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교회 (계2:1-7)
본문
자칭 유대인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유대인이라는 것은 신약 교회 이스라 엘이 생겼을 때에 구약 교회가 유대인들입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말 은 정통이라 그말이오. 정통을 말합니다. 우리가 정통이다, 정통 이다. 전부 정통입니다. 자칭 정통이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을 잘 살펴서 저거는 하나님이 정통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저 것은 스스로 정통이라고 인정하느肝정통이고 저 사람이 정 통이고 제가 정통이고, 이렇게 그만 제가 정통이라, 또 옆에 사람이 정통이라 이러면 당장 정통 돼 버려요. 하나님이 정통이라 해야 정 통이지 하나님이 정통이라 인정 안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사람 죽이는 것도 잠깐이오. 이거 이단이다. 이 교파가 이단이라 저 교 파가 이단이라 그만 몇이 이단이라 하면 완전히 몰려서 이단으로 정 죄당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게 이기지 못합니다. 전체가 다 이단 이라 해도 옳은 것은 하나님이 인정만 하면 된다 하는 것을, 아멘! 됐다! 너는 내게 합당한 자다! 이러고 하면 자꾸 일어서집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안다 그러면 이것은 자 꾸 헙니다. 훼방이라 말은 헐 훼(毁)자 헐 방(謗)자요. 헐어 가지고 자꾸 삣고 깎는다 말이오. 일곱 교회를 통해 깨달을 것이 일곱 교회가 각각 이거는 에베소 교회에 해당된 것이다. 이거는 서머나교회에 상관된 것이다. 에베소 교회에 말한 것이 일곱 교회에 다 해당된 것이요 서머나교회에 말한 것이 일곱 교회에 다 해당되는데 이것을 우리에게 에베소교회라, 서 머나교회라, 사데교회라 이렇게 교회 종목으로 이래 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죄악의 모든 유혹이나 구원이나 그런 것이 오는 순 서 계통이 있기 때문에 그 순서와 계통을 알리기 위해 가지고 요런 교회 저런 교회 한 것이지 그것이 모든 교회에 다 있는 것이라 그말 이오. 우리는 여기서 이단이 들어올 때는 요렇게 들어오는구나. 요런 이단은 요렇게 들어오는구나. 저런 이단은 저렇게 들어오는구나. 요 런 마귀는 요래 들어오는구나. 요런 사탄은 요래 들어오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첫째가 에베소교회,둘째가 서머나교회인데 에베소교회 서 머나교회에 이 교회를 망치는 이단은 무슨 감투를 쓰고 들어 왔는가 사도라 하는 것은 직접 하나님께 직통하는 사람이요, 유대인은 시퍼 런 정통을 가진 사람들이오. 정통이니 하나님으로 더불어 직접 연결 됐느니 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 속에 이단이 들어오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온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옳다 한다고 따라가지 말아요. 또 삐뚤어 졌다 한다고 다 삐뚤어진 걸로 정죄하지 말아요. 말씀을 들어봐요. 또 행동하는 걸 봐요. 그러면 다 봤어요 말도 제가 할 수 있고 행 동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거 있어요. 하나님이 결과를 맺게 하는 것은 제가 만들지 못해요. 그거는 가짜배기 못 만 들어요. 암만 천사의 말을 하고 아주 의인의 행동을 이래 해도 가짜 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 뒤에 딱 보면 결과를 해서 알려 줍니다. 이 거는 가짜다 하는 것을 그 결과로 보여 줍니다.
서머나교회의 사대관
1) 시간관 여기 서머나교회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교회로 나타났는데 주님과 서머나교회와 네 가지 지식이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시간관이 같습니다. 시간관이 같다 말은 시간을 어떻게 봤느냐 네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어떤 시간을 네 시간으로 보고 모든 것을 계산도 하고, 계획도 하고, 또 달성도 할려고 건설도 하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간관이 어디 나타났는가 나는 처음이요 나중 이라 이랬어요. 처음이라 말은 시발이라 말이요 나중이라 말은 끝 이라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그런 말인데 곧 영원 전 영원 후라는 말입니다. 영원 전과 영원 후는 시간이 그 안에 다 들었습니다. 영원 전과 영원 후에는 그 속에 시간이 다 들었지 빠진 시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영원 전과 영원 후를 당신의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살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일할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그 시간 에 다 매여서 살 것으로 알기 때문에 당신의 계획은 시간을 영원 전 으로 영원 후까지를 당신의 시간으로 생각을 하고 모든 일을 계획을 하고 처리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 년만을 자기 시간으로 알고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은 하루만을 자기 시간으로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은 다음 시 간이야 내가 모르겠고 당장 현실이라는 그 시간만 보고 사는 사람 여 러가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제일 눈이 소경된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돈을 벌려고 땀을 쭐쭐 흘리고 있으니까 이 바보 야, 그래 하지 마라. 돈 그거야 벌기 쉽지. 안 벌려 해 그렇지. 어 째 버나 나 따라오너라. 그래 은행에 가 보니까 돈을 세어서 척척 이래 갖다 단 위에 놓습니다. 그래 놓으니까 푹 거머쥐고 주머 니에 넣습니다. 3분 동안에 그만 부자입니다. 3분만 보니까 3분 동 안 부자가 됐어요. 이랬는데 그 다음에 5분도 안 돼서 이래 묶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3분만 자기 시간으로 보고 계획하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어떤 사람은 자기 젊을 때, 젊음이 생전 있는 줄 알고 젊을 때 시간만 알고 늙을 때를 생각지 못하고 젊을 때의 시간만 계 산해 가지고 해 놓으니까 나중에 통통 틀려 버렸다 말이오. 또 이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만 자기 시간으로 알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몇 살 먹으면 힘이 적을 거다. 늙어서 내 똥오줌 받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될 터이니까 그때 그래도 일꾼 하나 댈 만치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 거기까지는 계산을 해서 알뜰히 했습니다. 영원이 있는데 죽음 너머 시간을 계산 못 했다 말이오. 그 사람 그만 헛일이오. 자, 하루만 보고 계산한 사람 이틀 닥치면 헛일, 또한 달 시간만 계산해 가지고 상대한 사람은 그 다음에 한 달 지나고 나니까 통통 비어서 헛일, 젊을 때만 상대한 사람은 늙어서 헛일, 이 세상만 상대 한 사람은 오는 영원 무궁세계를 생각하니까 헛일이오. 이래서, 알파 와 오메가라는 시작과 끝이라 말은 영원 전과 영원 후가 다 내 시간 이요, 내가 거게 살 사람이요, 또 내가 거게 관계되기 때문에 억만 년 뒤에는 내가 어찌 되나 억만 년 뒤의 일까지 오늘의 계산에 넣 어 가지고 계산을 해야 되겠다 말이오. 예수님이 이래 살았는데 서머나교회도 이래 살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간관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관' 자라 말은 볼 관(觀)자요. 시간을 어떻게 보느냐 그말이오. 시 간에 대해서 어떻게 네가 지식하고 있느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것을 가리켜서 시간관이라 이러는데 시간관이 예수님과 같은 시간 관을 가졌어요. 아이가 학생 때 공부도 안 하고 자꾸 이렇게 깡패로 돌아다니면서 이러면 그 아이가 그렇게 된 이유가 어데 있어요 시 간관이 젊을 때 그때만 봤지 내가 이러면 늙어서는 어찌 되나 늙을 때의 시간을 생각지 못해서 그래요.
