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방주에서 나와 (창9:1-29)
본문
세계의 많은 나라들 가운데는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도 있고 없는 나라도 있습니다. 한국은 사형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은 사형제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범죄를 이러한 제도에 의하여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이 제도를 명령하셨을까요 과연 사형 제도가 인간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형 제도 자체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1970년대에 들어 포르투칼, 덴마크, 베네수엘라, 오스트리아, 브라질, 스위스, 영국등 많은 나라에서 반역죄와 해적행위를 제외하고는 법정형으로서의 사형이 폐지되었고, 일부 다른 나라에서는 사형판결이 거의 혹은 전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제도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행위이고 그것이 결코 범죄를 감소시키지 못했으며,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판은 인간이 행하는 것이고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에 오판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한 사람에게만 그 영향이 있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으나,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한다거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대홍수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어떤 사람은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보다도 몇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가운데 노아는 선택된 사람이었고, 그 가족 7명과 함께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위대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도 실수를 하였고, 그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복적으로 실수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9장에 기록된 노아의 실수는 분명 노아 자신의 실수였지만 그로 인하여 그 아들 함의 후손들은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창세기 9장은 대홍수의 심판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향해 주신 몇 가지의 지침(1-7절)과,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생물들에게 하신 무지개언약(8-17절), 그리고 노아의 실수(18-29)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9장 말씀을 중심으로 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와 다시 땅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있었던 몇 가지의 사건들을 통해, 우주의 주권자이신 엘로힘(-yhila/ Elohim) 하나님의 인생들을 향한 일관된 사랑과 인간의 본성(本性)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대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미 몇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8:21-22에서 다시는 사람의 악함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과, 물을 사용하여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약속하시는 말씀 가운데에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창세기 8:21에서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에서 구원된 사람일지라도 인간적인 죄악의 본성 은 제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조 이후에 지구상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물로 멸하시고 노아를 통해 땅에 충만하도록 하셨습니다(창 9:1, 7). 이제는 인간들로 하여금 온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도록, 인간과 피조물들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를 사람들의 손에 붙이셨습니다(9:2).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간에는 아름다운 공존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창 2:19). 그러나 타락 이후 대홍수의 심판 후에는 인간과 피조물들의 관계는 다른 피조물들이 인간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른 피조물, 특히 짐승들과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심어주신 인간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주신 것 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것, 즉 본능적으로 공포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무서워한다'는 것은 인간들로부터 당한 무서운 경험에 의해 후천적으로 취득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후 다른 피조물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는 평화로운 관계가 끝나고,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두려워하게 하여 지배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도록 배후에서 섭리하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산 동물을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즉 육식을 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게 된 이유와 시기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물을 인간의 식물(食物)로 채소와 함께 처음 허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인간과 동물은 더 이상 평화롭게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며, 인간은 짐승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도록 사형제도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9:4-6에서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동물일지라도 생명과 동일시하고 있는 '피'를 먹지 말 것과, 반드시 생명의 피를 찾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할 것을 지시하심으로 절대적으로 사람의 생명이 보존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인 살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3의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찌니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1:12-14에서는 고의적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며, 과실로 인한 살인자는 도피성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13에서는 과실로 인한 살인자를 위해 도피성을 준비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고의적인 살인자는 단에서라고 끌어내어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보전하기 위해 가장 엄한 규정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 9:6에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 생명은 존엄한 것입니다(창 1:26-27).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처음 인간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서 1:19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그 자신 속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접촉점(Contact point)을 이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며,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상해(傷害)하며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창세기 9:7에서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결코 허무하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귀한 존재이며 오히려 번성하고 땅에 편만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무지개를 보라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는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그것도 무서운 심판 후에 하신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그 후손, 모든 생물들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기간을 창세기 9:12에서는 영세까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물의 심판으로 인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멸망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여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죄로 인하여 멸망한 모든 인생들과, 다른 피조물들을 기억하고, 대홍수로 인한 우주의 대격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창 9:14-16). 노아에게 언약을 맺은 분은 엘로힘(-yhila/ Elohim)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에서도 하나님 언약의 특징들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바로 무지개언약에서도 그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일방적인 약속을 하시고, 또한 그 약속을 하나님 자신이 실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홍수에 의한 심판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약속입니다.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면 참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소나기를 비출 때 태양의 반대방향에서 주로 관찰되고, 무지개의 채색된 선들은 물방울 속으로 투과된 광선의 굴절과 내부반사에 의해 생긴다는 무지개의 원리를 알게된 후부터 그 신비스러움이 줄어들었습니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라며 색깔의 첫 자를 외웠지만, 무지개가 갖는 깊은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무지개는 어린아이들의 그림에서 많이 등장하는 일곱 색깔의 아름다운 현상일수만은 없습니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언약의 증표인 것입니다. 무지개를 볼 때, 인간의 죄에 대한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을 보호하시며 불안으로부터 또는 염려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실수하는 인간을 보라 노아는 분명 당대의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였고, 의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전 인류와 전 피조물의 멸망에서 구원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부끄러운 모습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는 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포도나무를 경작하였습니다. 실제로 아라랏 산의 위치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지역(8:4) 서북편에는 넓은 야산 지대가 있는데 이곳은 고대의 유명한 포도 생산지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경작하여 포도주를 만들고 그것을 많이 마셔서 취했습니다. 취했다는 것은 '잔뜩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포도주를 마시는데 익숙해 있었고, '취하여'의 솨카르(rK'v)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과다하게 포도주를 마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신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연수를 구하기 어려웠던 히브리인들은 일상 생활에서도 흔히 포도주를 음료수로 사용하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맨 마지막 드리는 것이 포도주였습니다(출 29:40;fp 23:13).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과다하게 마실 때에 있는 폐단에 대해서만 엄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잠 23:20, 21;사 20:1;28:7;엡 5:18). 성경에서 술취함의 결과는 가난해지고, 재앙과 근심 분쟁과 원망 창상과 붉은 눈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술이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쏜다고 말합니다. 또한 눈에 괴이한 것이 보이고 마음에는 망령된 것이 발합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고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으며, 때리거나 아프게 해도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다시 술을 찾는 것입니다.
