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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 (마5:14-16)

본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고 사람이 등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 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누가 소금이며 누가 빛인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약속이 이루어진 자만 이 소금이고 빛이다. 팔복은 새 언약의 성취 여정(旅程)임은 그동안 살펴본 바 대로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의미파악을 옳게 하기 힘들다. 아무든지 예수 만 믿으면 이제 소금이고 빛이므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야한다는 것은 억지이다.
왜냐하면 빛과 소금의 역할은 그런다고 된다거나, 혹은 세상의 그 무엇 이 곧바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더욱 충실히 하겠다고 설쳐대면 댈수록 세상은 더욱더 어지럽게 되고 혼돈의 와중 으로 떨어지게 된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율법적 행위로 하겠다는 시도는 무 엇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기에 그 자체가 혼돈이요 어두움인 것이다. 팔복의 모든 과정들을 되짚어 보라.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부숴뜨리지 않는 곳이 있었던가 어떻게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어두움의 음 침한 터널을 지나고 흑암의 모든 요소가 더불어 못박혀 버리지 않으면 빛되신 그리스도와는 한몸을 이루기가 도대체 불가능한 것이다.
너희가 소금이라는 사실은 소돔과 고모라의 그 모든 풍요와의 결별을 선언함 일 뿐만 아니라 그와는 상관이 없는 존재임을 뜻한다. 그럴때 비로소 소금인 것이다. 소금 아닌 것이 소금이라고 주장하고 확신하고 그러한 행위를 하려 고 한다고 해서 소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 겠는가 소금이라는 신분은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영토에서 농사지음의 시초 가 되는, 능히 그의 자녀로서 발을 내딛는 삶의 시작이라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JUmei'" ejste to; fw'" tou' kovsmou) 할 때의 이 빛은 조금더 생각해 보면 소금인 자가 비로소 빛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땅의 소금(to; ala" th'" gh'")인 자만이 세상의 빛(to; fw'" tou' kovsmou )이라는 것은 하나의 원리적인 사실이다. 손바닥만 있고 손등이 없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동시에 역으로도 성립된다. 손등만 있고 손바닥이 없 을 수 없다. 소금의 역할 따로, 빛의 역할 따로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인 것이다.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이라고 하는 표현은 이러한 간단한 사실을 알지 못한 소치에 불과하다. 오늘날은 아예 설교자들에 의해 로마서 따로 야고보서 따로이다. 그래서 로마서와 야고보서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괴리 가운데서 항상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언은 로마서的이요, 삶과 행 위는 로마서에서 철저히 고발하고 있는 행위를 야고보서의 말씀대로인양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것은 복음도 아니요, 그렇다고 철저한 율법 도 아닌 것이니 그야말로 철저한 혼돈일 뿐이다. 어떻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이 가능한가 빛이 무엇인지는 요한복음이 잘 증언해주고 있다. 왜 빛이라고 하는지도 또한 요한복음에 귀기울여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태초에(ejn ajrch'/) 말씀이(oJ lovgo") 계시니라 그 안에 생명이(zwh;) 있었으니(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hJ zw h; h\n to fw'" tw'n ajnqrwvpwn) (요 1:1-4) ajrch'/(아르케)에는 oJ lovgo"가 계시며 이 oJ lovgo"(호 로고스)는 하나님 과 함께 계실 뿐더러 하나님은 곧 말씀이시다. 만물로 하여금 만물되게 하는 근본이기에 그것은 빛이다. 자기의 근본됨이 무엇인지는 이 빛에 의해서만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두움인 세상이 이 빛을 빛으로 깨닫기란 그렇 게 간단하지가 않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katevlaben) (요 1:5)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 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9-11) 이것이 곧 빛과 어두움의 실상이다. 어두움의 생명은 어두움 그것이기 때문에 빛을 자기의 생명이라 생각지 않는다. 빛을 영접하는 것은 자기 생명인 어두움을 잃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영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큰 불행은 종교가 발흥하는 때이다. 역사적으로 암흑기라고 일컫는 시대치고 종교가 위세를 떨치지 않은 때는 많지 않다. 그것은 오늘날도 동일하다. 종교의 풍요를 만끽하는 동안은 빛이 필요 없다 .
왜냐하면 이미 자신은 빛을 영접했고 빛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당연지사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구태어 새삼스럽게 빛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신사적 종교인의 모습을 갖추고 조직과 체제가 제시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빛의 자녀로서 손색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새삼스럽게 무슨 참빛이 필요한가 이미 참빛을 영접하고 그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데 . 이것이 바로 종교부흥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다. 이것이 바로 빛이 세상에 비취되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교회생활과 빛을 영접하는 것은 전혀 별개일 수 있다. 사랑이 사랑의 장애물 이요, 찬송이 찬송의 장애물이요, 기도가 기도의 장애물이며 빛이 빛을 가로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참빛이 무엇인지 알 기란 요원하다.