그게 근시자요. 가깝게만 보고 멀리 보지 못해서 그래요.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날뛴 것은 세상은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시간이고 영원 무궁한 자기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에 대해서 염려를 하고 자기 생활에 계산 넣었습니까 안 넣었습니까 안 넣었다 그말이오. 안 넣으니까 낭파당했지요. 기독자는 시간이 주님과 같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영원한 시간을 우리가 가졌 기 때문에 영원한 시간을 계산 대 가지고 영원한 시간에 행복된 그 길을 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두고 영원한 시간에 행복된 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계산해서 가는 사람 이 우리 기독자들이라 그말이오.
2) 생사관 그 다음에는 생사관. 생사관 이것도 잘못되면 헛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있단다 그거만 있지 자기에게 해당됐다고는 생각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죽기야 죽지 해도 죽음에 대한 관심 적으로, 자기 마음에 감격적으로는 없습니다. 죽는다는 그걸 생각만 하고 있지 항상 살 것만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기독자들은, 살았느 냐 죽었다. 죽었느냐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다. 살아났으니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영생하는 것도 있고, 살아나기는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이 잘못되면 죽는 수가 있다. 그것이 뭐이냐 하면
둘째 사망의 해다. 그렇게 보는 것이 기독자의 생사관이오. 일반인들은 생사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 우리가 아는 것은, 일반인은 살았습니다. 살았다가 죽었습니다. 뭘로 죽었습니 까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살았던 것이 죽었습니다. 아이를 낳 으면 하나님이 창조할 때 영육을 창조한 건데 영육 창조한 것이 하나님이 그러면 죽은 걸 창조했느냐 죄인을 창조했느냐 그것이 신학 에 논리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걸 창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산 것을 창조하 고 좋은 걸 창조했어요. 좋은 걸 창조했는데 창조한 그것이 존재하 고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정죄가 옵니다. 인류 시조가 범죄해 가지고 정죄받은 것은 시조 자기 혼자만 정죄받은 것 이 아니라, 인류 시조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 먹지 말아라 하는 그 계약을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둘이 계약한 것인데, 하나님의 계약 대상인 인류 시조 아담 속에는 아담의 부정 모혈로 난 자손은 전부 그 안에 다 포함됐습니다. 대표해 가지고 아 담이 하나님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어긴 그 계약은 보통 자연 생육법으로 난 모든 사람들이 그 범죄에 다 동참했고 다 정죄받아 가지고 죽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일반인들은 누구든지 처음에 살았다가 그 다음에 죄와 허 물로 죽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는데 죽은 것이 계속 죽습니다. 죽은 것이 계속 죽어요. 모든 사람은 살았다가 죽었습니다. 살았다 가 죽었다는 그 말을 뭘로 가지고 증거할 수 있습니까 너희는 죄 와 허물로 죽었던 자라 죽었던 자라 했으니까 살아야 죽지요. 살았 다가 죽었다는 것을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았다가 죽어 가지고 이제 영원히 죽습니다. 인생은 산 것이 죽 어 가지고 영원히 죽습니다. 그걸 잘 몰라서 이 세상에서 지금 청년 으로 울뚝불뚝 힘쓰고 있으니까 산 자로 생각하지마는 그게 죽은 자 인데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받아 가지고 죽어가 고 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특수한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한 살 먹는 아이와 열 살 먹는 아이가 어느 아이가 많이 죽었소 열 살 먹는 아이가 많이 죽 었습니다. 그러면 한 해 살면 산 생명이 커지는 것입니까 죽음이 커 집니까 죽음이 커집니다. 이러다가 이제 차차 차차 한 살 두 살 먹는 것이 자꾸 죽어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다 죽고 영원한 죽음으로 옮겨서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생사관을 이렇게 성경이 말해 놨어요. 요대로 믿어야 합니다. 살 았다가 영원히 죽는 그것이 일반인들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어 찌 되느냐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 얻어서 다시 살아났다 이랬거든요.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산 것이 마귀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살아난 것이 그 뒤에는 또 어찌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살았다가 죽 었다가 또 살아났습니다. 살았다가 죽었다가 또 살아났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살아난 것은 몇 가지로 살아났습니까 네 가지 능력으로. 예수님의 대속은 완전한 사죄 칭의 화친이오. 예수님의 죽음의 대속, 또 성신의 감동, 또 진리,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 사활의 대속과 영 감과 진맘틂뎠泄때문에 우리가 살아난 것은 어떤 능력으로 살아났느냐 하면 예수님의 완전으 로 살아났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속한 것은 세 가지 죄를 대속한 것이요, 세 가 지 의를 대속한 것이요, 세 가지 동행을 대속한 것입니다. 세 가지 죄라 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금하는 것을 한 것이 한 죄이고, 또한 가지 죄는 하나님이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아니한 것이 죄이고, 또 하나님과 하나 돼서 그에게 피동되어서 거게 속해 살라고 했는데 배 반하고 나왔기 때문에 죄가 되어지고, 또 하나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 했는데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산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우리 죽음이 됐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가 죽었던 것이 살아났습니다. 다시 살아난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다시 살아났고
둘째 아담의 자손으로 또 나는 게 있습니다.
