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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잘되게 하리라 (렘29:11-14)

본문

유대 왕국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그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었던 바벨론이 자주 못살게 굴었습니다. 군대를 보내어 자기들의 눈에 드는 것은 이것 저것 다 빼앗아 가면서 유대 나라로 하여금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괴뢰 정권으로 만들려고 하는 속셈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유대 나라 전국에서 우수한 인재들이나 기능공들이 대거 차출을 당한 셈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여호와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던 경건한 사람들도 더러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나 에스겔 선지자,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이 끌려간 포로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져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예레미야가 보낸 서신이 도착을 했습니다. 유대 왕실의 사신으로 바벨론을 순방하게 된 엘라사라고 하는 대신 편에 보낸 것인데 그 편지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4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예레미야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 자신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 주시는 메세지였습니다.
5절 이하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바벨론에서 장가가고 시집가서 자식을 낳고 살 계획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계속해야하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하니까 아예 바벨론에 정착해서 살 생각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말씀을 들은 포로들의 가슴이 얼마나 철렁 내려앉았겠습니까 그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들렸겠습니까 어쩌면 그들은 은근히 이런 기대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곧 눈물로 헤어진 사랑하는 가족들을 재회할 날이 올 거야. 절대 희망을 잃지 말자.'
그러므로 앞으로 칠십 년 동안 고국에 못 돌아가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못 날 것이니 아예 시집 장가가서 정착할 궁리나 하라는 말씀은 그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이 칠십 년이지 그 말씀을 들은 자들 중에 칠십 년이 지나도 살아있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칠십 년 후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말처럼 허망한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특별히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던 사람들은 더 시험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몸부림친 우리를 어떻게 이렇게 대우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실까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실까' 그들은 이런 회의에 빠져 마음속으로 더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11절 말씀은 더 기가 막힙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이런 말씀일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너희들에게 무슨 재앙을 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잘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지금은 고생스럽겠지만 마지막은 해피엔드로 끝난다. 내가 너희에게 그런 해피엔드의 소망을 주려고 너희들을 바벨론으로 데리고 온 거야." 물론 만사가 형통하고 잘되는 상황이라면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아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다 깨어져 짙은 절망감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위로를 주기는커녕 감정을 상하게 함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흐르는 정서를 읽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11절의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음성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들 가운데는 이 말씀을 읽을 때 밑줄을 그으며 외워둬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마 그런 분들은 대부분 예수 믿고 재미본 사람들일 것입니다. 재미를 보니까 이 말씀 볼 때마다 또 재미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줄을 긋고 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런 저런 복을 주실 줄로 알고 신실하게 신앙생활 했던 형제들이 느닷없이 나라 경제가 하루아침에 거덜나는 통에 아무 죄 없이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갑자기 생활이 어려워지는 그런 형편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이 말씀을 과연 어떤 느낌을 가지고 읽을까요 "과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믿음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가운데 "정말 이 말씀은 이해 못하겠어. 내 처지로는 정말 이해가 안돼." 하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 저의 메시지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내가 잘못한 탓 때문에 이런 여러 가지 고충을 겪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남의 탓 때문에 고충을 겪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영을 잘못한 기업주나 정치를 잘못한 지도자들이나 흥청망청 뿌리면서 거드름 피운 사람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우리가 이런 어려움에 빠져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고통이 한두 해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 아닙니까 세우기는 힘들지만 무너지는 것은 잠깐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야 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 일은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본문의 11절 말씀을 주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이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와 닿습니까 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기분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이 말씀으로 인해 위로나 기쁨을 얻기는커녕 기분이 더 상하게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굳이 이 말씀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적게 해서 그들에게 들려 주실까요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 그러실까요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들려주신 것은 바벨론에 끌려간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좌절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일깨우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노예 생활을 해야 되는 형극의 길을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은 그들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그들은 삽니다. 희망이 있으면 그 모든 역경을 헤치고 결국은 우뚝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리면 그들은 반년도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살을 하든지, 자포자기하든지, 날마다 술에 취해 인생의 실패자처럼 살아가든지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시고자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이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만일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이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조금이라고 남아 있다면 그들이 견딜 수 없는 좌절 속에서도 문득문득 그 말씀을 떠올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하나님이 잘되게 하신다고 그랬어. 지금은 포로가 되어 이렇게 고통하지만 결과는 좋을 거라고 말씀했어. 해피엔드가 된다고 말씀했어.
