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주를 맞이 할 수 있는가? (벧후3:8-13)
본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누가 주를 맞이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해 드리도 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하늘가 에는 찬란한 별이 떴습니다. 그 별은 한 아이가 누워 있는 마굿간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 마굿간에 누워 있던 한 아이가 다름아닌 우리 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셨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세 명의 박사가 그 별의 의미를 알아보 고 아기 예수를 찾아와 그분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마굿간에서 탄생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장하여 청년이 되매 말씀을 증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전하시는 말씀은 감동적인 말이나 선동적인 말, 철학적인 영감을 주는 그러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리는, 눈먼 자를 보게 하는, 소멸의 가치 를 향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진정한 가치를 발견케 하는, 죽을 수밖 에 없는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유한의 차원에서 무 한의 차원으로 차원을 옮겨 주는,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이 모든 세 계를 포함해서 초월케 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은 석가나 공 자의 말같이 인간적이고 상징적인 어떠한 철학적인 말이 아닌, 역사 의 시간 속에 흘러가 버리는 것에 지나는 말의 증거가 아닌 실제적 으로 살아 있는 생명 그 자체의 말씀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말은 모두다 시간의 한계에 매 여 있으나 그분의 말씀은 영원의 차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이 모든 세계를 포함해서 초월케 하는 역사를 이루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 안에 살아 계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우리를 통하여 성취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한도끝도없습니다.
그런데 그중 그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그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마지막을 향해 맞 춰진 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 다름아닌 인류역사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렇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처음과 끝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의 역사가 인류 역사의 처음과 끝을 다 가지고 있는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탄생)은 준비된(예정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오묘하고 치밀하였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에 앞서서 율법을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사용하기 이전에 먼저 순종케 하기 위한 성결의 틀의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율법을 먼저 보내셔서 순종케 하기 위한 성결의 틀을 확보하 신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순종의 목적과 방향의 완성을 이 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갖는 목적과 방향은 사랑과 구원의 성취가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실제적인 목적은 사단의 멸망과 잃어버린 왕국의 재건을 위함 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재건 이란 그 나라와 그 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불멸의 종교가 되는 이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와옴을 볼수록 성탄절은 저에게 즐거움보다도 두려운 생각을 앞서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은 성경을 통해서 증명된 역사이자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증명된 아 주 명확한 역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또한 성경을 통해서 증명되는 역사이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 증명 되는 확실한 역사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교회시대의 불멸의 최대 이슈(Issue 관심사)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전히 준비하여 주를 맞이할 수 있는가"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과연 2000년 전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만을 상상하는 자들에게서 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상상되어질 수 있을까요 심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복음의 시작과 끝의 목적이 무엇 인지, 즉 복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목적과 방향을 알고 믿는 자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믿는 자들 이, 그것을 간파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냐는 것입니다. 수많 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파악지도 못하고 있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온전한 관계 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이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왜 독생자를 보내어 피를 흘려 죽게 하시면서까지 인간에게 접근하실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인데, 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알고 믿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요한 복음 17장의 기도문을 잘 살펴 보면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되는 이유와 목적, 우리를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와 영광이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현 교계는 복음을 이해,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어떠한 것이 가치있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가 치없는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지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의 일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도덕 이나 교양이나 지식이라는 토양 아래 예수 그리스도 초림 당시의 율 법사들과 제사자들 같이 영적 장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영적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보다는 그저 지식 인으로서, 교양인으로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가 아닌 생명이 없는 종교로 변해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게 그지 없습니다. 지금 현 교계가 겪고 있는 말씀의 침체 현상이라든지 영적인 정체 현상은 종말적 신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그 외에 여 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주된 원인은 하나님의 시간에 교계 의 시간이 역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정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과 교계의 시간이 서로 거꾸 로 흐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시간이 12시 5분 전을 가 리키고 있으면 이 시대의 교계의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면서 시간의 역행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면 기독교는 어떠한 성인들의 교리를 전하는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불 멸(영원한)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이 모든 세계를 포함해서 초월하게 하는 대단한 힘을 지 닙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힘으 로서 기독교의 역사 안에 세상의 끝이 다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불멸(영원)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핵인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을 잃고 있습니다. 