둘째 아담의 자손 그것은 신 적 요소이고 인적 요소가 아닙니다. 그러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지으 실 때에는 우리가 살았는데 산 것이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마디가 몇 개입니까 세 마디. 그러면, 살아났는데 살아난 이 사람 이 앞으로는 어찌 됩니까 살아난 이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 도 있는 것도 있고 또 영원히 죽지 못하고 영원히 영생을 하는 것도 있고 그렇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생사관을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또 몸과 마음의 형체도 영원히 죽지 않아요. 이것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고 내가 다시 조사해 가지고 안 되면 죽여 버릴 련다 이게 없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심판에는 그 행함 을 심판한다 했지 몸과 마음을 심판한다는 말이 성구에 없다 그말이 오. 알겠어요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따져야 돼요. 그래야 마귀란 놈들과 하나님의 법전에 서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지요. 이래서, 산 것이
첫째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죽었다가 죽은 것이 예수를 믿어 가지고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예수로 말미암 아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이 영은 영생으로 살아났고 우리의 마음과 고기덩어리의 형체도 영원한 것으로 살아났고, 왜 그거는 죽이는 심판이 없어요. 거기서 판정이 돼요. 죽이는 심판이 없으니까 영원 히 산다는 게 확정되지 않소 심판에서 죽인다 해야 되지 죽인다 안 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 살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심신의 행위도 다 살았어요. 행위도 다 살림을 받았습니다. 행위도 다 살림을 받았는 데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요. 행위는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살펴보겠다. 내가 이거 대속해서 살렸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다. 살았다. 너는 산 자라 하는 그런 이름은 가졌다. 네 명 의는 산 자다. 내가 대속해서 너를 살렸다. 네 행위도 다 살렸다. 그러나 행위에 대해서는 내가 너를 시험하겠다. 행위에 대해서는 네가 이 대속을 참 믿는 행위를 하는지 대속을 벗어버리는 행위를 하는지, 네가 벗어버릴 그런 우려성이 백프로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심사 해 본다 하고,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선악간에 각 사람의 행 함을 따라서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 오. 이러니까, 영과 혼, 몸 이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다시 재심 사 한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1차 사활의 대속으로 완전 대속이 됐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택한 자들이 세상에서 아 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이 마음도 부활하고 몸도 부활하고 영육이 부 활은 합니다. 부활하는데 다만 행위는 그게 의 되면 영생이 되고 죄 가 되면 멸망을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심사를 하신다고 이 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되고 인정 안 하시면 예수님의 대속을 확 벗길 것이오. 네가 내 대속을 안 입고 행동했는데 대속을 안 입고 벗어내 던져도 강제로 입 힌다 말이가 강제로 입혀요 그거는 안 돼요. 자유성을 줘서 네가 벗는 게 필요하거든 벗어라. 네가 괴로와도 입고 있는 게 필 요하거든 입어라. 이래 가지고 벗은 것은 영원한 사망이 되고 입고 벗지 않는 것은 다 영생입니다. 영, 육, 그 행위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안 벗고 입고 있으면 다 영생합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1호에 살았던 것이 2호 에 죽었고, 2호에 죽었던 것이 3호에 살아났고, 3호에 살아난 이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았는데 대속으로 살아난 이것이 예수님 의 사활의 대속을 벗지만 아니하면 전부 영생입니다. 사활의 대속을 벗지만 아니하면 전부 영생입니다. 몸도 마음도 행동도 벗지만 아니하면 다 영생이오. 심신의 정력도 벗지 아니하면 다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능도 영생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영 원히 살고,믿는 사람중에 어떤 사람은 살았던 것이 죽었고, 죽었던 것 이 살아나 가지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어버리면 그 다음에 죽 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으니까 죽어요. 사활의 대속을 벗으니까 죽는데,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 재심사가 있는 것은 몸입니 까 마음입니까 행동입니까 행동만이라는 요걸 똑똑히 알아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하는 요 성구를 단단 히 알고 뽈끈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이 벗은 것은 영원히 죽습니다. 우리는 영, 마음, 몸, 행위, 행위로서 만들어지는 기능이 있는데 그러면 몇 가지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합니까 영, 마음, 몸, 자기 행동한 형체는 영생하지만 행위는 뭘 만들어 내느냐 하면 행위는 기능을 만들어 냅니다. 행위는 기능을 만들어 내요. 기능 그거는 죽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글을 씁니다. 손으로 글을 씁니다. 글을 쓰니까 아주 글씨가 늘었습니다. 글씨가 늘어서 세계의 명필이 됐습니다. 그러면 글씨 잘쓰는 명필 그것은 하늘나라에 소용이 있습니 까 소용이 없어요. 다 죽어요. 어떤 사람이 시간을 소비해 가지고 자기에게 있는 정력, 정력이라 하면 마음의 재료와 몸의 재료 이 두 가지 재료를 가리켜서 정력이라 합니다. 그것 가지고 일생 동안 기울 여 가지고 복싱이라 하는 이거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세계 챔피언 이 됐어요. 세계 챔피언이 됐으면 챔피언 된 팔뚝 그거 하늘나라 가 요 못 가요 못 가지요.
그런데 그 힘이 그대로 있었으면 갈 터인데 그 힘이 일단 다른 것으로 가공이 돼 가지고 뚜드리고 치고 받고 하는 그 기능으로 변해졌어요. 그러면 그 기능은 하늘나라에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하나님의 진리에 맞아요 안 맞아요 하나님께 피동된 거요 안 된 거요 그러면 그 힘이 변해서 기능 됐기 때문에 그 정력 도 다 불타고, 기능도 불타고, 몸뚱이 그 형체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부활할 때에 영광이 차이 있다 그 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의 영광의 차이를 비유할 때 형체로 비유했는 데 형체는 땅에 속한 형체가 있으니까 이것도 형체요. 모래알도 형체 요. 하늘에 해도 형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해 한 개의 형체와 땅 에 있는 모래알 한 개의 형체가 이름은 가지고 있고 형체는 형체이지 만 해 한 개의 형체의 영광과 모래알 한 개의 형체의 영광이 차이가 얼마나 있습니까 심히 큰 차이요. 무한한 차이라. 해 한 개의 영광이나 가치나 실력이 모래알 한 개의 실력하고 비 교가 됩니까 모래알 같은 실력 부활도 있고 해 한 개와 같은 실력 부활도 있다 그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살았던 것이 죄와 허물로
첫째 아담으로 죽었고,
둘째 아담으로 살아났고,
둘째 아 담으로 살아난 것이 그대로 영생하는 것도 있고, 살아난 이것이 또 새로 죽는 일 있습니다. 새로 죽는 죽음은 무슨 죽음이라요
둘째 죽음. 그러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노라 예수님은 죽었다 가 살아났다 이랬으니까 예수님은 몇 마디입니까 죽은 거 산 것 몇 마디요 예수님은 살았었습니다. 살았었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두 마디. 살았었다가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대신했기 때문에 죽었는데 껍데기는 죽고 속에 알맹이는 살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한 번 봤습니까 두 번 봤습니까 한 번도 안 봤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보지 않았어 요. 예수님은 우리 대신해서 죽으셨지 당신은 죽지 아니했습니다. 이사야 53장 마지막 절수에 보면 우리 죄를 담당해서 죽었으나 실상은 우리 택한 자들의 죄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셨느니라 이랬어 요. 기도하고 계셨어요. 껍데기는 우리 대신해서 죽어서 형벌받았어 요. 껍데기는 죽음의 형벌 받았지만 속에 알맹이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요. 예수님의 심신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의 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인성의 영은 죽음의 형을 받지 아니했어요. 그 영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기도하고 계셨어요. 안 죽었어요. 속은 안 죽고 겉만 죽었어요. 예수님의 인성은 겉만 죽고 속은 죽지 않았습니다. 왜 겉어머리 죽는 것만 하면 우리 대형이 되고 대행이 되거든요. 대형이 되기 때문에 겉만 죽고 속은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몽땅 죽었다가 몽땅 살아났다 이랬는데 주님은 우리 대신하는 것은 껍데기 만 하면 대신할 수가 있기 때문에 껍데기는 대신해서 죽고 속 알맹이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죽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 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죽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려야 죽는 것인데 예수님은 하나님께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고, 우리 대신 형벌받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했 기 때문에, 거역함으로 정죄받아서 죽을 만한 것은 아니고 다만 우리 를 대형 대행한 사랑으로서 성공만 한 것이지 죽음의 저주를 속속들 이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받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 순종 하는 것으로만 전부가 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았다가 죽었고, 또 죽었다가
둘째 아담으로 말미 암아 살아났고, 살아난 이것이 지금 두 길이 있습니다. 살아난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 있고 살아난 것이 또한번 죽을 수 있습니다. 그 러면 또한번 죽는 것은 몇 동가리입니까 살았다가
첫째 아담 우리 조상으로 말미암아 죽었고, 죽었다가
둘째 아담으로 살았고, 또 산 것 이 또
둘째 죽음으로 죽고 그러면 마디가 몇 마디입니까 네 마디. 세 마디만 가지고 살면 영생해요. 어쩌면 세 마디 가지고 살 수 있 습니까 안 벗으면 돼요. 옷을 홀딱 벗었기 때문에 흰옷을 사서 입어 이랬고, 또 두루마기를 더럽혔기 때문에 빤다 이랬고, 내나 사 활의 대속을 입고 있으면서 실수하는 것을 가리켜서 사활의 대속의 구원의 두루마기를 더럽혔다고 말한 것이오. 더럽히면 빨면 돼요.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이 복 있다 빨면 돼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또 빨면 돼요.이것이 우리의 생사관입니다. 죽는 것은 뭘로 죽었습니까 죄로 죽는데 우리 조상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또 살아난 것은 사죄 칭의 화친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 네 가지로 살아났어요. 죽기는 죄 하나로 죽고 사는 건 이 네 가지가 구비해야 돼요. 구비하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생사관이 주님 과 서머나교회는 하나였습니다.
