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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막9:30-37)

본문

마가는 예수께서 갈릴리를 지나 가시면서 행선지를 알리고 싶어하시 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 본문 3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러고 싶어하셨느냐 하면 예루살렘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 가 가고 계시는데 31절에 있는대로 제자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믿 지 못하는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기간동안의 여행길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지나 가시는 것을 모르게 갈릴리 가운데를 지나고 계시다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집에 도착하셨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선 교센타인 본부를 이 가버나움에 두시고 활동하신 것이 아닌가 생 아주 중요한 곳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다음으로 두번째 고향 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생각됩니다. 주님이 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다 고 했는데 이 집은 대개 베드로의 집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 집에 들 어오셔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여기까지 오면서 쟁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모여드는 일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그렇게 바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그 분을 수종들고 몰려오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제자들도 비교적 한가하게 올 수 있었 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여유가 있는 상황 속에서 제자들이 가장 관 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지금 남은 여행길에서 가리치고자 했던 예수님 마음속의 교훈이나 아직까지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비밀 이 아니고, '누가 크냐' 하는 문제였다고 마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저 앞쪽으로 가시고 뚝 떨어진 곳에 서 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조금 걸음을 늦추고 예수님이 안 들릴 정도 의 낮은 소리로 서로 이런 얘기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예수님과 논쟁에 휘말리지 않은 몇몇 사람들을 남겨놓고 조금 떨어진 으 슥한 곳에 가서 '누가 크냐'는 문제를 얘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르고 계실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그 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다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물었을 때 제자들이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논쟁이 얼마나 부 끄러운 얘기이며 상황에 맞지 않은지를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누가 크냐'는 논쟁은 어떤 인간 집단에서든지 항상 있어왔 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누가 더 크 냐는 것을 잘 측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누가 더 큰 사람인가, 누가 더 존귀한 사람인가를 정확하게 판 단하는 것은 처세를 하는데 아주 중요한 무기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모인 곳에 가면 예배 때든지, 식사 때든지, 재판 때든 지, 어떤 곳이든지 누가 서열이 먼저냐 하는 것을 잘 가려야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야 서열이 먼저인 사람이나 많은 사람이 귀히 여기는 사람을 상석에다가 앉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주관하는 사람이나 심부름하는 사람이 손님들을 안내해서 자리에 앉힐 때 더 귀한 사람, 서열이 앞선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사람에게 자리 배정을 잘못하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실례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무슨 공적인 모임이나 이런 저런 모임에서 누 가 더 크냐하는 문제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다가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높은 사람에게 대접을 잘못하면 더 할 수 없는 모욕이 된다는 풍조 이므로 우리가 이 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 더 크냐하는 논쟁은 인간의 본능과 아주 부합되는 질문입니다. 인간들이 한결같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내가 좀 낫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 고 존경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 의 욕구가 자연스럽게 누가 더 크냐, 즉 저 사람이 나보다 어디가 더 나으냐 하는 논쟁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다는 것입니다. 금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영국의 로이드 죤스 목사님은 젊은 시절 에 의사가 되기 위해서 수업을 마쳤던 분입니다. 의학박사 학위까지 마치고 영국의 서어 바돌로매 병원에서 그 당시 최고의 의사로 알려진 토마스 호드라는 귀족이요, 왕식 주치의였던 분의 밑에서 수련을 하면 서 그가 가졌던 야망은 의사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공부해서 수석 조수가 되어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젊은 의사였지만 그가 손을 대면 안 낫는 병이 없다고 할 정도였 습니다.
