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20)
본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것은 에수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개혁교회연맹 제22차 총회 주제이며, 제73회 우리 교단 총회의 주제이기도합니다. 제자들에게 물으셧던 이 질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물으시는 질문이라 하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의 교회생활을 결정하는 매우 뜻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첫째로, 이 질문은 사람들의 편견을 드러내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게서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13절). 제자들은 그들이 들은 대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리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 이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편견을 드러낸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 들의 민족 중에 위대한 선지자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피압박 민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느니 예수가 하나의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만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이나 그의 놀라운 교훈 등을 보고 들었던 유대 사람들은 그를 보통 사람으로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현실 상황과 그들의 소망이 예수상을 그렇게 묘사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과 그리고 자기가 바라고 있는 기대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상”을 그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군사독재 정치속에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해방자로 묘사합니다. 백인 독재 정권 하에 인종차별을 받고 있는 흑인들에게 예수가 흑인으로 보여집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예수가 권력을 축복해 주는 분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를 천주교회는 천주교회 방식으로, 침례교회는 침례교회 방식으로, 그리고 장로교회는 장로교회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개인차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하기 전에, ”나는 과연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하기 전에,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정직하게 발견하지 않고는 회개가 일어날 수 없고, 예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사회신분과 교회직분 등이 오히려 우리의 편견을 더 깊게 만들어 예수께 대한 정직한 신앙고백을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기관의 제도와 이념과 직책 때문에 예수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불확실해지기가 쉽습니다. 교파와 직장과 민족과 국가와 같은 기관 공동체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편견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게 하는 신앙고백적인 설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6절). 이것은 결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한 대답은 아닙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와 같은 대답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훌륭해서 정답을 맞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니라”(17절). 베드로는 역시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한된 인간이었습니다. 단지 그가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떤 것은,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역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 중 누군가를 통해 예수에 대한 바른 대답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시작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그후 그의 편견을 곧 드러내고, 그것 때문에 예수로부터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인간적인 편견으로 반대의사를 표출했기 때문입니다 (21-23절).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23절). 이때 베드로는 아마도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라, 악마의 유혹이 그의 편견을 심화시켰던 것 같습니다.예수게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을 때 베드로는 바깥뜰에서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후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목결했으나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옛 직업에 다시 종사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으나, 그의 위선적 행위로 인해 바울 사도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갈 2:11-14). 이렇게 길게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했으면서도,하나님과 언약의 관계가 한결같이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 속에 있는 편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할 생각을 자기에기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학지식과 자기의 신앙열심을 먼저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이기적 이해관계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목사라는 직책, 또는 장로라는 체면 때문에 위선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경건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입니다. 그것을 자기에기로 돌릴 때, 자기를 중심한 독선과 위선의 관계를 낳게 됩니다. 여기서 목사와 장로,남성과 여성,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그리고 지역들과 이념들 사이의 대립과 충돌이 발생케 됩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는 목사나 장로나, 남자나 여자나, 연령이나 지역이나 이념에 어떤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리나 신학 이상의 생명적인 신인 관계입니다.
셋째로,이 질문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설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바르게 대답한 베드로에게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8절). 그것은 인간 베드로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라는 새 이름에 기초한 것입니다. 변화된 그의 정체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며,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성전의 ”모퉁이돌“로 묘사했습니다(엡 2:20-22).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눅 9:20)로 고백한 신앙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을 항상 들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이 교회가 너희의 것이냐, 아니면 나의 교회이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반석이 아니라 인간의 반석 위에 세우려는 유혹을 언제나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민족의 교회가 아니며, 국가의 교회도 아닙니다. 인간의제도나 이념이나 권력에 기초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그리스도의 교회는 ”천국 열쇠“(19절)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선교적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와 정치체제와 지배이념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 하에 심판받는 것을 예어해 주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장로교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장로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한국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본 충성과 사랑은 교파나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하나님의 나라의 열쇠를 가진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불의한 세력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 불의한 정권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나라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불의한 세력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나치정권에 협력했던 독일 교회가 죄책을 고백했듯이, 일제에 협력했던 일본 교회가 사죄했듯이, 우리 총회도 일본의 신사참배 결의 50년이 되는 이 해 9월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한, 무력하고 위선적인 우리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집권층에 의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3일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속에 오셔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예수의 질문에 오늘 우리의 교회는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주님은 정의와 평화와 일치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이며,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케 하시는 교회의 반석이십니다“라고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류의 화해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서울올림픽 체전 속에 우리 총회가 모이고 있습니다. 