3) 고락관 그 다음에는 고락관. 고생이고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냐 고생이라는 것이 자기 자체로 인한 고생 있습니다. 자기 자체 로 인해서 고생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체가 쇠약해지든지 또 늙어지든지 또 자기가 잘못해 가지고 다치든지 이래서 자체로 고생하는 게 있고, 또 다른 피조물들이 나를 괴롭게 해 가지고 고생하는 거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나를 고생시켜 가지고 감옥에도 가두고, 때리 기도 하고, 끌기도 하고, 굶기기도 하고, 돈 뺏들려고 칼로 찌르기도 하고 이 모든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내가 피해를 입는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고난을 줘서 고난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크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 고난받는 것이고, 하나는 피조물에게 고난받는 것이니 피조물에게 고난 받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피조물에게 고난받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 이 나를 괴롭히는 고난이 있고, 내 자체가 자체를 괴롭게 하는 고난 이 있으니 그 둘 다 피조물들에게 받는 고난입니다. 이래서, 이 서머 나교회는 피조물이 주는 고난은 고난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 은 그까짓 거 가치 없는 고난이라. 그 고난은 영원히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 고난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이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따라옵니다. 영원히 우리에게 고난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안 받 을려고 하면 피조물에게 고난을 받게 되고, 또 피조물이 주는 고난을 안 받을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거슬리면 하나님에게 고난을 받고, 또 세상에게 거뻔외하 면 세상의 고난 받고, 둘 다 고난 안 받으면 좋은데 이렇게 되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왜 하나님은 옳은 것이고 세상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에게 고난 안 받을려 하면 틀린 것에게 고난받아야 되 고 틀린 것에게 고난 안 받을려 하면 옳은 것에게 고난을 받아야 된 다 그말이오. 이 둘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이것도 합치될 수가 없어요.
평안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는 데, 하나님의 평안을 받을려고 하니까 세상이 하나님 평안을 받지 못 하도록 방해를 하고 세상이 주는 평안을 받으라고 자꾸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성도들이 세상이 주는 평 안 그까짓 거는 있다가 없어질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고 놓지 않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평안을 물리칩니다.세상이 주는 평안을 물리치니까 세상이 나에 게 고난을 줍니다. 세상이 나에게 고난을 줍니다. 고난을 주니까 이 고난을 받지 않으려 하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내놔야 될 거라 말이 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안 내주기 위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안 내주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고난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평안 때문에 이 세상 고난을 받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평 안의 중량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지 못하도록 애를 먹 이는데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을려고 애를 쓰니까 세상에는 미움을 당하는데 누구한테는 사랑을 받습니까 하나님께는 사랑을 받습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나를 하나님의 평안을 받지 못하도록 자 꾸 방해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돕는 것이 됩니까 해하는 것이 됩 니까 돕는 게 돼요. 할렐루야! 돕는 것이 돼요. 또 세상이 주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참 큰 고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난을 안 받고 세상 고난을 받을려고 합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나를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안 받 을려 한다고 세상이 미워서 고난을 되게 줍니다. 고난을 되게 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평안이 더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커져요. 이러니까 세상 제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 게는 바라다 주고, 도와 주고, 위해 주고, 섬기고, 나를 미워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욕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고, 축복해 주는 것이고 암만 해할려 해 봤자, 믿음에 선 자는 세상이 아 무리 해할려 해도 해하지 못하고 뺏으려 해도 뺏지 못합니다. 뺏으면 더 많아지고 더 커져요. 이 고락관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됩니다. 고락관을 바로 알면 고락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어요.
4) 빈부관 또 빈부관만 바로 알면 되는데 부자라는 것도 돈 부자도 있고, 명 예 부자도 있고, 지위 부자도 있고, 지식 부자도 있고, 건강 부자도 있고, 또 진리 부자도 있고, 또 믿음 부자도 있고, 또 하나님 부자도 있고 부자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좋은 부자가 뭐입니까 하나님 부자요. 그 다음에는 진리 부자. 그 다음에는 믿음 부자. 믿음 부자는 하나님의 충만한 것을 내것처럼 막 쓰는 겁니다. 건방지게 전지도 없는 것이 막 전지의 지혜를 척척 씁니다. 요셉 이가 애굽에 총리대신 되고난 다음에 애굽 나라를 다스리는데 하나님의 전지를 다 갖다 써 버려요. 하나님의 전지를 다 갖다 써요. 그 때 애굽이 참 잘됐습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도 다 갖다 씁니다. 이 러니까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를 아버지라 했지요. 그때 애굽 사람들 은 요셉이를 아버지라고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게 보니까 전지자거든요. 전능자거든요. 모든 걸 주권하고 있는 주권자거든요. 하는 대로 다 된다 말이오. 하나님의 것을 다 내다 썼어요. 하나님 의 것이 제것이오. 제것인데 뭘로 써먹어요 뭘로만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써 먹을 수 있어요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믿는 것이 하나님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오. 믿음으로 다 그래 썼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그분이 거지로 우리 안에 계십니까, 부자로 계십니까 그분이 어리석은 자로 계시요, 전지 전능자로 계시요 전지 전능이 내 안에 계시니 전지 전능을 쓸 수밖에는 없지요.
그런데 그분이 내 안에 계실 때 어떻게 계시면 좋겠어요 내 간 속에든지 내 가슴 속에든지 주먹덩이같이 둥그러이 그런 형체를 가지 고 계셔서 이는 전지한 덩어리다, 전능한 덩어리다, 이거는 완전한 덩 어리다, 이거는 다 완전이다.