그렇다면 내가 왜 이렇게 좌절만 하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 나는 절대로 안 망해. 나는 반드시 일어날거야.' 그들은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눈물을 닦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희망을 그들에게 주기 위해서 이 말씀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본문 말씀을 통해 희망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은 세상 사람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그분이 하시겠다면 하는 것이요, 그분이 된다면 말 그대로 되는 것이요, 그분이 틀림없다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믿으면 믿을수록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우리에게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스러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일종의 낙관론적인 말하고 다릅니다. 희망을 갖는 것과 낙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낙관이 무엇입니까 "날씨가 곧 좋아질 거야." 라며 막연히 기대하는 것입니다. 낙관이 무엇입니까 "그 두 사람 지금은 싸우지만 조금 후에는 다 화해할거야. 정치계가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는 풀릴 거야." 라며 무슨 일이든지 좋은 방향으로 풀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한 신문 광고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 궂은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의 희망을 향해! 박카스 에프." 낙관적인 사고 방식의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막연하기 짝이 없는 낙관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말씀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자체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전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잘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인식과 신뢰를 가지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주시는 모든 말씀이 순간 순간 희망의 촛불처럼 타오르는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방금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바벨론에 끌려가서 지금 참혹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있는 포로들로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하셔도 그것을 위로의 말씀이나 소망의 말씀으로 듣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하고 대충 듣고 흘려 버리면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가지만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소망의 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세 가지 사실에 대해서 틀림없이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 세 가지 사실에 대해서 믿는 믿음만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11절)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살았습니다." 하고 춤을 추었을지 모릅니다. 그러한 믿음만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희망을 갖는 백성들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1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이 가져야 했던 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으라 그러면 그들이 믿어야 했던 세 가지 사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선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유대 나라에 많은 사람 가운데 왜 하필이면 내가 이렇게 포로가 되어 끌려 왔을까'하고 신세 타령을 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은 다 가족들과 함께 조국에서 잘 살고 있는데,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믿으려 애썼던 나는 이 무서운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와 앞으로 70년 동안,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니 이 무슨 팔자냐' 하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레미야가 보낸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만 주목해 보았더라면 거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4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팔자가 사나워서라거나 재수가 없어서 끌려간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등을 떼밀어 바벨론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머나먼 이국 땅에, 그것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나라의 포로가 된다는 것은 서럽고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뜻이 숨어 있었습니다. 16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다시금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지금 예루살렘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게 하겠고." 참으로 숨이 탁 막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칼을 피하면 기근이 찾아오고, 풀뿌리를 먹고 간신히 기근에서 살아 남는다 해도 염병이 들이닥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자가 그 누구이겠습니까 유대 나라에 남아 있는 자들을 철저히 진멸하시겠다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18절을 보십시오. "내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가 친히 택하신 백성을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참고 또 참아오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과 5-6년 안에 그 무서운 심판이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에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이야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가 태평스러운 도성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이미 불을 지피기 시작한 용광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몇 사람을 뽑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도록 만드셨습니다. 마치 롯을 곧 심판할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끌어내신 것처럼 그들이 그 무서운 심판을 피하고 바벨론의 안전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그들을 미리 뽑아 내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선하시고 놀라운 뜻입니까 이것을 포로들이 알았다면 하루 종일 하나님 앞에 "주여, 감사합니다." 