부활과 재림은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 기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지하 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의 혹독한 핍박 속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 듯 그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과 자나깨나 예수 그리스도 오실 날만을 바라는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그들이 인내하며 순교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과 재림은 어떠한 방법적인 것이 아니요, 실제적인 것입니다. "오늘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종교적 위기를 겪게 된다면 신앙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크리스챤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할 때 마다 참으로 걱정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장 9절로 10절에는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 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 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 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는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교회시대의 최대의 이슈(Issue 관심사)는 "누 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 초림 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제사장들과 율 법사들의 복제인간격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 의 재림을 사모하는 것이 주기적인 과대망상일까요 허황된 것일까 요 편집증적 증상일까요 아닙니다. 비록 현실적인 부딪힘(마찰)이 있을지라도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잃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은 마지막 가치인 파멸적인 사랑을 드릴 때입니다. 성경(말씀)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 신약은 하나님 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작전서입니다.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 림과 교회시대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나 실제적으로는둘째 아담인 우리를 완성시켜 마귀를 박멸하기 위한 아주 정밀한 설계도 와 같이 짜여진 작전서인 것입니다.둘째 아담이 이룰 가장 중요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때에 성취가 되는데, 그 역사가 다름아닌 사단의 멸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기성교인들이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 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곧 오십니다. 지금은 깨어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성화를 이룹시다."라고 전도를 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나 가서 전하라. 왜 지금이 기도해야 될 때라고 하면서 불안을 조성 하는냐, 혹시 이단이 아니냐"라는 식의 말을 하는 한심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재림과 부활을 설교의 장식으로나 사용하고 말장 난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은 부활과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판 단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율법사들과 제사장들에게 옥 합을 깬 여인을 판단할 자격이 없음과 같습니다. 제사장들과 율법사 들은 옥합을 깬 여인을 판단했습니다. 하나님 집의 주인이, 하나님 의 종이라 하는 사람들이 영적 장님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그분을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분을 주라고 인정 못 하고 있을 때 창녀인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바라 보고 그 발 앞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예비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의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종들과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오시 고 있는데도 향유 옥합에 향유를 차고 넘치도록 채우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 향유 옥합에 향유가 더 채워져야 하는 것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박살이 나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파멸적 사랑의 가치가 표출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파멸적 사랑의 가치가 이 마지막 때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음으로써 향유 옥합에 향유를 채우려고만 하는 때늦은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원래는 향유 옥합에 향유를 채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박살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이목이나 원칙적인 것을 겁내한다면 마지막 때의 가치인 파멸적 사랑의 가치는 예비될 수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깨어 준비합시다. 기도합시다."라고 외치는 부류이고, 한 부류는 "내 신앙에만 충실하면 충분 히 천국에 갈 수 있어. 세상이 무너져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 야 해."라고 생각하는 부류입니다. 이 두 부류에 차이가 있다면 전 자는 너무 현실적이고, 후자는 너무 안일하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나머지 지금 돌아가는 시대적 상황을 성경의 예 언서에 빗대어 바라보는가 하면 예언의 성취의 척도인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거의 다 이루어짐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쯤 오시겠구나."라는 예측까지도 합니다. 반면에 후자는 "지금이 꼭 그런 생각을 해야만 될 때인가 불안감을 가지고 신 앙생활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저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지 상 관없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돼. 세상이 무너져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어야지"라고 하면서 세상 원리를 신앙에 적용시키면서 생활합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이 두 부류 중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지는 불보듯 뻔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깨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면 마 지막 때임을 정의하는 자체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은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는데도 그들이 모 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분별은 아 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세상 사람들은 시대를 분별할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하고 깨어 기도하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도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누가복음 12장 5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시대적 인 상황과 성경의 예언의 성취를 볼 때에,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가까웠음을 외치는 것은 주기적인 과 대망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사람들을 무 조건 이단이고 사이비라 못박는 사람들은 참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 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나도 쉽게 이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말을 신봉한 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적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고 바라는 것이지 세상의 종말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을지라도 지금의 이 시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 앞에 이른 시기라는 것은 우리가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적 신앙이 갖는 특수하고 필연적인 시대분별과 또 대 비방식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예비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외치는 행위보다도 내 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할지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식의 말로 성도들을 자꾸 세상으로 내모는 그런 행위가 더 삐뚤어진 행위임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될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3장 11절-12절에는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 고 간절히 사모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 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지 않고는 성화란 이룰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믿음까지도 잃어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긴장감과 소망은 재림신앙(부활신앙)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입니다. 