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주를 더 사랑하는가? (눅7:36-50)
본문
I. 이 말씀은 한 바리새인 시 몬의 집에서 죄 있는 한 여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의 사회에는 이른바 명사(名士)들을 초대하는 관례들이 있었습니다. 한 바리 새인이었던 시몬이 젊은 갈릴리 사람 예수를 초청하였습니다(눅 7:36). 그가 어떻게 당시 바리새인 종파에서 문제의 인물로 주목의 대 상이 되고 있는 예수를 자기와 함 께 잡수시기를 청했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초청 받은 그 집안 에서 뜻밖의 사태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그 동네에서 이미 창녀라고 하는 딱지가 붙은 죄인인 한 여자 가 예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그 눈물로 주님의 발등상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 씻 었습니다. 뿐아니라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그녀가 가지고 온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습니다(눅 7:37-38).
예수는 불청객이었던 이런 죄인 여자의 소행 앞에 침묵으로 일관했 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속으로 예수 를 힐난하였습니다. '예수가 과연 소문대로 선지자인가 만약 그가 선지자였다고 하면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나 자기를 만지는 이 사람이 죄 있는 여자인 줄 알았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 7:39). 그는 소리 없는 멸시의 총알을 예수에게 겨누고 말았습니다(눅 7:39).
이때 예수는 그 무거운 침묵의 공간을 깨치고 입을 열어
"시몬 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 멋 진 부채 탕감 비유를 통하여 '사죄 은총의 진리'를 공개하였습니다.
"많은 돈을 가진 한 사람이 어떤 가난한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 나리온을, 또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준 일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이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채주는 두 사람 모두에게 그 빚진 돈을 받지 않겠다고 탕감해 주었다. 이런 경우 그 두 사람 가운 데서 누가 그 채주를 더 사랑하 겠느냐"(눅 7:41-42) 이렇게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시몬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시몬의 대답은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십 데나리온보다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가 그 빚을 탕감해 준 채주에게 더 고마움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눅 7:43). 예수님은 시몬의 판단과 대 답이 없다고 긍정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하고 싶은 말씀 의 중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시몬에게 너 지금 이 여자를 보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초청되 어 머물고 계시는 그 장소는 그 집 뜰안입니다. 당시 유복한 바리 새인들의 집들은 그 가운데가 오목 하게 활짝 트인 뜰을 끼고 사방으 로 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흔 히 그런 집의 마당에는 화원과 우 물이 있었고, 특별한 경우에는 거 기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초대받은 손님은 그 집주인으로부터 세 가지 경우의 예 (禮)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그 집 에 들어오는 손님의 어깨에 자기 손을 얹고 환영과 평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먼지투성이가 된 손님의 발을 항아 리에 준비된 물로 씻어 주는 일이 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올리브향 을 뿌려 손님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이런 예(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청객의 그 여자는 항아리의 물이 아닌 마음 속에서부터 솟아난 눈물로 예수 의 발을 씻었다고 하였습니다. 수 건이 아닌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닦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합 을 깨뜨려 향유를 붓고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눅 7:44-4
6).
그녀가 이렇게 하게 된 큰 이유 를 예수님은 분명히 하였습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 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고 하였습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대답입니다.
누가 주(예수)를 더 사랑하는가 예수에게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주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였 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오십 데 나리온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로 비유했습니다(눅 7:41).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녀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눅 7:43). 또 '많은 죄' (눅 7:47)를 지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50데나리온과 500데 나리온 빚진 자 두 사람 가운데 그 채주를 '더 사랑하는 자'는 '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가리 켜 말한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자'라고 하 였습니다.
Ⅱ. 이 말씀은 예수는 사죄의 구 주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8절에 '이에 여 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 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사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가 누구이기 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눅 7:49). 사람의 죄를 사해 주는 일은 하나님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 인 류의 많은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결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강세(降世)의 목적은 정 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모토(motto)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예수는 이 세상에 서의 인류의 이상향을 건설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어떤 윤리적 혁신이나 교육적 계몽이나 사상적 이데올로기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론 군사적 문제나 영 토의 주권 문제를 가지고 오신 것 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8:36).
그는 더 확실하게 말씀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건강한 자 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 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또 마태복음 1장 21절에는 '아 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 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선언이었습니다(롬 6:23). 모든 인 류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 암아 이 사망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롬 5:12-21). 그래서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와 죄의 결과인 사 망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죄값은 금이나 은으로 보상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1:18). 그 죄값을 대신 할 것은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 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 다고 하였습니다(벧전 1:19). 그래서 예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이 세상 에 오셨습니다(막 10:4
5). 그래서 자신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 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 었나니'(벧전 2:24)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복음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소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 로 여기에 기독교의 우주성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민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만민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 것입니다(눅 2:10). 바 로 시몬의 동네에 있는 죄 있는 그녀는 이러한 사죄의 주를 만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Ⅲ. 이 말씀은 보은적(報恩的) 감 격의 사랑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본문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 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였 습니다(눅 7:47).