사실 빛(to; fw'") 에 참(ajlhqinovn) 이라는 한정어 가 동반할 수 밖에 없음은 인간의 죄악과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는 선언은 가히 어떠한 상태인지 짐작이 갈 수 있으리라. 이제까지 빛으로 여기고 자기 생명으로 여겨왔던 그 모든 가치의 체계가 어두 움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지 나고서야 비로소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이요 빛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제까지 팔복의 과정에서 이루어져 왔던 약속 성취의 모습이 아니던 가 이러한 언약의 성취만이 세상(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자신을 주관하던 이 전의 본질적인 가치체계로서, 그것은 법적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성경에 서 질타하고 있는 인간본질의 종교적인 바리새적 속성 등을 지시하는 개념이 다)과 결별이 가능하고, 이제는 세상과 무관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빛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복은 또 다른 표현으로 빛의 영접 과정 이요 빛과 하나됨의,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이 가능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우들에게 동일한 선언을 하고 있으니다음과 같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ejn kurivw/)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8)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안에서(ejn kurivw/) 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 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상수훈을 여기까지만 살펴보더라도 이제는 무엇이 그리스도인지는 어느 정도 드러났으리라 여겨진다. 예수 자신이 자신을 일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라고 自證하면 서 이러한 自證根據를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요 8:14)라고 하고 있다. 바로 ajrch'/ 속에 있는 만물의 원리를, 우주의 진리를 스스로 지니고 있기에 그러한 선포가 가능하리라. 그리고 참된 진리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시 작 지점이 어디며 이르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고, 그렇게 걸어가셨기에 우리는 그를 주로 삼으며,그 안에 있는 생명의 빛 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연합함으로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자. 마 5장 14절에서 16절까지는 매우 웅장하고도 완곡한 문체를 지니고 있다. 번역문장에서는 그것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원문의 서술형태를 우리말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다. 등불을 켜 서 말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면 그것은 집안의 모든 이들에게 비추인다 . 이처럼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볼 수 있고 또한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를 영광스러워 할 수 있도록 사람들 앞에 너희의 빛이 비추이게 하라 번역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의미의 손상을 가져오고 있다. 5장 16절의 번역문 은 그야말로 지나치리만큼 주절과 종속절이 전도되어 있다. 또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는 애매한 표현이다. 너희는 빛인데, 그 빛이 어떠하다는 것을 간결하면서도 웅변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얼마나 분명한 말씀인가.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질 수가 없다 당시의 도시는 주로 언덕 위에 많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언덕위의 도시는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눈에 띄게 마련이다. 무엇으로 가리운다거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빛 인 너희는 그러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등불 을 켜서 말아래 두는 법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정신나간 짓이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이다. 그렇듯 너희의 빛은 가리워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 요 등불이 집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이듯 비취는 빛이라는 것이다. 이러 한 빛을 발함은 너희의 착한 행실(ta; kala; e[rga)이요 그를 보고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이 빛을 사람들이 무조건 즐거워 하거나 영접하지는 결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도덕적인 행위에 속하는 것이 라든지 사회의 부조리 척결 운동정도라면 환영받지 못할리가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모범적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됨과 참된 진리의 길을 말하는 것인 다음에야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함이요, 빛을 빛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요한복음 1장의 참빛을 세상이 깨닫지도 영접지도 못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 빛은 반드시 어두움의 청산을 동시에 요구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 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 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 게 하려 함이라 (빌 2:12-16) 빛은 사람의 근본됨을 알게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라고도 한다. 一喜一 悲하며 喜怒哀樂에 휩쓸려 사는 人生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그곳에 있다. 이 참빛을 교회 봉사나 전도나 그 잘나빠진 신앙적 행위들로 도덕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to;n patev ra uJmw'n to;n ejn toi'" oujranoi'")이 결코 아니다. 또 하나 속아서는 결코 안될 일이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할 때 무엇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지를 분명 히 알지 못하면 많은 이들을 속이고 우롱하는 짓들이 수없이 일어날 수 있다 . 이것은 얼마든지 사람을 미혹할 수 있는 요소로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더욱 그러하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니 의 나 를 알지 못하면 엉뚱한 헛다리를 짚고 그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의 빛은 껍데기 예수를 가리켜 빛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아기가 누워있던 말구유가 아기일 수는 결코 없다. 어떻게 된일인지 이곳 저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니 어린 양이니 하는 자들이 출몰하고 있다. 그래서 나를 따르며 나의 말을 들어야만 구원인양 떠드는 이들도 종종 보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할 때 이 빛은 껍데기의 너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너희 속에 있는 너희 자신이 없어지고 그 안에 그와 하나가 되어진 그 어떤 것을 일컬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이다. 다시 말하면 질그릇과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너희가 세상의 빛 이라 고 할 수 있는 것은 너희라는 그릇 속에, 즉 어두움을 담고 있던 그 자 리에 너희 자신이던 그 어두움이 내어쫓기고(죽고) 빛이 자리했기 때문에 그 빛에 의해서 비로소 세상의 빛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보지 못하고 빛을 담고 있는 질그릇을 보며 감탄하고 추종하 고 따르려 한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는 그러한 인간의 죄악적 속성을 부숴뜨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던 것이다. 그 질그릇을 과감히 까부심으로 참빛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예수만을 따르던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마침내 그리스도 를 발견케 하고 만나게 하는데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그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그리스도이시다. 예수의 나와 그리스도의 나가 철저히 분리될 수 있을 때만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자증적 진술이 가능하다. 더구나 그 가는 길과 마침내 잘못 보고 추종하는 세상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할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나는 빛이다 라는 自證은 참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이러한 나누 임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自證은 죽어야할 어두움이 죽음을 가장한채 웅크리고 앉아 왕노릇하고자 함이요 광명의 천사로 둔갑해 있는 모습에 불과 하다.
왜냐하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나는 빛 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 다는 자가 내가- 운운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더욱 견 고히 살아 있음을 스스로 증거할 따름이다. 다만 그와 연합된 자들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고 指稱(지칭, designa tion)될 수 있을 뿐이며 진리의 삶을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살 뿐이다. 그럼 에도 自己가 누구인지 自己 認識은 분명하게 갖고 있다. 더불어 그는 세상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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