우리가 땅으로는 가치없는 것들에 대한 경계를, 하늘로는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종말적 신앙이 단순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종말적 신앙이 현시대적 상황에서 비 롯된 것이라면 이단시할 수 있으나 신앙의 중심인 부활과 재림에 대 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단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 은 사람들이 종말적 신앙을 주기적인 과대망상이라고 하며 너무나도 쉽게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핵을 이루어왔던 것이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이었기 때문에 부활 과 재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 종말적 신앙은 이단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 시대 종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 전히 준비하여 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부활과 재림 에 대한 신앙으로 핵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밝히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에게 팽배해 있는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위 기의식의 팽배로부터 비롯된 종말론<<즉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혼 란하므로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종말론>>은 일반론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지금 이 시대를 말세라고 말합니다. 예언에 따른 단 순한 해석이나 시대의 조명에 따른 일반론적 종말론으로는 다시 오 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반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게 하는 기반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 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시대에 맞게 내려지는 시 대적인 복음으로서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때를 온전히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말적 신앙이 일반론에 의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반론에 의한 종말적 신앙은 주기적 과대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적인 복음-전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며, 전함을 받는 자는 수용하기 힘든 복음. 성경에는 그 시대에 맞게 내려질 시대적인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증 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 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 야 하리라 하더라.(요한 계시록 10장 8-11절)"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시대적인 복음을 내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각 시대시대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음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율법 과 맥을 같이 하였듯이 교회시대 마지막 때를 외치는 복음이기도 하 지만 마지막 때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한 복음이기도 합니다. 요한 계시록 10 장을 보면 이 복음은 다시 예언하여야 할 복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대적인 복음이 새로운 복음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시대적인 복음이 있었습니다. 노아 때에는 노아에게 내려진 메시지가 있었고, 출애굽 시대에는 모세를 통하여 내려온 메시지가 있었으며, 신약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내려온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각 시대마다 내려진 복음이 있었는데 그 복음은 한 줄기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그 시대시 대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갔습니다. 시대적인 복음은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라는 말씀처럼 전하는 자에 게 핍박이, 전함을 받는 자에게는 넓은 수용의 틀이 요구되었습니다.
오늘을 준비해야 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대해 히브리서 3장 12절로 15절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히브리서 3장 15절에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데 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불평과 원망으로 일 관했습니다. 항상 노하심을 격동케 하는 쪽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 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지금은 하늘문이 닫히고 있고 또 은혜의 시대의 마지막이 가까워지 고 있는 때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지 못 한 자들의 모습을 "심판 때에 밖에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 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 인들은 고린도전서 10장 1-11절에 기록된 말씀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 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 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 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 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 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내가 주를 맞이하지 못 하겠는가"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에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라고 우리에게 밝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일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 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 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아모스 3장 7-8절)" 마지막 때 깨어 있는 종들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진실한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의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잠시 "누가 주를 맞이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끝 까지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신앙을 지킴으로써 신랑으로 오 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중에 맞이하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분이 전하시는 말씀은 감동적인 말이나 선동적인 말, 철학적인 영감을 주는 그러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죽은 영을 살리는, 눈먼 자를 보게 하는, 소멸의 가치 를 향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진정한 가치를 발견케 하는, 죽을 수밖 에 없는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유한의 차원에서 무 한의 차원으로 차원을 옮겨 주는,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이 모든 세 계를 포함해서 초월케 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은 석가나 공 자의 말같이 인간적이고 상징적인 어떠한 철학적인 말이 아닌, 역사 의 시간 속에 흘러가 버리는 것에 지나는 말의 증거가 아닌 실제적 으로 살아 있는 생명 그 자체의 말씀을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인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의 말은 모두다 시간의 한계에 매 여 있으나 그분의 말씀은 영원의 차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이 모든 세계를 포함해서 초월케 하는 역사를 이루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 안에 살아 계시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우리를 통하여 성취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한도끝도없습니다.