그런데 그가 모시고 있는 선배요 스승인 호드경을 따라 상류사회의 모임에 몇 번 참석하면서 마음 속에 깊은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대의 실력자들, 당대의 영국에서 성공했다고 행세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말미에 앉아 바라보니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남을 헐뜯고 깎아 내리고 그래도 자기가 낫다고, 누가 크냐는 시비가 모일 때마다 이어지는 분위기를 본 것입니다. 당대의 최고 법률가들, 출세할 군인들, 귀족들, 의사들의 사교장소가 말입니다. 그런 분위기 그를 지켜보면서 내가 되려고 하는 것이, 내가 가고자 하는 자리가 바 로 저기인가 하는 회의에 빠지면서 그가 사람들의 육신이 병보다 영혼 의 병을 안고 촉망받던 의사이던 그가 시골로 떠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 젊은 죤스의사가 보았던 바로 그 문제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 야고보,요한, 세 사람이 헬몬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하는 광경을 보았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 중의 하나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그 장면을 본 다음에 예수님의 부활 때 까지 입을 꼭 다물고 있으라는 엄명을 예수님께로 부터 받았습니다. 지금 얘기해 봐야 아무 도움이 못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부호라 후에 말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요, 그 엄청난 광경을 베드로,야고보, 요한이 보았는데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얘기가 얼마나 하고 싶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엄청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 았고 엘리야가 나타나고 꿈에도 그리던 모세가 나타나는 광경을 보았 으므로 자랑도 하고 마음속에 끓고 있는 그런 굉장한 것들을 나누고 싶은데 그것을 말하지 말라 하시고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는 것 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인격이 아주 성숙해서 그런 문제를 잘 감당할 수 있고 소화해낼 만한 정도가 못되니 그런 엄청난 비밀을 가슴에 담 고 있기가 어땠는지 가만히 상상해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러 니 차마 그 얘기는 못하고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보지 못한 빌립더러 "야, 빌립 너 우리 주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알기나 해 그 영광 스러운 주님을 너는 못 봤잖아 내가 언젠가는 이 얘기를 하고야 말겠 지만 우리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넌 모르지" 하고 말했다면 그 얘기를 듣는 빌립이 기분이 좋았겠습니까아니, 나도 뭐 예수님이 바다야 잔잔하라 하실 때 바다가 잔잔해지는 광경도 보았고, 제가 본 것 내가 못 본 것도 별고 없는데 예수님이 좀 더 데리고 다니고 좀 더 사랑하는 것 같으니가 뽑내고 뻐기는구나"하고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 을 것입니다.그렇다고 그 제자들 가운데 도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 그만그만하게 영적으로 자라가고 있는 중인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금 누가 더 크냐는 시비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야고보, 요한도 그들의 별명이 우뢰의 아들이라 불릴 정도였으 니 성질이 급하고 덜렁거리는 사람들이니 그들인들 가만히 있겠습니 까아마 시몬을 붙들고 "시몬 네 생각에 엘리야나 모세가 지금이라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아 무슨 모세나 엘리야가 나타나만 약에 내가 모세나 엘리야를 만났다고 하면 믿겠니" 말은 못하지만 그 것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헬몬산에 같이 올라갔 던 세 제자는 객관적으로 볼 때 조건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부 출신들입니다. 그중에 바돌로매,빌립같은 사람들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바돌로매 같은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가 아닌가 생각 되는데 그는 상당한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요즘같은 표현으로 하면 국졸 출신에 고기나 잡아 먹고 살던 인간들이 예수님이 좀 가까이 한 다고 했더 지금 뭘 보았는지 모르겠고 무슨 특별교육을 받았는지 모르 지만 똑 같이 지금 한삼년간 제자로 함께 다니고 있는데, 자기는 대학 을 졸업했고 명문가의 출신인데 건방지게 산 기도 한 번 갔다 오더니 혼자 잘난척 하는 분위기에서 제자들이 그런 시비를 벌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운데를 지나 오시면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또 얘기 하셨지만 그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바로 이 사건의 주역인 베드로가 마가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묻기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7장 9절에도 심히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때 제자들의 복잡 한 마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는다, 부활한다 하지만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이해가 안되는 얘기였기 때문에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얘길 하시는가 싶지만 그들 마음에는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면 이제 무슨 일이 벌어져서 메시야 왕 국이 세워질 것 같은 화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가서 메시야로 오신 분이요, 다윗의 후손이시니까 예수님이 왕이 되시 면 도대체 누가 장관이 되고 예루살렘 시장이 될 것인가 하는 관심이 그들에게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딴 사람과 구별해서 제자 셋을 산에 데리 고 가셨으며 그들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알지 않았겠습니까 "베드로, 야고보,요한아 염려하지 말아라. 그래도 너희들이 열둘 중에 서 서열이 1,2,3, 아니냐" 그런 말씀을 한 마디라도 해 주실법 한데 그런 말씀은 없고 자기가 죽는다 하시고 부활한다 하시는 등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시니까 물어 보기도 겁이 난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러면 지금 자기들이 그리고 있는 멋 진 성공의 꿈, 이게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러니 예수님에게 물어보 기가 겁이 나는 겁니다. 꼬치꼬치 캐물어서 예수님 죽고 부활하는 얘 기의 의미를 묻고 싶어도 내가 가진 야망이 다 무너질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날아 가버리는 것이니다. 그러니 심히 근심하면서 이게 대체 어찌되는 것인가, 삼년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 면서 이제 빛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예수님 하시는 얘기가 무슨 얘긴 가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행하는 가운데 그런 염려와 무 서움과 근심, 조차도 더 이상 그들을 짓누를 수 없을 정도로 그들 마음 속에는 누가 더 크냐 하는 집착이 강하게 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삼년이상 동행을 했고 가르침을 받았고 주님의 능력 을 받아서 실제로 주님 대신의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낮은 자리로 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것자비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시는데 그의 제자들 높이 올라갈 수 있는가 하는 논쟁을 하며 주님이 가고자 하는 반대의 길을 가고자 그들끼리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는 지난 날의 부끄러운 얘기를 지금 베드로가 마가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 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데리고 주님이 지금 교회를 개척해야 됩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신약교회가 시작되어야 하는 엄청난 계획 을 주님이 지금 마음 속에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사용하시려고 하는 이 사람들은 주님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주 님은 십자가의 길로, 낮아지기 위해서 매맞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그 길을 가려고 하는데 자기들은 높아지기 위해서 누가 예루살렘의 시장 이 될 것인가 누가 국방장관이 될 것이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지금 같은 여행길을 가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무서워하고 안타까워하며 답 답해 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또 다시 가르치십니다. 