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가려느냐? (요6:66-71)
본문
1. 요한복음 6장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었겠습니까 수 만병의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서 떨어져 나오는 무수한 떡과 고기들을! 그곳에 모여서 그 광경을 보고 그 떡과 고기로 배불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떡을 먹고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을 의욕과 열심히 넘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영적인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심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자 아주 쉽게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고려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정이 두터운 친구 셋이서 여행을 하다가 길에서 묵직한 금덩어리 하나를 주웠습니다. 셋은 이로 인하여 깊은 우정에 금이 갈까봐 금을 팔아서 셋이 똑같이 나누어 갖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뜻밖의 횡재를 축하하는 뜻으로 술을 사다 마시며 실컷 즐기자고 하였습니다. 해서 셋 중 하나가 술을 받으러 인근 주막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술받아 오던 자에게 갑자기 엉뚱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옳지, 술에다 독약을 타서 둘을 죽이면 금덩어리는 몽땅 내 것이 되겠지." 그래서 그 자는 술에다 독약 을 타가지고 태연하게 두 친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한편, 남아있던 두 친구들도 금을 조금이라도 더 갖고 싶은 욕심으로, 술 받으러 간 친구를 죽이자고 모의하였던 것입니다. 이윽고 술 가진 자가 오자마자 둘이서 달려들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얼씨구 좋아라 하고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받아 온 술을 실컷 퍼 마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둘이도 피를 토하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욕심의 끝입니다. 야고보서에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2. 본론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들 중에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는 이제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영보다 더 중요하게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세상에서의 삶이, 육신적인 삶도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삶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서라도 지옥에는 가지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예화 가운데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땅에서 일을 하다가 그 땅에 감추어진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털어 그 밭을 샀습니다. 농부는 더욱 귀한 진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아까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진주를 영적 삶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모든 소유는 육신적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 삶을 위하여 육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인류의 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삶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들의 육체를 거리낌 없이 순교의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그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생각한다면 육체를 위하여 영을 죽이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는 길어야 70, 80이지만 영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죽은 이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중간 자리는 없습니다. 영생과 영벌, 두 가지 밖에는 우리의 영이 거할 처소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똑바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며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깊은 눈물과 탄식이 베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고 영원을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에게는 ‘너희는 나를 떠나가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믿음없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 욕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환경이 변해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영생에 대하여 언급했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결코 예수님을 배반해서는 안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위해 죽기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교부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크리소스틈은 로마의 시이저가 주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앞에서 처형당했다. 아르카우디스는 크리소스톰에게 내릴 형벌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맨 먼저 그를 추방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폐하, 폐하께서 저를 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크리소스톰은 대답했다. 그 다음으로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 곳을 뚫고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나는 너를 감옥에 집어넣어 너의 친구들 뿐만 아니라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 시키겠다."라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은 "저에게 결코 저를 떠나시지 않고 버리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친구가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격노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크리소스톰, 그 자신은 그의 환경, 즉 속박과 투옥, 그리고 죽음이 공포에 상관없이 정말로 자유로웠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약합니다. 너무도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멋지게 대답한 베드로는 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합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그 일로 인하여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망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3. 결론 성도 여러분, 주님께는 영생이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시며 본체이신 주님은 그 안에 머무르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미래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주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떠날지라도, 신앙생활이 혹독한 어려움을 유발할지라도, 심지어는 죽음까지 요구하는 고난에 직면할지라도 주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고 또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술받아 오던 자에게 갑자기 엉뚱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옳지, 술에다 독약을 타서 둘을 죽이면 금덩어리는 몽땅 내 것이 되겠지." 그래서 그 자는 술에다 독약 을 타가지고 태연하게 두 친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한편, 남아있던 두 친구들도 금을 조금이라도 더 갖고 싶은 욕심으로, 술 받으러 간 친구를 죽이자고 모의하였던 것입니다. 이윽고 술 가진 자가 오자마자 둘이서 달려들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얼씨구 좋아라 하고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받아 온 술을 실컷 퍼 마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둘이도 피를 토하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욕심의 끝입니다. 야고보서에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2. 본론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에 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들 중에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는 이제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영보다 더 중요하게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세상에서의 삶이, 육신적인 삶도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삶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다리를 자르고 눈을 빼서라도 지옥에는 가지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예화 가운데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땅에서 일을 하다가 그 땅에 감추어진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털어 그 밭을 샀습니다. 농부는 더욱 귀한 진주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를 아까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진주를 영적 삶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모든 소유는 육신적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 삶을 위하여 육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인류의 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삶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들의 육체를 거리낌 없이 순교의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그 부자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생각한다면 육체를 위하여 영을 죽이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는 길어야 70, 80이지만 영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죽은 이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중간 자리는 없습니다. 영생과 영벌, 두 가지 밖에는 우리의 영이 거할 처소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똑바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시며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깊은 눈물과 탄식이 베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고 영원을 기약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너무너무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에게는 ‘너희는 나를 떠나가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믿음없는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 욕심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환경이 변해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영생에 대하여 언급했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오늘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결코 예수님을 배반해서는 안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위해 죽기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4세기의 교부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크리소스틈은 로마의 시이저가 주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앞에서 처형당했다. 아르카우디스는 크리소스톰에게 내릴 형벌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맨 먼저 그를 추방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폐하, 폐하께서 저를 저의 집에서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제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크리소스톰은 대답했다. 그 다음으로 아르카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의 보화는 하늘에 있습니다. 아무도 그 곳을 뚫고 도적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나는 너를 감옥에 집어넣어 너의 친구들 뿐만 아니라사람과의 접촉을 일체 금지 시키겠다."라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은 "저에게 결코 저를 떠나시지 않고 버리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신 친구가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격노한 아르카디우스는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저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크리소스톰, 그 자신은 그의 환경, 즉 속박과 투옥, 그리고 죽음이 공포에 상관없이 정말로 자유로웠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약합니다. 너무도 쉽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우리의 믿음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멋지게 대답한 베드로는 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합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그 일로 인하여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세계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살을 택했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망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살로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3. 결론 성도 여러분, 주님께는 영생이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시며 본체이신 주님은 그 안에 머무르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미래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주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떠날지라도, 신앙생활이 혹독한 어려움을 유발할지라도, 심지어는 죽음까지 요구하는 고난에 직면할지라도 주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고 또 많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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