그런데 그중 그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그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마지막을 향해 맞 춰진 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이 다름아닌 인류역사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렇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처음과 끝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의 역사가 인류 역사의 처음과 끝을 다 가지고 있는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탄생)은 준비된(예정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오묘하고 치밀하였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에 앞서서 율법을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것으로 사용하기 이전에 먼저 순종케 하기 위한 성결의 틀의 확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율법을 먼저 보내셔서 순종케 하기 위한 성결의 틀을 확보하 신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순종의 목적과 방향의 완성을 이 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갖는 목적과 방향은 사랑과 구원의 성취가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실제적인 목적은 사단의 멸망과 잃어버린 왕국의 재건을 위함 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잃어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재건 이란 그 나라와 그 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불멸의 종교가 되는 이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와옴을 볼수록 성탄절은 저에게 즐거움보다도 두려운 생각을 앞서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은 성경을 통해서 증명된 역사이자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증명된 아 주 명확한 역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또한 성경을 통해서 증명되는 역사이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 증명 되는 확실한 역사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지나갔습니다. 이제 교회시대의 불멸의 최대 이슈(Issue 관심사)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전히 준비하여 주를 맞이할 수 있는가"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과연 2000년 전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만을 상상하는 자들에게서 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상상되어질 수 있을까요 심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복음의 시작과 끝의 목적이 무엇 인지, 즉 복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목적과 방향을 알고 믿는 자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믿는 자들 이, 그것을 간파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있겠냐는 것입니다. 수많 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파악지도 못하고 있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온전한 관계 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이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왜 독생자를 보내어 피를 흘려 죽게 하시면서까지 인간에게 접근하실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인데, 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알고 믿는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지고 있는 요한 복음 17장의 기도문을 잘 살펴 보면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되는 이유와 목적, 우리를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와 영광이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현 교계는 복음을 이해,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어떠한 것이 가치있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 가 치없는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지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 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의 일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채 도덕 이나 교양이나 지식이라는 토양 아래 예수 그리스도 초림 당시의 율 법사들과 제사자들 같이 영적 장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영적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보다는 그저 지식 인으로서, 교양인으로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가 아닌 생명이 없는 종교로 변해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깝게 그지 없습니다. 지금 현 교계가 겪고 있는 말씀의 침체 현상이라든지 영적인 정체 현상은 종말적 신앙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그 외에 여 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주된 원인은 하나님의 시간에 교계 의 시간이 역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정하신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간과 교계의 시간이 서로 거꾸 로 흐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시간이 12시 5분 전을 가 리키고 있으면 이 시대의 교계의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면서 시간의 역행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다면 기독교는 어떠한 성인들의 교리를 전하는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불 멸(영원한)의 종교가 되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이 모든 세계를 포함해서 초월하게 하는 대단한 힘을 지 닙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힘으 로서 기독교의 역사 안에 세상의 끝이 다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불멸(영원)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핵인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을 잃고 있습니다. 부활과 재림은 신화나 전설 같은 이야 기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지하 교회의 성도들이 로마의 혹독한 핍박 속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순교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 듯 그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과 자나깨나 예수 그리스도 오실 날만을 바라는 재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그들이 인내하며 순교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과 재림은 어떠한 방법적인 것이 아니요, 실제적인 것입니다. "오늘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종교적 위기를 겪게 된다면 신앙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는 크리스챤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할 때 마다 참으로 걱정스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1장 9절로 10절에는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 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 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 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는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교회시대의 최대의 이슈(Issue 관심사)는 "누 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 초림 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제사장들과 율 법사들의 복제인간격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 의 재림을 사모하는 것이 주기적인 과대망상일까요 허황된 것일까 요 편집증적 증상일까요 아닙니다. 