의지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친히 본을 보이시며 자신이 제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것 같이 그들도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이와 같은 분이라면 우리가 본받을 대상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예수님은 최고의 보상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상급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끼어들어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 시점에 그가 끼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의 행동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 말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30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 때 내세의 복뿐만 아니라 금세에 그 이상의 복을 받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것을 기복신앙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이런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고 그분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금세에 여러 배를 받기 원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을 버리고 아내를 버려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것은 아내들에게 심각한 말씀입니다.
반면에 남편들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어떤 어수룩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성경을 읽다가 누가복음 18장을 보게 되었는데 29절과 30절 말씀이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것만 복된 소식이 아니라 이 말씀도 제게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있는 아내를 버리면 젊고 예쁘고 세련되고 똑똑한 아내를 서너 명 데리고 살 수 있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에서 아내를 버린다는 말은 아내와 이혼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아내와 이혼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력히 그런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직업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씀의 요점은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힘쓰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아내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히 대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기꺼이 감수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형제를 버린다는 말 역시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안의 경조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선순위를 두다 보니 아무래도 그 일이 뒷전에 밀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 마친 후에 찾아뵙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형제간의 의가 상할 위험도 있지만 감수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버린다는 말 역시 양로원에 맡긴다거나 부양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은 결코 아내와 이혼하거나 형제와 갈라서거나 부모를 모른 척 하도록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본을 보였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내세에 상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금세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이 임할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4) 여기에 완전한 모범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차선은 최선의 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선의 모델로 만족하지 말고 최선의 모델을 좇으십시오.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군가를 본받고 있는 것이라면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시며 최고의 본을 보여주셨으며 최고의 보상을 해주시는 그분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이자 관원인 청년에게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주고 자신을 좇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데 그들이 가진 재물이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 가치 있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돈이 아까와서 가치 있는 일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재물이 신처럼 군림합니다. 이 청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제쳐두고 자신을 좇으라고 단호히 요구하셨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하여 그것을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29절과 30절에는 따르는 자들에게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라는 그분의 요구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다른 곳에서 그분 자신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
대체 그분이 누구이길래 우리의 가진 재물을 다 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아내보다도 자신을 더 위하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목숨까지도 버리라고 주저 없이 말씀하시는 그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자기의 지위가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헌신과 봉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행정직 말단 공무원인 동사무소 직원이 누구에게 자기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백화점 말단 직원인 현관 안내를 맡는 사람이 누구에게 자기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 지위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하고 시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상인들은 자기가 가진 상품의 질이 보잘 것 없을 때 비싼 가격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상거래에서 가격이 비싼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것과 같은 주장을 한 사람은 역사상 한 명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요구하신 것과 같은 헌신을 요구한 사람도 역사상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최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습니다(요5:18). 자기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 하여 사실상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셨습니다(요14:9). 최고의 헌신을 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 있는 그분을 따르는 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한 때 이런 말을 하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제, 시이저, 샤를마뉴, 그리고 나는 무력으로 제국을 건설했으나 그리스도는 사랑의 제국을 세웠고 이 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죽는구나”
둘째로, 최고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헌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 권력을 휘둘러 위협을 가하며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건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많은 보상을 주겠다는 미끼를 던지며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것에 수반되는 희생을 먼저 분명하게 밝히시며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몸소 행하면서 자신이 행한 것을 따라하라고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모범을 보이시고 그 모범을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0).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13:34). “내가 너희의 주와 선생이나 종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긴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셨습니다(요13:14). 비폭력, 무저항부의로 유명한 간디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한 아주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그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이 아이의 사탕먹는 버릇을 아무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아이가 들을 겁니다. 사탕 먹지 말라고 아이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이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며 입을 뗄듯 하던 간디가 눈길을 어머니에게 돌리고 말했다. 보름 후에 아이를 다시 데리고 오세요. 그때 말해 주겠습니다. 저희는 먼 곳에 살기 때문에 보름씩 여기 머물기도 어렵고, 보름 후에 다시 오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간디는 다시 한번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보고는 또 말했다. 아무래도 보름 후라야 말해줄 수 있겠습니다. 할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갔던 어머니가 보름 후 다시 찾아왔다.
간디는 아이의 눈을 한 동안 그윽이 들여다 보다가 말했다. 얘야, 사탕을 먹지말렴.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하고 고마워하며 어머니가 물었다. 왜 그 말씀을 보름 전에는 해주실 수 없었느냐고. 간디가 대답했다. 그때는 저도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평범한 일화이지만 간디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기에 충분한 이야기입니다. 간디는 이처럼 행동하는 사람으로 여러 면에서 훌륭한 본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의 위대함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인간적인 결함과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일화에서는 사탕을 먹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자신도 이것을 중단하기까지는 아이에게 충고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하셨습니다. 그분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언제까지 그분처럼 완전한 사람은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모범은 도저히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31-33절).
어느 누가 그분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강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그리고 자기 의지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분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셨습니다. 이렇게 친히 본을 보이시며 자신이 제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것 같이 그들도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이와 같은 분이라면 우리가 본받을 대상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지 않겠습니까
셋째로, 예수님은 최고의 보상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분께서 주실 수 있는 상급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끼어들어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이 시점에 그가 끼어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의 행동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한 말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30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 때 내세의 복뿐만 아니라 금세에 그 이상의 복을 받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것을 기복신앙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이런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고 그분을 위하여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금세에 여러 배를 받기 원하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을 버리고 아내를 버려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은데 이것은 아내들에게 심각한 말씀입니다.
반면에 남편들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어떤 어수룩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성경을 읽다가 누가복음 18장을 보게 되었는데 29절과 30절 말씀이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것만 복된 소식이 아니라 이 말씀도 제게는 복된 소식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있는 아내를 버리면 젊고 예쁘고 세련되고 똑똑한 아내를 서너 명 데리고 살 수 있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에서 아내를 버린다는 말은 아내와 이혼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아내와 이혼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력히 그런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직업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이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씀의 요점은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힘쓰다 보면 경우에 따라서는 아내에게 상대적으로 소홀히 대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기꺼이 감수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형제를 버린다는 말 역시 관계를 끊어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집안의 경조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우선순위를 두다 보니 아무래도 그 일이 뒷전에 밀리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 마친 후에 찾아뵙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형제간의 의가 상할 위험도 있지만 감수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버린다는 말 역시 양로원에 맡긴다거나 부양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성경은 결코 아내와 이혼하거나 형제와 갈라서거나 부모를 모른 척 하도록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본을 보였듯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우선순위를 두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내세에 상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금세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복이 임할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4) 여기에 완전한 모범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차선은 최선의 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차선의 모델로 만족하지 말고 최선의 모델을 좇으십시오.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누군가를 본받고 있는 것이라면 최고의 헌신을 요구하시며 최고의 본을 보여주셨으며 최고의 보상을 해주시는 그분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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