이사야 5:11-12에서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이러한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하는 것은 육체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갈 5:19-21). 노아를 보십시오. 술에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을 벗었다'(he suncobered himself)라는 뜻으로 스스로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보았습니다.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에서 보고(ar 라아)는 단순히 지나치듯 본 것이 아니라 만족스럽게 응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의 잘못은 아비의 하체를 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악의적으로 즐겼다는데 있으며, 더욱이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형제들에게 고하여 아비의 수치를 자신들이 즐기도록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후에 그는 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9:25).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사람들은 온 세상에 편만하여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닮고 있는 인간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도록 사형제도를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노아의 실수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 실수는 물론 술에서 왔습니다. 노아의 실수를 통해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여김을 받지만 여전히 죄의 유혹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도 그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죄의 유혹에 우리 자신을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오히려 선에 속해야합니다(시 38:18). 그리고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시 97:10-"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롬 12:9-"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노아의 아들 함의 잘못은 부친의 허물을 공개하고 부친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고, 허물이 노출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질 수 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숙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실망하거나 흉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변화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역설했던 베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면 왜 이 제도를 명령하셨을까요 과연 사형 제도가 인간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형 제도 자체가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1970년대에 들어 포르투칼, 덴마크, 베네수엘라, 오스트리아, 브라질, 스위스, 영국등 많은 나라에서 반역죄와 해적행위를 제외하고는 법정형으로서의 사형이 폐지되었고, 일부 다른 나라에서는 사형판결이 거의 혹은 전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제도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행위이고 그것이 결코 범죄를 감소시키지 못했으며,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박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재판은 인간이 행하는 것이고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에 오판의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한 사람에게만 그 영향이 있다면 별다른 문제가 없겠으나,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한다거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도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대홍수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요 어떤 사람은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보다도 몇 배나 더 많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 가운데 노아는 선택된 사람이었고, 그 가족 7명과 함께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위대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도 실수를 하였고, 그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복적으로 실수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9장에 기록된 노아의 실수는 분명 노아 자신의 실수였지만 그로 인하여 그 아들 함의 후손들은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창세기 9장은 대홍수의 심판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향해 주신 몇 가지의 지침(1-7절)과,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생물들에게 하신 무지개언약(8-17절), 그리고 노아의 실수(18-29)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9장 말씀을 중심으로 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와 다시 땅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있었던 몇 가지의 사건들을 통해, 우주의 주권자이신 엘로힘(-yhila/ Elohim) 하나님의 인생들을 향한 일관된 사랑과 인간의 본성(本性)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대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미 몇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8:21-22에서 다시는 사람의 악함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과, 물을 사용하여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약속하시는 말씀 가운데에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창세기 8:21에서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심판에서 구원된 사람일지라도 인간적인 죄악의 본성 은 제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조 이후에 지구상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물로 멸하시고 노아를 통해 땅에 충만하도록 하셨습니다(창 9:1, 7). 이제는 인간들로 하여금 온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도록, 인간과 피조물들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를 사람들의 손에 붙이셨습니다(9:2).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간에는 아름다운 공존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창 2:19). 그러나 타락 이후 대홍수의 심판 후에는 인간과 피조물들의 관계는 다른 피조물들이 인간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른 피조물, 특히 짐승들과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심어주신 인간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의해 유지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주신 것 중에서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것, 즉 본능적으로 공포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무서워한다'는 것은 인간들로부터 당한 무서운 경험에 의해 후천적으로 취득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후 다른 피조물과 인간이 서로 공존하는 평화로운 관계가 끝나고,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두려워하게 하여 지배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도록 배후에서 섭리하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산 동물을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즉 육식을 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게 된 이유와 시기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물을 인간의 식물(食物)로 채소와 함께 처음 허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인간과 동물은 더 이상 평화롭게 공존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인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며, 인간은 짐승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도록 사형제도를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9:4-6에서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동물일지라도 생명과 동일시하고 있는 '피'를 먹지 말 것과, 반드시 생명의 피를 찾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할 것을 지시하심으로 절대적으로 사람의 생명이 보존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인 살인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13의 십계명에서도 "살인하지 말찌니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출애굽기 21:12-14에서는 고의적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며, 과실로 인한 살인자는 도피성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9:1-13에서는 과실로 인한 살인자를 위해 도피성을 준비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고의적인 살인자는 단에서라고 끌어내어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보전하기 위해 가장 엄한 규정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 9:6에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며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 생명은 존엄한 것입니다(창 1:26-27).