하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의심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내가 포로로 잡혀온 것에는 분명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칠십 년을 여기서 살라고 하실 때도 분명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 내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다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라는 말씀이 그들에게 희망이 되었을 것이고 생명의 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모두가 악하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사야 38장 17절을 보십시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이사야는 고통 속에 평안을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의 찡그리신 이마를 보지 마십시오. 그의 따뜻한 마음을 읽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모든 고통이 변장된 축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가 실패하고 가난하게 삶으로서 그 가난한 터전이 장차 위대하고 큰 일을 할 수 있는 지도자를 키우는 모태가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당하는 이 경제 위기가 우리 나라를 세계 열강 중에 우뚝 세우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숨겨져 있는 고난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조금 가난해지고 겸손해지고 고통스럽지만 우리의 욕망을 좀더 절제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때를 만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격을 다시 가다듬고 우리의 속 사람을 강건케 하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는 것을 그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우리의 고생이 후손의 복이 됨을 믿으라
둘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고생함으로서 자손들이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70년을 낯선 땅 바벨론에서 산다고 해봅시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도 끌려올 당시 적어도 10대 중반 이상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70년 후면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도 85세 이상은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해도 그 나이면 아주 건강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 먼길을 나설 엄두조차 못낼 상황일 것입니다. 또 그 나이에 돌아가 봐야 가족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남아 있겠습니까 만나봐야 다 쭈그러진 바가지와 같이 된 사람들일텐데 무엇이 그리 반갑겠습니까 인생의 허무만 잔뜩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은 거기서 뼈를 묻어야 될 숙명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야, 내 팔자 이것으로 끝나겠구나.'하고 생각하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이와 같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허락하신 것은 여기서 낳는 내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야.'라는 믿음만 가지면 절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유대 나라는 우상을 섬긴 사람이나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나 똑같이 그 죄 값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지고 하나님이 내리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이라고 하는 십자가를 자기 스스로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장차 메시야를 세상에 오게 할 선민으로서의 유대민족의 먼 장래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벨론에서 고통하며 값을 치르는 그들을 통해서 거룩한 후손들이 나오면 그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장엄한 비전을 이 땅에 펼치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부모는 고생하고 희생 당하지만 자녀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크게 들림을 받고 사용될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포로들이 이 사실을 분명히 믿었더라면 그들이 아무리 뼈를 깎는 고통의 나날을 보낸다 해도, 어떤 면에서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을 당한다 해도 절대 좌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성 세대가 이왕 당할 바에는 우리가 미리 고생을 도맡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생 덕분에 자손들이 건강하고, 세계 어느 민족 앞에 내놔도 부끄러움이 없는 복된 민족이 될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나 가난, 슬픔을 희망을 가지고 당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부모의 심정은 누구나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가 조금 고생하더라도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는 잘되고 자식은 고생하기를 원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며 이따금 삼풍백화점을 떠올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너지기 얼마 전부터 삼풍백화점은 더 이상 하중을 견디지 못한 채 여기저기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건물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균열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건물은 이미 버틸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는데도 백화점측은 영업 확장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주차장에 차 댈 데가 없어 몇 바퀴를 돌아야 될 정도로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나갈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팔 물건들을 쌓아 놓느라고 비상계단쪽 복도에까지 제품을 쌓아 놓고 판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무너지고 나니까 장사 잘된 것이 그들에게는 저주였고, 돈 잘 벌게 된 것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우리 나라에 비추어 봅시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기반이 엉망이고, 구조도 잘못되어 있고, 도덕성은 땅에 떨어져 일말의 양심마저 찾아보기 힘들어진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이 잘된다고 해 봅시다. 