이래 주먹덩이만해 가지고 완전하면 좋 겠어요 주먹덩이만한 덩어리도 없고 알밤만한 덩어리도 없고 아무것 도 없으면서 전지 전능 완전만 있으면 좋아요 이러니까 이렇게 좋 게 우리 안에 와서 내주해 계셔요. 전능자가 돼 가지고 와서 있어도 전능은 좋지마는 주먹덩이만한 게 들어놓으면 좀 괴롭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좋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로 전 지 전능으로만 완전으로만 내 안에 계셔 가지고 실력만 이행하고 이 러니까 안 보인다고 또 야단이오. 안 보인다고 또 부인한다 말이오. 결론 이래서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 이 네 가지 사대관이 바르 면 그 사람의 생활은 필연적으로 바로 되고 맙니다. 이 네 가지를 바로 모르고 착각한 가운데서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머나 교회는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이 예수님과 같기 때문에 나 도 그러하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사람 이라는 건 생의 애착욕이 있습니다. 생의 애착욕이 있기 때문에 어쩌든지 좋은 것 찾아갑니다. 좋은 것 찾아가고, 유익한 것 찾아가고, 사는 것 찾아갑니다. 요 지식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산다는 요 지식이 확고하게 서 있으면 그 지 식이 변동되기 전에는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게 죽는다는 그 지식을 가지고는 그 사람이 내가 주를 위해 죽어야 지. 죽어야지 해도 못 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올바른 교리와 신조가 아니면 올바른 신앙 행위는 있을 수가 없고 올바른 신앙 행위가 없는 데는 올바른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에베소교회,둘째가 서머나교회인데 에베소교회 서 머나교회에 이 교회를 망치는 이단은 무슨 감투를 쓰고 들어 왔는가 사도라 하는 것은 직접 하나님께 직통하는 사람이요, 유대인은 시퍼 런 정통을 가진 사람들이오. 정통이니 하나님으로 더불어 직접 연결 됐느니 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 속에 이단이 들어오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온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옳다 한다고 따라가지 말아요. 또 삐뚤어 졌다 한다고 다 삐뚤어진 걸로 정죄하지 말아요. 말씀을 들어봐요. 또 행동하는 걸 봐요. 그러면 다 봤어요 말도 제가 할 수 있고 행 동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거 있어요. 하나님이 결과를 맺게 하는 것은 제가 만들지 못해요. 그거는 가짜배기 못 만 들어요. 암만 천사의 말을 하고 아주 의인의 행동을 이래 해도 가짜 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 뒤에 딱 보면 결과를 해서 알려 줍니다. 이 거는 가짜다 하는 것을 그 결과로 보여 줍니다.
서머나교회의 사대관
1) 시간관 여기 서머나교회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교회로 나타났는데 주님과 서머나교회와 네 가지 지식이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시간관이 같습니다. 시간관이 같다 말은 시간을 어떻게 봤느냐 네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어떤 시간을 네 시간으로 보고 모든 것을 계산도 하고, 계획도 하고, 또 달성도 할려고 건설도 하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시간관이 어디 나타났는가 나는 처음이요 나중 이라 이랬어요. 처음이라 말은 시발이라 말이요 나중이라 말은 끝 이라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그런 말인데 곧 영원 전 영원 후라는 말입니다. 영원 전과 영원 후는 시간이 그 안에 다 들었습니다. 영원 전과 영원 후에는 그 속에 시간이 다 들었지 빠진 시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영원 전과 영원 후를 당신의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살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일할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그 시간 에 다 매여서 살 것으로 알기 때문에 당신의 계획은 시간을 영원 전 으로 영원 후까지를 당신의 시간으로 생각을 하고 모든 일을 계획을 하고 처리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일 년만을 자기 시간으로 알고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은 하루만을 자기 시간으로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은 다음 시 간이야 내가 모르겠고 당장 현실이라는 그 시간만 보고 사는 사람 여 러가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제일 눈이 소경된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돈을 벌려고 땀을 쭐쭐 흘리고 있으니까 이 바보 야, 그래 하지 마라. 돈 그거야 벌기 쉽지. 안 벌려 해 그렇지. 어 째 버나 나 따라오너라. 그래 은행에 가 보니까 돈을 세어서 척척 이래 갖다 단 위에 놓습니다. 그래 놓으니까 푹 거머쥐고 주머 니에 넣습니다. 3분 동안에 그만 부자입니다. 3분만 보니까 3분 동 안 부자가 됐어요. 이랬는데 그 다음에 5분도 안 돼서 이래 묶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3분만 자기 시간으로 보고 계획하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어떤 사람은 자기 젊을 때, 젊음이 생전 있는 줄 알고 젊을 때 시간만 알고 늙을 때를 생각지 못하고 젊을 때의 시간만 계 산해 가지고 해 놓으니까 나중에 통통 틀려 버렸다 말이오. 또 이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만 자기 시간으로 알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몇 살 먹으면 힘이 적을 거다. 늙어서 내 똥오줌 받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될 터이니까 그때 그래도 일꾼 하나 댈 만치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 거기까지는 계산을 해서 알뜰히 했습니다. 영원이 있는데 죽음 너머 시간을 계산 못 했다 말이오. 그 사람 그만 헛일이오. 자, 하루만 보고 계산한 사람 이틀 닥치면 헛일, 또한 달 시간만 계산해 가지고 상대한 사람은 그 다음에 한 달 지나고 나니까 통통 비어서 헛일, 젊을 때만 상대한 사람은 늙어서 헛일, 이 세상만 상대 한 사람은 오는 영원 무궁세계를 생각하니까 헛일이오. 이래서, 알파 와 오메가라는 시작과 끝이라 말은 영원 전과 영원 후가 다 내 시간 이요, 내가 거게 살 사람이요, 또 내가 거게 관계되기 때문에 억만 년 뒤에는 내가 어찌 되나 억만 년 뒤의 일까지 오늘의 계산에 넣 어 가지고 계산을 해야 되겠다 말이오. 예수님이 이래 살았는데 서머나교회도 이래 살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간관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관' 자라 말은 볼 관(觀)자요. 시간을 어떻게 보느냐 그말이오. 시 간에 대해서 어떻게 네가 지식하고 있느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것을 가리켜서 시간관이라 이러는데 시간관이 예수님과 같은 시간 관을 가졌어요. 아이가 학생 때 공부도 안 하고 자꾸 이렇게 깡패로 돌아다니면서 이러면 그 아이가 그렇게 된 이유가 어데 있어요 시 간관이 젊을 때 그때만 봤지 내가 이러면 늙어서는 어찌 되나 늙을 때의 시간을 생각지 못해서 그래요.
그게 근시자요. 가깝게만 보고 멀리 보지 못해서 그래요.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날뛴 것은 세상은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시간이고 영원 무궁한 자기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시간에 대해서 염려를 하고 자기 생활에 계산 넣었습니까 안 넣었습니까 안 넣었다 그말이오. 안 넣으니까 낭파당했지요. 기독자는 시간이 주님과 같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영원한 시간을 우리가 가졌 기 때문에 영원한 시간을 계산 대 가지고 영원한 시간에 행복된 그 길을 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두고 영원한 시간에 행복된 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계산해서 가는 사람 이 우리 기독자들이라 그말이오.