비록 현실적인 부딪힘(마찰)이 있을지라도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은 잃지 말아야 됩니다. 지금은 마지막 가치인 파멸적인 사랑을 드릴 때입니다. 성경(말씀)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 신약은 하나님 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작전서입니다.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 림과 교회시대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나 실제적으로는둘째 아담인 우리를 완성시켜 마귀를 박멸하기 위한 아주 정밀한 설계도 와 같이 짜여진 작전서인 것입니다.둘째 아담이 이룰 가장 중요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때에 성취가 되는데, 그 역사가 다름아닌 사단의 멸망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재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기성교인들이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 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곧 오십니다. 지금은 깨어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성화를 이룹시다."라고 전도를 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나 가서 전하라. 왜 지금이 기도해야 될 때라고 하면서 불안을 조성 하는냐, 혹시 이단이 아니냐"라는 식의 말을 하는 한심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재림과 부활을 설교의 장식으로나 사용하고 말장 난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은 부활과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판 단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율법사들과 제사장들에게 옥 합을 깬 여인을 판단할 자격이 없음과 같습니다. 제사장들과 율법사 들은 옥합을 깬 여인을 판단했습니다. 하나님 집의 주인이, 하나님 의 종이라 하는 사람들이 영적 장님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그분을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분을 주라고 인정 못 하고 있을 때 창녀인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바라 보고 그 발 앞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예비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난 이야기가 아닌 지금 우리의 현실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종들과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오시 고 있는데도 향유 옥합에 향유를 차고 넘치도록 채우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 향유 옥합에 향유가 더 채워져야 하는 것 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박살이 나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파멸적 사랑의 가치가 표출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파멸적 사랑의 가치가 이 마지막 때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음으로써 향유 옥합에 향유를 채우려고만 하는 때늦은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원래는 향유 옥합에 향유를 채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박살을 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이목이나 원칙적인 것을 겁내한다면 마지막 때의 가치인 파멸적 사랑의 가치는 예비될 수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깨어 준비합시다. 기도합시다."라고 외치는 부류이고, 한 부류는 "내 신앙에만 충실하면 충분 히 천국에 갈 수 있어. 세상이 무너져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 야 해."라고 생각하는 부류입니다. 이 두 부류에 차이가 있다면 전 자는 너무 현실적이고, 후자는 너무 안일하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나머지 지금 돌아가는 시대적 상황을 성경의 예 언서에 빗대어 바라보는가 하면 예언의 성취의 척도인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거의 다 이루어짐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쯤 오시겠구나."라는 예측까지도 합니다. 반면에 후자는 "지금이 꼭 그런 생각을 해야만 될 때인가 불안감을 가지고 신 앙생활을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그저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지 상 관없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돼. 세상이 무너져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어야지"라고 하면서 세상 원리를 신앙에 적용시키면서 생활합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이 두 부류 중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을 맞이할 수 있을지는 불보듯 뻔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깨어 기도합시다."라고 말하면 마 지막 때임을 정의하는 자체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은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는데도 그들이 모 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분별은 아 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세상 사람들은 시대를 분별할 수 없다.>> 말씀을 묵상하고 깨어 기도하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도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누가복음 12장 5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시대적 인 상황과 성경의 예언의 성취를 볼 때에,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가까웠음을 외치는 것은 주기적인 과 대망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사람들을 무 조건 이단이고 사이비라 못박는 사람들은 참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 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나도 쉽게 이단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말을 신봉한 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종말적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고 바라는 것이지 세상의 종말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을지라도 지금의 이 시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 앞에 이른 시기라는 것은 우리가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적 신앙이 갖는 특수하고 필연적인 시대분별과 또 대 비방식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예비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외치는 행위보다도 내 일 세상에 종말이 온다할지라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식의 말로 성도들을 자꾸 세상으로 내모는 그런 행위가 더 삐뚤어진 행위임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될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3장 11절-12절에는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 고 간절히 사모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 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지 않고는 성화란 이룰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믿음까지도 잃어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긴장감과 소망은 재림신앙(부활신앙)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입니다. 