우리는 이 성경을 오해하지 말 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학자나 잘못된 개신교 학자들 중에는 '그 녀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죄사함도 많이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의 인간공덕설 교리입니다. 곧 이 행득구주의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되느냐, 결과가 되느냐에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죄사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7장 50 절에 그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떠난 사랑이 용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500데나리 온의 많은 빚을 탕감 받았기 때문에 그 채주를 더 사랑하고 감사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음의 대명사 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죄 받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를 더 사랑하게 됨은 믿음에서 오는 사죄(속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보 은적 사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몬의 동네에 죄 있는 한 여자! 그녀는 벌써 예수께 대한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았음 을 알고 불청객으로 갑자기 주님 앞에 나타난 행동은 벌써 믿음에서 나온 보은적 사랑의 행동입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죄인의 구 주라고 하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섭리적인 은혜 였습니다(엡 2:8).
그러므로 그녀가 1 예수께 나오 고
2 예수의 발 곁에 서고 3 울 며
4 그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 고 5 자기 머리털로 씻고 6 그 발에 입맞추고 7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는 행동은 바로 많은 사 죄(구원)의 은총에 대한 '보은적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 플루머(Plummer)는 '그리스도 자신은 그녀에게 회개와 사죄 의 확신을 주었고 그 확신은 또 그녀에게 사랑과 감은의 정을 격동 시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복음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기독교가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기독교 가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과연 기독교가 죄인의 종교 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죄인 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의인과는 상관이 없 습니다. 마치 건강한 자가 의사와 상관이 없음과 같습니다. 병든 자 가 의사와 상관이 있음과 같습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장소 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죄 를 사함 받은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다.'고 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또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가 됩니다(요일 1:8, 10).
바울은 주님의 사도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 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 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5).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 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하였 습니다. 세리는 성전에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 고 하였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는 '나보다 가련하고 비 참한 죄인은 다시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베푸시는 큰 사죄(구원)의 은총이 따라옵니다. 그 결과 마침내 탕감 받은 감 격의 힘이 주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2,000년 기독교가 세상을 이긴 비결입니다.
누가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망에 이르는 많은 죄, 큰 죄 를 사함 받은 사람들이 주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순교에 까지 이르는 불사성(不死性)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 경향의 오늘 은 더 주를 사랑하는 은총 입은 자들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입니다. 500데나리온이나 되는 크고 많 은 부채를 탕감 받은 자들의 감격 적 보은의 사랑이 오늘의 경향을 있게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초청 받은 그 집안 에서 뜻밖의 사태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그 동네에서 이미 창녀라고 하는 딱지가 붙은 죄인인 한 여자 가 예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발 곁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흘러내리는 그 눈물로 주님의 발등상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을 풀어 씻 었습니다. 뿐아니라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그녀가 가지고 온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었습니다(눅 7:37-38).
예수는 불청객이었던 이런 죄인 여자의 소행 앞에 침묵으로 일관했 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마음속으로 예수 를 힐난하였습니다. '예수가 과연 소문대로 선지자인가 만약 그가 선지자였다고 하면 지금 자기 앞에 나타나 자기를 만지는 이 사람이 죄 있는 여자인 줄 알았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 7:39). 그는 소리 없는 멸시의 총알을 예수에게 겨누고 말았습니다(눅 7:39).
이때 예수는 그 무거운 침묵의 공간을 깨치고 입을 열어
"시몬 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 멋 진 부채 탕감 비유를 통하여 '사죄 은총의 진리'를 공개하였습니다.
"많은 돈을 가진 한 사람이 어떤 가난한 한 사람에게는 오백 데 나리온을, 또한 사람에게는 오십 데나리온을 빌려준 일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이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채주는 두 사람 모두에게 그 빚진 돈을 받지 않겠다고 탕감해 주었다. 이런 경우 그 두 사람 가운 데서 누가 그 채주를 더 사랑하 겠느냐"(눅 7:41-42) 이렇게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시몬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시몬의 대답은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십 데나리온보다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가 그 빚을 탕감해 준 채주에게 더 고마움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라는 내용입니다(눅 7:43). 예수님은 시몬의 판단과 대 답이 없다고 긍정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하고 싶은 말씀 의 중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 시몬에게 너 지금 이 여자를 보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예수께서 초청되 어 머물고 계시는 그 장소는 그 집 뜰안입니다. 당시 유복한 바리 새인들의 집들은 그 가운데가 오목 하게 활짝 트인 뜰을 끼고 사방으 로 건물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흔 히 그런 집의 마당에는 화원과 우 물이 있었고, 특별한 경우에는 거 기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초대받은 손님은 그 집주인으로부터 세 가지 경우의 예 (禮)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그 집 에 들어오는 손님의 어깨에 자기 손을 얹고 환영과 평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먼지투성이가 된 손님의 발을 항아 리에 준비된 물로 씻어 주는 일이 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올리브향 을 뿌려 손님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초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이런 예(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청객의 그 여자는 항아리의 물이 아닌 마음 속에서부터 솟아난 눈물로 예수 의 발을 씻었다고 하였습니다. 수 건이 아닌 자기 머리털을 풀어서 닦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합 을 깨뜨려 향유를 붓고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눅 7:44-4
6).