주님이 인내심이 부족 한 분이었으며 아마 일찌감치 끝장을 내지 않겠습니까 3년이나 가르 쳐도 그것도 보통으로 가르친게 아닙니다.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가르 치게 아니고 삼년을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늘 같이 다니며 이 위대한 선생이 가르쳐 놓았는데도 3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이런 정도 밖에 안 되는 그들을 보시면서 주님이 또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분노의 빛도 없고 실망의 빛도 없이 또 다시 가르치십니다.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35절에 예수께서 앉으셔서 열두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선생님이 앉으시고 그 주변에 제자들이 둘러 앉는 것은 바로 그 시절 유대인들의 교실입니다. 야외든지 어디든지 선생님이 앉으면 제자들이 빌 둘러서 앉고 거기가 교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들이 지금 다스리는 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누가 더 크냐, 서열이 일번이냐 이번이냐 하는 얘기를 하고 있지만 섬기는 자가 되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 린 아이를 하나 품에 안고 예수님께서 37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어린아이라고 하는 것은 하찮은 존재를 말합니다. 요즘 우리의 관점에서는 아이들이 왕인데 하찮은 존재라니 하시겠지만 10년,20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아이들이 요즘처 럼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품에 안고 있는 그 아이는 사람을 헤아릴 때 그 수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그 냥 보잘것 없이 아주 소홀하게 생각해도 그것으로 끝인 존귀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주님이 너희들이 섬기는 자가 되 라, 종이 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헬라어는 그 시절에는 모두가 사 용하던 제2외국어 중에서 어릴 때 부터 아주 익숙하게 썼던 말이기 때문에 다들 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람아어로 어린 아이와 종이라는 말이 똑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종이 되라, 섬기는 자 가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어린 아이를 안고 바로 이 말씀을 할 때에 이 말이 아람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에게는 좀더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무엇 때문에 영접 하라는 것입니까 주님 때문에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그 런 사람을 귀히 여겨보라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하는 말을 여러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을 볼 때에 우리 가섬기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이 가 지고 있는 어떤 영향력,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나 재산이나 학벌이나 외모나 이런 저런 것 때문에 사람을 귀히 여기기도 하고 천하게 여기 기도 하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고 방식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귀히 여기기 때문에 너희가 외모를 따라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이런 아이같이 하찮은 사람 이라고 해도, 종과 같이 비천한 사람이라고 해도, 너희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들을 귀히 여기는, 그래서 그들을 돕는 자가 되고, 친절한 자가 되고, 그들에게 온유한 자가 되는 그런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약2:1-4에서는 좀 더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하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수님께서 가르쳤던 이 교훈을 초대교회에서 다시 한번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를 가지고 볼 때 얼마든지 무시하고 박대해도 괜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인간을 귀히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는 자로서 그들을 대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 너희가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섬기는 자가 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 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눅22: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박혀서 죽으시기 바로 전날 밤인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는데 또 누가 크냐는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고 누가가 기록하 고 있습니다. 그 논쟁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또한번 묵묵히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그때 행하신 일 가운데 발을 씻긴 얘기를 빼고 있는데 요한복음 13:4-20을 보면 누가 크냐는 시비를 벌이고 있는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묵묵히 옷을 벗으시고 물을 떠서 수간을 들고 "자 내가 너희의 발을 씻기마"고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3:12-14 의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 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 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남기신 교훈이 누 가 크냐하는 시비가 아니고 누가 발을 씻길 것이냐, 누가 더 작은 자 냐, 발을 씻기는 자가 사실을 더 큰자요 천국에서 그런 자에게 상급이 많을 것이다.예수께서 그 교훈을 남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두 제자와 또 또 초기의 120명 성도들에게 주셨던 이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유효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 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말 아야 하고 중요한 지위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주님이 그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이 누가 크냐는 사고 방식이 주님께로 부터온 것이 아니요 세상 사람으로 부터 온 것이요, 사탄으로 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잘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다.