국민 소득이 10,000 불에서 15,000불로 올라갔다고 국민들의 마음이 들떠 있고 아쉬운 줄 모르고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세대는 모든 부귀영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중을 견디지 못해서 삽시간에 무너지는 백화점처럼 결국 우리 자손들 때에 이 나라가 왕창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전세계가 놀라 자빠질 정도로 폭음을 내면서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보며 이와 같은 무서운 재난을 미리 막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우리가 고통을 당함으로 이 나라 구조가 바뀌고 도덕성이 살아나고 양심이 살아나서 참으로 의식 있는 시민으로 다시 발돋움 할 수만 있다면,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세상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을 만큼 내면 깊숙이부패했던 그 모든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회개하고 거듭나서 다시 우뚝 설 수만 있다면 우리 다음 세대에서는 이 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전세계가 이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내가 고통 당함으로 자녀들이 복을 받을 수 있고, 우리 당대가 값을 치름으로 다음 당대에는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하는 믿음만 있으면 우리 앞에 있는 고통을 희망을 가지고 볼 수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심을 믿으라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틀림없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만사가 즐겁기만 한 사람에게는 하루가 천년처럼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포로로 잡혀가서 새벽부터 중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한 시간이 천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앞으로 70년은 더 포로 생활을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기절하고도 남을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새벽부터 나가서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야되는 그런 처절한 처지에다 그들을 마냥 내버려두셨을까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자기 자녀가 그렇게 고통을 당하며 하루하루를 한숨과 눈물로 보내고 있는 것을 보시고 남의 일 보듯이 생각하실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에서 칠십 년을 살도록 허락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었다면 그 칠십 년 동안 시시 때때로 그들을 도우실 은혜 역시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12-13절이 바로 이 은혜를 말하지 않습니까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왜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야, 너희들 바벨론에서 앞으로 70년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루하루 뼈를 깎는 고통을 당할 지도 몰라. 너희들이 눈물을 쏟으면서 펑펑 울 때가 자주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럴 때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 와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당할 때가 자주 있을 거야. 그때마다 무릎을 꿇고 내 이름을 불러라. 내가 기꺼이 너를 도와주겠다. 처자가 그리워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을 거야. 그럴 때마다 나를 향하여 부르짖어 라. 그러면 내가 너를 위로해 주겠다. 너희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태산과 같은 장벽이 너희 앞에 가로막을 때도 있을 거야. 그럴 때마다 낙담하지 말고 나를 찾아와서 부르짖어라. 나의 문을 두드려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당장 있어야 될 것들이 없어서 어찌할 줄을 모를 때 너희들이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나에게 구하면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공급해 주마."
바로 이 약속이 12-13절의 내용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도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포로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준비하고 계시니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절망할 필요가 없어" 라는 믿음만 가졌더라면 그들은 포로생활도 희망을 가지고 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 동안이라도 어려움을 허락하실 때면 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포로로 잡혀간 유대 나라 사람들에게 주셨던 동일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내게 부르짖으라. 기도해라. 걱정하지 말고 내 앞에 와서 기도해라. 무릎 꿇고 내 이름을 부르라. 내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내가 다 들어주마." 헬렌 켈러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참으로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신세로 태어났지만 세계 역사에 불후의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 하나가 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닫힌 행복의 문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지금 막 열린 문을 보지 못합니다." 옳은 말이라고 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앞문이 닫혔으면 뒷문이 열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사방의 문이 다 닫혀 있다 해도 하나님은 지붕을 들어내서라도 위를 향해서 바라볼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닫힌 문만 가지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은 닫힌 문을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닫힌 문이 있으면 열린 문이 있는 줄 알고 사방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열어주시는 문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이 보는 재미라고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처지를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의 처지에 비기겠습니까 우리를 그들에게 비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게 느끼는 가장들도 있고, 또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마음 둘 곳이 없이 허탈해 하는 우리 젊은이들도 있고, 갑자기 생활비가 줄어 가지고 이것저것 아끼지 아니하면 안 되는 각박한 상황에 빠져 있는 주부들도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칠십 년을 사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찮은 고생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이러한 어려움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하나님은 이럴 때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 가지 사실만 확실하게 믿으면 11절 말씀이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의 고통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고생함으로 다음 세대가 복을 받는다는 것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반드시 주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 11절의 말씀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으면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해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매일 매일 문을 나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한량없이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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