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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 (눅22:24-30)

본문

눅 22장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미리 준비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가롯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반역한 사실과 베드로 요한에게 유월절만찬을 준비할 것을 명하신 이후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그들 중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일 후에 베드로가 세번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미리 경고하셨고 이 사실은 예수님이 붙잡혀 가신 직후에 그대로 이뤄졌다. 예수를 잡아 간 후에 사람들은 예수를 희롱하였다.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네가 선지자라면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희롱할 뿐 아니라 많은 말로 욕하였다는 사실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누가는 본문의 내용을 성만찬 직후에 놓았다. 누가에 의하면 '누가 크냐' 하는 이 문제가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닌 것으로 본다. 누가는 9:46 이하에서 이러한 변론이 과거에도 있었던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들 중에 오직 마가만은 이 사건이 길을 걸어 가는 중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막 9:34) 마태는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중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주님의 나라에서 내 아들들을 주님의 좌우에 앉게 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말씀 하시면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가르쳐 주셨다. 야고보 형제가 로중에서 주의 보좌 좌우편을 구하였든지, 최후의 만찬에서 스승을 팔 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든지 이 사건 속에서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 중에서 이 문제가 다툼이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툼은 .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타나기 마련이다. 성경에 나타난 몇가지 다툼의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잠 6:14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끄치느니라. 잠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 16:28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잠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 18:6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약 4: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고전 3: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 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성경에 나타난 다툼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아브라함과 조카 롯 (창 13:6-9)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후에 애급에 다녀 온 일이 있었다. 이유는 가나안 땅의 기근 때문이었다. 그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를 가지고 오게 되었는데 그 때에 롯도 함께 동행하였다. 창세기 기자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다고 말한다. 그의 풍부한 소유는 다름아닌 바로가 준 선물이었다. 그는 운 좋게도 갑작스러운 부자가 되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벧엘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았다. 벧엘은 그가 전에 장막을 쳤던 곳이다.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처음으로 제단을 쌓기도 한 곳이었다.
1) 아브라함은 겸손과 참회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다.
2) 아브라함은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을 찾아 감사를 드렸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처음 가졌던 감격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가 처음 그리스도를 전해 준 그 사람, 처음 나갔던 교회, 처음으로 은혜 받았던 그날 등등은 누구나 잊을 수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지금 자신을 볼 때 성공 같고, 은혜받은 것 같고, 만사형통인 것 같지만 사실 자신이 가졌던 부끄러움을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서 헌신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군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군은 누구든지 처음으로 가졌던 그 감격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가지 기억할 것은 이렇게 은혜생활을 하는 아브라함에게 언제나 좋은 일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툰 것이다. 목자들의 다툼은 다름 아니라 그들의 거한 곳이 양과 소와 장막을 치기에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영역의 싸움이다. 싸움은 골육이라고 없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다투지 말자 !'고 롯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아브라함은 삼촌이기에 최대한 양보를 하였다. 사람들이 누구나 다툼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일 뿐 다툼은 언제나 계속되고 있다. 이 다툼이 없는 세상은 과연 이상론일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매우 평화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밖으로 보이는 평화의 이면에는 매우 처절할 만큼 안으로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과 가족 어느 단체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경쟁과 싸움은 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아브라함에게 숙질간에 있었던 싸움은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할 것은 그 싸움을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골육이라.'바우이 교수는 그의 주석에서 인간이 가진 세가지 욕망을 이렇게 말하였다. 창피하게 살고 싶지 않은 욕망 공포와 두려움을 모르고 살고 싶은 욕망 자기와 자녀들이 평화로운 가운데 일하며 마음놓고 살 수 있는 욕망. 아브라함은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골육이 아니냐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집안 싸움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롯은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대로 소알 땅을 선택하였다. 자기 중심의 사람이라고 할 롯은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급 땅과 같은' 자기의 운명을 맡길 곳이 결코 못되는 소돔을 택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늘을 보며 땅을 보며 눈물을 삼키며 떠나가는 조카 롯을 등졌다. 이것이 인생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게 아닌데 하면서 머리를 흔들며 갈 길을 간 것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싸움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유는 '한 골육'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가족이든지 싸우는 것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한 어버이를 모신 '피붙이'이기 때문이다. 부모 앞에서 싸우는 것은 부모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러한 다툼 중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그는 롯과 헤어진 이후 헤브론에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종과 횡으로 땅을 네게 주리라 약속하셨다. 롯은 큰 즐거움으로 삼촌을 떠났으나 가족과 재산을 잃는 큰 불행으로 생을 끝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비록 눈에 보이는 즐거움은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한 소망이 넘쳤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롯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2. 이스라엘 자손과 모세 (출 17:2-3) 이 일은 르비딤에서 있었던 일이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당신이 지도자라면 물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백성들은 왜 당신이 우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어 광야에서 생축과 함께 목말라 죽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5세기 로마의 정치가이며 위대한 사상가였던 보에티우스(Boetius)는 사람마다 모든 사물이 변하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행운은 계속되기를 바라는 탐욕자들이라고 나무랐다. 그는 말하기를 '하늘은 밝은 대낮을 이루었다가 또 그것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고 계절은 지면을 꽃과 열매로 장식하였다가 비 바람과 추위로 휘저어 놓으며 바다는 때때로 잔잔한 수면으로 사람을 손짓하나 어떤 때에는 거센 풍랑을 일으켜 삼킬듯이 덤벼든다.