2) 생사관 그 다음에는 생사관. 생사관 이것도 잘못되면 헛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있단다 그거만 있지 자기에게 해당됐다고는 생각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죽기야 죽지 해도 죽음에 대한 관심 적으로, 자기 마음에 감격적으로는 없습니다. 죽는다는 그걸 생각만 하고 있지 항상 살 것만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기독자들은, 살았느 냐 죽었다. 죽었느냐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다. 살아났으니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영생하는 것도 있고, 살아나기는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이 잘못되면 죽는 수가 있다. 그것이 뭐이냐 하면
둘째 사망의 해다. 그렇게 보는 것이 기독자의 생사관이오. 일반인들은 생사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 우리가 아는 것은, 일반인은 살았습니다. 살았다가 죽었습니다. 뭘로 죽었습니 까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살았던 것이 죽었습니다. 아이를 낳 으면 하나님이 창조할 때 영육을 창조한 건데 영육 창조한 것이 하나님이 그러면 죽은 걸 창조했느냐 죄인을 창조했느냐 그것이 신학 에 논리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걸 창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산 것을 창조하 고 좋은 걸 창조했어요. 좋은 걸 창조했는데 창조한 그것이 존재하 고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정죄가 옵니다. 인류 시조가 범죄해 가지고 정죄받은 것은 시조 자기 혼자만 정죄받은 것 이 아니라, 인류 시조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 먹지 말아라 하는 그 계약을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둘이 계약한 것인데, 하나님의 계약 대상인 인류 시조 아담 속에는 아담의 부정 모혈로 난 자손은 전부 그 안에 다 포함됐습니다. 대표해 가지고 아 담이 하나님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어긴 그 계약은 보통 자연 생육법으로 난 모든 사람들이 그 범죄에 다 동참했고 다 정죄받아 가지고 죽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일반인들은 누구든지 처음에 살았다가 그 다음에 죄와 허 물로 죽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는데 죽은 것이 계속 죽습니다. 죽은 것이 계속 죽어요. 모든 사람은 살았다가 죽었습니다. 살았다 가 죽었다는 그 말을 뭘로 가지고 증거할 수 있습니까 너희는 죄 와 허물로 죽었던 자라 죽었던 자라 했으니까 살아야 죽지요. 살았 다가 죽었다는 것을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았다가 죽어 가지고 이제 영원히 죽습니다. 인생은 산 것이 죽 어 가지고 영원히 죽습니다. 그걸 잘 몰라서 이 세상에서 지금 청년 으로 울뚝불뚝 힘쓰고 있으니까 산 자로 생각하지마는 그게 죽은 자 인데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받아 가지고 죽어가 고 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특수한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한 살 먹는 아이와 열 살 먹는 아이가 어느 아이가 많이 죽었소 열 살 먹는 아이가 많이 죽 었습니다. 그러면 한 해 살면 산 생명이 커지는 것입니까 죽음이 커 집니까 죽음이 커집니다. 이러다가 이제 차차 차차 한 살 두 살 먹는 것이 자꾸 죽어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다 죽고 영원한 죽음으로 옮겨서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생사관을 이렇게 성경이 말해 놨어요. 요대로 믿어야 합니다. 살 았다가 영원히 죽는 그것이 일반인들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어 찌 되느냐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 얻어서 다시 살아났다 이랬거든요.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산 것이 마귀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살아난 것이 그 뒤에는 또 어찌 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살았다가 죽 었다가 또 살아났습니다. 살았다가 죽었다가 또 살아났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살아난 것은 몇 가지로 살아났습니까 네 가지 능력으로. 예수님의 대속은 완전한 사죄 칭의 화친이오. 예수님의 죽음의 대속, 또 성신의 감동, 또 진리,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 사활의 대속과 영 감과 진맘틂뎠泄때문에 우리가 살아난 것은 어떤 능력으로 살아났느냐 하면 예수님의 완전으 로 살아났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속한 것은 세 가지 죄를 대속한 것이요, 세 가 지 의를 대속한 것이요, 세 가지 동행을 대속한 것입니다. 세 가지 죄라 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금하는 것을 한 것이 한 죄이고, 또한 가지 죄는 하나님이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아니한 것이 죄이고, 또 하나님과 하나 돼서 그에게 피동되어서 거게 속해 살라고 했는데 배 반하고 나왔기 때문에 죄가 되어지고, 또 하나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 했는데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산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우리 죽음이 됐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가 죽었던 것이 살아났습니다. 다시 살아난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다시 살아났고
둘째 아담의 자손으로 또 나는 게 있습니다.
둘째 아담의 자손 그것은 신 적 요소이고 인적 요소가 아닙니다. 그러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지으 실 때에는 우리가 살았는데 산 것이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마디가 몇 개입니까 세 마디. 그러면, 살아났는데 살아난 이 사람 이 앞으로는 어찌 됩니까 살아난 이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 도 있는 것도 있고 또 영원히 죽지 못하고 영원히 영생을 하는 것도 있고 그렇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생사관을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또 몸과 마음의 형체도 영원히 죽지 않아요. 이것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고 내가 다시 조사해 가지고 안 되면 죽여 버릴 련다 이게 없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심판에는 그 행함 을 심판한다 했지 몸과 마음을 심판한다는 말이 성구에 없다 그말이 오. 알겠어요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따져야 돼요. 그래야 마귀란 놈들과 하나님의 법전에 서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지요. 이래서, 산 것이
첫째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죽었다가 죽은 것이 예수를 믿어 가지고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예수로 말미암 아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이 영은 영생으로 살아났고 우리의 마음과 고기덩어리의 형체도 영원한 것으로 살아났고, 왜 그거는 죽이는 심판이 없어요. 거기서 판정이 돼요. 죽이는 심판이 없으니까 영원 히 산다는 게 확정되지 않소 심판에서 죽인다 해야 되지 죽인다 안 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 살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심신의 행위도 다 살았어요. 행위도 다 살림을 받았습니다. 행위도 다 살림을 받았는 데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요. 행위는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살펴보겠다. 내가 이거 대속해서 살렸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다. 살았다. 너는 산 자라 하는 그런 이름은 가졌다. 네 명 의는 산 자다. 내가 대속해서 너를 살렸다. 네 행위도 다 살렸다. 그러나 행위에 대해서는 내가 너를 시험하겠다. 행위에 대해서는 네가 이 대속을 참 믿는 행위를 하는지 대속을 벗어버리는 행위를 하는지, 네가 벗어버릴 그런 우려성이 백프로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심사 해 본다 하고,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선악간에 각 사람의 행 함을 따라서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 오. 