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수님의 제자인가 (눅14:25-35)
본문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외계인이 이 땅에 와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본다면 그 외계인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여길 것이다. ‘너희는 먼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떤 집을 살까, 어떤 차를 탈까, 어떤 직업을 택할까, 누구와 결혼할까를 먼저 구하라.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면, 너무 힘들지 않다면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중세인들과 같다. 그들은 틀렸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우리이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이 모두 우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한다. 하늘도 우리를 위해서 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중심이시다. 우리는 구심점을 바꿔야 한다. 그분이 태양이시고 우리는 그분 주위를 도는 것이다.” 이 땅의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파헤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교회에 왜 이와 같은 신자들이 많이 있는 것일까요 본문의 말씀은 그 이유를 적어도 두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만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25절에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열망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따르는 무리에게 더 열심히 따를 수 있도록 격려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낙담케 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좇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그러나 대다수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표적을 보기 위해서, 정치적인 지도자로 추대하기 위해서, 호기심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심으로 결과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동요케 하셨고 떠나게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교회가 예배당을 사람들로 채우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23절)을 열심히 좇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채우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뿌리 깊은 병폐인 기복신앙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일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각종 집회에 코메디언이나 가수와 같은 연예인을 초청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예배에 참석시키고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예배를 코메디나 쇼로 착각하고 예배에서 그런 것들만을 추구하려 들 수 있으며 기대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중심에 있지 않고 변두리에만 있으려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씀만 하시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모여든 사람들에게조차 그분을 따르는 데 걸림이 될 수 있는 제자의 의무를 말씀하시면 분명한 결정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태도는 무조건 사람만 끌어다 놓고 보자는 생각을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치러야 할 대가를 알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제자훈련이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으로 대두되면서 일부 목사님들이 그리스도인과 제자를 구분하여 제자는 구원받고 많은 신앙 훈련을 받아야 비로소 되는 것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자훈련에 참여하고 제자훈련을 이수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두 가지 명칭을 아무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회사에는 정규 사원이 있고 임시 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임시” 그리스도인이란 없고 모두 “정규” 그리스도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정규”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제자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0-41) 성숙한 신자와 성숙치 못한 신자의 구별은 제자와 그리스도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고전2:15-3:3,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히5:12-14,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성경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으로 불리는 네 권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언급한 오르띠즈 목사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다섯 번째 복음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는 우리가 사복음서에서 밑줄을 그어서 표시해 놓은 모든 구절들을 뽑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밑줄을 그은 구절들은 모두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들입니다. 마태복음 11:28-29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8절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9절의 “나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을 좋아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본문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주이심을 기뻐합니다. 선한 목자이심을 좋아합니다. 병든 자를 고치러 오신 의원이심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주님(Lord)이시라는 진리는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되어 있는 말씀들은 다섯 번째 복음서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자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주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쿠리오스(kurios)”는 소문자로 쓰일 때는 노예가 주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지만 대문자로 쓰일 때는 최고 권세자를 뜻하므로 로마제국의 황제 한 사람에게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을 단순한 구주가 아니라 구주와 주님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예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죄값을 십자가 위에서 지불하여 주신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26절, 27절, 33절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불신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이 옳다면 그리스도인은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와 상충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연세대에서 있었던 한총련 시위로 나라 안이 시끄러웠었습니다. 그에 앞서 한총련은 평양에서 열리는 범민족대회에 대표자 2명을 파견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연세대 휴학생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입북하기 위해서 독일에 머무르고 있는 아들을 찾아가서 눈물로 사정하고 붙들고 했지만 그 학생은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입북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부모와의 정(情)도 포기했던 것입니다.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혈연의 정도, 자기 목숨도 기꺼이 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주님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뜻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그분을 영접하게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으로 인한 축복만을 생각하고 그로 인한 책임은 모른 채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습니다. 