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처음 인간이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서 1:19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은 그 자신 속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접촉점(Contact point)을 이루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며,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상해(傷害)하며 그분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창세기 9:7에서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결코 허무하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귀한 존재이며 오히려 번성하고 땅에 편만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무지개를 보라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는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였습니다. 그것도 무서운 심판 후에 하신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그 후손, 모든 생물들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기간을 창세기 9:12에서는 영세까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물의 심판으로 인한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멸망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여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죄로 인하여 멸망한 모든 인생들과, 다른 피조물들을 기억하고, 대홍수로 인한 우주의 대격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창 9:14-16). 노아에게 언약을 맺은 분은 엘로힘(-yhila/ Elohim) 하나님이었습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에서도 하나님 언약의 특징들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바로 무지개언약에서도 그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일방적인 약속을 하시고, 또한 그 약속을 하나님 자신이 실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홍수에 의한 심판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약속입니다. 어린 시절 무지개를 보면 참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소나기를 비출 때 태양의 반대방향에서 주로 관찰되고, 무지개의 채색된 선들은 물방울 속으로 투과된 광선의 굴절과 내부반사에 의해 생긴다는 무지개의 원리를 알게된 후부터 그 신비스러움이 줄어들었습니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라며 색깔의 첫 자를 외웠지만, 무지개가 갖는 깊은 의미는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무지개는 어린아이들의 그림에서 많이 등장하는 일곱 색깔의 아름다운 현상일수만은 없습니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언약의 증표인 것입니다. 무지개를 볼 때, 인간의 죄에 대한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을 보호하시며 불안으로부터 또는 염려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실수하는 인간을 보라 노아는 분명 당대의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였고, 의인이었습니다. 더구나 전 인류와 전 피조물의 멸망에서 구원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부끄러운 모습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는 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포도나무를 경작하였습니다. 실제로 아라랏 산의 위치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지역(8:4) 서북편에는 넓은 야산 지대가 있는데 이곳은 고대의 유명한 포도 생산지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경작하여 포도주를 만들고 그것을 많이 마셔서 취했습니다. 취했다는 것은 '잔뜩 마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포도주를 마시는데 익숙해 있었고, '취하여'의 솨카르(rK'v)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과다하게 포도주를 마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포도주를 마신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자연수를 구하기 어려웠던 히브리인들은 일상 생활에서도 흔히 포도주를 음료수로 사용하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 맨 마지막 드리는 것이 포도주였습니다(출 29:40;fp 23:13).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과다하게 마실 때에 있는 폐단에 대해서만 엄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잠 23:20, 21;사 20:1;28:7;엡 5:18). 성경에서 술취함의 결과는 가난해지고, 재앙과 근심 분쟁과 원망 창상과 붉은 눈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술이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쏜다고 말합니다. 또한 눈에 괴이한 것이 보이고 마음에는 망령된 것이 발합니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누운 자 같고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으며, 때리거나 아프게 해도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다시 술을 찾는 것입니다.
이사야 5:11-12에서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이러한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하는 것은 육체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갈 5:19-21). 노아를 보십시오. 술에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을 벗었다'(he suncobered himself)라는 뜻으로 스스로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낸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보았습니다.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에서 보고(ar 라아)는 단순히 지나치듯 본 것이 아니라 만족스럽게 응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의 잘못은 아비의 하체를 본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악의적으로 즐겼다는데 있으며, 더욱이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형제들에게 고하여 아비의 수치를 자신들이 즐기도록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후에 그는 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9:25).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심으로 사람들은 온 세상에 편만하여 충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닮고 있는 인간의 생명을 존엄하게 여기도록 사형제도를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노아의 실수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그 실수는 물론 술에서 왔습니다. 노아의 실수를 통해 여러분들은 무엇을 느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여김을 받지만 여전히 죄의 유혹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도 그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죄의 유혹에 우리 자신을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오히려 선에 속해야합니다(시 38:18). 그리고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시 97:10-"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롬 12:9-"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노아의 아들 함의 잘못은 부친의 허물을 공개하고 부친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고, 허물이 노출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질 수 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숙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실망하거나 흉을 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변화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역설했던 베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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