그런데 채울 길 없는 인간의 욕망은 운명이 그 습성과는 달리 다른 어떤 항구성을 가지도록 구속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다툼은 끝없는 욕망에서 계속된다. 이러한 욕망은 마치 거미가 으슥한 곳에 줄을 쳐놓고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서 잔인하기까지 하다. 모세와 다툰 사람들은 심지어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면서 여호와를 시험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었다. 출 17:4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하면서 상황이 매우 위급함을 호소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의 호소를 기억하셨다.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치게 하셨고 반석은 물을 내 백성으로 마시게 하셨다. 우리에게 위급한 상황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나지 않음과 같다. 루즈벨트는 소아마비환자였다. 그러나 그는 불편함을 개의치않고 대통령에 도전하였고 그 결과 그는 네번이나 대통령직을 맡았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면 그것을 헤쳐나갈 길이 전혀 없지 아니하다. 반석에서 물을 내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듯이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뜻 밖의 길을 준비하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다툼 자체에 머무르는 것 보다도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호소하는 것이 어려움을 당한 모든 사람에게 요구된다. 다툼보다도 엎드림이 더 낫다.
3.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교회가 파송한 초대 선교사이다.(행 13:1-3) 선교사로서의 그들의 활동은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 전하는 길은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이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는 주장때문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있었다. 말하자면 교리적인 다툼이었다. 예루살렘총회는 이 구원론 문제를 가지고 모였다. 예루살렘 총회는 행 15:11 에 기록된대로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더 이상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를 괴롭게 말라고 결정한 후 유다와 실라가 함께 바울 바나바와 동행하여 안디옥까지 들어가서 이 결정된 사실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다툼이란 감정이 앞서서는 안된다. 인간이 감정의 동물인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란 이성에 의하여 지배되어야 한다. 마틴 루터는 '만일 우리의 이성이 신앙으로 다스려지면 이성은 훌륭하게 봉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성은 신앙으로 부터 생명을 받을 때 더욱 자랑스러운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함께 동역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마가라 하는 요한의 문제로 다툰 것이 행 16:36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바나바는 그를 데리고 가자 하였으나 바울은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밤빌리아에서 자기를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않았던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바울이 실라와 동행한 것은 이 사건이 있은 직후였다. 누가 크냐 이 말은 누가 더 나은가 누가 더 훌륭한가를 묻는 말이다. 누가 더 힘이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세상은 다스리고 주관하는 왕들과 권세자 집권자들을 은인, 공로자, 각하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 예수님은 앉아서 먹는 자가 크다고 스스로 답하시면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말씀 하셨다. 마땅히 대접받으셔야 할 선생님이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셨다. 누가 크냐 하고 우쭐대던 제자들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머쓱해 졌겠는가 똑똑한체 한 롯이 만난 결국이 무엇인가 모세를 대적하여 다툰 백성들이나 누가 크냐하고 서로 다툰 제자들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부끄러움 뿐 아닌가 바울은 갈 5:15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 빌 2:3에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 하였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섬기는 자라 하셨다. 그러나 지금 온 세상이 그를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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