우리가 땅으로는 가치없는 것들에 대한 경계를, 하늘로는 천국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종말적 신앙이 단순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종말적 신앙이 현시대적 상황에서 비 롯된 것이라면 이단시할 수 있으나 신앙의 중심인 부활과 재림에 대 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단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 은 사람들이 종말적 신앙을 주기적인 과대망상이라고 하며 너무나도 쉽게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의 핵을 이루어왔던 것이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이었기 때문에 부활 과 재림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 종말적 신앙은 이단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감히 이 시대 종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온 전히 준비하여 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부활과 재림 에 대한 신앙으로 핵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밝히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 수많은 사람들에게 팽배해 있는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위 기의식의 팽배로부터 비롯된 종말론<<즉 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혼 란하므로 곧 종말이 올 것이라는 종말론>>은 일반론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지금 이 시대를 말세라고 말합니다. 예언에 따른 단 순한 해석이나 시대의 조명에 따른 일반론적 종말론으로는 다시 오 실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반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게 하는 기반이 되어주지 못하기 때 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시대에 맞게 내려지는 시 대적인 복음으로서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때를 온전히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말적 신앙이 일반론에 의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반론에 의한 종말적 신앙은 주기적 과대망상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적인 복음-전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며, 전함을 받는 자는 수용하기 힘든 복음. 성경에는 그 시대에 맞게 내려질 시대적인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증 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 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 야 하리라 하더라.(요한 계시록 10장 8-11절)"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시대적인 복음을 내려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각 시대시대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음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그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율법 과 맥을 같이 하였듯이 교회시대 마지막 때를 외치는 복음이기도 하 지만 마지막 때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기 위한 복음이기도 합니다. 요한 계시록 10 장을 보면 이 복음은 다시 예언하여야 할 복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대적인 복음이 새로운 복음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시대적인 복음이 있었습니다. 노아 때에는 노아에게 내려진 메시지가 있었고, 출애굽 시대에는 모세를 통하여 내려온 메시지가 있었으며, 신약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내려온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각 시대마다 내려진 복음이 있었는데 그 복음은 한 줄기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그 시대시 대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갔습니다. 시대적인 복음은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라는 말씀처럼 전하는 자에 게 핍박이, 전함을 받는 자에게는 넓은 수용의 틀이 요구되었습니다.
오늘을 준비해야 하는 성도들의 태도에 대해 히브리서 3장 12절로 15절에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히브리서 3장 15절에는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데 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불평과 원망으로 일 관했습니다. 항상 노하심을 격동케 하는 쪽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 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지금은 하늘문이 닫히고 있고 또 은혜의 시대의 마지막이 가까워지 고 있는 때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지 못 한 자들의 모습을 "심판 때에 밖에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 고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 인들은 고린도전서 10장 1-11절에 기록된 말씀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 들이 다 구름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 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 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 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 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내가 주를 맞이하지 못 하겠는가"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에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라고 우리에게 밝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일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 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 시리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아모스 3장 7-8절)" 마지막 때 깨어 있는 종들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진실한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의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잠시 "누가 주를 맞이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끝 까지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신앙을 지킴으로써 신랑으로 오 실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 중에 맞이하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되 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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