이러니까, 영과 혼, 몸 이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다시 재심 사 한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1차 사활의 대속으로 완전 대속이 됐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택한 자들이 세상에서 아 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이 마음도 부활하고 몸도 부활하고 영육이 부 활은 합니다. 부활하는데 다만 행위는 그게 의 되면 영생이 되고 죄 가 되면 멸망을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심사를 하신다고 이 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되고 인정 안 하시면 예수님의 대속을 확 벗길 것이오. 네가 내 대속을 안 입고 행동했는데 대속을 안 입고 벗어내 던져도 강제로 입 힌다 말이가 강제로 입혀요 그거는 안 돼요. 자유성을 줘서 네가 벗는 게 필요하거든 벗어라. 네가 괴로와도 입고 있는 게 필 요하거든 입어라. 이래 가지고 벗은 것은 영원한 사망이 되고 입고 벗지 않는 것은 다 영생입니다. 영, 육, 그 행위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안 벗고 입고 있으면 다 영생합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1호에 살았던 것이 2호 에 죽었고, 2호에 죽었던 것이 3호에 살아났고, 3호에 살아난 이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았는데 대속으로 살아난 이것이 예수님 의 사활의 대속을 벗지만 아니하면 전부 영생입니다. 사활의 대속을 벗지만 아니하면 전부 영생입니다. 몸도 마음도 행동도 벗지만 아니하면 다 영생이오. 심신의 정력도 벗지 아니하면 다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능도 영생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영 원히 살고,믿는 사람중에 어떤 사람은 살았던 것이 죽었고, 죽었던 것 이 살아나 가지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어버리면 그 다음에 죽 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으니까 죽어요. 사활의 대속을 벗으니까 죽는데,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 재심사가 있는 것은 몸입니 까 마음입니까 행동입니까 행동만이라는 요걸 똑똑히 알아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하는 요 성구를 단단 히 알고 뽈끈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이 벗은 것은 영원히 죽습니다. 우리는 영, 마음, 몸, 행위, 행위로서 만들어지는 기능이 있는데 그러면 몇 가지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합니까 영, 마음, 몸, 자기 행동한 형체는 영생하지만 행위는 뭘 만들어 내느냐 하면 행위는 기능을 만들어 냅니다. 행위는 기능을 만들어 내요. 기능 그거는 죽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글을 씁니다. 손으로 글을 씁니다. 글을 쓰니까 아주 글씨가 늘었습니다. 글씨가 늘어서 세계의 명필이 됐습니다. 그러면 글씨 잘쓰는 명필 그것은 하늘나라에 소용이 있습니 까 소용이 없어요. 다 죽어요. 어떤 사람이 시간을 소비해 가지고 자기에게 있는 정력, 정력이라 하면 마음의 재료와 몸의 재료 이 두 가지 재료를 가리켜서 정력이라 합니다. 그것 가지고 일생 동안 기울 여 가지고 복싱이라 하는 이거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세계 챔피언 이 됐어요. 세계 챔피언이 됐으면 챔피언 된 팔뚝 그거 하늘나라 가 요 못 가요 못 가지요.
그런데 그 힘이 그대로 있었으면 갈 터인데 그 힘이 일단 다른 것으로 가공이 돼 가지고 뚜드리고 치고 받고 하는 그 기능으로 변해졌어요. 그러면 그 기능은 하늘나라에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하나님의 진리에 맞아요 안 맞아요 하나님께 피동된 거요 안 된 거요 그러면 그 힘이 변해서 기능 됐기 때문에 그 정력 도 다 불타고, 기능도 불타고, 몸뚱이 그 형체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부활할 때에 영광이 차이 있다 그 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의 영광의 차이를 비유할 때 형체로 비유했는 데 형체는 땅에 속한 형체가 있으니까 이것도 형체요. 모래알도 형체 요. 하늘에 해도 형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해 한 개의 형체와 땅 에 있는 모래알 한 개의 형체가 이름은 가지고 있고 형체는 형체이지 만 해 한 개의 형체의 영광과 모래알 한 개의 형체의 영광이 차이가 얼마나 있습니까 심히 큰 차이요. 무한한 차이라. 해 한 개의 영광이나 가치나 실력이 모래알 한 개의 실력하고 비 교가 됩니까 모래알 같은 실력 부활도 있고 해 한 개와 같은 실력 부활도 있다 그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살았던 것이 죄와 허물로
첫째 아담으로 죽었고,
둘째 아담으로 살아났고,
둘째 아 담으로 살아난 것이 그대로 영생하는 것도 있고, 살아난 이것이 또 새로 죽는 일 있습니다. 새로 죽는 죽음은 무슨 죽음이라요
둘째 죽음. 그러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노라 예수님은 죽었다 가 살아났다 이랬으니까 예수님은 몇 마디입니까 죽은 거 산 것 몇 마디요 예수님은 살았었습니다. 살았었는데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두 마디. 살았었다가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대신했기 때문에 죽었는데 껍데기는 죽고 속에 알맹이는 살았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한 번 봤습니까 두 번 봤습니까 한 번도 안 봤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보지 않았어 요. 예수님은 우리 대신해서 죽으셨지 당신은 죽지 아니했습니다. 이사야 53장 마지막 절수에 보면 우리 죄를 담당해서 죽었으나 실상은 우리 택한 자들의 죄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셨느니라 이랬어 요. 기도하고 계셨어요. 껍데기는 우리 대신해서 죽어서 형벌받았어 요. 껍데기는 죽음의 형벌 받았지만 속에 알맹이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요. 예수님의 심신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의 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인성의 영은 죽음의 형을 받지 아니했어요. 그 영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기도하고 계셨어요. 안 죽었어요. 속은 안 죽고 겉만 죽었어요. 예수님의 인성은 겉만 죽고 속은 죽지 않았습니다. 왜 겉어머리 죽는 것만 하면 우리 대형이 되고 대행이 되거든요. 대형이 되기 때문에 겉만 죽고 속은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몽땅 죽었다가 몽땅 살아났다 이랬는데 주님은 우리 대신하는 것은 껍데기 만 하면 대신할 수가 있기 때문에 껍데기는 대신해서 죽고 속 알맹이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죽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 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죽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려야 죽는 것인데 예수님은 하나님께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고, 우리 대신 형벌받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했 기 때문에, 거역함으로 정죄받아서 죽을 만한 것은 아니고 다만 우리 를 대형 대행한 사랑으로서 성공만 한 것이지 죽음의 저주를 속속들 이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받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 순종 하는 것으로만 전부가 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았다가 죽었고, 또 죽었다가
둘째 아담으로 말미 암아 살아났고, 살아난 이것이 지금 두 길이 있습니다. 살아난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 있고 살아난 것이 또한번 죽을 수 있습니다. 그 러면 또한번 죽는 것은 몇 동가리입니까 살았다가
첫째 아담 우리 조상으로 말미암아 죽었고, 죽었다가
둘째 아담으로 살았고, 또 산 것 이 또
둘째 죽음으로 죽고 그러면 마디가 몇 마디입니까 네 마디. 세 마디만 가지고 살면 영생해요. 어쩌면 세 마디 가지고 살 수 있 습니까 안 벗으면 돼요. 옷을 홀딱 벗었기 때문에 흰옷을 사서 입어 이랬고, 또 두루마기를 더럽혔기 때문에 빤다 이랬고, 내나 사 활의 대속을 입고 있으면서 실수하는 것을 가리켜서 사활의 대속의 구원의 두루마기를 더럽혔다고 말한 것이오. 더럽히면 빨면 돼요.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이 복 있다 빨면 돼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또 빨면 돼요.이것이 우리의 생사관입니다. 죽는 것은 뭘로 죽었습니까 죄로 죽는데 우리 조상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또 살아난 것은 사죄 칭의 화친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 네 가지로 살아났어요. 죽기는 죄 하나로 죽고 사는 건 이 네 가지가 구비해야 돼요. 구비하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생사관이 주님 과 서머나교회는 하나였습니다.