세계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총대들은 독선과 위선과 편견을 넘어서서, 서로에게 배우고 자라나는 겸손과 하나됨으로 하나님의 성화를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치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유익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사람들의 편견을 드러내게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게서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13절). 제자들은 그들이 들은 대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리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 이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의 편견을 드러낸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 들의 민족 중에 위대한 선지자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피압박 민족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느니 예수가 하나의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만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이나 그의 놀라운 교훈 등을 보고 들었던 유대 사람들은 그를 보통 사람으로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현실 상황과 그들의 소망이 예수상을 그렇게 묘사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과 그리고 자기가 바라고 있는 기대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상”을 그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군사독재 정치속에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해방자로 묘사합니다. 백인 독재 정권 하에 인종차별을 받고 있는 흑인들에게 예수가 흑인으로 보여집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예수가 권력을 축복해 주는 분으로 보여집니다. 예수를 천주교회는 천주교회 방식으로, 침례교회는 침례교회 방식으로, 그리고 장로교회는 장로교회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개인차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하기 전에, ”나는 과연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대답하기 전에,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정직하게 발견하지 않고는 회개가 일어날 수 없고, 예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이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사회신분과 교회직분 등이 오히려 우리의 편견을 더 깊게 만들어 예수께 대한 정직한 신앙고백을 못하게 하는 경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기관의 제도와 이념과 직책 때문에 예수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불확실해지기가 쉽습니다. 교파와 직장과 민족과 국가와 같은 기관 공동체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편견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게 하는 신앙고백적인 설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에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6절). 이것은 결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한 대답은 아닙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와 같은 대답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훌륭해서 정답을 맞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니라”(17절). 베드로는 역시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한된 인간이었습니다. 단지 그가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떤 것은,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역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 중 누군가를 통해 예수에 대한 바른 대답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시작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그후 그의 편견을 곧 드러내고, 그것 때문에 예수로부터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인간적인 편견으로 반대의사를 표출했기 때문입니다 (21-23절). 그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23절). 이때 베드로는 아마도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라, 악마의 유혹이 그의 편견을 심화시켰던 것 같습니다.예수게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을 때 베드로는 바깥뜰에서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후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목결했으나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옛 직업에 다시 종사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으나, 그의 위선적 행위로 인해 바울 사도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갈 2:11-14). 이렇게 길게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했으면서도,하나님과 언약의 관계가 한결같이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 속에 있는 편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할 생각을 자기에기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학지식과 자기의 신앙열심을 먼저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이기적 이해관계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목사라는 직책, 또는 장로라는 체면 때문에 위선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경건한 모양은 있으나 경건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입니다. 그것을 자기에기로 돌릴 때, 자기를 중심한 독선과 위선의 관계를 낳게 됩니다. 여기서 목사와 장로,남성과 여성,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그리고 지역들과 이념들 사이의 대립과 충돌이 발생케 됩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는 목사나 장로나, 남자나 여자나, 연령이나 지역이나 이념에 어떤 차별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은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리나 신학 이상의 생명적인 신인 관계입니다.
셋째로,이 질문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설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바르게 대답한 베드로에게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8절). 그것은 인간 베드로를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라는 새 이름에 기초한 것입니다. 변화된 그의 정체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며,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성전의 ”모퉁이돌“로 묘사했습니다(엡 2:20-22).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눅 9:20)로 고백한 신앙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의 질문을 항상 들어야 합니다. 이 질문은 ”이 교회가 너희의 것이냐, 아니면 나의 교회이냐“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반석이 아니라 인간의 반석 위에 세우려는 유혹을 언제나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민족의 교회가 아니며, 국가의 교회도 아닙니다. 인간의제도나 이념이나 권력에 기초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절). 그리스도의 교회는 ”천국 열쇠“(19절) 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선교적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와 정치체제와 지배이념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 하에 심판받는 것을 예어해 주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장로교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장로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한국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본 충성과 사랑은 교파나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하나님의 나라의 열쇠를 가진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불의한 세력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 불의한 정권에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나라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불의한 세력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나치정권에 협력했던 독일 교회가 죄책을 고백했듯이, 일제에 협력했던 일본 교회가 사죄했듯이, 우리 총회도 일본의 신사참배 결의 50년이 되는 이 해 9월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못한, 무력하고 위선적인 우리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집권층에 의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3일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속에 오셔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예수의 질문에 오늘 우리의 교회는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주님은 정의와 평화와 일치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이며,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성장케 하시는 교회의 반석이십니다“라고 응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류의 화해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서울올림픽 체전 속에 우리 총회가 모이고 있습니다. 세계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총대들은 독선과 위선과 편견을 넘어서서, 서로에게 배우고 자라나는 겸손과 하나됨으로 하나님의 성화를 진행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치가 모든 것을 합동하여 유익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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