제자의 축복과 의무를 저울질해 보고 제자가 되는 것을 신중하게 결정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그리고 일단 구원을 받고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다면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정쩡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처음부터 주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망대를 세우는 자와 전쟁을 하러 나가는 왕의 비유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첫째로,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것만이 주님의 뜻은 아닙니다. 25절에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열망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따르는 무리에게 더 열심히 따를 수 있도록 격려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낙담케 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좇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그러나 대다수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표적을 보기 위해서, 정치적인 지도자로 추대하기 위해서, 호기심을 위해서 따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심으로 결과적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을 동요케 하셨고 떠나게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교회가 예배당을 사람들로 채우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23절)을 열심히 좇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채우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면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뿌리 깊은 병폐인 기복신앙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일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각종 집회에 코메디언이나 가수와 같은 연예인을 초청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예배에 참석시키고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예배를 코메디나 쇼로 착각하고 예배에서 그런 것들만을 추구하려 들 수 있으며 기대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중심에 있지 않고 변두리에만 있으려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씀만 하시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모여든 사람들에게조차 그분을 따르는 데 걸림이 될 수 있는 제자의 의무를 말씀하시면 분명한 결정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태도는 무조건 사람만 끌어다 놓고 보자는 생각을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치러야 할 대가를 알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제자훈련이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으로 대두되면서 일부 목사님들이 그리스도인과 제자를 구분하여 제자는 구원받고 많은 신앙 훈련을 받아야 비로소 되는 것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자훈련에 참여하고 제자훈련을 이수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두 가지 명칭을 아무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회사에는 정규 사원이 있고 임시 사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임시” 그리스도인이란 없고 모두 “정규” 그리스도인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누구나 “정규”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제자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0-41) 성숙한 신자와 성숙치 못한 신자의 구별은 제자와 그리스도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고전2:15-3:3,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히5:12-14,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성경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으로 불리는 네 권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언급한 오르띠즈 목사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다섯 번째 복음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는 우리가 사복음서에서 밑줄을 그어서 표시해 놓은 모든 구절들을 뽑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밑줄을 그은 구절들은 모두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들입니다. 마태복음 11:28-29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28절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9절의 “나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을 좋아 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본문의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구주이심을 기뻐합니다. 선한 목자이심을 좋아합니다. 병든 자를 고치러 오신 의원이심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주님(Lord)이시라는 진리는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되어 있는 말씀들은 다섯 번째 복음서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6:46)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자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주님”에 해당하는 헬라어 “쿠리오스(kurios)”는 소문자로 쓰일 때는 노예가 주인을 부를 때 쓰는 말이었지만 대문자로 쓰일 때는 최고 권세자를 뜻하므로 로마제국의 황제 한 사람에게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을 단순한 구주가 아니라 구주와 주님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예수님께서 당신을 대신하여 당신의 죄값을 십자가 위에서 지불하여 주신 구주이심을 믿습니까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주님이심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26절, 27절, 33절이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불신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이 옳다면 그리스도인은 더욱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와 상충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연세대에서 있었던 한총련 시위로 나라 안이 시끄러웠었습니다. 그에 앞서 한총련은 평양에서 열리는 범민족대회에 대표자 2명을 파견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연세대 휴학생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입북하기 위해서 독일에 머무르고 있는 아들을 찾아가서 눈물로 사정하고 붙들고 했지만 그 학생은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입북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부모와의 정(情)도 포기했던 것입니다.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혈연의 정도, 자기 목숨도 기꺼이 버렸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우리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주님을 위해서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뜻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그분을 영접하게 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으로 인한 축복만을 생각하고 그로 인한 책임은 모른 채 제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습니다. 제자의 축복과 의무를 저울질해 보고 제자가 되는 것을 신중하게 결정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그리고 일단 구원을 받고 제자가 되기로 결정했다면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정쩡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처음부터 주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망대를 세우는 자와 전쟁을 하러 나가는 왕의 비유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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