3) 고락관 그 다음에는 고락관. 고생이고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냐 고생이라는 것이 자기 자체로 인한 고생 있습니다. 자기 자체 로 인해서 고생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체가 쇠약해지든지 또 늙어지든지 또 자기가 잘못해 가지고 다치든지 이래서 자체로 고생하는 게 있고, 또 다른 피조물들이 나를 괴롭게 해 가지고 고생하는 거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나를 고생시켜 가지고 감옥에도 가두고, 때리 기도 하고, 끌기도 하고, 굶기기도 하고, 돈 뺏들려고 칼로 찌르기도 하고 이 모든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내가 피해를 입는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고난을 줘서 고난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크게 말하면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 고난받는 것이고, 하나는 피조물에게 고난받는 것이니 피조물에게 고난 받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피조물에게 고난받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 이 나를 괴롭히는 고난이 있고, 내 자체가 자체를 괴롭게 하는 고난 이 있으니 그 둘 다 피조물들에게 받는 고난입니다. 이래서, 이 서머 나교회는 피조물이 주는 고난은 고난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 은 그까짓 거 가치 없는 고난이라. 그 고난은 영원히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 고난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이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따라옵니다. 영원히 우리에게 고난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안 받 을려고 하면 피조물에게 고난을 받게 되고, 또 피조물이 주는 고난을 안 받을려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거슬리면 하나님에게 고난을 받고, 또 세상에게 거뻔외하 면 세상의 고난 받고, 둘 다 고난 안 받으면 좋은데 이렇게 되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왜 하나님은 옳은 것이고 세상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에게 고난 안 받을려 하면 틀린 것에게 고난받아야 되 고 틀린 것에게 고난 안 받을려 하면 옳은 것에게 고난을 받아야 된 다 그말이오. 이 둘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이것도 합치될 수가 없어요.
평안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는 데, 하나님의 평안을 받을려고 하니까 세상이 하나님 평안을 받지 못 하도록 방해를 하고 세상이 주는 평안을 받으라고 자꾸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성도들이 세상이 주는 평 안 그까짓 거는 있다가 없어질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고 놓지 않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평안을 물리칩니다.세상이 주는 평안을 물리치니까 세상이 나에 게 고난을 줍니다. 세상이 나에게 고난을 줍니다. 고난을 주니까 이 고난을 받지 않으려 하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내놔야 될 거라 말이 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안 내주기 위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안 내주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고난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평안 때문에 이 세상 고난을 받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평 안의 중량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지 못하도록 애를 먹 이는데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을려고 애를 쓰니까 세상에는 미움을 당하는데 누구한테는 사랑을 받습니까 하나님께는 사랑을 받습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나를 하나님의 평안을 받지 못하도록 자 꾸 방해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돕는 것이 됩니까 해하는 것이 됩 니까 돕는 게 돼요. 할렐루야! 돕는 것이 돼요. 또 세상이 주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참 큰 고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난을 안 받고 세상 고난을 받을려고 합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나를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안 받 을려 한다고 세상이 미워서 고난을 되게 줍니다. 고난을 되게 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평안이 더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커져요. 이러니까 세상 제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 게는 바라다 주고, 도와 주고, 위해 주고, 섬기고, 나를 미워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욕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고, 축복해 주는 것이고 암만 해할려 해 봤자, 믿음에 선 자는 세상이 아 무리 해할려 해도 해하지 못하고 뺏으려 해도 뺏지 못합니다. 뺏으면 더 많아지고 더 커져요. 이 고락관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됩니다. 고락관을 바로 알면 고락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어요.
4) 빈부관 또 빈부관만 바로 알면 되는데 부자라는 것도 돈 부자도 있고, 명 예 부자도 있고, 지위 부자도 있고, 지식 부자도 있고, 건강 부자도 있고, 또 진리 부자도 있고, 또 믿음 부자도 있고, 또 하나님 부자도 있고 부자 많습니다. 그 중에 제일 좋은 부자가 뭐입니까 하나님 부자요. 그 다음에는 진리 부자. 그 다음에는 믿음 부자. 믿음 부자는 하나님의 충만한 것을 내것처럼 막 쓰는 겁니다. 건방지게 전지도 없는 것이 막 전지의 지혜를 척척 씁니다. 요셉 이가 애굽에 총리대신 되고난 다음에 애굽 나라를 다스리는데 하나님의 전지를 다 갖다 써 버려요. 하나님의 전지를 다 갖다 써요. 그 때 애굽이 참 잘됐습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도 다 갖다 씁니다. 이 러니까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를 아버지라 했지요. 그때 애굽 사람들 은 요셉이를 아버지라고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게 보니까 전지자거든요. 전능자거든요. 모든 걸 주권하고 있는 주권자거든요. 하는 대로 다 된다 말이오. 하나님의 것을 다 내다 썼어요. 하나님 의 것이 제것이오. 제것인데 뭘로 써먹어요 뭘로만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써 먹을 수 있어요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믿는 것이 하나님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오. 믿음으로 다 그래 썼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그분이 거지로 우리 안에 계십니까, 부자로 계십니까 그분이 어리석은 자로 계시요, 전지 전능자로 계시요 전지 전능이 내 안에 계시니 전지 전능을 쓸 수밖에는 없지요.
그런데 그분이 내 안에 계실 때 어떻게 계시면 좋겠어요 내 간 속에든지 내 가슴 속에든지 주먹덩이같이 둥그러이 그런 형체를 가지 고 계셔서 이는 전지한 덩어리다, 전능한 덩어리다, 이거는 완전한 덩 어리다, 이거는 다 완전이다.
이래 주먹덩이만해 가지고 완전하면 좋 겠어요 주먹덩이만한 덩어리도 없고 알밤만한 덩어리도 없고 아무것 도 없으면서 전지 전능 완전만 있으면 좋아요 이러니까 이렇게 좋 게 우리 안에 와서 내주해 계셔요. 전능자가 돼 가지고 와서 있어도 전능은 좋지마는 주먹덩이만한 게 들어놓으면 좀 괴롭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좋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로 전 지 전능으로만 완전으로만 내 안에 계셔 가지고 실력만 이행하고 이 러니까 안 보인다고 또 야단이오. 안 보인다고 또 부인한다 말이오. 결론 이래서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 이 네 가지 사대관이 바르 면 그 사람의 생활은 필연적으로 바로 되고 맙니다. 이 네 가지를 바로 모르고 착각한 가운데서 잘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서머나 교회는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이 예수님과 같기 때문에 나 도 그러하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이렇게 말씀했어요. 사람 이라는 건 생의 애착욕이 있습니다. 생의 애착욕이 있기 때문에 어쩌든지 좋은 것 찾아갑니다. 좋은 것 찾아가고, 유익한 것 찾아가고, 사는 것 찾아갑니다. 요 지식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산다는 요 지식이 확고하게 서 있으면 그 지 식이 변동되기 전에는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게 죽는다는 그 지식을 가지고는 그 사람이 내가 주를 위해 죽어야 지. 죽어야지 해도 못 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올바른 교리와 신조가 아니면 올바른 신앙 행위는 있을 수가 없고 올바른 신앙 행위가 없는 데는 올바른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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