우리 속에 있는 본능을 부추겨 사단이 우리 자신을 존귀한 자라고 인정하도록 만들고,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평가하는 만큼 남 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만한 생각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님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고 그런 생각에 젖어 있는 우리의 사고 방식을 회개하고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것을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큰 자가 누구냐 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 발을 씻기는 자야말로 우리 주님이 보실 때 정말 큰 자라 고 여기시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 길이 아니면 우리에게 바른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그 길로 가고자 우리 자신이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단한다고 해서 내가 그 길로 한번 가 봐야겠 다고 결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발을 씻기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대학생이 여러해 전에 제게 상담했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대단 히 머리가 좋고 똑똑해서 아주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고 학급에서는 계속 장학생인 그 학생이 와서 하는 말이 자기가 아무리 다른 친구들 을 나 보다 낫게 여기려고 해도 그래서 자기가 낮은 자리에서 그 친구 를 평가하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가 낫다는 것입니다. 니고 낮은 자리에 서서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려고 생각해봐 도 자기가 낫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래도 친절하게 다 른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는 선량한 마음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공부도 자기가 장학생이니 도저히 남을 낫게 여기자는 것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너무 잘 나서 불행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런 경험을 많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나서가 아니고 부족한 자여도 우리가 쉽 게 볼 수 있는 인간의 약점을 주변 사람들에게서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은, 사람의 약점이 아니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한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가운데 있기 때문에, 또는 그를 사랑하고 귀해 여 기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돕는 자가 되고 친절히 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실을 깨닫고 그런 자가 되고자 하지만 우리에 게서 그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피나는 교육을 받지 않습니까 어느 선 생님이 그 엄한 질서가 있고 서열이 분명한 사회에서 그 더려운 발을 손수 씻긴단 말입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님은 혁명가엿습니다. 총을 든 혁명가가 아니고 수건을 들고 남의 발을 씻기는 놀라운 혁명가였습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그 광경을 평생동안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처럼 살기를 원하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기를 원하 고 또 심지어는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들이어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그 일을 위해서 발을 씻기는 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언제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받게 됩니까사도행전 2장에 성령님이 그들에 게 충만하게 임하실 때에 참으로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섬 기는 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이 꼭 되고야 말겠다, 되어야지, 그러나 계속해서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사도행 전 2장에서 처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기 시작할 때 그들이 참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되기 시 작하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초기의 성도들도 꼭 그렇게 살았 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 남긴 저서에서 집사에 관한 것 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집사는 흠이 없고 주님의 진리를 따라 살며. 중략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매듭을 짓고 있습니다. 집사 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을 받은 모든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서 예수님이 그 렇게 존귀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발을 씻기셨던 그 모습을 본 받아서 우리가 그 길을 가야하고 그 길을 가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시기를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오늘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일을 우리도 행하기를 원하고 이 삶을 살기를 원합니까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우리 가운데 이미 와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고 주장하셔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주시고 수고를 해도 그 수고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그런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구할 때에 약속하 신 그 분이 그 약속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약 속을 믿지 않는 자에게, 그 약속을 바라보면서 구하지 않는 자에게 그 분께서 능력을 주고 행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친히 발을 씻기시고 깨닫지 못하고 우매한 그 제자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깨우치시고 마침내 성령님의 능력 을 덧입혀서 주님 자신과 똑 같은 모습으로 그 땅에 살게 하심으로 말 미암아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놀랍게 증거되고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행하셨던 그 주님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그대로 역사하고 계신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이 시간에 다같이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우리 마음에 내가 섬겨야 할 자가 누군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사는 수십억의 인구를 다 섬기는 그런 자리에 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혹시 증오의 대상이 되고 미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 게 특별히 우리가 섬겨야 하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의 어린 아이 하나처럼 우리가 무시해 버리고 살아온 사람들 처럼 우리가 그러지 말았었야 했을, 그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아픔을 주시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마음에 떠 오릅니까 우리의 삶이 현장을 구체적으로 마음 속에 그리면서 이 시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오셔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능력을 달라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고 이 시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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