그녀가 이렇게 하게 된 큰 이유 를 예수님은 분명히 하였습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 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고 하였습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대답입니다.
누가 주(예수)를 더 사랑하는가 예수에게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 주를 더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하였 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오십 데 나리온이 아닌 그보다 훨씬 많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로 비유했습니다(눅 7:41).
예수님은 시몬에게 그녀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눅 7:43). 또 '많은 죄' (눅 7:47)를 지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50데나리온과 500데 나리온 빚진 자 두 사람 가운데 그 채주를 '더 사랑하는 자'는 '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라고 가리 켜 말한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자'라고 하 였습니다.
Ⅱ. 이 말씀은 예수는 사죄의 구 주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48절에 '이에 여 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 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사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가 누구이기 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눅 7:49). 사람의 죄를 사해 주는 일은 하나님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이 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 인 류의 많은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결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강세(降世)의 목적은 정 치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모토(motto)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결코 예수는 이 세상에 서의 인류의 이상향을 건설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어떤 윤리적 혁신이나 교육적 계몽이나 사상적 이데올로기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물론 군사적 문제나 영 토의 주권 문제를 가지고 오신 것 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8:36).
그는 더 확실하게 말씀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건강한 자 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 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또 마태복음 1장 21절에는 '아 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 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선언이었습니다(롬 6:23). 모든 인 류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 암아 이 사망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롬 5:12-21). 그래서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와 죄의 결과인 사 망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죄값은 금이나 은으로 보상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1:18). 그 죄값을 대신 할 것은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 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 없 다고 하였습니다(벧전 1:19). 그래서 예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이 세상 에 오셨습니다(막 10:4
5). 그래서 자신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 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 었나니'(벧전 2:24)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복음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소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바 로 여기에 기독교의 우주성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민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만민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된 것입니다(눅 2:10). 바 로 시몬의 동네에 있는 죄 있는 그녀는 이러한 사죄의 주를 만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Ⅲ. 이 말씀은 보은적(報恩的) 감 격의 사랑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본문을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 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하였 습니다(눅 7:47).
우리는 이 성경을 오해하지 말 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학자나 잘못된 개신교 학자들 중에는 '그 녀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많았기 때문에 죄사함도 많이 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의 인간공덕설 교리입니다. 곧 이 행득구주의입니다.
문제는 그녀의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되느냐, 결과가 되느냐에 있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죄사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7장 50 절에 그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떠난 사랑이 용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500데나리 온의 많은 빚을 탕감 받았기 때문에 그 채주를 더 사랑하고 감사하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믿음의 대명사 인 것입니다. 사랑은 사죄 받은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를 더 사랑하게 됨은 믿음에서 오는 사죄(속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보 은적 사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몬의 동네에 죄 있는 한 여자! 그녀는 벌써 예수께 대한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았음 을 알고 불청객으로 갑자기 주님 앞에 나타난 행동은 벌써 믿음에서 나온 보은적 사랑의 행동입니다. 그녀는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예수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죄인의 구 주라고 하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섭리적인 은혜 였습니다(엡 2:8).
그러므로 그녀가 1 예수께 나오 고
2 예수의 발 곁에 서고 3 울 며
4 그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 고 5 자기 머리털로 씻고 6 그 발에 입맞추고 7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는 행동은 바로 많은 사 죄(구원)의 은총에 대한 '보은적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석가 플루머(Plummer)는 '그리스도 자신은 그녀에게 회개와 사죄 의 확신을 주었고 그 확신은 또 그녀에게 사랑과 감은의 정을 격동 시킨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복음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기독교가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기독교 가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과연 기독교가 죄인의 종교 가 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죄인 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의인과는 상관이 없 습니다. 마치 건강한 자가 의사와 상관이 없음과 같습니다. 병든 자 가 의사와 상관이 있음과 같습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장소 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많은 죄 를 사함 받은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 없다.'고 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또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가 됩니다(요일 1:8, 10).
바울은 주님의 사도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 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 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 1:15).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 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하였 습니다. 세리는 성전에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 고 하였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는 '나보다 가련하고 비 참한 죄인은 다시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베푸시는 큰 사죄(구원)의 은총이 따라옵니다. 그 결과 마침내 탕감 받은 감 격의 힘이 주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2,000년 기독교가 세상을 이긴 비결입니다.
누가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망에 이르는 많은 죄, 큰 죄 를 사함 받은 사람들이 주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순교에 까지 이르는 불사성(不死性)의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 경향의 오늘 은 더 주를 사랑하는 은총 입은 자들로 말미암아 있게 된 것입니다. 500데나리온이나 되는 크고 많 은 부채를 탕감 받은 자들의 감격 적 보은의 사랑이 오늘의 경향을 있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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